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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2015 / Sanghwan A. Lee

건전한 상급 신앙

문제 제기: 많은 사람들이 상급 신앙에 대해 지나치게 알레르기 반응을 보입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 중 하나는 “상 주시는 이”보다 “상”에게 초점을 맞춤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잘못된 신앙을 갖도록 부축이고 있는 현대 교회의 흐름에 대한 반발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상급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입니다. 이렇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상급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혹시 자신의 업적을 기리고 타인에게 뽐낼 수 있는 화려한 장치 정도로 생각하고 계시나요? 우리가 자주 들었던 다음과 같은 면류관 비유처럼 말이지요.

나는 금 면류관 열 개인데 너는 겨우 하나야?

나는 다이아몬드 면류관인데 너는 면류관이 하나도 없네?

이런 식으로 상급을 생각하기 때문에 상급 신앙의 문제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건전한 상급 신앙: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자세는 위에 언급된 형태의 잘못된 상급 신앙을 타파하기 위해 성경이 증거하는 건전한 상급 신앙까지 해체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말처럼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게 되지요. 빈대는 잡아야 합니다. 한 마리도 안 남기고 다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초가삼간은 건들지 맙시다. 집은 있는 그대로 나누고 있어서는 안될 빈대만 잡읍시다. 지금부터 이 작업을 여러분과 함께 하려고 합니다.

 

성경 구절들: 우선 상급에 대해서 계시하고 있는 성경 구절들을 보여 드린 후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전 3:8)

ὁ φυτεύων δὲ καὶ ὁ ποτίζων ἕν εἰσινἕκαστος δὲ τὸν ἴδιον μισθὸν λήμψεται κατὰ τὸν ἴδιον κόπον, “심는 이와  주는 이는 하나입니다그러나 각자 자기가 일한 대로 각자 자기의 상을 각자 받을 것입니다” (고전 3:8).

심는 이와  주는 이가 “하나 (ἕν)”라고 되어 있습니다이는 예수님을 위해 봉사하는 모든 성도들을 집합명사로 표현한 것입니다그러나 “하지만 뜻하는 δὲ 뒤에 등장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이긴 하나이지만…”이라는 뉘앙스를 암시하지요그렇다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하나를 구성하는 각자의 지체들이 봉사하는 사역의 양상과 그에 따른 보상의 양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이런 주장은 δὲ 이후의 문장에서 (1) 단수 소유형용사 (ἕκαστος) + (2) 단수 소유형용사 (ἴδιος) + (3) 단수 소유형용사 (ἴδιος) 구조가 ἕν 대비를 이루며 나타난다는 사실을 통해 강력한 지지를 받습니다다시말해 δὲ 이전의 문장이 성도들을 집합명사로 표현하여 거시적으로 표현했다면 이후의 문장은 군집명사로 표현하여 미세적으로  것입니다이럴경우 δὲ 이전의 문장을 통해서는 사역의 방향성에 강세가 놓이는 반면 δὲ 이후의 문장에는 사역의 질에 대에 강세가 놓이는 것이지요결국 예수님을향한 사역의 본질적 의미는 한가지이지만 봉사하는 지체들의 일의 양상이나 그에 따른 상급의 양상은 각자 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끝으로 상급의 양상은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라는 문장에 의해 한정되며 “보상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는 μισθός 상급으로 번역된 단어라는 사실도 무시할  없습니다결국 각자 섬긴바에 따라 앞으로 받게될 상급에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 3:13-14)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골 3:23-24)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6)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요이 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계 11:18)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12)

보시다시피 상급 신앙은 비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이 확실히 계시할 뿐 아니라 권장하고 있는 건전한 가르침이라는 것이지요.

 

4:4, 10-11: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가 공부할 구절은 계 4:4, 10-11입니다. 왜냐하면 상급의 목적에 대해서 계시하는 유일한 구절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상급에 대한 개념을 검사하면서 건전한 상급 신앙에 대해서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계 4:4, 10-11)

(1) 24 장로들의 정체: 본문에는 이십사 장로들이 나옵니다. 신학자들마다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 여러가지 견해를 내놓습니다: 별, 천사들, 구약의 성도들, 모든 성도들의 대표자, 구약의 12 지파와 신약의 12 사도들, 구약의 24 선지서들.[1] 그러나 대다수의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봅니다.[2]

(ㄱ) 인격적 장치: 첫 째, 별과 같은 비인격체로 보기에는 인격을 나타내는 장치들이 너무 많이 사용됐습니다. 그러므로 천사나 인간, 혹은 둘 다로 보는 견해가 더 합당합니다.

