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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2/2018 / Sanghwan A. Lee

극적 아이러니(Dramatic Irony)

Christos Karakolis는 “The Logos-Concept and Dramatic Irony in the Johannine Prologue and Narrative”에서 요한복음의 Prologue가 독자들에게 끼치는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 논한다. 그의 논지를 간략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Prologue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독자들에게 명확히 설명해 줌으로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사건들—특히 예수님의 정체성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들—을 공관복음을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해석하도록 유도한다.’ 예컨대 예수님의 정체성을 모르는 관계로 그 분을 오해하는 유대적 종교지도자들을 요한복음에서 만날 때, 독자들은 그들에게 분개하거나 적개심을 갖기 보다는 오히려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기게 된다. 독자들은 Prologue를 통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Karakolis는 이런 효과를 “극적 아이러니(Dramatic Irony)”로 표현한다.

Karakolis의 주장은 복음을 이미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행동강령까지 터치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정죄하기전에 먼저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참 좋은 예수님을 함께 알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이미 알고 있는 성도들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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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0/2018 / Sanghwan A. Lee

가장 귀한 계보

“사도들이 우리를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복음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Οἱ ἀπόστολοι ἡμῖν εὐηγγελίσθησαν ἀπὸ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Ἰησοῦς ὁ Χριστὸς ἀπὸ τοῦ θεοῦ ἐξεπέμφθη·” ~1 클레멘트 42.1
 
이 짧은 구절에는 (1) [예수님의] 사도들(Οἱ ἀπόστολοι), (2) 우리(ἡμῖν), (3) 예수님(Ἰησοῦς), (4) 하나님(θεοῦ)이 등장한다. 클레멘트가 넷을 등장시킨 이유는 그가 받은 복음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그의 논증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클레멘트가 받은 복음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복음이 아니다.
둘째, 그 복음에는 확실한 기원이 있다.
셋째, 그 기원을 추적하면 다음과 같다:
i. 그 복음은 사도들이 클레멘트를 위해(이익의 여격)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ii.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
iii.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건네준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iv. 그러므로 클레멘트가 받은 복음의 기원은 하나님이다. (참고로 본문에 등장하는 두 개의 동사가 모두 수동태[εὐηγγελίσθησαν, ἐξεπέμφθη]로 쓰였다. 복음의 신적 기원을 강조하는 장치로 보인다.)
 
결국 클레멘트의 논증에 따르면 그가 받은 복음은 ‘(1) 하나님→ (2) 예수님 → (3) 사도들 → (4) 속사도들’이라는 계보를 따르는 셈이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리가 따르는 “복음”의 기원은 어디인가? 1세의 역사 속에 등장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의 하나님까지 소급되는가? 아니면 최근에 하늘에서 뚝딱 떨어진 듣보잡 족발, 아니 족보를 따르고 있는가?
 
시시콜콜한 것들에 관해서는 족보, 족보, 족보를 따지면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근간에 대한 계보를 무시한다면… 몹시 곤란하지 않을까?
07/16/2018 / Sanghwan A. Lee

성경과 문화 (종교 vs. 수학?)

Annette Punkt Imhausen 교수는 최근에 출판한 책—Mathematics in Ancient Egypt: A Contextual History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6)—을 통해 ‘헬라화의 영향으로 인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가 피차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교류했었고, 이를 통해 수학적 개념들 까지도 자연스레 통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주장은 고대의 파피러스(P BM 10399, P BM 10520, P BM 10794, P Heidelberg 663, etc)의 분석을 통해 상당한 지지를 받는다. 알렉산더 대왕이 남긴 가장 큰 유산, 헬라어가 링구아 프랑카로 사용됐던 시대였던지라 문화적 교류가 활발히 일어났고, 수학도 이러한 흐름의 수혜자였던 것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성경의 저자들도 이러한 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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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코-로만 시대는 요즘처럼 과학, 신학, 철학, 수학 등이 서로 상관없이 동떨어진 과목이 아니었다. 그 시대는 모든 것이 종교적이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관점을 빼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21세기의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수학도 종교적으로 이해됐다. L.C.D. Kulathungam는 “종교와 … 수학은 서로 불간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주장함으로 수학과 종교의 경계선을 허물었고, R. Hunter도 “수학자 프톨레미는 모든 것이 종교적이었던 시대에 살았다”고 주장함으로 수학과 종교라는 이분법을 연대기적 오류로 지적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기독교 진영에서도 지지를 받고 있다: “그레코-로만 시대는 종교와 정치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시대였다.” 물론 수학도 마찬가지다.

 

