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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6/2015 / Sanghwan A. Lee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관용을, 모든 것에는 사랑을!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와 영국의 존 웨슬리는 구원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같은 그리스도 인이라는 이유로 서로를 존중했고 사랑했다. 그들은 서로의 글들을 읽기 즐거워했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서로의 가치를 칭송하기도 했다.

미국의 에이든 토저와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도 구원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관계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 토저는 웨슬리의 입장과 유사했고, 로이드 존스는 에드워즈의 입장과 유사했다고 할까? 그러나 같은 그리스도 인이라는 이유로 서로를 존중했고 사랑했다. 하루는 토저와 로이드 존스가 한 자리에서 대화를 나눴다. 로이드 존스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던 토저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구원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오랜 시간 동안 설명했다. 신기하게도 로이드 존스는 토저의 설명에 한 마디의 반증도 하지 않았다. 그대신 그를 향해 빙그레 웃음지었을 뿐이다. 당연히 그 웃음의 의미는 ‘저는 당신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정중하게 사양합니다’였다. 둘은 그리스도 인이라는 이유로 서로를 존중했고, 서로의 가치를 인정했었던 것이다. 나는 마틴 로이드 존스의 웃음에서 그의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볼 수 있었다.

얼마 전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여보, 이단이 아니라면 서로 관용하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할 듯 해요. 앞으로 복음의 본질이 같은 사람을 만나면 주변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거리를 두지 말아요, 우리.”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준 아내의 멋진 권면이었다. 어거스틴도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관용을, 모든 것에는 사랑을”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중심 교리에 일치가 있다면 주변 교리에는 관용을 베풀고, 삶으로는 사랑하는 자세가 그리스도 인들에게 필요하다는 말이다.

며칠 전에 한 전도사님께서 재미있는 질문을 던지셨다. 내 자신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분류하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솔직히 말씀 드렸다. “저는 침례에 관해서는 침례교의 주장을 따릅니다. 교회와 이스라엘, 그리고 성서해석에 관해서는 세대주의의 주장을 따르고요. 구원론에 있어서는 칼빈주의를 따릅니다. 사회를 대하는 태도는 웨슬리안을 따르며, 하나님의 전지성을 논할 때는 몰리니즘을 따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물론 내 신학적 소양이 턱없이 부족하고 줏대 또한 없기에 이렇게 분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내가 몸담고 있는 교단에도 성서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내 가슴을 가장 뜨겁게 했던 선진들의 삶 가운데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교단만이 유일무이하게 무흠한 교단이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을 나는 존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교단 무용론을 주장하는 자들을 존경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교단의 존재는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좋은 부분만 채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물론 내가 틀렸을지 모르지만, 교단을 세 번이나 옮기면서 깨달은 사실은 완벽한 교단은 없다는 것. 각 교단마다 고칠 점도 있고 배워야 할 점도 있다는 것. 그러므로 각 교단들은 진리를 위한 선의의 경쟁은 하되 서로를 원수 보듯이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Dallas Theological Seminary는 사본학과 성서해석학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 초교파 학교이다. 초교파 학교인만큼 교수님들마다 주변 교리에서만큼은 각자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작년에 E. 교수님으로부터 배웠던 예레미아의 새언약이 지금 배우고 있는 C. 교수님의 해석과 다르다. 작년에 G. 교수님으로부터 배웠던 휴거의 시간대가 지금 배우고 있는 L. 교수님의 견해와 다르다. 하지만 교수님들은 중심 교리에서만큼은 일치하기 때문에 주변 교리에 있어서는 자신이 틀렸을 수 있음을 인정하며 타인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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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이 하나 있다. Dallas Theological Seminary의 교수님들이 서로의 의견을 피력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며, 반박된 부분을 변증하는 내용의 책이었다. 매일 얼굴을 봐야 하는 같은 학교의 교수님들끼리 이처럼 날카롭게 부딪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어보면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면서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상대방의 의견을 반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책의 내용보다 작자의 태도에 더 큰 감동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같음 속에서 다름을 인정하는 모습이 어떤 것임을 얼추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몇 개월 사이에 나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변화를 겪으면서 홀로 행복한 상상을 해 본다. 에드워즈와 웨슬리가 나눴던 우정이 한국에 있는 다른 교단들의 신학자들로부터 만들어 질 수는 없을까? 토저와 로이드 존스가 보여줬던 관용이 한국에 있는 다른 교단의 목회자들로부터 만들어 질 수는 없을까? 한국의 수많은 교단들이 교단을 위한 경쟁이 아니라 진리를 위한 경쟁을 할 수는 없을까? 그러면 참 멋질텐데 말이다.

페이스 북: https://www.facebook.com/sanghwan.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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