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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2015 / Sanghwan A. Lee

완전한 성서해석 vs. 건전한 성서해석

religious-freedom-bible-locked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처음 만났을 때 성경을 완전하게 풀 수 있는 비밀의 열쇠를 갖게 된 줄 알았었다. 그래서 원어가 없이는 성경을 풀 수 없을 것이라는 굳센 믿음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하팍스 레고메나(성경에 한 번 등장하는 단어들)를 만났다. 내 바람이 약간 수그러 들었지만 외부의 문서에서 용례를 찾아 해석하거나 문맥을 통해 단어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는 방법론을 배운 후 다시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외부의 문서에서 조차도 용례를 찾을 수 없는 하팍스 레고메나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나서 다시 위축됐다. 예컨대 구약에는 약 1,500개의 하팍스 레고메나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 중에 400개는 신조어이거나 근원을 결코 찾을 수 없거나 다른 링귀스틱 구조 속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것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해석 불가능한 단어들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들을 가리켜 “유령의 언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얼마 후 하팍스 레고마나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구절도 일반 언어학적 틀 속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게다가 온전히 재건할 수 없는 성경이 쓰일 당시의 문화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해석의 틀이 바뀐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리고 단어에 한 가지의 의미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비트겐슈타인과 소쉬르는 “언어는 일종의 게임이다”고 말했고, 지젝은 “언어는 존재의 고문실”이라고 말했으며, 데리다는 “언어는 끝없이 미분한다”고 말했는데, 성경 속의 단어들 조차 이들의 판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내 말이 의심스럽다면 같은 본문을 설교하는 열 분의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라. 이단이 아닌 이상 전적으로 다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당히 다르게 본문을 해석하시는 것을 알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드와 존 웨슬리 사이에도 이런 해석학적 차이가 있었다. 에이든 토저와 로이드 존스 사이에도 해석학적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존 파이퍼와 존 맥아더 사이에도 해석학적 차이가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해석들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다. 성경은 무흠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해석하는 인간들에게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런 한계를 성서해석학적 용어로 ‘일반 해석학의 한계’라고 부른다. 결국 성서 원어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갖게된 신념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불가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렇다면 완전한 성서 해석은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토마스 쿤이 ‘과학 혁명의 구조’를 통해 통상적인 과학에 관한 미신을 해체하려 시도했을 때, 온 세계의 과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그 때 과학계의 요동에도 흔들리지 않고 가장 냉철하게 쿤을 비판한 과학자가 있었다. 칼 포퍼다. 그는 쿤을 향해 다음과 같은 비수의 칼날을 던졌다: “쿤은 어려움불가능으로 대체하려 했다.” 내가 기독교 인이 아니었다면 쿤의 결론에 모든 표를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포퍼의 비판에 90%, 쿤의 결론에 10%의 표를 던졌다. 기독교는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기를 열망하시고, 또한 그것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신론에서 출발하며, 그 신론은 자연 계시과 특별 계시라는 두 개의 거대한 강줄기를 통해 굽이쳐 흐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한계로 인해 성경의 완전한 해석은 불가능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해석을 향한 건전한 해석학적 시도까지 부인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이런 시도는 성경의 하나님은 자유 신학자들이 표현하는대로 “간격의 하나님,” “휴가가신 하나님,”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도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기를 열망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에 근간을 둔다.

그렇다면 건전한 성서 해석을 위해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바는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째는 일반 언어학적 장치들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둘 째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감이 없이는 결단코 바르게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첫 번째 부분은 다음의 링크[성경을 사랑하시는 분들께]에서 길게 설명했으니 본글에서는 두 번째 부분에 대해서 다루도록 하겠다.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지젝과 데리다가 언급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세상의 언어학은 일반 해석학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지만 성서 해석학은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기독교 해석학에는 일반 해석학 외에 또 하나의 해석학이 있기 때문이다. 특별 해석학이다. 특별 해석학이란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기를 열망하시는 하나님께서 서기관 중에 서기관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보내사 성경 말씀을 풀어주신다는 가르침이다. 성령 하나님을 통해, 오직 성령 하나님을 통해, 성도들은 일반 해석학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피해야 할 함정이 하나 있다. 일반 언어학적 장치들도 하나님께서 계시를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이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무시하신채 역사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믿음의 선진들 사이에서 해석적 차이가 난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장치들에 한계를 두는 범위가 달랐기 때문이 아니던가? 잠시 C. S. 루이스의 말을 들어보자. 루이스는 성령 하나님께서 일반 언어학적 장치들을 무시하지 않고 우리에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성육신에 빗대어 설명했다. 그의 논증을 쉽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동정녀의 몸속에 성자 하나님께서 입으실 육신이 씨앗으로 창조 되었다.
(2) 그 씨앗은 다음 날 바로 육신이 되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3) 엄마의 자궁 속에서 열 달의 시간을 거치며 육신으로 조직되는 과정을 거쳤다.
(4) 그 후에는 평범한 아이가 태어나는 방식으로 세상에 태어나 가시화 되었다.

