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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2018 / Sanghwan A. Lee

재키(Jacqueline)의 고구마

오늘 재키 누님께 호출을 받아 댁에 방문했다. 텃밭에 심겨진 고구마를 함께 캐자는 이유였다. 아이들과 함께 고구마를 캐며 시간을 보내던 중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에 보이는 수 많은 고구마들이 오직 하나의 고구마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텃밭에 심은 것은 오직 하나의 고구마였는데, 그 고구마가 저렇게 많은 자녀를 낳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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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충격과 동시에 어제 번역했던 골로새서 1.6이 떠올랐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듣고 참으로 깨달은 그 때부터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이 복음은 세상에서 열매를 맺고 있으며 또한 자라나고 있습니다.” ~개인번역

본문에 있는στν καρποφορούμενον κα αξανόμενον “[ 복음은 세상에서] 열매를 맺고 있으며 또한 자라나고 있습니다 번역했다. 우회적 구조를 일반 동사의 구조와 차별하여 강조적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유? (코이네 헬라어에서 모든 우회적 구조를 강조적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반드시 개인어와 저자의 신텍스를 고려한 후 판단해야 한다.) 골로새서를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우회적 구조가 아주 희귀하게 나타난다. 움직임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부분은 거의 일반동사나 분사로 묘사됐을 뿐이다. 그러므로 서신에서 겨우 번만 나타나는현재형 동사 + 현재형 분사 근접거리 우회적 구조는 강조적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어떤 강조점일까? 첫째, ‘복음이 세상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 이라는 생명성지금까지 자라나고 있는 이라는 역동성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생명성과 역동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씨앗이었다. 씨앗은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세상의 풍파를 뚫고 역동한다. 결과 세상에 심겨진 복음은 오늘도열매를 맺고 있으며 또한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예부터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말이다. 복음은 정녕 하나님의 능력이자 자존심인게다.

잠시 모습을 돌이켜 본다. 과연 안의 복음은 어떠한가? 내 속에 들어있는 복음이 참이라면 삶을 통해 열매를 맺고 자라나는 것이 옳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렇다면 삶은 그러한가? 입술의 말과 행동을 통해 예수님의 향기가 증거되고 있는가? 모습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점점 변화되고 있는가? 반드시 깊이 숙고해봐야 일임에 틀림없다.

인생에 영향력을 끼친 구고마가 있다. 첫째, 권혁수의 호박고구마. 정말 눈물이 나고 배가 아프도록 웃겼기 때문. 둘째, 재키 누님의 생명성과 역동성이 풍부한 고구마. 큰 충격과 더불어 깊은 깨달음을 줬기 때문. 짧고 짧았던 오늘 훌륭한 레슨을 배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10/14/2018 / Sanghwan A. Lee

요한복음 1.3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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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πάντα διʼ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καὶ χωρὶς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οὐδὲ ἕν. ὃ γέγονεν,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존재하게 되었고,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 중, 단 하나도 예수님 없이 존재하게 된 것은 없습니다.” ~개인 번역

09/24/2018 / Sanghwan A. Lee

1분 신학: “말씀하시는 성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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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anghwan Lee

09/18/2018 / Sanghwan A. Lee

요한복음 Prologue 분석 (1, 2, 3, 4)

1. 분석 (1)

2. 분석 (2)

3. 분석 (3)

4. 분석 (4)

08/22/2018 / Sanghwan A. Lee

극적 아이러니(Dramatic Irony)

Christos Karakolis는 “The Logos-Concept and Dramatic Irony in the Johannine Prologue and Narrative”에서 요한복음의 Prologue가 독자들에게 끼치는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 논한다. 그의 논지를 간략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Prologue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독자들에게 명확히 설명해 줌으로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사건들—특히 예수님의 정체성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들—을 공관복음을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해석하도록 유도한다.’ 예컨대 예수님의 정체성을 모르는 관계로 그 분을 오해하는 유대적 종교지도자들을 요한복음에서 만날 때, 독자들은 그들에게 분개하거나 적개심을 갖기 보다는 오히려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기게 된다. 독자들은 Prologue를 통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Karakolis는 이런 효과를 “극적 아이러니(Dramatic Irony)”로 표현한다.

Karakolis의 주장은 복음을 이미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행동강령까지 터치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정죄하기전에 먼저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참 좋은 예수님을 함께 알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이미 알고 있는 성도들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라고 생각된다.

