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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2018 / Sanghwan A. Lee

ρ̅ν̅γ̅

풀러 신학교의 GEL 교수인 Donald A. Hagner 공관복음이역사적 > 신학적구도로 쓰였다면 요한복음은신학적 > 역사적구도로 쓰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프레임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일치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해결할 있는 틀을 제공한다. 독자에 따라 신학성과 역사성에 부여하는 배율에 차이가 있을 있겠지만, 배율을 바르게 잡을 경우 마리의 토끼를 잡게 되는 셈이다. 물론 이상적인 기대지만 말이다.

잠시 요한복음의 Epilogue 기록된 수수께끼 숫자, 153 떠오른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 역사적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신학적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혹은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배율을 어느정도로 둬야 하는가? 아니면… 153표적(σημεῖον)” 관점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153 헬라어 알파벳으로 바꾸어봤다. ρ̅ν̅γ̅ 나왔다. ρ̅ν̅γ̅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파피러스 122 153 ρ̅ν̅γ̅ 기록되었음을 발견했다. 신기했다. 그렇다면 ρ̅ν̅γ̅ 어떤 의미로 풀어야 하나? 아크로스틱 혹은 애너그램으로 풀어야 하나? 그렇다면 ρ̅ 무엇을 의미하나? ν̅ γ̅? 아니면 게마트리아로 풀어야 하나?

 

Papyrus122.jpg

 

주일 설교를 끝내고, 주보를 끝내고, 심방을 끝내고, 내일 성도들이 먹을 음식 배달을 끝내고, 다음 강의 준비를 끝내고, 오랜만에 찾아온 시간의 여유이런 답없는 상상을 하며 보내는 시간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보상의 시간이다. 주님, 감사합니다~  🙂

 

이렇게 토요일 저녁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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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2018 / Sanghwan A. Lee

ὑψόω

“들어 올리다” 정도로 번역되는 ὑψόω는 요한복음에 5번 등장한다 (3.14; 8.28; 12.32, 34). 재미있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모습을 의미하기 위해 본단어가 사용됐다는 것. 이상하다. 요한은 ‘십자가에 못박다’는 의미의 단어들(i.e., σταυρόω, προσηλόω, προσπήγνυμι)을 제치고 ‘들어 올리다 (ὑψόω)’를 선택한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ὑψόω에 담겨있는 중의적 뜻 때문으로 보인다. ὑψόω는 공간적으로 ‘들어 올리다’ 뜻 외에 공경과 존경의 의미로 ‘높이다’는 뜻이 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ὑψόω 되신다는 의미에는 문자적으로 ‘들려진다’는 뜻이 있지만 영적으로는 ‘존경과 공경을 받기에 합당한 자리로 높여지신다’는 뜻도 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재림의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로마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수치와 치욕의 상징이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저주와 버림의 상징이었다.하지만 우리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기쁨과 즐거움의 상징이다. 복음은 결단코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05/10/2018 / Sanghwan A. Lee

침례 요한의 페리코페(περικοπή)

요한복음의 ‘프롤로그 (1.1~18)’와 ‘표징들의 책 (2.1~12)’ 사이에 위치한 ‘침례 요한의 페리코페 (1.19~51)’에는 성자 하나님의 호칭이 무려 12개 이상이 등장한다: (1) 예수 (Ἰησοῦς), (2) 하나님의 어린양 (ὁ ἀμνὸς τοῦ θεοῦ), (3) 세상 죄를 짊어지신 자 (ὁ αἴρων τὴν ἁμαρτίαν τοῦ κόσμου), (4) 성령 침례자 (ὁ βαπτίζων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5) 하나님의 아들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6) 침례 요한의 뒤에 오시는 분 (ὁ ὀπίσω μου ἐρχόμενος), (7) 바리새인들이 알지 못하는 분 (ὃν ὑμεῖς οὐκ οἴδατε), (8) 랍비 (ῥαββί), (9) 그리스도 (Χριστός), (10) 메시아 (Μεσσίας), (11) 이스라엘의 왕 (βασιλεὺς τοῦ Ἰσραήλ), (12) 사람의 아들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신약의 페리코페들 중에서 성자 하나님의 호칭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페리코페(περικοπή)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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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있다. 왜 ‘침례 요한의 페리코페’에 성자 하나님의 호칭이 이처럼 많이 등장하는 것일까? 왜 요한복음에 사용된 성자 하나님의 호칭이 이곳에 거의 모두 집약되어 나타나는가? 혹시 공관복음과는 다른 관점으로 침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을 대비시키려는 사도 요한의 의도적 프레임은 아닐까? 이럴경우 페리코페 안에 두루두루 뿌려진 성자 하나님의 호칭들은 다음과 같은 아우성 소리를 낸다. 

