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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2014 / Sanghwan A. Lee

복음은 하나님의 자존심이요 능력입니다

최근 김동호 목사님께서 복음을 “파는 상품”에 비유하신 후 “간접광고(ppl)”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쓰신 글을 읽고 많이 속상했습니다. 인본주의적 사유로 신본주의적 복음에 접근하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담벼락에 제 생각을 댓글로 드렸고, 그 댓글을 제 페친들에게 나누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 생각되어 이곳에 공유합니다. 본 글은 김 목사님을 폄하하기 위함이 아니라 잘못된 생각을 바르게 펴고자 하는 작은 자의 몸부림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지나가던 후학이 짧은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복음은 파는 상품이 아니라 선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한 기초작업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의 굳은 마음을 쟁기질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것이 복음이기 때문에 복음을 예수님의 마음과 자세로 선포하는 것이 우선시 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보다도 복음을 많이 외쳤던 찰스 스펄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The Word of God is like a lion. 하나님의 말씀은 사자와 같다.
You don’t have to defend a lion. 당신은 사자를 보호할 필요가 없다.
All you have to do is let the lion loose, 당신이 해야할 모든 일은 사자를 풀어놓는 것이다.
and the lion will defend itself. 그러면 사자가 스스로를 보호할 것이다.’

복음도 하나님의 말씀이니 이와 같지 않을까요? 복음은 하나님의 자존심이요 능력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선포된 ‘씨도 안먹히는 소리’처럼 들렸던 복음은 그 자리에서 삼천명을 회심시켰습니다. 소위 베드로가 ‘밭도 갈지 않고 [복음의] 씨를 뿌’렸는데, 그 씨앗이 죄인들의 마음에 심긴 것이지요.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저는 사람이 PPL과 같은 방법으로 죄인들의 마음을 구원을 향해 준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하실 수 있지요. 그러므로 복음은 간접광고와 같은 PPL (Product PLacement)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기에 충분하고 유일한 하나님의PPL (Powerful PLan)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스펄전의 말을 인용합니다.

“The Word of God is like a lion. 하나님의 말씀은 사자와 같다.
You don’t have to defend a lion. 당신은 사자를 보호할 필요가 없다.
All you have to do is let the lion loose, 당신이 해야할 모든 일은 사자를 풀어놓는 것이다.
and the lion will defend itself. 그러면 사자가 스스로를 보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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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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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익명 / 1월 16 2015 1:53 오전

    – 성경 해석과 관련 벧전 4장 6절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라는 구절에 대한 목사님의 해석은 무엇인가.

    성경이 기록될 때는 장과 절이 없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성경은 장으로 나눠져 있지만, 당시는 파피루스에 다 붙어있다. 벧전 3:18에 육체로는 죽었지만 영으로는 살림을 받아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는데, 그 영들은 노아 때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로 규정돼 있다. 첫 번째 심판 때에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인데, 거기에서 선포한 내용이 뭔가.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다고 연결되면서, 예수님께서 천상천하음부까지를 다 장악하시는 분임이 드러난다. 그러면서 벧전 4:6 죽은 자들 가운데도 복음이 전해졌다고 나온다. 붙어있는 파피루스를 생각한다면 그 죽은 자가 누군지는 간단히 나타난다.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됐다고 나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구원받았느냐 그건 모른다. 그걸 저는 얘기하지 않았다. 그런 구절이 있기 때문에 장례식에 갔을 때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에게도 따뜻하게 기도해줄 수 있지 않느냐고 연결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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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월 16 2015 8:20 오전