08/20/2018 / Sanghwan A. Lee

가장 귀한 계보

“사도들이 우리를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복음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Οἱ ἀπόστολοι ἡμῖν εὐηγγελίσθησαν ἀπὸ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Ἰησοῦς ὁ Χριστὸς ἀπὸ τοῦ θεοῦ ἐξεπέμφθη·” ~1 클레멘트 42.1
 
이 짧은 구절에는 (1) [예수님의] 사도들(Οἱ ἀπόστολοι), (2) 우리(ἡμῖν), (3) 예수님(Ἰησοῦς), (4) 하나님(θεοῦ)이 등장한다. 클레멘트가 넷을 등장시킨 이유는 그가 받은 복음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그의 논증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클레멘트가 받은 복음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복음이 아니다.
둘째, 그 복음에는 확실한 기원이 있다.
셋째, 그 기원을 추적하면 다음과 같다:
i. 그 복음은 사도들이 클레멘트를 위해(이익의 여격)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ii.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
iii.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건네준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iv. 그러므로 클레멘트가 받은 복음의 기원은 하나님이다. (참고로 본문에 등장하는 두 개의 동사가 모두 수동태[εὐηγγελίσθησαν, ἐξεπέμφθη]로 쓰였다. 복음의 신적 기원을 강조하는 장치로 보인다.)
 
결국 클레멘트의 논증에 따르면 그가 받은 복음은 ‘(1) 하나님→ (2) 예수님 → (3) 사도들 → (4) 속사도들’이라는 계보를 따르는 셈이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리가 따르는 “복음”의 기원은 어디인가? 1세의 역사 속에 등장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의 하나님까지 소급되는가? 아니면 최근에 하늘에서 뚝딱 떨어진 듣보잡 족발, 아니 족보를 따르고 있는가?
 
시시콜콜한 것들에 관해서는 족보, 족보, 족보를 따지면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근간에 대한 계보를 무시한다면… 몹시 곤란하지 않을까?
07/16/2018 / Sanghwan A. Lee

성경과 문화 (종교 vs. 수학?)

Annette Punkt Imhausen 교수는 최근에 출판한 책—Mathematics in Ancient Egypt: A Contextual History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6)—을 통해 ‘헬라화의 영향으로 인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가 피차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교류했었고, 이를 통해 수학적 개념들 까지도 자연스레 통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주장은 고대의 파피러스(P BM 10399, P BM 10520, P BM 10794, P Heidelberg 663, etc)의 분석을 통해 상당한 지지를 받는다. 알렉산더 대왕이 남긴 가장 큰 유산, 헬라어가 링구아 프랑카로 사용됐던 시대였던지라 문화적 교류가 활발히 일어났고, 수학도 이러한 흐름의 수혜자였던 것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성경의 저자들도 이러한 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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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코-로만 시대는 요즘처럼 과학, 신학, 철학, 수학 등이 서로 상관없이 동떨어진 과목이 아니었다. 그 시대는 모든 것이 종교적이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관점을 빼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21세기의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수학도 종교적으로 이해됐다. L.C.D. Kulathungam는 “종교와 … 수학은 서로 불간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주장함으로 수학과 종교의 경계선을 허물었고, R. Hunter도 “수학자 프톨레미는 모든 것이 종교적이었던 시대에 살았다”고 주장함으로 수학과 종교라는 이분법을 연대기적 오류로 지적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기독교 진영에서도 지지를 받고 있다: “그레코-로만 시대는 종교와 정치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시대였다.” 물론 수학도 마찬가지다.

 