위의 순서에서 첫 번째 단계인 동정녀가 잉태한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다. 그러나 그 기적은 또 다른 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예컨대 잉태한 바로 다음 날 아이가 태어났다거나, 혹은 아이가 어른의 모습으로 태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동정녀의 몸속에서 조직된 성자 하나님의 육체는 평범한 아이들처럼 열 달이라는 시간을 보낸 후에 평범한 아이들이 태어나는 방식으로 태어났다. 기적이 자연 법칙을 통해 가시화 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에게 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다.

루이스와는 다른 관점으로, 그러나 비슷한 맥락으로, 이를 정리한 신학자가 있다. 해석학 교수인 엘리엇 존슨이다. 그는 꽃에 빗대어 일반 해석학과 특별 해석학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꽃에는 뿌리와 줄기와 잎과 꽃봉우리가 있다. 땅에 심긴 씨앗은 뿌리를 내리는 것을 시작으로 줄기를 내고, 줄기는 점점 자라 잎사귀와 꽃봉우리를 낸다. 그렇게 꽃 한 송이가 완성되고 구조화 된다. 꽃 한 송이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자. 뿌리는 줄기와 잎과 꽃봉우리와 전혀 다른 별개의 타자가 아니라 서로 관계하는 유기적 공동체라는 점에서 동일성을 갖는다. 그러나 뿌리는 빛을 받지 못하는 흙 속에 있는 반면 줄기와 잎과 꽃봉우리는 빛을 받는 공기 중에 있다는 점에서 공간적 차이성을 갖는다. 존슨은 일반 해석학을 뿌리가 존재하는 흙의 영역에 빗대고 특별 해석학을 뿌리를 통해 점점 확장되는 다음의 요소들이 존재하는 공기의 영역에 빗댐으로 둘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유비한다. 거두절미하고 동일성에 대해서 말하자면 결국 흙 속이라는 일반 언어학적 말판에서 끝없이 미분되기에 고문을 해도 의미가 잡히지 않았던 뿌리에 담긴 언어들을 성령 하나님께서 줄기와 잎사귀와 꽃봉우리까지 끌어 올리사 빛으로 조명하심으로 바른 의미를 잡아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께서 일반 언어학적 장치들을 무시하신채 영해적으로만 역사하신다는 생각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런 사실을 무시할 때 일어나는 웃지 못할 사건은 안상홍의 증인들이 “전의산”을 그들의 성소로 정한 해석학적 이유가 아니던가?

이제 결론을 맺자. 나는 원어의 중요성을 안다. 그러나 그 한계도 안다. 나는 일반 언어학의 중요성을 안다. 그러나 그 한계도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어를 아무리 잘 알고 일반 언어학적 장치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건전한 성경 해석은 절대로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른 성서 해석을 위해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답은 하나다. 오직 하나다. 열심히 공부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다. 정말 이것 만이 유일한 길이다. 이렇게 기도하며 공부할 때 일반 해석학으로는 뿌리에서 멈출 수 밖에 없는 해석을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줄기와 잎과 꽃 봉우리까지 끌어 올리사 바르게 해석해 주신다. 내가 제시한 답이 너무 시시해서 웃음이 날지 모르겠지만 성경을 가장 건전하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텍스트로써의 성경을 연구하는 자들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런 내 생각을 가장 확실하게 표현한 학자가 있다. 세계적인 헬라어 문법 학자인 다니엘 왈라스이다. 그의 말을 인용하며 본글을 맺는다.

당신이 기도하지 않고 신학을 한다면 사실상 철학을 하는 것이다. 신학은 철저하게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계시의 영의 도우심 없이는 바르게 사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신학을 하는 이유가 그저 ‘또 다른 관점’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기도는 필요없다. 그러나 ‘진리’를 알기 위함이라면 기도는 필수다. 요즘 지식의 습득으로부터 오는 희열의 늪에 빠져 진리를 추구하고자 했던 초심을 잃어버리는 신학생들을 종종 본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신학생은 무릎으로 기도하고, 머리로 공부하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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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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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ng Taek Pyo / 12월 16 2015 10:04 오전

    다니엘 월러스의 글만 살짝 가져가도 될까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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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익명 / 2월 17 2017 9:02 오전

    신학을 하고 싶은데 응답이 없으니 철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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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Paul: 홍성은 (@b2winus) / 2월 22 2017 4:27 오전

    신대원을 졸업하고 성경신학과 해석학에 대해 좀 더 깊은 이해를 쌓고 싶은 한 사람으로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고 또 많은 도전이 되네요. 무릎으로 기도하고 머리로 공부하는 일에 전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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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김지영 / 4월 21 2017 10:57 오후

    신학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지식도 부족하지만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며 히브리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를 알더라도 주님의 뜻대로 바르게 알고싶은 마음으로 기도하며 끝까지 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리고 페북에서 공유할께요~
    שלו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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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4월 22 2017 5:55 오전

      좋은 결정 하셨네요! 기도하겠습니다. 히브리어 공부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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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Lawrence Jee / 8월 29 2017 8:43 오전

    아멘 (_ _)

    요 며칠 혼란스러웠던 것들이 이 글로 풀릴것 같습니다.
    물론.. 좀 더 기도해봐야겠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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