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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7/2015 / Sanghwan A. Lee

축귀(逐鬼)에 실패한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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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 식은 땀을 흘리며 깼다. 입에서는 “언아 미안해…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라는 말들만 쏟아져 나왔다. 끔찍한 악몽을 꿨기 때문이다.

꿈 속에 사랑하는 언이가 나왔다. 몇 주 동안 떨어져 있기 때문에 사무칠 대로 그리웠던 지라 무척 반가웠다. 꼭 끌어안기 위해 가다가는 중 언이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눈에는 검은 동자가 없고, 입에서는 성인의 목소리로 욕이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닌가? 축귀의 경험이 있었던 나는 언이가 귀신들렸음을 알 수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신속히 정신을 가다듬고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떠나가라”를 외쳤다. 귀신은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깐족대며 나를 비웃고 있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 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축귀에 실패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다는 사실과 미치도록 사랑하는 아들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돌아버릴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정신을 가다듬고 귀신을 쫓으려 했다. 그러나 아들을 다시 보는 순간 내 믿음의 분량보다 더 강한 귀신이 들어 있다는 사실에 나는 압도됐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나는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언아 미안해…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렇게 꿈에서 깼다.

마가복음 9장에는 나와 비슷한 아버지가 나온다. 아들이 귀신이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쫓지 못하는 아버지.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자신이 미웠을까? 가장 소중한 사람이 귀신들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상황이 얼마나 야속했을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부탁했더니 그들도 쫓지 못한다. 결국 사건은 예수님의 손에 넘겨져 해피 엔딩으로 해결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느꼈을 그 고통과 아픔은 쉽게 가시지 않는 여운으로 내 마음에 남는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왜 귀신을 쫓지 못했던 것일까? 아버지의 신앙이 어느 정도인지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왜 쫓지 못한 것일까? 아버지는 그랬다손 치더라도 제자들만큼은 쫓을 수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 질문은 “기도 이외의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답해졌다. 여기에 “종류”라고 번역된 헬라어(γένος)는 문맥 속에서 크게 두 개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 사람이 아닌 존재로써의 귀신 (Philip Schaff), (2) 강약의 정도가 차이 나는 귀신들의 종류 (Henry Alford). 둘 중에 어떤 의미로 사용됐는지 문맥은 밝히지 않지만 다른 구절의 도움을 받는 다면 두 번째 관점이 적합하다고 보인다. 귀신들의 종류에 따라 영적인 힘에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다니엘 10 장을 보면 한 천사가 바사 왕국의 군주로 언급된 귀신에 의해 방해를 받자 더 강한 미가엘에게 도움을 받는 내용이 나온다. 우리는 여기에서 천사들의 종류에 따라 강약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Stephen R. Miller, James A. Montgomery, Robert Jamieson, Mark Mangano). 하나를 더 보태자면 유대인들은 천사들을 9 종류로 분류한다. 서열대로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스랍, (2) 그룹, (3) 왕권들, (4) 주권들, (5) 능력들, (6) 통치자들, (7) 권세들, (8) 천사장, (9) 천사. 정말 이렇게 나눠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천사들 사이에도 질서와 힘의 강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혹시 본래 천사들이었던 귀신들이 타락한 후에도 그 질서를 따라 역사하는 것은 아닐까? 고맙게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12를 통해 다음과 같은 답을 줬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여기에 언급된 4 종류의 표현들은 타락한 천사들의 계급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압도적이다 (Ernest Best, Peter S. Williamson, Charles J. Ellicott, Robert Jamieson, John Peter Lange, Max Anders).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상대하는 귀신들 사이에도 계급적 질서와 힘의 강약이 존재하고, 우리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상대할 수 있는 귀신들과 아직 그럴 수 없는 귀신들이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강한 귀신들과 상대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기도 이외의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 풀어서 해석하자면 우리가 더 열심히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강한 종류의 귀신들은 쫓을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기도를 깊이, 자주, 오래하면 귀신을 쫓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해석일 뿐이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태복음 17:20을 보면 예수님께서 의미하신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맺어진 관계’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쫓을 수 없는 이유는]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그렇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9장에 의미하신 기도란 ‘얼만큼 자주하나,’ ‘얼만큼 오래하나,’ ‘하루에 몇 번씩 하나’등과 같은 바리새인적 의미가 아니라 깊은 믿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하나님과 친밀하고 각별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혹자는 다양한 사본들(P45vid A C D K L W X Δ Θ Π Ψ f1, 13 33 M)에 “기도와 금식”이라고 되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문자적으로 금식하지 않으면 더 강한 귀신을 쫓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문맥의 취지를 벗어난 주장으로 사료된다. 가장 권위 있는 사본(א* B)에는 금식에 대한 표현이 등장하지 않을 뿐더러, 문맥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을 향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점점 깊어지는 교제를 통하여 믿음이 점점 커짐에 따라 더 강한 귀신을 쫓을 수 있다는 말이다. (1) 믿음의 성장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까지 점점 나아가는 것이요, (2)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까지 점점 나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이 우리를 통해 점점 발산된다는 의미이며, (3)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이 우리를 통해 점점 발산된다는 것은 그에 비례하여 강한 귀신들이 점점 정복된다는 의미로 말이다.