조금 이른 시대로 가보자. 우리에게 있어서 피타고라스(ca 570—495 BCE)는 단지 수학자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수학자가 아니었다. 21세기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그는 “수학자이자 종교자”였다. “모든 것은 숫자이다”라는 신념을 따랐던 피타고라스. 우주의 비밀을 풀기 위한 비밀의 열쇠가 숫자라고 믿었던 피타고라스. 무리수를 세상의 질서를 파괴하는 괴물로 봤던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증명한 후에 100마리의 소를 잡아 제단에 바쳤던 피타고라스 (추신: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피타고라스가 발견한 공식이 아니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던 공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불리는 이유는 그가 공식을 증명했기 때문. 물론 피타고라스는 신들이 도왔기 때문에 정리를 증명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그가 남긴 거대한 유산은 결국 새로운 주인을 만나 그레코-로만 시대로 흐를 준비를 한다. 바로 플라톤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플라톤은 단지 철학자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21세기적 관점을 고대 시대로 투영하려는 연대기적 오류이다. 플라톤도 단지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수학자이기도 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선생에게 수학을 배웠던 플라톤. 그들의 수학적 영향을 받아 철학을 개진했던 플라톤. “우주의 질서를 이루고 있는 원리”가 곧 숫자라고 믿었던 플라톤. 영혼을 구속의 세계로부터 자유롭게 할 비밀의 열쇠를 수학으로 봤던 플라톤. 종교와 수학을 “다른 과목”으로 보지 않았던 고대의 사람들에게는 지극히도 당연한 사유였다. 이런 사유는 플라톤을 지나 그레코-로만 시대에도 변함없이 수용됐다. 그리고 그레코-로만 시대의 클래시스트들에 의해 더욱 확산됐다. 성경의 저자들도 이런 문화에 노출되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번에는 조금 뒤로 가보자. 어거스틴(354—430 CE)의 “신의 도성”에는 재미있는 부분이 나온다.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완벽한 이유는 6일 동안 창조됐기 때문이라고 논증하는 부분이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6일을 선택하신 이유는 6이라는 숫자에 들어있는 완전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추신: 주지주의와 주의주의 관점으로 이 부분을 바라보면 이해가 더욱 쉽게 될 것이다). 이처럼 어거스틴에게도 종교와 수학은 이분된 개념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 학문이었다. 이처럼 피타고라스(ca 570—495 BCE)에서 어거스틴(354—430 CE)에 이르기까지 종교와 수학을 이분하는 개념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 안에 자리잡고 있는 1세기도 마찬가지이다.

 

가끔씩 성경에 등장하는 숫자에서 상징적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를 “무의미한 것,” “쓸데없는 짓,” “영해주의자들의 성서해석”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만난다. 솔직히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레코-로만 시대의 문화에 관한 책들을 얼마나 읽고 있느냐고. 기독교 진영 밖에 있는 학자들의 그레코-로만 시대의 연구를 얼마나 접하고 있느냐고. 이러한 부분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단지 종교와 수학에 철저한 분리가 있는 21세기적 관점으로 1세기의 문서를 해석하려 한다면 곤란하다. 물론 후대에 발전된 카발라적 관점으로 성경의 숫자를 풀려는 시도는 명백한 연대기적 오류이기에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레코-로만 시대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던 문화를 고려하여 숫자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권장될만한, 아니 마땅히 그래야만하는 시도이지 않을까?

 

월요일 아침, 커피숍에서 요한계시록에 관련된 서적을 읽다가 속상해서 몇자 끼적인다. 숫자에 담겨진 의미들을 당시의 문화 속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unnecessary”라고 단정한 저자. 그가 인용한 책들은 대부분이 이차서적들이고, 기독교 진영 밖의 책들은 단 한권도 없다. 그 흔한 R. Backhum, R. Hurtado의 책만 읽어도 그런 주장은 안할텐데 말이다. 한 챕터씩 비판하고 싶지만 20분 전에 시켜놓은 아메리카노가 식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만 하련다. K. Mathews를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The Bible was not written in a cultural vacuum; it is imperative that the expositor consider its cultural setting in order to recognize the distinctive message of the Bible.”

06/21/2018 / Sanghwan A. Lee

배은망덕 (背恩忘德)

우리는 어떤가요?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06/15/2018 / Sanghwan A. Lee

예수님의 사랑

“우리를 [늘, 변함없이, 끝까지, 영원히] 사랑하시고 우리를 그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에서 [이미] 해방시키신 예수 그리스도께…Τῷ ἀγαπῶντι ἡμᾶς καὶ λύσαντι ἡμᾶς ἐκ τῶν ἁμαρτιῶν ἡμῶν ἐν τῷ αἵματι αὐτοῦ (계시록 1.5 필자번역)”

