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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4/2015 / Sanghwan A. Lee

용기

수학자 피타고라스의 치명적인 실수는 무리수를 부인한 것이다. ‘모든 것은 유리수 만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잘못된 전제가 그로 하여금 무리수의 존재를 끝까지 부인하게 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날 그의 제자 히파소스가 무리수를 발견해 피타고라스 앞에서 증명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는 죽임을 당한다. 이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들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는 피타고라스에 의한 타살이다. 잘못된 신앙에 눈먼 피타고라스는 그렇게 무리수의 존재를 은폐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언젠가는 밝혀지는 법. 유클리드가 귀류법을 사용하여 무리수를 증명해 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무리수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수로 자리를 굳히게 되니 피타고라스의 은폐는 물거품이 된 셈이다. 만약 피타고라스가 솔직하게 무리수를 인정했다면 어땠을까? 지금의 수학계는 이보다 더 놀라운 발전을 이뤄냈을 수 있지 않았을까? 피타고라스와 유클리드의 시간적 차이는 길게 잡아 300년 정도이니 그 사이에 무리수를 통해 발전했을 수학계를 상상해보라. 정말 대단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괴물같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로 인해 자살을 하거나 리만의 가설로 인해 미쳐버리는 사람은 없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지나친 가정이지만 피타고라스의 쓸데없는 자존심과 고집과 아집이 이를 야기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신학계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많은 신학자들이 꽉막힌 신학자들로 인해 마녀사냥을 당한후 화형과 수장을 당했던가? 신학계의 히파소스들이 신학계의 피타고라스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셈이다. 자신의 잘못된 신념을 맹목적으로 지지하기위해 참된 사유를 폭력적으로 잠재운 피타고라스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신학이 우리에게 전수되고 있는 이유는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기 때문이다. 단지 아쉬운 점은 피타고라스들의 방해가 없었다면 지금의 신학은 이보다 훨씬 더 체계적으로 발전됐었을 수도 있었다는 것.

나에게는 소중한 아들이 있다. 나는 그가 균형잡힌 신학을 배우기 원한다. 체계적인 신학을 접하기 원한다. 건전한 신학을 배우기 원한다. 그래서 이 시대의 피타고라스들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하시는 목사님들과 신학자들께 깊이 감사한다. 진리는 그들의 외침을 통해 발전된 모습으로 다음 세대에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는 잘못된 번역자들과 외로운 싸움을 하시는 분이 계시다. 잘못된 내용을 책으로 출판한 저자와 싸우시는 분도 계시다. 잘못된 신학을 영상으로 만들어 배포하는 목사들과 싸우는 분도 계시다. 세상은 이들을 알아주지 않지만 이들의 업적은 반드시 다음 세대를 사는 후손들의 삶에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을 나는 믿는다.

진리를 위해 싸우시는 용기있는 신학자님들과 목사님들께 깊이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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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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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ohnjooyung / 3월 6 2015 6:56 오후

    이상환 목사님께 저희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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