조금 이른 시대로 가보자. 우리에게 있어서 피타고라스(ca 570—495 BCE)는 단지 수학자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수학자가 아니었다. 21세기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그는 “수학자이자 종교자”였다. “모든 것은 숫자이다”라는 신념을 따랐던 피타고라스. 우주의 비밀을 풀기 위한 비밀의 열쇠가 숫자라고 믿었던 피타고라스. 무리수를 세상의 질서를 파괴하는 괴물로 봤던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증명한 후에 100마리의 소를 잡아 제단에 바쳤던 피타고라스 (추신: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피타고라스가 발견한 공식이 아니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던 공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불리는 이유는 그가 공식을 증명했기 때문. 물론 피타고라스는 신들이 도왔기 때문에 정리를 증명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그가 남긴 거대한 유산은 결국 새로운 주인을 만나 그레코-로만 시대로 흐를 준비를 한다. 바로 플라톤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플라톤은 단지 철학자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21세기적 관점을 고대 시대로 투영하려는 연대기적 오류이다. 플라톤도 단지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수학자이기도 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선생에게 수학을 배웠던 플라톤. 그들의 수학적 영향을 받아 철학을 개진했던 플라톤. “우주의 질서를 이루고 있는 원리”가 곧 숫자라고 믿었던 플라톤. 영혼을 구속의 세계로부터 자유롭게 할 비밀의 열쇠를 수학으로 봤던 플라톤. 종교와 수학을 “다른 과목”으로 보지 않았던 고대의 사람들에게는 지극히도 당연한 사유였다. 이런 사유는 플라톤을 지나 그레코-로만 시대에도 변함없이 수용됐다. 그리고 그레코-로만 시대의 클래시스트들에 의해 더욱 확산됐다. 성경의 저자들도 이런 문화에 노출되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번에는 조금 뒤로 가보자. 어거스틴(354—430 CE)의 “신의 도성”에는 재미있는 부분이 나온다.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완벽한 이유는 6일 동안 창조됐기 때문이라고 논증하는 부분이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6일을 선택하신 이유는 6이라는 숫자에 들어있는 완전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추신: 주지주의와 주의주의 관점으로 이 부분을 바라보면 이해가 더욱 쉽게 될 것이다). 이처럼 어거스틴에게도 종교와 수학은 이분된 개념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 학문이었다. 이처럼 피타고라스(ca 570—495 BCE)에서 어거스틴(354—430 CE)에 이르기까지 종교와 수학을 이분하는 개념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 안에 자리잡고 있는 1세기도 마찬가지이다.

 

가끔씩 성경에 등장하는 숫자에서 상징적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를 “무의미한 것,” “쓸데없는 짓,” “영해주의자들의 성서해석”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만난다. 솔직히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레코-로만 시대의 문화에 관한 책들을 얼마나 읽고 있느냐고. 기독교 진영 밖에 있는 학자들의 그레코-로만 시대의 연구를 얼마나 접하고 있느냐고. 이러한 부분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단지 종교와 수학에 철저한 분리가 있는 21세기적 관점으로 1세기의 문서를 해석하려 한다면 곤란하다. 물론 후대에 발전된 카발라적 관점으로 성경의 숫자를 풀려는 시도는 명백한 연대기적 오류이기에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레코-로만 시대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던 문화를 고려하여 숫자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권장될만한, 아니 마땅히 그래야만하는 시도이지 않을까?

 

월요일 아침, 커피숍에서 요한계시록에 관련된 서적을 읽다가 속상해서 몇자 끼적인다. 숫자에 담겨진 의미들을 당시의 문화 속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unnecessary”라고 단정한 저자. 그가 인용한 책들은 대부분이 이차서적들이고, 기독교 진영 밖의 책들은 단 한권도 없다. 그 흔한 R. Backhum, R. Hurtado의 책만 읽어도 그런 주장은 안할텐데 말이다. 한 챕터씩 비판하고 싶지만 20분 전에 시켜놓은 아메리카노가 식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만 하련다. K. Mathews를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The Bible was not written in a cultural vacuum; it is imperative that the expositor consider its cultural setting in order to recognize the distinctive message of the Bible.”

06/21/2018 / Sanghwan A. Lee

배은망덕 (背恩忘德)

우리는 어떤가요?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06/15/2018 / Sanghwan A. Lee

예수님의 사랑

“우리를 [늘, 변함없이, 끝까지, 영원히] 사랑하시고 우리를 그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에서 [이미] 해방시키신 예수 그리스도께…Τῷ ἀγαπῶντι ἡμᾶς καὶ λύσαντι ἡμᾶς ἐκ τῶν ἁμαρτιῶν ἡμῶν ἐν τῷ αἵματι αὐτοῦ (계시록 1.5 필자번역)”

본문은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현재형 문법 구조로 나타나는 유일무이한 구절이다. 물론 과거형 표현이 사용된 문법 구조가 단회적 사건이나 이미 지나간 사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문처럼 ‘관사(Τῷ) + 현재분사(ἀγαπῶντι) + 대명사(ἡμᾶς)’의 실명사적 구조가 ‘관사(Τῷ) + 과거분사(λύσαντι) + 대명사(ἡμᾶς)’의 실명사적 구조와 카이(καὶ)를 사이에 두고 대비를 이루는 문법 구조는 상당히 충격적인 계시를 전달한다. 게다가 관사가 하나만 쓰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대비를 극대화 시키기에 충분하다: 관사(Τῷ) + 현재분사(ἀγαπῶντι) + 카이(καὶ) + 과거분사(λύσαντι). 이런 구조를 고려하여 5절을 번역하면 어떨까?

“우리를 [늘, 변함없이, 끝까지, 영원히] 사랑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에서 [이미] 해방시켜주신 분, 예수 그리스도께!”

현대어 성경은 이러한 뉘앙스를 살려 전반부를 잘 번역 하였다: “늘 우리를 사랑하고 (반면에 후반부는 너무 안타깝게 번역했다).” 카톨릭 성경은 후반부를 잘 번역 하였다: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고 (역시 안타깝게도 전반부는 원인과 결과적으로 번역했다).”

결론? 계시록 1.5는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실패할 수 없는 신적이고 의지적인 사랑, 완전하고 변함없는 사랑, 그리고 영원하고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담고 있다.

사랑의 예수님,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