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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6/2015 / Sanghwan A. Lee

과학과 성경

문제 제기요즘 과학과 성경의 교집합을 찾으려는 시도가 기독교 진영에서 보여지고 있다. 이런 작금의 상황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으나 상황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짧은 글 하나만 나누고자 한다. 본 글의 취지는 과학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세 가지 관점을 간단하게 분석한 후 우리의 현 주소를 진단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두는 믿음을 고백하는 성도들임을 밝혀둔다. 이런 전제하에 우리가 다룰 세 개의 관점은 (1) 과학적 실재론 (Scientific Realism), (2) 과학적 반실재론 (Scientific Anti-Realism) (3) 과학적 도구론 (Scientific Instrumentalism)이다.

(1) 과학적 실재론 (Scientific Realism)은 과학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참과 거짓을 분류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문제점은 역사적으로 이전의 이론을 수정한 허점을 보인 과학에게 이렇게 큰 권위를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컨대 과학의 한 분야인 물리학을 보자. 최근 뉴턴 역학은 양자 역학으로 대치됐고, 또한 되고 있다. 앞으로 어떤 물리학이 나올지 모르지만 분명히 양자 역학도 다른 역학으로 대치될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은 대치되는 과정에서 당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던 기존의 이론들이 수정됐다는 것이다. 이는 과학적 발견이 절대적 사실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실재론을 고수하는 관점은 일종의 교만으로 보인다.

(2) 과학적 반실재론 (Scientific Anti-Realism)은 과학은 진리를 찾는데 무용지물 하다는 관점이다. 과학 무용론을 지지하는 셈이다. 이런 관점은 과학적 실재론을 적대하는 자들이 주로 선택하는 관점인데, 이는 명백한 무지에 의거한 논증의 오류(Argumentum Ad Ignorantiam Fallacy)이다. 과학적 실재론이 틀렸다고 해서 과학적 반실재론이 옳아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진리를 찾는데 쓸모가 없나? 가치가 없나? 그렇지 않다. 과학은 다수의 고정적 사실들을 발견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거시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쓰고 있는 안경도, 운전하는 자동차도, 통화하는 전화기도 과학의 도움에 의해 발견된 고정적 법칙들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소산물이다. 이처럼 과학은 고정적 법칙들을 찾는데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과학적 반실재론은 일종의 무지로 보인다.

(3) 과학적 도구론 (Scientific Instrumentalism)은 과학은 유용하다는 관점이다. 과학을 절대적으로 보는 과학적 실재론과 무가치하게 보는 과학적 비실재론의 중간지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과학적 도구론은 과학을 절대적으로 신봉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충실한 그러나 때때로 실수하는 시녀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도구론의 관점을 소유한 사람들은 새롭게 제시된 가설들 향해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 하며, 기존의 가설들에게도 새로운 조명이 필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과학적 실재론은 항상 열려있지만 아무 것에나 열려있지 않고, 항상 닫혀 있지만 모든 것에 닫혀 있지는 않는 겸손의 자세를 요구하는 셈이다.

상황진단: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적 권위로 여긴다고 신앙 고백하는 신학도들이 과학적 실재론을 과학적 도구론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그 결과 자신은 과학적 도구론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유의 흐름은 과학적 실재론으로부터 시작된다. 현재 발견되고 있는 과학적 정황들을 불변하는 사실로 가정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수정하려는 태도가 그 예이다. 내가 의미하는 “성경의 가르침”이란 “특정한 교단이 제시하는 해석”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숨겨진 진리”이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 절대적이지 않은 과학적 정황들을 오캄의 면도날처럼 사용하여 모든 가능한 성서해석학적 경우를 베어내면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Sola Scientia가 아니라 Sola Scriptura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특정한 교단이 제시하는 해석”을 지지하기 위해서 과학적 정황들을 무조건 쓸모없는 것 혹은 마귀적인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특정한 교단이 제시하는 해석”도 절대적이지 않은 경우가 있지 않은가? 결국 가장 균형 잡힌 태도는 Only Authority적 사유로 고백되는 Sola Scriptura가 아니라 Final Authority적 사유로 고백되는 Sola Scriptura라는 생각을 해본다.

맺으며: 진리를 추구하는 우리의 자세는 모든 것에 닫혀있어서도 안되고, 모든 것에 열려있어서도 안 된다. 성경이 확고히 계시하는 부분에는 닫혀있되, 확고하지 않게 계시하는 부분에는 열려 있어야 한다. 그리고 확고하게 계시되지 않은 부분은 무작정 열어두지 말고 “Scripture Interprets Scripture”의 공식에 따라 확고히 계시된 부분으로 열려진 가능성들을 최대한 닫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닫을 수 없는 부분이 나타나면 그 부분 만큼은 가능성 혹은 결정불가능성의 이름으로 열어놓아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를 사랑하는 작은 신학도의 보잘것 없는 끼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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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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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m ju heon / 8월 5 2015 10:25 오후

    감사합니다
    균형잡힌 시선에서 많이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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