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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6/2017 / Sanghwan A. Lee

다마스키오스의 하이퍼아고니아(ὑπεράγνοια)

그리스 신플라톤학파 계통의 신비주의 철학자인 다마스키오스(ca. 468~553). 그는 인간이 불변하는 진리(원리)를 마주할 때 보일 수 있는 행동을 가리켜 하이퍼아고니아(ὑπεράγνοια)라고 했다. 부정접두어(α)에 강조전치사(ὑπέρ)까지 붙어있는 이 단어는 최상급 의미로 번역되면 ‘무지의 극치,’ 절대급 의미로 번역되면 ‘전적인 무지,’ ‘온전한 무지’라는 의미가 된다. 인간은 변화무쌍하고 제한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불변하는 진리(원리)를 마주하는 순간 그것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보거나 배워보지 못했음을, 그래서 그것에 대해 하이퍼아고니아함을 인지하게 된다는 말이다. 신을 마주한 인간도 그렇다. 전지전능한 신을 마주하는 순간 인간은 그를 알고 있었던 존재처럼 행동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를 얼마나 알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만질 수 없는 신, 들을 수 없는 신, 그래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신. 그런 신을 마주할 때, 인간은 그에 대한 자신의 온전하고 전적인 무지, 즉 무지의 극치에 달해 있는 자신의 무지함을 마주하게 된다는 의미다.

이천년 전, 한 줄기의 빛이 시공간을 가르고 이 땅에 내려왔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신 그 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신이셨다. 그러나 그를 마주한 인간들이 보기 시작한 것은 신이 아니였다. 신에 대한 자신들의 하이퍼아고니아였다. 만들어진 신, 정형화된 신, 할라카로 조각된 신이 아닌 살아서 숨쉬며 그들과 함께 거하는 신. 이러한 신은 그들의 종교성에 의해 더욱 짙어진 하이퍼아고니아를 적나라하게 들추어냈던 것이다.

하지만 신은 단지 그들의 하이퍼아고니아를 들추어 내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이퍼아고니아를 벗겨내기 위함이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기독교의 용어, 계시를 통해서 말이다. 성육신한 신께서는 하이퍼아고니아로 충만한 인간들 앞에서 말씀하셨고, 행동하셨다. 낮에도 계시하셨고, 밤에도 계시하셨다. 땅에서도 계시하셨고, 배에서도 계시하셨다. 들에서도 계시하셨고 산에서도 계시하셨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만나는 모든 자들에게 계시하셨다. 결국 성령에 의해 자신의 하이퍼아고니아를 인정하고 계시를 받은 자들은 고백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신에 대한 인간의 하이퍼아고니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아그노시아(ἀγνωσία: 무지)로, 아그노시아는 그노시스(γνῶσις: 앎)로, 그노시스는 에피그노시스로(ἐπίγνωσις: 충만한 앎) 바뀌게 됐던 것이다.

오늘도 세상에는 신에 대해 하이퍼아고니아한 자들이 살고 있고, 신은 여전히 자신을 계시하고 있다. 당신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다. 우리는 말씀을 손에 쥘 때, 우리를 찾아온 신의 손을 잡게 된다. 말씀을 펼 때, 우리를 향해 입을 여시는 신과 마주하게 된다.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하이퍼아고니아를 아그노시아와 그노시스를 거쳐 에피그노시스로 이끌어 가시는 신을 경험하게 된다.

Tolle Lege, Tolle Lege,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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