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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7/2015 / Sanghwan A. Lee

표절(Plagiarism)과 날조(Forgery)

표절 (Plagiarism): 최근 크게 놀랄만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저명한 신학자의 글을 읽다가 그가 이전 신학자의 글들을 적지 않게 표절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보고 있는 두 권의 책이 표절된 자와 표절한 자의 책일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책 A의 한 부분을 읽고 책 B의 한 부분을 읽기 시작한 나는 책 A와 같은 내용이 끊임없이 나와 먼저 읽었던 책 A를 실수로 다시 잡은 줄 알았다. 그러나 표지를 보니 책 B였다. 평소에 크게 존경하고 있었던 신학자였던 지라 실망이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표절에 표절에 표절이었다.

최근 표절을 방지하는 장치가 비교적 근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오래 전에 출판된 책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글을 읽었다.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인용 기호에 대한 장치들이 변화되거나 더욱 구체화 된 것은 사실이지만 표절이란 행위에 대한 도덕적 준거는 결단코 최근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표절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와 표절에 대한 도덕적 준거를 분리하지 않음으로 표절의 행위를 정당화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사본학자들이 갖고 있는 자료 중 표절의 도덕적 비정당성에 대해 가장 먼저 말한 사람은 기원전 1 세기에 살았던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이다. 그는 표절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의 비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타인의 글을 훔쳐 자신의 것인 것 마냥 출판을 한다. 그들은 자신의 아이디어에 의존하지 않고 타인의 아이디어에 의존하여 제 것인 것 마냥 글을 쓴다. 그들은 타인의 작품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훔친 것을 자신의 작품인 것 마냥 교만을 떤다. 이런 자들은 단지 비난을 받는 것 만으로 족하지 않다. 죄악 된 인생을 산다는 죄목으로 실형을 받아야 싸다. (Vitruvius Pollio, Vitruvius: The Ten Books on Architecture, ed. Morris Hicky Morgan [Medford, MA: Oxford University Press, 1914], 195. 필자의 감정이 약간 개입된 번역임을 밝힌다.)

폴리오에게 있어서 표절은 도적질이며, 도적질의 범위는 타인의 글뿐 만이 아니라 아이디어에까지 확장된다. 기원전 1 세기를 살았던 그에게도 표절에 대한 확실한 도덕적 잣대가 있었던 것이다.

날조 (Forgery): 참 재미있는 것은 표절과 정 반대되는 범죄도 초대교회 역사에 발견된다는 것이다. 바로 날조이다. 표절이 ‘타인의 아이디어나 글에다가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이라면 날조는 ‘자신의 아이디어나 글에다가 타인의 이름을 붙이는 ’이다. 예컨대 고린도 3서는 바울이 쓴 것이 아니다. 가현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원했던 초대교회 교부가 바울이 쓴 것처럼 날조한 문서이다. 의도는 좋게 평가될 수 있겠지만 그의 행동은 정당화 될 수 없다. ‘타인의 아이디어나 글에다가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뿐 만 아니라 ‘자신의 아이디어나 글에다가 타인의 이름을 붙이는 ’까지도 기독교가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타인의 생각과 글에는 타인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자신의 생각과 글에는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 이것이 정직함의 가장 기본적인 적용이 아니던가?) 결국 터툴리안의 증언에 따라 고린도 3서를 쓴 교부는 교부의 자리에서 해고당하고, 그가 날조한 문서에는 빨간 딱지가 붙게 됐다.

그 후에 등장한 문서 중 교회에 대하여가 있다. 디모데가 쓴 것처럼 되어있지만 사실은 살비안이 날조한 것이다. 이를 발견한 사로니우스 교주는 그를 책망하며 이유를 물었다. 역시 살비안의 의도는 교회의 정통 교리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성에 대한 책망을 받자 살비안은 선한 거짓말 논증에 호소하며 자신이 한 일을 정당화 한다. 그의 행동과 말을 쉽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요즘과 같은 시기에는 선한 거짓말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에 관심을 갖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지요. (Lewis R. Donelson, Pseudepigraphy and Ethical Argument in the Pastoral Epistles [Tubingen, Germany: Mohr Siebeck, 1986], 21)

그러나 사로니우스 교주는 그의 가당치 않은 논증에 동의하지 않고 날조된 문서에 빨간 딱지를 붙였다. 표절(Plagiarism)이던 날조(Forgery)던 기독교가 요구하는 도덕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다.

벧후 1:5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더하라.” “덕”이라고 번역된 헬라어(ἀρετή)는 아레테이다.  아레테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의 그리스인들이 “뛰어난 도덕성”을 의미하기위해 사용한 단어로써 그들이 추구했던 인간 최고의 가치였다. 그들은 청렴하고, 고결하며, 정직하고, 성실한 자의 특성을 아레테라고 불렀고, 학교에서는 가장 중요한 주제로 아레테를 다루었다. 이러한 아레테가 믿음과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어 성도의 영성과 도덕성은 긴밀한 관계 속에 묶여 있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그렇다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믿음에 덕, 즉 영성에 도덕성을 더하는 관계이다. “더하다”는 헬라어(ἐπιχορηγέω)는 ‘부유한 사람이 합창 단원들의 연습과 유지에 필요한 물질을 필수적으로 공급하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즉 부유한 자가 자신의 부유함을 근거로 합창 단원의 필요를 필수적으로 공급하듯이, 예수님을 믿는 부유한 영성이 있는 자는 그 영성을 근거로 삶에 도덕성을 필수적으로 공급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성경은 영성과 도덕성을 별개의 것으로 나누지 않는다. 영성은 도덕성을 수반하고 도덕성은 영성을 따라간다. 영성이 신앙의 시작이라면 도덕성은 신앙의 끝이다. 그리고 영성은 도덕성을 발출하고 도덕성은 영성을 증거한다. 결국 표절(Plagiarism)이던 날조(Forgery)던 행위자의 영성의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은 아닐까?

휴… 평소에 깊이 존경하던 신학자의 글에서 표절에 표절에 표절을 발견하니 망치로 머리를 몇 대 얻어 맞은 듯 하다. 앞으로 억지로라도 내 (소)논문들을 읽을 아들을 위해서라도 한 문장, 한 문장을 옮기는데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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