본문은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현재형 문법 구조로 나타나는 유일무이한 구절이다. 물론 과거형 표현이 사용된 문법 구조가 단회적 사건이나 이미 지나간 사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문처럼 ‘관사(Τῷ) + 현재분사(ἀγαπῶντι) + 대명사(ἡμᾶς)’의 실명사적 구조가 ‘관사(Τῷ) + 과거분사(λύσαντι) + 대명사(ἡμᾶς)’의 실명사적 구조와 카이(καὶ)를 사이에 두고 대비를 이루는 문법 구조는 상당히 충격적인 계시를 전달한다. 게다가 관사가 하나만 쓰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대비를 극대화 시키기에 충분하다: 관사(Τῷ) + 현재분사(ἀγαπῶντι) + 카이(καὶ) + 과거분사(λύσαντι). 이런 구조를 고려하여 5절을 번역하면 어떨까?

“우리를 [늘, 변함없이, 끝까지, 영원히] 사랑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에서 [이미] 해방시켜주신 분, 예수 그리스도께!”

현대어 성경은 이러한 뉘앙스를 살려 전반부를 잘 번역 하였다: “늘 우리를 사랑하고 (반면에 후반부는 너무 안타깝게 번역했다).” 카톨릭 성경은 후반부를 잘 번역 하였다: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고 (역시 안타깝게도 전반부는 원인과 결과적으로 번역했다).”

결론? 계시록 1.5는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실패할 수 없는 신적이고 의지적인 사랑, 완전하고 변함없는 사랑, 그리고 영원하고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담고 있다.

사랑의 예수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05/15/2018 / Sanghwan A. Lee

오! 달콤한 교환이여!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와 예수님과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는 마태복음 20.20~22에는 문법학자들의 시선을 끄는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세베대의 어머니의 요구, 즉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요구는 αἰτέω의 능동태형이 쓰인 반면,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는 예수님의 답변은 αἰτέω의 중간태형이 쓰였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αἰτέω의 태를 바꾸신 이유는 무엇일까? 다수의 문법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αἰτέω의 능동태형은 ‘단순한 요구’를 의미하지만 중간태형은 ‘거래적 요구’를 의미한다. 물론 αἰτέω가 모든 책들 속에서 이런 양상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대략적으로 그런 양상을 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이 마태복음 속에는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여러 이유들 중 하나는 세리였던 마태의 업무가 그로 하여금 능동태와 중간태의 미묘한 차이를 다룰 수 있는 훈련을 충분히 제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마태복음 20.20~22에 사용된 αἰτέω가 이러한 양상을 띈다면 어떨까? 재미있는 해석이 만들어진다.

세베대의 어머니는 자신의 두 아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구(αἰτέω의 능동태)했다. 거래가 아닌 단순한 부탁으로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αἰτέω의 중간태형을 사용하심으로 당신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부탁은 거래 혹은 교환이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신 셈이다. 공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자리는 무엇으로 교환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이다.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을 마시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좌우에 앉을 수 있는 표를 얻을 수 있는 교환권이라는 말이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신에 사용된 “ὢ τῆς γλυκείας ἀνταλλαγῆς, 오! 달콤한 교환이여!”가 ‘죄인’과 ‘의인’의 교환이었다면, 본문에 사용된 교환은 ‘예수님의 잔을 마시는 것’과 ‘예수님의 좌우옆에 앉는 것’의 교환인 셈이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다”고 고백한 제자들의 고백을 인정 하신 후에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는 모호한 말씀을 하신다. 혹시 이것은… 예수님의 잔을 마신 세베대의 아들들 뿐 아니라, 그 잔을 마셨던 역사 속의 순교자들, 그리고 앞으로 마실 모든 순교자들도 그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망을 주기 위함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와 아내도 도전해 봐야겠다! ὢ τῆς γλυκείας ἀνταλλαγῆς!

05/13/2018 / Sanghwan A. Lee

하나님의 자기 계시

신약 성경에 6 사용된 ἐξηγέομαι 문맥에 따라 ‘~ 관하여 말하다,’ ‘설명하다,’ ‘묘사하다정도로 이해된다. 1.18d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ἐξηγήσατο하셨다고 증거한다. 표현은 문맥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예수님께서 (1) 하나님에관하여 말씀하셨다’? (2) 하나님을설명하셨다’? 혹은 (3) 하나님을묘사하셨다’? 안타깝게도 (1)~(3) 해석은 문맥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번역이라고 판단된다.

