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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2014 / Sanghwan A. Lee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

고타마 싯타르타는 증지부(增支部) 5.79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수도승이 타인을 인도하려 한다. 그들에게는 타인을 인도할 능력이 없음에도 말이다. 그런 수도승으로부터 인도를 받은 자들 또한 타인을 인도하려 한다. 타인을 인도할 능력이 더 없음에도 말이다.

타인을 가르칠 능력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가르치니 그로부터 배운 자들이 바르게 배울 턱이 없다는 말이다. 결국 무지의 연쇄반응만 순환적으로 일어나 진리로부터 지속적으로 멀어지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일개의 도덕적 가르침도 이러하다면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떨까? 예수님께서는 마 15:14에 말씀하셨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맹인은 맹인을 인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타인을 인도하고 싶어도 맹인은 타인을 인도해서는 안 된다. 자신 조차도 인도할 수 없는 자가 어찌 타인을 인도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둘 다 낭패를 당하게 될 것이다.

최근에 한 신학교 교수와 목사가 쓴 책을 읽었다. 맹인이 쓴 글이었다. 신학교 교수는 원어도 제대로 분석 못했고, 고대 근동 문화나 그레코-로만 문화도 어설프게 알면서 결정불가능성을 정언명제처럼 말했다. 교수라는 간판 뒤에 숨어 맹인들을 우롱하는 격이었다. 목사의 책은 더 심했다. 신학적 기본 틀도 없었고, 성경으로 검증할 수 없는 간증들이 진리처럼 소개되면서 감성 팔이 역할만 했다. 그러면서 제목은 거창했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에서부터 무지의 연쇄반응이 시작됐다. 주변의 맹인들은 그 책을 보고 환호했고, 책을 읽은 후에는 그 책의 내용이 정말 그러한가 하여 성경과 대조하며 상고하지는 않고 타인들을 가르치기에 바빴다.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맹인의 책을 구입하여 그들에게 책을 소개한 자들과 같은 일을 반복했다. 이를 본 글을 쓴 맹인은 자신의 시력이 타인보다 월등히 좋다고 착각하여 또 다른 글을 썼고, 맹인들은 그 글을 보고 자신의 눈이 예전보다 밝아졌다고 굳게 믿으며 더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은 시력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며 더 깊은 블랙홀에 빠져들고 있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런 일을 예견했던 것일까? 그는 야고보서 3:1을 통하여 이런 말을 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더 큰 심판”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표현(μειζον κριμα)은 비교급으로써 두 개의 가능한 의미를 제시한다. 첫 째는 타인보다 더 높은 기준으로 심판을 받게 되거나, 둘 째는 타인보다 심판 때 받을 처벌이 더 강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남을 인도하는 자리는 인도하는 자를 위한 자리가 아니요 인도를 받는 자를 위한 자리인고로 그만큼 책임감이 막중하기 때문이다. 야고보 사도는 주객이 전도된 자세로 선생이 되려는 맹인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내렸던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리는 존귀한 자리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영혼들을 다루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도 알지 못한채 선생 질을 하는 것은 선생의 본유적 자세를 모르기 때문이리라.

선생들이여, 명심하자. 소중한 시간과 피같은 물질을 투자하며 당신들의 책을 사 읽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정도로 사랑하는 영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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