(ㄴ) 천사적 장치 부재: 둘 째, 천사들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a) 보좌: 천사들이 보좌에 앉아 있다는 성경 구절이 없고 (그들은 하나님의 앞에 서 있습니다),

(b) 면류관: 천사를 위해 면류관이 준비된다는 구절도 없으며,

(c) 장로: 장로라는 단어가 천사에게 사용된 사례가 없기 때문입니다.[3]

이럴경우 24 장로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천상의 또 다른 종류의 천사라거나 사람들이라는 견해가 남습니다.

(ㄷ) 사람을 지지하는 장치: 셋 째, 사람으로 봐야 하는 이유는

(a) 하얀 옷: 장로들이 입고 있는 하얀 옷은 유대인 제사장들의 복장[4]이거나 예수님의 보혈에 씻은 성도들의 거룩한 옷[5]으로 볼 수 있고,

(b) 12의 배수: 계시록에서 12로 곱해서 나오는 숫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리를 지칭하는데 장로의 숫자인 24도 12의 배수이며[6]

(c) 성도의 악기: 계 5:8에 등장하는 24 장로들은 계 14:2와 15:2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연주하는 악기인 하프를 갖고 있으며[7]

(d) 동일한 찬양 구조: 하나님의 성도들이 부르는 찬양과 동일한 내용과 구조의 찬양을 부르고 있고,[8]

(e) 탈무드: 탈무드 브라코트 17a가 묘사하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습과 너무 흡사하며: “다가올 세상에서 … 의인들은 머리에 면류관 쓰고 앉아서 쉐키나와 함께 잔치를 벌일 것입니다.”[9]

(f) 아나렐스: 로마의 역사 아나레스를 보면 티리다테스가 네로의 이미지 앞에 면류관을 벗어 내려 놓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10]

(g) 면류관: 고난과 환란을 잘 견딘 증거로 수여되는 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11] 그 당시에 사용된 면류관은 스테파노스와 디아데마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디아데마는 주권을 상징하는 면류관이고 스테파노스는 올림픽과 같은 경기에서 이긴 사람들이 받는 상급이었습니다. 24 장로들이 쓰고 있는 면류관은 스테파노스로써 이들이 인생이란 경주를 마친 후 심판을 통해 받은 상급을 의미하는 듯 합니다.[12]

이런 정황들으로 봤을 때, 24 장로들은 구약과 신약을 대표하는 상급을 받은 성도들로 보는 것이 가장 무리가 없을 듯 합니다.

(2) 24 장로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24 장로들을 상급을 받은 성도들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경우 우리가 관심을 갖고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24 장로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립니다. 여기에 “드리다”고 번역된 헬라어는 문맥에 따라 ‘내려 놓다’는 의미가 아니라 ‘드리다’는 의미로 해석되는게 옳습니다.[13] 24 장로들이 면류관을 벗어 하나님께 드렸다는 의미지요.

Robert-Crown

잠깐만요. 면류관을 하나님께 드린다고요? 24 장로들이 보좌에 계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부분은 이해가 됩니다. 세세토록 사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부분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면류관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면류관을 드리는 것일까요? 위에 언급했다시피 스테파노스는 상급과도 같은 의미의 면류관입니다. 열심히 달렸기 때문에, 쉬지 않고 뛰었기 때문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기 때문에 받은 상급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이 세상을 살면서 상 주시는 이, 곧 하나님만을 열심히 사랑했기 때문에 받은 상급입니다. 세상의 조롱과 핍박을 견디며 하나님만을 예배했기 때문에 받은 상급입니다. 그래서 받은 상급을 하나님께 다시 드린다고요? 이것은 마치 마라톤 경기에 출전해서 받은 메달은 상 주신 분께 돌려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 자신이 열심히 노력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상급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일까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3) 상급의 근원: Gordon D. Fee는 이 구절을 이렇게 주해했습니다.