우선 18a 보자. 18a 지금까지 하나님을(ἑώρακεν)”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증거한다. 그러나 18d 하나님을 ἐξηγήσατο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증거한다. 18a 18d 비교하면 ἑώρακεν ἐξηγήσατο 연결되고 있음을 있다. 이럴경우 18d 예수님께서 하나님을보여주셨다 의미로 이해될 있다. , ἐξηγήσατο 단지 ‘~ 관하여 말하다,’ ‘설명하다,’ ‘묘사하다정도의 의미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ἑώρακεν 의해 의미가 확장되어 적게는눈에 보일 정도로 설명해 주시다,’ 많게는생생하고 확실하게 보여주시다정도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는 후자를 취한다. 18b c 예수님을 “μονογενὴς θεὸς ὁ ὢν εἰς τὸν κόλπον τοῦ πατρὸς” 설명하고, 또한 근접 문맥도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을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원격 문맥까지 고려하면 더 큰 설득력을 얻을 수 있겠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만난다. 문맥 속에서 ἐξηγήσατο가 ‘보여주다’로 이해될 수 있다면 ‘보여주다’는 동사를 사용하지 않고 굳이 ἐξηγήσατο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에, 즉 신적 계시 사역까지 포함할 수 있는 단어가 ἐξηγήσατο였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요한은 ἐξηγήσατο를 통해 ‘공생애 기간동안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보여주는 계시의 작업’을 하실 예수님을 프롤로그에 담아내려 했다는 의미다. 공관복음과 비교해 볼 때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표적과 담화가 큰 비중으로 나타난다는 분석은 이런 해석에 힘을 싣는다. (결국 요한의 의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 도마의 고백에서 화룡점정을 찍는다 [요 20.28]). 그러므로 ἑώρακεν과 ἐξηγήσατο는 찰떡궁합이 되는 셈이다. 18절 처럼 말이다! 🙂

그렇다.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에 관해 말씀만 하셨던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에 대해 설명만 하시거나 묘사만 하셨던 분도 아니시다. 이러한 사역은 구약의 선지자들도 감당했었다. 예수님은 달랐다. 그분은 하나님의 현현이셨다. 하나님의 자기계시셨다. 아담과 함께 에덴의 동산을 거니시던 쉐키나의 영광께서 인간의 옷을 입고 우리와 함께 땅을 걸어주시며 하나님을 설명하시고 보여주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영광은 아버지로부터 오신 유일무이하신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의 영광이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듣는다.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을 만난다. 그분은 하나님의 현현이자 하나님의 자기계시이기 때문이다!

05/12/2018 / Sanghwan A. Lee

ρ̅ν̅γ̅

풀러 신학교의 GEL 교수인 Donald A. Hagner 공관복음이역사적 > 신학적구도로 쓰였다면 요한복음은신학적 > 역사적구도로 쓰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프레임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일치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해결할 있는 틀을 제공한다. 독자에 따라 신학성과 역사성에 부여하는 배율에 차이가 있을 있겠지만, 배율을 바르게 잡을 경우 마리의 토끼를 잡게 되는 셈이다. 물론 이상적인 기대지만 말이다.

잠시 요한복음의 Epilogue 기록된 수수께끼 숫자, 153 떠오른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 역사적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신학적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혹은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배율을 어느정도로 둬야 하는가? 아니면… 153표적(σημεῖον)” 관점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153 헬라어 알파벳으로 바꾸어봤다. ρ̅ν̅γ̅ 나왔다. ρ̅ν̅γ̅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파피러스 122 153 ρ̅ν̅γ̅ 기록되었음을 발견했다. 신기했다. 그렇다면 ρ̅ν̅γ̅ 어떤 의미로 풀어야 하나? 아크로스틱 혹은 애너그램으로 풀어야 하나? 그렇다면 ρ̅ 무엇을 의미하나? ν̅ γ̅? 아니면 게마트리아로 풀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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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를 끝내고, 주보를 끝내고, 심방을 끝내고, 내일 성도들이 먹을 음식 배달을 끝내고, 다음 강의 준비를 끝내고, 오랜만에 찾아온 시간의 여유이런 답없는 상상을 하며 보내는 시간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보상의 시간이다. 주님, 감사합니다~  🙂

 

이렇게 토요일 저녁을 맞이한다.

