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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8/2017 / Sanghwan A. Lee

귀 막힌 목사

나는 단 한 번도 평신도의 신분으로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평신도”란 소위 “사역자 (i.e., 목사, 전도사)”가 아닌 성도들을 일컫는다. 신학교를 다닐 때는 ‘전도사’의 신분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부목사’의 신분으로, 담임을 맡은 후로는 ‘담임 목사’의 신분으로 교회당을 다녔다. 그래서 그랬던지 시나브로 사역자의 관점으로만 교회당의 제반 사항들을 이해하려는 버릇이 생겼더랬다.

담임 목회를 그만 둔지 어느덧 2년 하고도 몇 개월. 이 기간동안 처음으로 평신도의 모습으로 교회당을 다니고 있다. 헌데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게 아닌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듯이 내게 ‘탈-사역자적-관점’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더이상 ‘사역자의 관점’이 아닌 ‘평신도의 관점’으로 교회당의 제반 사항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많이 속상하고 가슴이 아팠다. 목회할 때 전혀 공감되지 않았던 성도들의 아우성이 이제야 비로서 구구절절이 이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던 그들의 부탁들, 웃기지도 않게 들렸던 그들의 당부들, 달갑지 않게 여겨졌던 그들의 외침들은 결국 양들의 울음 소리였던 것이다. 그렇다. 목사인 내가 봤을 때 웃기기만 했던 문제들이 평신도인 내가 봤을 때는 심각한 일이었다. 목사인 내가 봤을 때 사소하기만 했던 문제들이 평신도인 내가 봤을 때는 중대한 일이었다. 목사인 내가 봤을 때 말도 안된다고 여겼던 문제들이 평신도인 내가 봤을 때는 똥줄이 타는 문제였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들을 향해 ‘믿음이 없는 자들,’ ‘교회를 힘들게 하는 자들,’ ‘분란을 초래하는 자들’이라고 너무 쉽게 단죄했었던 것이다. 내게 있었던 비좁은 ‘사역자의 관점’만이 교회당의 제반 사항들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척도일 것이라고 착각했던 무지몽매함의 결과였다.

나의 어리석음과 미련함이 조금씩 이해되고 있는 요즘, “목사”라는 직분의 무게와 중요성에 대해서 곱씹게 된다. 목사는 완벽할 수 없다. 완전해 질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론적 한계를 핑계삼아 성경이 요구하는 선한 목자상을 이루기 위한 달음박질까지 멈출 필요는 없다. 목사는 응당 성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도를 품기 위해 애써야 한다. 성도를 사랑하기 위해 발버둥쳐야 한다. 예수님의 양을 먹이고, 키우고, 보듬고, 사랑하는 것이 목사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선한 목사로 성장하기 위해 사역자들이 노력해야 할 부분들이 많겠지만, 가장 으뜸되는 일들 중에 하나는…

지금 섬기고 있는 성도들의 아우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그 소리가 말 같지 않은 투정처럼 들린다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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