이십사 장로가 누구를 나타내는지간에 … 그들은 면류관을 벗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내려 놓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것도 자신의 것 … 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확실히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노력으로 얻어” 소유한 영광 조차도 전적으로 보좌에 앉으사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지요.[14]

그렇습니다. 24 장로들은 상급까지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고스란히 다 돌려 드리는 것이었습니다.[15]

 

드리기 위해 받는 상급, 면류관: 아마 약간 실망이 들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상급도 하나님께 돌려드린다고? 그게 뭐야? 상급은 내가 갖는 것이 아닌가? 어차피 돌려 드릴 것이라면 받을 필요가 없잖아. 이 땅에서 설렁 설렁 살아야겠다.

만약 이렇게 생각이 든다면 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세요. 제가 예전에 퍽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고, 졸업한 후에야 비로서 한 달에 오천원씩 받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돈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쓰지 않고 갖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곧 아버지 생신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 때 부터 돈을 열심히 모아 25,000원을 만들었지요. 그리고 그 돈으로 멋진 넥타이를 하나를 샀습니다. 그동안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생신 선물을 사드리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용돈을 받게 되었으니 사랑하는 아버지의 생신 선물을 살 수 있었던 것이지요. 얼마나 신바람이 났었는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저는 넥타이를 농속에 깊이 숨겨 두었고, 아버지의 생신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왜 그렇게 시간이 가지 않던지요. 하루에도 수 없이 넥타이를 꺼내 봤고, 그 위에 향수도 수차례 뿌려댔습니다. 아버지께서 넥타이를 받으시며 기뻐하실 것을 혼자 상상하며 웃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이 주가 흘렀고 드디어 아버지의 생신 날이 왔습니다. 저는 새벽같이 일어나 아버지를 깨웠습니다. 그리고 농속에 깊이 숨겨두었던 넥타이를 꺼내 드렸지요. 아버지께서는 놀라시며 넥타이를 받으셨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때 아버지의 얼굴에서 피어났던 웃음 꽃은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습니다.

제가 이쯤에서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그 날 우리 집에서 가장 행복했던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아버지였을까요? 물론 아버지도 행복해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보다 더 행복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저였습니다! 받는 자의 기쁨보다 주는 자의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지요.

 

주는 것이 기쁨인 사랑: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주는 게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더 좋은 것으로 주고 싶어집니다. 더 소중한 것으로 주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가장 아끼는 것을 아낌없이 주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께서도 가장 소중한 성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이고, 베다니의 마리아도 순전하고 값진 나드를 예수님께 온전히 드렸던 것이지요. 저는 이것이 계 4:10에서 볼 수 있는 드림의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24 장로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피땀흘려 달음박질 했기 때문에 받은 귀한 상급을 하나님께 고이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떨까요? 아쉽거나 서럽거나 후회스러울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다해 사랑했고 생명보다 사랑하는 하나님께 그들이 갖고 있는 소중한 것을 드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천국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께 우리가 천국에서 드릴 것이 있다는 것은 정말 가슴 찡한 일이겠지요! 잠시 고전 9:24-25를 봅시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4-25)

바울은 가장 좋은 상을 받도록 뛰라고 명합니다. 뛰고, 또 뛰고, 또 뛰라고 합니다. 왜그럴까요? 상급에 눈이 멀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가장 좋은 상급을 얻어, 가장 좋은 예수님께 드리기 위함입니다. 가장 귀하신 하나님은 가장 귀한 상급을 받으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니까요.

 

정리하기예전에는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더 많은 면류관을 받고 싶었습니다. 제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서 더 많은 면류관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혀 다른 이유로 면류관을 받고 싶습니다.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요, 제 업적을 기리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하나님께 더 많이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멀리 뛸 것입니다
더 빨리 달릴 것입니다
더 높이 비상할 것입니다

그렇게 받은 면류관들
하나도 남김없이 고이 모아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께 고스란히 드리며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소중하고 존귀하신 하나님,
모든 면류관들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제 눈물과 땀으로 모은 이 모든 면류관들을 받아 주시옵소서!”

