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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8/2015 / Sanghwan A. Lee

觀點

  1. 다니엘 왈라스와 바트 어만 앞에 똑같은 사본들이 놓여 있다. 왈라스는 사본들이 성경 필사의 정확성을 논증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어만은 기독교가 꾸며진 종교라는 결정적 증거가 사본들로부터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둘 앞에 놓인 사본들은 같은 것들이다.
  2. 앤터니 플루와 크리스토퍼 히친스 앞에 DNA 구조 모형이 놓여 있다. 플루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DNA를 통해 변증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히친스는 하나님이 없다는 결정적 증거가 DNA라고 주장한다. 둘이 본 DAN 구조 모형은 같은 것이었다.
  3. 새뮤얼 존슨과 존 미셸 앞에 소네트가 펄쳐저 있다.존슨은 소네트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글임을 스스로 논증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미셸은 크리스토퍼 말로위의 글임을 논증한다고 주장한다. 둘이 읽은 소네트는 같은 것이었다.
  4. 혹자는 창세기 1장에서 전통적 창조론을 보는 반면 혹자는 유신진화론을 본다. 혹자는 창세기 1-2장에서 같은 사건을 보는 반면 혹자는 다른 사건을 본다. 혹자는 창세기 3장에서 계시를 보는 반면 혹자는 신화를 본다. 이들이 본 성경은 같은 것이다.
  5.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6. 사람들마다 각자 다른 관점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즉자체는 있는 그대로 인식될 수 없다“고 메를로-퐁티는 말했다.Different-view
  7. 즉자체는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쓰고 있는 “관점“이라는 안경을 통해 투영된 후 이해된다는 말이다. 결국 바른 관점의 부재는 즉자체에 대한 본유적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당신이 빨간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본다면 빨간 사물이 보일 테고, 굴절된 안경을 쓰고 본다면 굴절된 사물이 보이듯이 말이다. 결국 퐁티는 즉자체 자체를 부인한다.
  8.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즉자체는 물론 절대적 즉자체를 믿는다.
  9. 우리에게 있어서 절대적 즉자체는 실체요, 실체는 진리며, 진리는 불변하는 명사다.
  10. 그 명사를 시작으로 모든 피조된 즉자체들은 동사적 명사가 된다.
  11. 그러나 죄로 인해 타락해 버린 인간은 잘못된 관점을 갖고 태어나고, 잘못된 관점을 배우며, 잘못된 관점을 옳은 관점인 것처럼 사유하기에 즉자체들을 왜곡되게 인식한다. 잘못된 것을 옳은 것으로 착각하여 사명감을 갖고 변증 및 관철하려는 자들이 기독교 진영에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12. 그렇다면 이런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13. 사도 바울의 회심이 기록된 구절들을 통해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4. 사도행전 9장에는 잘못된 관점을 갖고 다메섹으로 향하던 바울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빛이신 하나님을 본 바울은 즉시 실명하게 되고 (행 9:8),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기도에 힘쓴다 (행 9:9, 11).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를 바울에게 보내사 치유를 하시는데 (행 9:17), 그 때 신비로운 일이 일어난다.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진 것이다 (행 9:18). 비늘이 벗겨졌다는 의미가 뭘까? 몇몇의 주석가들은 시력을 되찾은 것을 의미하는 원시적 표현이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주석가들은 누가가 의사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실제로 비늘이 벗겨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나는 후자의 의견을 따른다.
  15. 그렇다면 바울의 눈에서 벗겨진 비늘같은 것은 무엇일까?
  16. 나는 그의 굴곡되고 색칠된 기형적 옛 관점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비늘이 벗겨진 사건 전후에 보이는 바울의 삶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전에는 핍박했던 교회를 이제는 세우고, 전에는 저주했던 예수님을 이제는 예배하며, 전에는 율법주의로 읽었던 구약을 이제는 은혜주의로 읽기 시작하는 바울. 그의 세계관이 바뀌었다. 그가 인식했던 사물과 사물들 간의 관계가 바뀌었다. 왜? 그의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7. 성령님께서 바울의 관점을 수정하신 것이다.
  18. 이것이 진리를 바르게 보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19.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사 우리의 눈에서 비늘을 벗겨주시는 사건은 중생이 필요한 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중생 후에도 바른 관점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즉자체를 왜곡되게 바라보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중생한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기 위해서 성령의 관점이 필요하다. 또한 영적 전쟁을 하기 위해서도 성령의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가 중생시 받은 관점은 온전히 개발된 관점이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는 발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화의 기간동안 눈을 덮고 있는 비늘을 지속적으로 벗어내고, 마음을 덮고 있는 모세의 수건을 끊임없이 걷어내는 일이 필요하다(고후 3:15-16). 그렇게 얻어지는 성령의 구체적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즉자체에 대한 바른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20.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의 구체적 관점을 소유할 수 있을까?
  21.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마음 (ὁ νοῦς)”은 ‘관점’의 뿌리로 이해될 수 있고, “변화를 받으라 (μεταμορφοῦσθε)”는 신적 수동태로 볼 수 있다. 이럴 경우 우리의 관점은 하나님의 개입이 있어야지만 변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22. 그리고 이를 위한 하나님의 신적 개입은 겸손한 태도(잠 11:2; 고후 3:14-15)와 끊임없는 기도(약 1:5), 부지런한 말씀 연구(느 8:8-9)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유(고후 3:15-16)로 시작된다.
  23.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들은 겸손한 태도로 쉬지 말고 기도하고, 부지런히 말씀을 연구하며,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유함으로 바른 관점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24.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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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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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ohnjooyung / 3월 19 2015 12:58 오전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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