 

‘침례 요한의 사역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준비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예수님의 사역은 물로 침례를 주는 침례 요한의 사역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역입니다!’ ‘세상 죄를 짊어지시는 예수님의 사역은 세상 죄를 고발만 할 수 있었던 침례 요한의 사역과는 전혀 다른 사역입니다!’

 

침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는 Continuity와 Discontinuity가 존재한다. 공관복음이 Continuity를 잘 그려냈다면 요한복음은 Discontinuity를 잘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 정말 놀랍고 위대한 책이다.

04/16/2018 / Sanghwan A. Lee

ι̅β̅ vs δωδεκα

시내사본 마가복음 필사자는 숫자 개의 다른 형태로 사용했다. 첫째는 숫자 의미하는 듀오(δύο) 의미하는 데카(δέκα) 합성어인 도데카(δώδεκα)이고, 둘째는 도데카의 축약형인 ι̅β̅ 이다 (이오타[ι] 의미하고 베타[β] 의미하기 때문에 ι̅β̅ 된다). 얼핏보면 δώδεκα ι̅β̅ 특별한 의미없이 이표동의(異表同義)적으로 사용된 것처럼 보이지만, “ 제자들 등장하는 문맥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차이가 발견된다. 가룟 유다가 근접 문맥에 등장하지 않는 구절(3.14, 16; 4.10; 6.7; 9.35; 10.32; 11.11)에는 ι̅β̅ 쓰인 반면 유다가 앞뒤 4 단어 이내에 등장하거나(14.10, 43) 가룟 유다를 특정하는 구절(14.17, 20)에서는 δώδεκα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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ι̅β 쓰인

Και εποιησεν ι̅β̅ ους και αποστολους ωνομασεν ινα ωσι μετ αυτου και ινα αποστελλη αυτους κηρυσσει (3.14)

και εποιησεν τους ι̅β̅ και επεθηκεν ονομα τω Σιμωνι Πετρον (3.16)

Και οτε εγενετο κατα μονας ηρωτουν αυτον οι περι αυτον συν τοις ι̅β̅ τας παραβολας (4.10)

Και προσκαλειται τους ι̅β̅ και ηρξατο αυτους αποστελλιν δυο δυο και εδιδου αυτοις (6.7)

Και καθισας εφωνησεν τους ι̅β̅ και λεγει αυτοις Ει τις θελει πρωτος ειναι εστε παντω εσχατος και παντων διακονος (9.35)

παραλαβων παλιν τους ι̅β̅ ηρξατο αυτοις λεγιν τα μελλοντα αυτω συμβαινιν (10.32)

Και εισηλθεν ις Ιεροσολυμα εις το ιερον και περιβλεψαμενος παντα οψε ηδη ουσης της ωρας εξηλθεν εις Βηθανιαν μετα των ι̅β̅ (11.11)

δώδεκα 쓰인

Και Ιουδας Ισκαριωθ εις των δωδεκα απηλθεν προς τους αρχιερις ινα αυτον παραδω αυτοις (14.10)

Και οψιας γενομενους ερχεται μετα των δωδεκα (14.17)

Ο δε ειπεν αυτοις Εις των δωδεκα ο εμβαπτομενος μετ εμου εις το τρυβλιον (14.20)

Και ευθυς ετι αυτου λαλουντος παραγεινεται Ιουδας εις των δωδεκα και μετ αυτου οχλος μετα μαχαιρων και ξυλων παρα των αρχιερεων και των γραμματεων και πρεσβυτερων (14.43)

가룟 유다의 배반이 기록된 14장에 사용된 모두 δώδεκα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 Amy Myshrall 주장처럼 적어도 4명의 필사자가 시내사본을 필사했다면 마가복음에 등장하는숫자 놀이 특정한 필사자의 장난 혹은 신학적 장치로 설명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의 필사자는숫자 놀이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던 것일까? 노미나 세크라의 축약법을 프레임 삼아 ι̅β̅ 이해하도록 유도한 것일까? 그렇다면 사본을 보는 자들로 하여금 이라는 거룩한 그룹에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신학적 가르침을 받도록 유도한 것일 수도 있겠다. 마치 거룩한 “교회당 다닌다고 해서 모든 자들이 “성도”는 아닌 것처럼 말이다. 물론 나의 상상의 날개가 너무 크게 펼쳐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언제나 느끼는 부분이지만사본의 세계는 무척 깊고, 넓고, 오묘하다. 아직 탐험이 백 분의 일도 못끝난 미지의 세계처럼 말이다.

04/04/2018 / Sanghwan A. Lee

STM 논문

오늘 Google Books에서 소논문 출판 소식이 왔네요. 지도 교수님이셨던 다니엘 왈라스와 함께했던 (고통스러웠지만 무척 행복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갔습니다. ㅎㅎ 사소한 부분 하나 하나까지 이잡듯이 뒤지며 꼼꼼하게 지도해 주셨던 교수님이 보고싶은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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