      Sanghwan A. Lee / Jan 16 2015 8:19 오전

      안녕하세요. 우선 이 구절을 놓고 만들어진 몇 가지 역사적 해석을 간단하게 고찰해 본 후 제 해석을 나누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Calvin – 문자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해 졌다는 견해로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3일 동안에 음부에서 이루신 구속활동이었다는 해석입니다. 이 견해는 제가 예전에 취했었던 견해로써, 복음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인정/부인할 기회 없이 죽어버린 영혼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적 배려라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러한 견해를 버린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님의 승천사건 후에 태어나 복음을 들어볼 기회가 없이 죽어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지는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아직까지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본절에 있는 “복음이 전파 되었으니”라는 말은 단순과거 동사인εὐηγγελίσθη의 번역으로써 일회의 사건을 나타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은 구속사적 형평성에 어긋납니다. (2) 성경은 그 어디에도 죽은 자들이 옥에서 예수님의 전도를 받아 낙원으로 옮겨졌다는 설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Clement – “죽은 자들“이라는 단어를 구약시대의 의인(여기서 의인이란 오실 초림의 메시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죽은 사람들을 나타낸다는 견해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 모세 정도로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방법은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진 가설로써 비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혹자는 이를 억측이라고까지 하지요.

      Augustine, Luther – “죽은 자들”이라는 단어를 불신자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상당히 많은 지지를 얻고 있으나 역시 비판 받아 마땅한 이유는 역시 문맥을 벗어나 만들어진 견해이기 때문입니다. 5절에 있는 “산 자”와 “죽은 자”를 보세요. 이는 문자적으로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들을 나타냅니다. 베드로 사도가 “죽은 자들”이라는 단어를 갑자기 개연성 없이 영적인 단어로 사용했을리 만무합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해석이 가장 성경적인 해석일까요? 문제의 복잡성을 최소한으로 줄여보기 위해서 모든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두 개의 권위 (1. 문맥의 중요성, 2. 원어 성경의 권위)에다가 제 해석을 세워보겠습니다.

      (1) 문맥적 배경 – 1절부터 6절까지 흐르고 있는 문맥은,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임하는 공평하지 못한 육신의 고통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주제를 돌출해 내기 위해서, 베드로 사도는 1절을 통하여 예수님의 태도를 말하고 있고, 2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있으며, 3절부터 5절까지 과거로부터 일어난 변화를 이야기 하고, 마지막 6절에 영생의 소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베드로 사도는 육신의 고난은 성화를 돕는 촉매제이며,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도록 돕는 윤활류라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이 문맥을 구성한 것이며, 6절은 육체의 고동을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어 고통을 이기도록 유도하는 첨가제 정도로 봐야 합니다.

      (2) 원어적 분해 – 이로써는 정확한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에 헬라어를 분해해 보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εἰς τοῦτο γὰρ καὶ νεκροῖς εὐηγγελίσθη, ἵνα κριθῶσιν μὲν κατὰ ἀνθρώπους σαρκί, ζῶσιν δὲ κατὰ θεὸν πνεύματι.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 구절에서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은 “복음이 전해진”라고 번역된εὐηγγελίσθη 와 “심판을 받으나”라고 번역된 κριθῶσιν가 일반 단순 과거형인 반면에 “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번역된 ζῶσιν가 가정법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어 성경은 이러한 뉘앙스를 전달하는데 취약함을 보이고 있지요. 여하튼, 이러한 헬라어의 문법구조는 해석의 틀을 좁힌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전파된 시점과 심판을 받은 시점은 과거의 일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던 반면에 살고 있는 것은 지금 현재에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 또 하나 해석의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처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ἀνθρώπους로써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지 않고 ”인류“라고 쓰이는 단어랍니다. 이는 신자와 불신자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들이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첫 번째 사망인 육신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지요.