나는 신학이 무섭다. 너무 존귀한 학문이지만 나처럼 교만한 자가 할 경우 머리는 채우되 영혼은 터는 무서운 학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과 연결되지 않는 신학은 회 칠한 무덤처럼, 빛 좋은 개살구처럼,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처럼, 개에게 던지는 거룩한 것처럼 영혼 없는 가분수로 사람을 뒤튼다. 바로 나처럼 말이다. “당신이 신학(神學)을 오래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감격의 눈물이 많아지지 않고, 죄에 대한 분노가 커지지 않으며, 이웃을 향한 사랑이 깊어지지 않는다면 그 동안 당신이 해온 것은 사학(死學)일 뿐이다.” 얼마 전에 트위터에 올렸던 표현이다. 이제와 깨닫게 된 것은 내가 20 년 이라는 시간동안 해왔던 것은 사학(死學)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학(神學)이라는 자기 최면과 더불어…

그러나 감사하게도 은혜와 자비가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지난 밤 나를 만져주셨다. 들을 귀가 꽉 막혀 들을 수 없고, 볼 눈이 꽉 막혀 볼 수 없으며, 느낄 수 있는 마음이 화인 맞아 느낄 수 없던 나에게 꿈으로 역사하셨다. 나를 오해하지 말라. 나는 직통 계시를 믿지 않는다. 성경 이외에 새로운 계시가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추수 밭에 떨어진 곡식 알갱이를 줍지 말고 남겨 두라고 명하신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께서 들을 귀가 꽉 막혀 들을 수 없고, 볼 눈이 꽉 막혀 볼 수 없으며, 느낄 수 있는 마음이 화인 맞아 느낄 수 없는 나 같은 영적 문둥이들에게 가끔씩, 아주 가끔씩 꿈을 통해 채찍질을 하실 수 있다고는 믿는다. 지난 밤 그 사랑의 채찍이 자고 있는 내 살갗을 찢고 들어와 골수를 내리쳤고, 점점 죽어갔던 내 영혼은 그 채찍을 통해 다시 시퍼렇게 살아날 수 있었다.

오늘 새롭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내가 하나님과 끝없이 친밀해 져야 하는 이유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을 악한 영의 권세로부터 지켜줘야 할 사명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 같은 개 망난이가 40살이 될 때까지 좌충우돌하며 그래도 앞으로 기어갈 수  있는 이유는 나를 위해 새벽마다, 아니 하루 종일 부르짖는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이 아닌가? 사랑하는 아들 언이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바르게 설 수 있도록 아버지인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줘야 한다. 그리고 만난 후에도 더 열심히 도와야 한다.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더 철저히 엎드림으로,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함으로,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음으로 말이다.

오랜만에 흘린 뜨거운 눈물과 깊은 회개기도 끝에 이렇게 간구했다. “하나님, 제 믿음의 분량이 조금 더 커지면 제게 다시 한 번 꿈을 허락하소서.” 다음에는 그 자식과 맞장떠 아작을 낼 계획이다. 전진하자, 상환아. 힘차게 전진하자. 쉬지 말고 앞만 보며 달려가자. 네가 지켜줘야 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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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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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arkminjoy / 9월 8 2015 10:59 오전

    기도 외에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 거하는 것.. 또한 자녀를 위한 간절한 간구. 역시나 교만하고 게으른 1인, 마음 깊이 공감하며 새기며 돌아갑니다. 귀한 나눔 감사해요 🙂

    Liked by 1명

    • Sanghwan A. Lee / 9월 8 2015 8:15 오후

      감사합니다. 늘 겸손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하루도 즐겁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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