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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5/2018 / Sanghwan A. Lee

칠병소어의 기적 (七에서 七을 거쳐 七로)

병이어의 기적보다는 다소 덜 알려져 있지만 칠병이어의 기적도 성경에 등장한다. 두 개의 기적을 비교해 보면 한 가지 특이한 부분이 발견된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πέντε ἄρτους κριθίνους καὶ δύο ὀψάρια)”라는 표현이 사용되어 (1) 어떤 종류의 빵인지, (2) 몇 개의 떡인지, (3) 몇 마리의 물고기인지에 대한 정보를 주는 반면, 칠병이어의 기적은 “일곱 개의 떡과 몇 마리의 물고기 (ἑπτὰ καὶ ὀλίγα ἰχθύδια)”라는 표현만 사용됐다는 사실. 오병이어의 기적과는 달리 떡의 종류나 물고기의 개수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오직 떡의 개수가 일곱이라는 부분만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칠병이어라는 표현 보다는 칠병소어로 보는게 옳다고 보인다). 마 15:34에 직접 인용된 예수님의 질문—“πόσους ἄρτους ἔχετε; (너희에게 떡이 몇 개가 있니?)”—과 36절의 신텍스—“ἔλαβεν τοὺς ἑπτὰ ἄρτους καὶ τοὺς ἰχθύας (일곱 개의 떡과 그 생선을 취하사)”—도 떡의 개수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놓치지 말자.

그 이유가 뭘까? 왜 칠병소어의 기적은 빵의 종류와 물고기의 개수에 대해서 침묵할까? 왜 빵의 개수가 일곱이라는 부분만 구체적으로 명시할까? 38절에 기록된 먹고 남은 광주리의 개수도 의미심장하다. 몇 개의 광주리가 남았나? 일곱 광주리다. 일곱 개의 떡이 수천명을 배부르게 한 후에 일곱 개의 광주리로 남아 돌아온 것이다. 일곱 개의 떡과 일곱 개의 광주리 사이에 무시할 수 없는 연결 고리가 형성된다. 혹시… 일곱 개의 떡과 일곱 개의 광주리 사이에 계신 완전하신 “생명의 떡,”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이럴경우 모인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일곱 개의 떡이 완전하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손을 통해 일곱 개의 광주리에 담기게 되는 기적을 경험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불완전한 七완전한 七을 거쳐 풍성한 七로 거듭난 것이다! 결국 풍성한 은 지금 당장 굶주린 영혼들의 배를 채우시는 예수님께서 앞으로 당신을 만나게 될 수많은  영혼들의 배까지도 채우실 수 있는 온전히 풍성하신 생명의 떡이심을 나타내는 복선 역할을 하게 된다.

론 이렇게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칠병소어의 기적은 “생명의 떡”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님을 담고 있는 요한복음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에 시도한 연결이 매끄럽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상상력까지 발휘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논리학에서 말하는 “숨은 전제”를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으로 보고, 완성된 성경을 소유하고 있는 후대 독자들을 고려할 경우 어느정도 끼워맞춰진다. 물론 상상력 속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

 

七.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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