      이 모든 단서들을 한데 모아보면 이러한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즉, 복음이 전해졌던 “죽은 자들”이란 지금은 죽어있으나 죽기 전에 복음을 들어 영접한 자들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하자면, 6절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자들에게 두 번째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 복음을 들어 죽은 사람들을 나타내는 것이랍니다. 이러한 해석은 베드로서의 시대적 배경과 목적으로 비추어 보아 타당성을 확보하기도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핍박이 만연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성도의 믿음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예수 공동체에게 이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 당신 예수 공동체들은 육체의 고통을 받으며 순교한 순교자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었고,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의 마음을 졸이게 했던 것이지요. 자, 이러한 상황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가장 용기를 줄 수 있는 소식이 무엇일까요? 죽음 뒤에 찾아오는 부활에 대한 소식입니다. 십자가 뒤에 영광이 있고, 고통 뒤에 면류관이 있으며, 죽음 뒤에 부활이 있지요? 때문에 성도들은 육신의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을 모든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기쁜 소식을 핍박속에 있는 예수 공동체에게 전함으로써, 그들이 당하고 있는 육체적 고통을 영생의 소망으로서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며, 베드로 전서 4장 1절 부터 6절까지는 이러한 위로의 메시지로 해석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추신 1: 참고로 제 해석을 지지하는 신학자들의 글을 이곳에 첨부하겠습니다.

      J. N. D. Kelly: Preaching the gospel’ is an activity carried out by Christian evangelists, always in this world.

      John H. Elliott: Taking the “dead” of v 6a in connection with both v 5 and the remainder of v 6, however, provides a satisfactory solution. In this case, the “dead” of v 6 refers to a portion of those now deceased (cf. v 5), namely the deceased among the letter’s addressees. The fact that the author stressed earlier that the addressees themselves were the privileged recipients of the good news (euaggelisamenōn hymas, 1:12, and euaggelisthen eis hymas, 1:25) makes it likely that the entire statement in 4:6 also pertains to the addressees, but here to those among the addressees who, once having heard and accepted the good news, are at present among the dead. This view was first advanced by Spitta (1890, 63–66) and subsequently was adopted by several other scholars.

      R. C. H. Lenski: These are not all of the dead who shall face the Judge at the last day but those to whom the gospel was preached prior to Peter’s writing, (by the gospel preachers mentioned in v. 1, 12), who at this writing were already dead.

      추신 2: 파피루스에 대한 이야기는 왜 하신 것지이요? 파피루스는 이 구절을 푸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추신 3: 벧전 3:18과 벧전 4:6은 전혀 다른 문맥에 들어있는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둘을 연결시켜 해석하면 잘못된 해석이 나오는 것이랍니다. 왜 이 둘을 연결시키면 되지 않는지는 Thomas R. Schreiner의 글을 대신하여 답하겠습니다.

      Others maintain that the verse speaks of the preaching of the gospel to those who have died physically. This interpretation is often connected with 1 Pet 3:19, where the spirits are understood to be human beings and the gospel was proclaimed to them after their death (see commentary on 3:19). According to this view, however, 4:6 is an elaboration of what was communicated in 3:19, for now all those who have died have the gospel proclaimed to them.384 Some limit this to those who died before Christ’s coming; others, to all those who died without hearing the gospel; and others, to all those who died without exception. The advantage of this interpretation is that it understands the “dead” in vv. 5–6 to refer to those who are physically dead, so that there is no shift in meaning. Nevertheless, this interpretation should be rejected for several reasons. First, we argued earlier that 1 Pet 3:19 does not refer to the preaching of the gospel at all but to a proclamation of triumph over demonic powers. Elliott rightly remarks, “The interest in a possible correspondence between 3:19 and 4:6 appears motivated more by dogmatic than by exegetical concerns; namely, a desire to find here a biblical expression of the universality of salvation.”385 Second, the passive verb phrase “the gospel was preached” (euēngelisthē) does not refer to preaching done by Christ but the preaching of Christ (cf. the passive verb from kēryssō, “announce, proclaim,” in 1 Cor 15:12; 2 Cor 1:19; 1 Tim 3:16).386 We should understand this to refer to preaching by human beings, therefore, not Christ himself. Hence, the verbal form provides no support for the preaching of the gospel by Christ after human beings have died. Third, there is no basis in the text for limiting the dead to those who preceded the incarnation, to Old Testament saints, or even to those who have not had the opportunity to hear the gospel. Peter did not even give a hint that he addressed any of these people specifically. We are left, then, with the notion that the gospel was preached to all of the dead after their demise. But this view can be confidently rejected. The New Testament nowhere else envisions the possibility of repentance and salvation after death, quite the contrary (cf. Luke 16:26; Heb 9:27). Furthermore, if v. 6 refers to all the dead, then it follows from the rest of the verse that all of the dead will be saved, for Peter said the gospel was preached to the dead so that they should “live according to God in regard to the spirit.” Nothing is said in this verse about any being condemned, but the notion that all will respond positively to the gospel is ruled out by the rest of the New Testament, where the final judgment of the wicked is taught consistently (cf. Matt 25:31–46). Fourth, there is an insuperable problem contextually with this interpretation. In the entire letter Peter exhorted the readers to endure persecution, knowing that they have the future reward of eternal life. Even in this paragraph he presented that very argument, urging them to persevere because God will judge those who are sinners (v. 5). It would make no sense at all if he were to shift gears suddenly and promise a second chance to those who have rejected the gospel during this life. If Peter were promising a second chance, the Petrine readers could not be faulted for concluding that they could deny the faith now and then embrace it after death. Apostasy, in any case, would not be the last word, for they would have another opportunity after death to believe the gospel. This interpretation should be rejected, then, because it veers away from the purpose of the entire letter and even contradicts the teaching of 4:1–6.387 Elliott rightly concludes that any notion of Christ’s universal redemption or of a second chance “to those who died before Christ … is thoroughly inconsistent with the theology, ethics, and aim of 1 Peter as a w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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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본도로 / 4월 2 2017 12:55 오후