천국은 그렇게
드리는 자의 기쁨과 받으시는 분의 기쁨으로 인해 짙은 향기가 진동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건전한 상급 신앙이 아닐까요?

 

 

[1] G. K. Beale, The Book of Revelation: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Cumbria: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9), 322.

[2] G. K. Beale, The Book of Revelation: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Cumbria: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9), 322; Robert Jamieson, A. R. Fausset, and David Brown, Commentary Critical and Explanatory on the Whole Bible, vol. 2 (Oak Harbor, WA: L.R.S., Inc., 1997), 564; Marvin Richardson Vincent, Word Studies in the New Testament, vol. 2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887), 478; H. D. M. Spence-Jones, ed., Revelation, The Pulpit Commentary (London; New York: Funk & Wagnalls Company, 1909), 145; H. A. Ironside, Lectures on the Book of Revelation (Neptune, N. J.: Loizeaux Brothers, 1920), 82; John R. Yeatts, Revelation, Believers Church Bible Commentary (Scottdale, PA: Herald Press, 2003), 470;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B.S., 2012), Re 4:4.

[3] J. Massyngberde Ford, Revelation: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Commentary, vol. 38, Anchor Yale Bible (New Haven;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8), 72.

[4] Ibid.

[5] Christopher A. Davis, Revelation, The College Press NIV Commentary (Joplin, MO: College Press Pub., 2000), 164.

[6] Ibid.

[7] Ibid., 165.

[8] Ibid.

[9] David H. Stern, Jewish New Testament Commentary : A Companion Volume to the Jewish New Testament, electronic ed. (Clarksville: Jewish New Testament Publications, 1996), Re 4:4.

[10] Cornelius Tacitus, Annales (Latin), ed. Charles Dennis Fisher (Medford, MA: Perseus Digital Library, 1906).

[11] Robert Jamieson, A. R. Fausset, and David Brown, Commentary Critical and Explanatory on the Whole Bible, vol. 2 (Oak Harbor, WA: L.R.S., Inc., 1997), 564.

[12] John F. Walvoord, “Revelation,” in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An Exposition of the Scriptures, ed. J. F. Walvoord and R. B. Zuck, vol. 2 (Wheaton, IL: Victor Books, 1985), 943; Robert Jamieson, A. R. Fausset, and David Brown, Commentary Critical and Explanatory on the Whole Bible, vol. 2 (Oak Harbor, WA: L.R.S., Inc., 1997), 565; Henry Barclay Swete, ed., The Apocalypse of St. John, 2d. ed., Classic Commentaries on the Greek New Testament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06), 73.

[13] Paige Patterson, Revelation, ed. E. Ray Clendenen, vol. 39,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H, 2012), 160; Henry Cowles, The Revelation of John; With Notes, Critical, Explanatory, and Practical (New York: D. Appleton and Company, 1871), 91;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R.S., 2012), Re 4:10.

[14] Gordon D. Fee, Revelation, New Covenant Commentary Series (Eugene, OR: Cascade Books, 2011), 74.

[15] Albert Barnes, Notes on the New Testament: Revelation, ed. Robert Frew (London: Blackie & Son, 1884–1885), 118; Venerable Bede, The Explanation of the Apocalypse, trans. Edward Marshall (Oxford: James Parker and Co., 187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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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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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인태 / 11월 23 2015 5:09 오후

    감사합니다~! 명쾌하고 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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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Joshua Kim / 11월 23 2015 6:42 오후

    목사님을 글을 많이 기다립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이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의 내면이 또한 삶이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또한 다 내어주신 그분의 성품을 닮기를 원합니다. 상급은 얼마만큼 예수그리스도와 닮았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Liked by 1명

  3. 익명 / 3월 22 2016 2:25 오전

    아~~상급론에 늘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큰 깨달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Liked by 1명

  4. 황은택 / 6월 4 2017 10:08 오전

    너무 귀한 말씀이십니다 마음과 영에 새깁니다 감사합니다

    Liked by 1명

  5. Lawrence Jee / 8월 29 2017 8:27 오전

    아멘 (_ _)

    Liked by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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