05/12/2018 / Sanghwan A. Lee

ὑψόω

“들어 올리다” 정도로 번역되는 ὑψόω는 요한복음에 5번 등장한다 (3.14; 8.28; 12.32, 34). 재미있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모습을 의미하기 위해 본단어가 사용됐다는 것. 이상하다. 요한은 ‘십자가에 못박다’는 의미의 단어들(i.e., σταυρόω, προσηλόω, προσπήγνυμι)을 제치고 ‘들어 올리다 (ὑψόω)’를 선택한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ὑψόω에 담겨있는 중의적 뜻 때문으로 보인다. ὑψόω는 공간적으로 ‘들어 올리다’ 뜻 외에 공경과 존경의 의미로 ‘높이다’는 뜻이 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ὑψόω 되신다는 의미에는 문자적으로 ‘들려진다’는 뜻이 있지만 영적으로는 ‘존경과 공경을 받기에 합당한 자리로 높여지신다’는 뜻도 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재림의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로마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수치와 치욕의 상징이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저주와 버림의 상징이었다.하지만 우리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기쁨과 즐거움의 상징이다. 복음은 결단코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05/10/2018 / Sanghwan A. Lee

침례 요한의 페리코페(περικοπ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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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프롤로그 (1.1~18)’와 ‘표징들의 책 (2.1~12)’ 사이에 위치한 ‘침례 요한의 페리코페 (1.19~51)’에는 성자 하나님의 호칭이 무려 12개 이상이 등장한다: (1) 예수 (Ἰησοῦς), (2) 하나님의 어린양 (ὁ ἀμνὸς τοῦ θεοῦ), (3) 세상 죄를 짊어지신 자 (ὁ αἴρων τὴν ἁμαρτίαν τοῦ κόσμου), (4) 성령 침례자 (ὁ βαπτίζων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5) 하나님의 아들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6) 침례 요한의 뒤에 오시는 분 (ὁ ὀπίσω μου ἐρχόμενος), (7) 바리새인들이 알지 못하는 분 (ὃν ὑμεῖς οὐκ οἴδατε), (8) 랍비 (ῥαββί), (9) 그리스도 (Χριστός), (10) 메시아 (Μεσσίας), (11) 이스라엘의 왕 (βασιλεὺς τοῦ Ἰσραήλ), (12) 사람의 아들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신약의 페리코페들 중에서 성자 하나님의 호칭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페리코페(περικοπή)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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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있다. 왜 ‘침례 요한의 페리코페’에 성자 하나님의 호칭이 이처럼 많이 등장하는 것일까? 왜 요한복음에 사용된 성자 하나님의 호칭이 이곳에 거의 모두 집약되어 나타나는가? 혹시 공관복음과는 다른 관점으로 침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을 대비시키려는 사도 요한의 의도적 프레임은 아닐까? 이럴경우 페리코페 안에 두루두루 뿌려진 성자 하나님의 호칭들은 다음과 같은 아우성 소리를 낸다. 

 

‘침례 요한의 사역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준비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예수님의 사역은 물로 침례를 주는 침례 요한의 사역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역입니다!’ ‘세상 죄를 짊어지시는 예수님의 사역은 세상 죄를 고발만 할 수 있었던 침례 요한의 사역과는 전혀 다른 사역입니다!’

 

침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는 Continuity와 Discontinuity가 존재한다. 공관복음이 Continuity를 잘 그려냈다면 요한복음은 Discontinuity를 잘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 정말 놀랍고 위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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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2018 / Sanghwan A. Lee

ι̅β̅ vs δωδεκα

시내사본 마가복음 필사자는 숫자 개의 다른 형태로 사용했다. 첫째는 숫자 의미하는 듀오(δύο) 의미하는 데카(δέκα) 합성어인 도데카(δώδεκα)이고, 둘째는 도데카의 축약형인 ι̅β̅ 이다 (이오타[ι] 의미하고 베타[β] 의미하기 때문에 ι̅β̅ 된다). 얼핏보면 δώδεκα ι̅β̅ 특별한 의미없이 이표동의(異表同義)적으로 사용된 것처럼 보이지만, “ 제자들 등장하는 문맥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차이가 발견된다. 가룟 유다가 근접 문맥에 등장하지 않는 구절(3.14, 16; 4.10; 6.7; 9.35; 10.32; 11.11)에는 ι̅β̅ 쓰인 반면 유다가 앞뒤 4 단어 이내에 등장하거나(14.10, 43) 가룟 유다를 특정하는 구절(14.17, 20)에서는 δώδεκα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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ι̅β 쓰인

