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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2017 / Sanghwan A. Lee

하나님 놀이

αἴτησόν με ὃ ἐὰν θέλῃς, καὶ δώσω σοι, 네가 원하는 것을 뭐든지 내게 말해봐! 내가 그것을 줄께! ~ 6:22d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다. 헤롯이 헤로디아의 딸에게 말이다. 일개의 인간에 불과했던 헤롯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 했던것 같다. 자신이 뭐라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뭐든지(ὃ ἐὰν) 있다고 생각했을까? 헤롯의 건방진 하나님 놀이 결국 침례 요한의 목을 소반에 담는 불상사를 낳았다. 자신이 생각했던 최대치는 겨우 왕국의 반(사람의 영역)이었지만 헤로디아의 딸이 요구했던 것은 최대치를 훨씬 넘어서는 선지자의 목숨(하나님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침례 요한.jpg

본문을 묵상하며 떠오른 구절이 있다. 7:7이다. “Αἰτεῖτε καὶ δοθήσεται ὑμῖν, 너희는 구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보다시피 헤롯의 표현과 아주 흡사하다. 그러나 독특한 부분이 있으니 헤롯은 1인칭 능동태 동사(δώσω) 사용한 반면 예수님께서는 3인칭 신적수동태 동사(δοθήσεται) 사용하셨다는 . 헤롯이내가 줄께 말했다면 예수님께서는하나님께서 주실 것이야 말씀하신 것이다. 물론 구함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헤롯의 표현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둘의 비교는 어느정도 타당성을 갖는다. 이럴경우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함이 일개의 인간인 헤롯의 교만함과 대비되는 비교가 만들어진다.

헤롯: αἴτησόν με ὃ ἐὰν θέλῃς, καὶ δώσω σοι

예수님: Αἰτεῖτε καὶ δοθήσεται ὑμῖν

때때로 우리는 순간적인 기분에 따라 하나님 놀이 경우가 있다. 반드시 피해야 할 순간이다. 오죽하면 우리는 일개의 인간이기 때문에 맹세하지 말고옳다 옳다혹은아니라 아니라하는 것이 족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5:33-37)? 삶의 모든 부분에서 기억해야할 부분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한다. 입에 재갈을 물리고 살아야 한다. 오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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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2017 / Sanghwan A. Lee

예수님께서 주신 권세

“… καὶ ἐδίδου αὐτοῖς ἐξουσίαν τῶν πνευμάτων τῶν ἀκαθάρτων,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들을 아래에 있는 권세 주셨습니다.” ~ 6:7c

종속 속격이 사용됐다. 이런 구조를 살려 최대한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권세 아래정도가 된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들을 아래에 놓을 있는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의미다. 이러한 권세는 대상 A 대상 B 사이에 적대적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군 사이에 있는 계급을 나타낼 때도 종속 속격이 사용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본문에 사용된 속격은 아군 사이에 있는 계급의 높낮이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군과 적군 사이에 있는 전투력의 높낮이를 의미한다. , 제자들의 전투력이 더러운 영들의 전투력보다 더욱 높다는 말이다. 한글 성경은 이러한 적대 관계를 확실히 표현하기 위해 쫓아내는 (현대인의 성경),” “억누르는 (새번역),” “제어하는 (공동번역, 개역개정, 개역한글)” 등으로 번역했다. 바람직한 노력이지만 구체적인 번역은 그에 따르는 댓가를 지불해야할 때가 종종 있다. 속격의 범위를 잘못 한정할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본구절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종속 속격의 범위가 구체화 되어있지 않다. 그러므로쫓아내는,” “억누르는,” “제어하는등의 표현은 본구절의 의도보다 구체적인 번역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본문의 종속 속격, 권세 아래 어떤 권세를 의미할까? 가장 안전한 답은 13a에서 찾을 있다고 본다. 

“καὶ δαιμόνια πολλὰ ἐξέβαλλον, 제자들이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며…”

이럴경우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권세는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는 권세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다소 애매모호한억누르는”이제어하는” 보다 명쾌한 선택인듯 하다. (본구절 만큼은 현대인의 성경에 한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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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런 권세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우리로부터 오지 않는다. 오직 더러운 영들과 비교할 없을 정도로 강력하신 만왕의 왕이시요 만유의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그분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발산되는 것이다. 능력의 이름 예수 권능의 이름 예수 모든 강력을 파하는 예수 생명되신 예수~” 이처럼 존귀하신“예수”란 이름의 권세가 말이다!

11/26/2017 / Sanghwan A. Lee

기도

딥쉬코스(δίψυχος). 야고보서에 등장하는 단어로 ‘둘(δίς)’과 ‘마음(ψυχή)’의 합성어(δί-ψῡχος)이다. ‘사람(ἀνὴρ)’과 함께 쓰여 ‘두 개의 마음을 품고 있는 자’ 정도로 번역될 수 있고, 문맥 속에서 ‘의심하며 구하는 자’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고 약 1:7-8은 말씀한다. 즉,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 기도하는 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도하는 시간,’ ‘기도의 횟수,’ ’기도하는 언어,’ ’기도하는 문자적 자세’ 등이 아니다. 이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없이 올리는 기도는 시간 낭비요 감정 낭비일 뿐이다.

11/24/2017 / Sanghwan A. Lee

잠자는 죽은 아이

“τὸ παιδίον οὐκ ἀπέθανεν ἀλλὰ καθεύδει, 그 아이는 [전혀] 죽지 않았어. [지금] 자고 있을 뿐이야.” ~막 5:39c

“죽다”는 일반과거형이 쓰였고, “자다”는 현재형이 쓰였다. 아이가 죽었다는 인간들의 생각을 논리의 선상에서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은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의 논리로 볼 때 “죽다”를 현재형으로, “자다”를 과거형으로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논증할 수 있겠다: “전에는 아이가 잤지만 이제는 죽어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시제를 틀어서 말씀하셨다: “아니야. 그 아이는 [전혀] 죽지 않았어. [지금] 자고 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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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주관자시요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께는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실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 ἀπέθανεν: 완료형이나 현재형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새학파의 주장에 따라 명제 A를 논리의 선상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는 텐스폼, 즉 장치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으로 본문을 살폈다.
11/20/2017 / Sanghwan A. Lee

귀신의 고백

“Ἰησοῦ υἱὲ τοῦ θεοῦ τοῦ ὑψίστου, 예수님이시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막 5:7

귀신이 예수님을 호칭한 표현이다. 두 개의 호격이 등장한다. 첫째는, “예수님이시여!” 둘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동격 구조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곧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된다. 게다가 두 번째 표현에는 한정적 구조가 사용되고 있어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이 강조되고, 그 구조가 아들을 수식하고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각별하고 독특한 위치가 나타난다.

귀신은 탁월한 신학자이다. 당시의 종교인들보다, 심지어는 제자들보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귀이다. 지식과 믿음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구절이다. 우리는 머리에는 지식을 삶에는 신앙을 갖춘 바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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