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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9/2017 / Sanghwan A. Lee

폴리캅의 고백

서론: Τί γὰρ κακόν ἐστιν εἰπεῖν, Κύριος Καῖσαρ, καὶ ἐπιθῦσαι, καὶ τὰ τούτοις ἀκόλουθα, καὶ διασώζεσθαι; “시저가 ()시라 말한 그분께 향을 올려 드리고 당신의 생명을 보존한다고 해서 손해볼 것은 없지 않습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시라 고백하는 폴리캅에게 던져진 질문이었다. 이방원의 하여가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있겠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년까지 누리리라.”

문제제기: 질문을 받은 폴리캅.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부분이 한군데 있다. 질문자가 사용한 διασώζεσθαι 태(態)이다. διασώζεσθαι διασῴζω(‘구원하다’) 현재부정사로 중간태 혹은 수동태일 있다. 문맥속에서 부정사의 태를 식별해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두개의 태가 자연스럽게 들어맞는다. 중간태로 취해도 해석이 가능하고, 수동태로 취해도 해석이 가능하다는 의미다—중간태로 취할 경우 자신을 구원하라 되고 수동태로 취할 경우구원을 받으라 된다. 사실 질문자가 어떤 의미로 διασώζεσθαι 사용했는지, 게다가 폴리캅은 어떤 의미로 διασώζεσθαι 받아 들였는지 우리는 없다. 질문자가 수동태로 사용했어도 폴리캅은 중간태로 이해했을 있고, 질문자가 중간태로 사용했어도 폴리캅은 수동태로 이해했을 있다. 그러나 관심은 질문자의 의도가 아니라 폴리캅이 어떤 의미로 διασώζεσθαι 이해했는지에 있다.

중간태: 만약 중간태로 이해했을 경우시저에게 예배를 드림으로 스스로 목숨을 구원하라 의미로 해석이 된다. 폴리캅의 목숨은 폴리캅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의미가 된다. 배교 행위가 자신의 생명을 조금 연장시킬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순간 폴리캅은 베드로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예수님을 번이나 부인함으로 자신의 생명을 조금 연장시켰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말이다. 비록 배교로 얻은 연장된 삶을 사는 동안 놀라운 사역을 이루어 냈지만, 베드로는 십자가에 달리는 그 순간까지 배교로 인해 찾아온 아픔을 지우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비록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고치시고 싸매셨지만 그분을 번이나 부인했다는 사실은 베드로의 마음에서 순간도 떠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베드로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 폴리캅. 그의 삶을 근거로 추정하건데 그가 διασώζεσθαι 중간태로 이해했다손 치더라고 라고 답했을 가능성은 무척 적게 느껴진다.

수동태: διασώζεσθαι 수동태로 이해했을 경우시저에게 예배를 드림으로 시저에 의해 목숨을 건짐받으라 의미로 해석이 된다. 이럴경우 폴리캅의 목숨은 시저에게 달려있게 된다. 배교 행위가 시저로 하여금 폴리캅의 생명을 연장시킬 있는 수단이 된다는 의미다. 그순간 폴리캅은 마태복음 10:28 떠올렸을 것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시저는 폴리캅의 목숨을 능히 멸할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영혼까지 멸할 수는 없었다. 그의 몸과 영혼을 능히 멸하실 있는 분은 오직 ,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 뿐임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역시 그의 삶을 근거로 추정하건데 그가 διασώζεσθαι 수동태로 이해했을 경우에도라고 답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폴리캅의 선택: 폴리캅이 διασώζεσθαι 중간태로 이해했는지 수동태로 이해했는지 우리는 없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어떤 경우에서도아니요 것임을 짐작 있다. 우리의 예측대로 그는 최후의 순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86년간 예수님 섬겨왔습니다. 그동안 그분께서는  번도 내게 해를 끼치신 일이 없었지요. 헌데 내가 어찌 나의 왕이시요 나의 구세주이신 분을 어찌 부인할 있겠습니까?” 폴리캅의 표현을 한국적으로 나타낸다면 다음과 겠다: “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처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예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그는 그 고백을 끝으로 예수님의 품에 안기게 된다.

Polycarp.jpg

우리의 자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폴리캅과 같은 믿음이 있나요?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기에 생명까지 던질 수 있는 믿음이 있나요? 본글의 결론은 여러분께서 오늘의 삶을 통해 직접 써보세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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