Και εποιησεν ι̅β̅ ους και αποστολους ωνομασεν ινα ωσι μετ αυτου και ινα αποστελλη αυτους κηρυσσει (3.14)

και εποιησεν τους ι̅β̅ και επεθηκεν ονομα τω Σιμωνι Πετρον (3.16)

Και οτε εγενετο κατα μονας ηρωτουν αυτον οι περι αυτον συν τοις ι̅β̅ τας παραβολας (4.10)

Και προσκαλειται τους ι̅β̅ και ηρξατο αυτους αποστελλιν δυο δυο και εδιδου αυτοις (6.7)

Και καθισας εφωνησεν τους ι̅β̅ και λεγει αυτοις Ει τις θελει πρωτος ειναι εστε παντω εσχατος και παντων διακονος (9.35)

παραλαβων παλιν τους ι̅β̅ ηρξατο αυτοις λεγιν τα μελλοντα αυτω συμβαινιν (10.32)

Και εισηλθεν ις Ιεροσολυμα εις το ιερον και περιβλεψαμενος παντα οψε ηδη ουσης της ωρας εξηλθεν εις Βηθανιαν μετα των ι̅β̅ (11.11)

δώδεκα 쓰인

Και Ιουδας Ισκαριωθ εις των δωδεκα απηλθεν προς τους αρχιερις ινα αυτον παραδω αυτοις (14.10)

Και οψιας γενομενους ερχεται μετα των δωδεκα (14.17)

Ο δε ειπεν αυτοις Εις των δωδεκα ο εμβαπτομενος μετ εμου εις το τρυβλιον (14.20)

Και ευθυς ετι αυτου λαλουντος παραγεινεται Ιουδας εις των δωδεκα και μετ αυτου οχλος μετα μαχαιρων και ξυλων παρα των αρχιερεων και των γραμματεων και πρεσβυτερων (14.43)

가룟 유다의 배반이 기록된 14장에 사용된 모두 δώδεκα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 Amy Myshrall 주장처럼 적어도 4명의 필사자가 시내사본을 필사했다면 마가복음에 등장하는숫자 놀이 특정한 필사자의 장난 혹은 신학적 장치로 설명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의 필사자는숫자 놀이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던 것일까? 노미나 세크라의 축약법을 프레임 삼아 ι̅β̅ 이해하도록 유도한 것일까? 그렇다면 사본을 보는 자들로 하여금 이라는 거룩한 그룹에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신학적 가르침을 받도록 유도한 것일 수도 있겠다. 마치 거룩한 “교회당 다닌다고 해서 모든 자들이 “성도”는 아닌 것처럼 말이다. 물론 나의 상상의 날개가 너무 크게 펼쳐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언제나 느끼는 부분이지만사본의 세계는 무척 깊고, 넓고, 오묘하다. 아직 탐험이 백 분의 일도 못끝난 미지의 세계처럼 말이다.

04/04/2018 / Sanghwan A. Lee

STM 논문

오늘 Google Books에서 소논문 출판 소식이 왔네요. 지도 교수님이셨던 다니엘 왈라스와 함께했던 (고통스러웠지만 무척 행복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갔습니다. ㅎㅎ 사소한 부분 하나 하나까지 이잡듯이 뒤지며 꼼꼼하게 지도해 주셨던 교수님이 보고싶은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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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2018 / Sanghwan A. Lee

한 여름 밤의 꿈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행 19.19

마술을 행하는 자들이 가져온 “그 책 (τὰς βίβλους)”은 단순히 마술책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술책은 물론 금, 은, 보석등 값비싼 재료들로 만들어진 부적등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용어(Ἐφέσια Γράμματα)라고 대다수의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런 부적들의 가치를 환산하니 “은 오만”이나 됐다. 여기에 사용된 “은”이 데나리온을 의미한다면 한 사람이 137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 액수를 의미한단다. 놀랍게도 예수님을 만난 에베소 사람들은 그만한 가치의 물건을 버렸다. 그 이유가 뭘까? 기독교가 요구하는 참된 신앙에는 버림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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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참된 신앙은 버리는 것이다. 무엇을 버리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거룩한 것을 취하는 대신 부정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높은 것을 취하는 대신 낮은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귀한 것을 취하는 대신 저질스러운 것들을 버리는 것이다. 그 어떠한 경제적 손실, 육체적 고통, 지위의 하강이 온다손 치더라도 주께서 원치 아니하시는 것들을 미련없이 버리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오호라, 그렇구나. 기독교는 예수님을 취하는 대신 예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들을 버리는 종교인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아니, 나는 어떤가? 그리고 당신은 어떤가? 버려야 할 똥들을 양 손에 가득 움켜진채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질 수 있다고 스스로 속이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다면 빨리 꿈 깨자.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03/26/2018 / Sanghwan A. Lee

