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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2015 / Sanghwan A. Lee

내 욕심인가 부르심인가?

며칠 전 심혈을 기울여 쓴 소논문의 결과가 나왔다. B였다. 의례껏 A일 것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소논문을 훑어보니 친필로 비판을 해준 부분들이 몇 군데 보였다. 신중하게 읽어보니 이상한 점들이 발견됐다.

첫 째, 채점자가 내가 구축한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의 하팍스 레고마나 사용법을 변호하기 위해 예로 들었던 세익스피어와 제인 오스틴의 하팍스 레고메나 사용법을 가리켜 “Using late material to prove 1st CE writing may not work”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다음 장에도 세익스피어와 제인 오스틴의 사례를 사용한 것을 또 다시 비판했다: “Why are these relevant?” 웃음이 났다. 내가 세익스피어와 제인 오스틴의 하팍스 레고메나 사용법을 통해 증명하려 했던 방법론은 채점자가 생각했던 것처럼 연대기적 오류에 속하지 않는다. 단지 같은 사람도 글에 따라 하팍스 레고메나를 사용할 수 있다는 시대와 상관없는 언어학적 변증에 속한다.

둘 째, 더블 스페이스로 써야 할 소논문을 싱글 스페이스로 썼다고 점수를 깎았다. 실라버스에는 싱글 스페이스로 써야 한다고 적혀 있는데도 말이다!

셋 째, 결론에 찰리 채플린 콘테스트에 나간 채플린을 떨어뜨린 심사위원을 예로 들어 사도 바울의 글을 바울의 글로 보지 못하는 자유신학자들을 비판한 내 논리를 “You used this illustration in the beginning and here, but can you explain why it is related to this topic?”이라고 비판했다. 역시 채점자는 기본적인 논리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넷 째, 채점자의 수준이 너무 낮아서 필체를 유심히 보니 교수님의 것이 아니었다. 며칠 전에 교수님의 책에 싸인을 받아둔 것이 있기 때문에 쉽게 비교할 수 있었다. 그때야 비로소 알았다. 교수님이 아니라 신약부에서 인턴쉽을 하는 어설픈 수준의 채점자가 내 소논문을 채점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채점자이면서 채점의 기준이 기록되어 있는 실라버스도 읽지 않았다. 채점을 할 때 소논문에 구축되어 있는 나의 논리를 신중하게 파악하지도 않고 대충대충 흘려 넘겼다. ‘소논문을 채점할 실력이 없으면 다른 분야에서 인턴쉽을 하지 왜 채점자로 인턴쉽을 하는가?’라는 질문이 쉬지않고 나왔다. 한 글자, 한 글자에 학생의 눈물과 땀과 시간이 주옥처럼 녹아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자는 채점자가 될 자격이 없지 않은가? 결국 여러 과정을 거친 내 소논문에는 두 명의 채점자의 글이 남아있게 됐다. 한 사람은 내 논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한 사람은 내 논증을 이해하는 사람. 감사하게도 내 논증을 이해하지 못했던 인턴의 글과 점수는 내 논증을 이해하신 교수님의 글과 점수로 대치됐다. ‘물음표’는 ‘느낌표’로, ‘부족하다’는 ‘훌륭하다’로 ‘B’는 ‘A’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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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명확히 구분하고 일을 선택해야 한다. 특히 타인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자리는 더 그렇다. 어설프게 실력도 없으면서 자신의 욕심을 위해 특정한 일을 하게 되면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막대한 피해를 볼 수 있다.

목회도 그렇다. ‘내가 정말 부르심을 받았는가?’ ‘정말 그 길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인가?’ 목사는 끊임없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향한 부르심에 대한 질문없이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목회를 하면 성도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난다.

내가 어린 나이에 담임 목회를 하며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목회는 절대 목사를 위한 직업이 아니라는 것. 그대신 예수님과 그 분의 양들을 위한 거룩한 사명이라는 것. 모세도 히브리 민족 때문에 부름을 받았고, 다윗도 이스라엘 백성 때문에 부름을 받았으며,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도 민족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없었다면 모세도, 다윗도, 열 두 제자들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목사도 예수님을 양들을 위해 부름을 받는 것이지 결코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부름 받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던 나는 교회의 담임 사역을 하며 많은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이런 사실을 깨달은 후 교회와 목회를 미련없이 떠났다. 그 결과 양들도 살고 나도 살았다. 그렇다. 있어야 할 자리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있어야 하지만 떠나야 할 자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떠나야 하는게다. 그게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이다.

이번에 소논문 해프닝을 겪으며 예전에 목회했던 교회의 성도들이 떠올랐다. 부르심에 대한 기도와 생각없이 무작정 목회를 시작했던 나 때문에 아파했던 성도들, 시험 받았던 성도들, 교회를 안 나오기 시작한 성도들… 그들에게 몹시 죄송스러워졌다. 실력없이 인턴쉽을 하며 잘 써진 소논문을 B로 처리했던 채점자처럼 자격없이 목회를 하며 소중한 예수님의 양들을 염소 취급했던 나…

외로운 광야에 계신 존귀한 성도님들, 진심으로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부디 좋은 목사님과 행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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