    비기독교인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 중 하나가 복음이 전파되기 전의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복음을 듣을 기회도 없이 지옥에 가면 불공평한 것이다. 그럼 이순신 장군은 지옥에 간 것이냐? 이에 대한 답변은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은 다르다라는 말로 끝내버립니다.
    그래도 불공평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난해한 문제입니다.

    “죽기 전에 복음을 영접한 자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순수하게 해석해 봅니다.

    벧전4:6절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합니다.
    즉 육신이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의미입니다.
    육신이 있을 때 복음을 들은 자가 죽은 후 다시 들을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구절 문맥 의미로 보아 믿고 죽었다면 영으로 이미 살은 상태일틴데,
    이미 살아 있는 영에게 “하나님을 따라 영으로 살게 하려 한다” 나온 점입니다.
    즉 믿지 못하고 육신이 죽은 자들에게 하는 말 같습니다.

    “육신으로 심판을 받았다” 합니다. 믿고 죽은 자들에게 이런 “심판”이란 표면이 옳은 것일까요?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었으니 일단 심판이라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으로 복음을 듣게 되어 영으로 살림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 같습니다.

    벧전4:6절은 벧전3:19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한다는 내용과는 다릅니다.
    벧전3:19 심판 선포고, 벧전4:6절을 복음 전파입니다.

    하지만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를 보면 부자는 육신이 죽은 후 곧바로 음부에 처해졌습니다.
    순교자들은 잠잔다 즉 안식의 상태입니다.
    성경에서는 두 곳에 대해서만 나와 있습니다.
    타종교에서 말하는 중천(중간상태) 같은 곳은 없습니다.

    결론: 아직 답을 모르겠습니다. 더 연구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게시글에 질문을 했는데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삭제 된 것인가요?
    댓글이 달리는 것 같지도 않고, 오래 걸려서 대화하는데 시간이 걸려서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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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4월 4 2017 5:06 오후

      안녕하세요, 본도로 형제님. 이제야 댓글을 확인했습니다. 학업이 바쁜지라 블로그에 가끔씩 들어와 확인하기 때문에 이제야 답신을 드립니다. 답글을 기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참고로 이전에 댓글을 주신 부분은 찾을 수 없네요. 아마 남겨지지 않고 지워진듯 합니다.

      위에 언급하신 부분의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은 예전부터 있어 왔지요. 그러나 베드로가 여러가지 레이어들을 전제로 하고 언급한 부분인지라 21세기의 성도인 우리가 그 뜻을 이해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일차 독자들은 베드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겠지요?

      좋은 의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도 더욱 연구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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