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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8/2017 / Sanghwan A. Lee

The Four Faces of the Korean Jesus

한국 예수님의 네 가지 얼굴

몇몇의 극단적 한국 교회가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크게 네 개의 부분으로 나눠져 있는 듯하다.

4 faces of the Korean Jesus.png

첫째, 종말적 얼굴이다. 종말적 예수님을 선포하는 자들은 세상의 마지막 날을 향해 성도의 얼굴이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재림,” “심판,” “멸망,” “불구덩이,” “죽지 않는 구더기등은 이들의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들이다.

둘째, 민중적 얼굴이다. 민중적 예수님을 선포하는 자들은 세상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자들을 향해 성도의 얼굴이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약자,” “버림받은 ,” “배고픈 ,” “소수의 인권,” “투쟁,” “궐기등은 이들의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들이다.

셋째, 교조적 얼굴이다. 교조적 예수님을 선포하는 자들은 변질될 없는 기독교의 교리를 향해 성도의 얼굴이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일점일획,” “아무개니즘,” “아무개신조,” “아무개주의등은 이들의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들이다.

넷째, 신비적 얼굴이다. 신비적 예수님을 선포하는 자들은 세상이 감히 없는 비밀스러운 영적인 것들을 향해 성도의 얼굴이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계시,” “영안,” “혜안,” “성령의 풀어주심등은 이들의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얼굴이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의 얼굴일까? (1)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마지막 날을 향해서만 얼굴을 고정하도록 이끄시는 종말적 얼굴일까? 그렇다면 세상에서 고통받 약자들의 절박한 외침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지금 당장 물과 음식이 필요한 자들에게 성경만 던져주며 죽도록 충성하라고 가르친단 말인가? (2) 혹은 우리로 하여금 버려진 약자들을 향해서만 얼굴을 고정하도록 이끄시는 민중적 얼굴일까? 그렇다면 그들을 영원형벌에서 자유케 하는 종말적 복음은 언제 전하나? 현세적 필요만을 공급하다가 내세적 필요를 공급해 주지 못한다면 저들의 소중한 핏값은 누가 지불하나? (3) 혹은 우리로 하여금 딱딱 맞아 떨어지는 정교한 교리를 만들어 그것만 보게하시는 교조적 얼굴인가? 그렇다면 정교한 교리로도 설명될  없는 하나님의 신비한 속성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물론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이다. 그러나 교리가 기독교의 모든 것일까? (4) 혹은 우리로 하여금 비밀스럽고 영적인 것들만 보게 하시는 신비적 얼굴인가? 그렇다면 성경이 확실히 계시하는 케리그마적 가르침들은 어떻게 하나? 가르침으로 인해 기독교가 2,000년의 맥을 이어 것이 아닌가? 바로 가르침이 변화무쌍한 세상의 기류 속에서 기독교가 표류하지 않도록 도와준 닻이 아니던가? 아직 계시되지 않은 것들만 추구하다가 이미 확실히 계시된 가르침을 변질시키는 것은 마리의 토끼를 잃는 것과 뭐가 다른가? 이처럼 쪽으로 치우친 편향된 해석은 성경이 허용한 한계를 넘어감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기형적 접근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경이 묘사하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다 바르게  있을까? 혹시 양자택일(兩者擇一) “Either-Or” 접근이 아니라, 양자택양(兩者擇兩) “Both-And” 접근을 통해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려는 자세가 아닐까?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는 예수님께서는 다가올 심판의 임박성과 뒤에 반드시 임할 심판에 대해서 분명히 가르치셨다. 동시에 지금, 바로 현세에서 고통받고 있는 약자들을 고치시고 싸매셨다. 설령 그들이 당신을 따르지 않고 배반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어디 이뿐인가? 일점일획도 변할 없는 케리그마적 메세지를 확고부동하게 전하심으로 변화무쌍한 세상의 기류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길을 내셨다. 또한 세상에게는 감추어진 하늘의 신령한 비밀들을 풀어주시는 계시의 , 성령 하나님을 보내심으로 감추인 것들이 더이상 감추어진 것들로 남아있지 않도록 우리의 영적 이해를 돕고 계신다. 그렇다. 내가 성경을 통해 만난 예수님의 얼굴은 종말적, 민중적, 교조적, 신비적인 부분에 담겨 있는 선한 것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하나님의 얼굴이다. 나는 그분의 얼굴에서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신(神) 본다. 그리고 버림받은 , 소외된 , 고치는 자, 싸매는 자, 가르치는 , 계시하는 , 판단하는 , 심판하는 , 감히 범접할 없는 , 어떤 인간의 말로도 형용할 없는 신비로운 자를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하나의 표현으로 설명될 없는 오묘하고도 신묘막측한 신인(神人)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깊이를 무시하고 개인적인 경험이나 취향에 맞춰 단일화 시키려 ,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편향되게 일그러지는 괴물의 형상이 된다.

21 기의 한국 기독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진중한 대화라고 생각한다. 서로 정죄하고 단죄하기 전에 정말 성경이 묘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무엇인지를 깊이 연구하고, 연구한 바를 타인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동료 기독교인들의 음성을 열린 마음으로, 그러나 비판적으로 들으며 대화할 , 우리는 성경이 묘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향해 보다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나치게 이상적인 바람이다.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힘이 들어갈 것이고, 서로가 도달하려는 접점에 끝까지 도착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모임이 불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비록 만장일치를 이루어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관점을 수정, 보완하는 만으로도 필요없는 싸움을 대폭 줄일 있을테니 말이다. 그것 만으로도 성과일 것이다그러는 동안 우리가 할 일이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적 메세지를 죄인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 주변에서 고통받고 소외당하고 있는 약자들을 품는 것이다.
셋째,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수호하며 복음의 정수를 후대에 흘리는 것이다.
넷째, 성령 하나님께 의지함으로 보다 깊고 정확하게 기독교의 신비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자세로 삶과 대화에 임하다 보면 우리가 보지 못했던, 그러나 타인은 보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보다 완전하신 얼굴을 볼 수 있게 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일그러진 얼굴이 환하고 밝게 펴진채 한국 땅에 두루 비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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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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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njae Kong / 7월 18 2017 9:24 오후

    이 글을 보고 사도행전 15장 말씀이 생각이 났는데요 나눠보고 싶어서요..ㅋ

    [사도행전15장 1-12절,새번역]
    몇몇 사람이 유대에서 내려와서, 이렇게 신도들을 가르쳤다. “여러분이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다. 드디어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와 신도들 가운데 몇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해서, 사도들과 장로들을 찾아 보게 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떠나서, 페니키아와 사마리아를 거쳐가면서, 이방 사람들이 회개한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곳의 모든 신도들을 매우 기쁘게 하였다.
    예루살렘에 이르러서, 그들은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환영을 받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하신 일들을 모두 보고하였다.
    그런데 바리새파에 속하였다가 신도가 된 사람 몇이 일어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명하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문제를 다루려고 모였다.
    많은 논쟁을 한 뒤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서 나를 택하셔서, 이방 사람들도 내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 속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셔서,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셔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메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그들도 꼭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자 온 회중은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통하여 이방 사람들 가운데 행하신 온갖 표징과 놀라운 일을 보고하는 것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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