본래 목사란…

“본래 목사란
 
잘해도 욕먹도 못해도 욕먹는 부르심입니다.
이왕 욕먹을 것 잘하면서 욕먹어야지요.
 
사람의 기쁨을 구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면서 가세요.
 
정말 그거면 됩니다.”
 
70년 아래의 목사에게 주신 방지일 목사님의 조언. 엘파소의 사무실에서 환하게 웃으시며 주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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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8/2018 / Sanghwan A. Lee

당신도 빚진자 입니다 (몬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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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을 자신에게 빚진자로 만드는 바울 사도. 그는 ἐγὼ, Παῦλος, ἐγὼ, μοι, ἐμῇ와 σοι, σεαυτόν를 적시적소에 사용함으로 자신이 건축한 무대의 중앙에 빌레몬을 세운다. 그 무대는 빌레몬이 바울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자리다. 서신을 읽던 독자들은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는 셈이다. “빌레몬아, 오네시모가 너에게 빚을 졌지? 그렇다면 이걸 기억해. 뭐,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너도 나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을… 그것도 네 자신을 말이야!”라고 말하는 바울의 대사를 들을 수 있기 때문. 한 문장 속에 등장하는 바울을 가리키는 용어들(ἐγὼ, Παῦλος, ἐγὼ, μοι, ἐμῇ [물론 ἐμῇ가 나타나는 구조는 그레코-로만 시대에 널리 사용됐던 서신서명공식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ἐμῇ에 담겨 있는 포스는 빌레몬에게 무의식적으로 피력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인다])은 빌레몬을 가리키는 용어들(σοι, σεαυτόν)과 날카로운 대비를 이룬다. 그리고 그 대비는 빌레몬으로 하여금 자신이 바울에게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그 은혜를 제 삼자, 즉 자신에게 빚을 진 오네시모에게 흘릴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빌레몬에게 준 은혜는 누구로부터 온 것인가? 그렇다.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분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 은혜는 바울을 바꿨고, 바울을 통해 빌레몬을 바꿨다. 이제는 빌레몬을 통해 오네시모를 바꿀 차례다. 바울은 그만의 독특한 수사법을 사용함으로 빌레몬이 오네시모에게 마땅이 흘려야하는 은혜의 당위성을 피력하고 있는 셈이다: ἵνα μὴ λέγω σοι ὅτι καὶ σεαυτόν μοι προσοφείλεις, 구태여 그대가 내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말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벌써 말했으면서 ㅎ] 그대가 지금만큼 된 것이나 그대의 영혼이 구원 받은 것은 전적으로 나의 도움이었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오네시모를 도와줘야겠지요?] (현대어 성경)

왜? 우리에게 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는 단지 우리 속에서 꽁꽁 숨어 조용히 지낼 수 없는, 시퍼렇게 살아 꿈틀대기에 삶 밖으로 표출될 수 밖에 없는 역동적인 은혜이기 때문이다!
03/03/2018 / Sanghwan A. Lee

창고에 다녀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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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짐들을 풀었을 때가 기억난다. 하나님께서 작은 자를 어떻게 빚으실지 궁금해 하며 인생의 다음 챕터를 준비했던 그때. 이제는 풀었던 짐들을 정리하며 다음 챕터를 향해 고개를 든다. 저 짐들은 머지않아 다른 곳에 풀리겠지.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사명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되겠지.

세상 사람들은 인생사를 “미지(未知)의 세계로의 여행”이라 말한다. 하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미지(未知)가 아닌 미지(美知)가 된다. 인생사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도록 구성된 지식과 지혜로의 여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일을 살지 않는다. 오늘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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