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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2014 / Sanghwan A. Lee

인격적 관계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아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부모의 품을 일탈하는 것이다.

한 심리학자의 말이다. 정말 그런것 같다. 이동능력이 없기에 부모의 품속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아이에게 기어다닐 수 있는 힘이 생기면서부터 나타나는 현상은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이다. “품안의 자식”이라고 했던가? 그 아이가 품밖의 자식이 되는 순간인게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언이가 기어다니기 시작한다. 그 심리학자의 말대로 아들이 했던 첫 번째 일은 내 품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다. 이동능력이 생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대견하기도 했지만 나로부터 가시적으로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켠으로는 서운했다. 그러나 이러한 서운함은 반전이 되어 나를 찾아왔다.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기쁨과 즐거움을 아래와 같이 동반하며 말이다.

도서관에서 과제와 싸운 후 지친 심신을 이끌고 집에 들어오면 멀리서 놀고 있던 아들과 눈이 마주친다. 나를 본 언이는 너무 좋아 어쩔줄 몰라하다가 결국 나를 향해 몸을 돌리고 엉금엉금 기어오기 시작한다. 아이를 길러본 부모들은 다 알겠지만 그 장면은 눈물없이 볼 수 없다. 나로부터 더 일탈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아이가 그 능력을 내게로 오는데 사용하다니… 그 시간 만큼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멈춘다. 내가 갖고 있던 모든 근심, 걱정, 피로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사랑하는 아들과 아빠와의 로맨스가 시작된다. 아… 그렇구나.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아이에게 생기는 이동능력이란 (1) 부모로부터의 일탈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기도 한 반면 (2) 부모에게 스스로 올 수 있도록 하는 인격적 수단도 됨을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한된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이에게 이동능력이 없을 때에는 내가 아들에게 감으로 기쁨을 얻었다. 그러나 이동능력이 생긴 아이가 스스로 내게 왔을 때에는 전에 느꼈던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에덴 동산 한 복판에 심겨졌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아담아, 나는 너와의 기계적 교제를 원하지 않는단다. 나는 너에게로 가고, 너는 나에게로 오는 인격적 교제를 원한단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잎으로 맺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스스로 찾아갈 수 있는 인격적인 교제라… 그것은 일방적인 기계적 교제와는 결단코 비교할 수 없는 각별하고 특별하며 풍성한 교제이리라.

어제도 집에 들어오는 나를 본 언이는 너무 좋아하다가 역시 엉금엉금 기어 내게로 왔다. 내 무릎에 기대어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뭐라고 쫑알대더니 저렇게 활짝 웃는다.

Ryan

내가 갖고 있던 모든 피로가 한 방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나는 아들을 두 팔로 번쩍들어 안고 그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늪지대가 나타나면은 악어떼가 나온다, 악어떼!” 아빠와 아들의 웃음 꽃이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혹시 이것이 스바냐가 말한 하나님의 마음이 아닐까?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 3:17)

그래,
나 역시도
나를 바라보시고 웃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에
더 큰 웃음을 드리기 위하여 그 분께로의 한 걸음을 성큼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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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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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m0hun / 10월 29 2014 11:05 오후

    아드님이 참 귀엽네요.^^ 저도 아이들을 참 좋아해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세 아이의 아빱니다. 목사님의 글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제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느꼈던 몇 가지 생각들을 나눠볼까 합니다. 첫 애가 3살이 될 때까지 저희 부부는 거의 애를 키우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던 시간도 있었고, 그 와중에 힘들게 공부할 수 있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아이를 통해 같은 또래의 다른 믿음의 가정들과 성장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내 아이만이 아닌 다른 아이들 또한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소중한 지도 배우게 됐습니다.
    둘째가 생기고 나서 그 아이가 말귀를 알아들을 때가 되자, 문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부르시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주신 일들을 아이들의 모습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첫째의 순종적인 모습,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보다는 부모와 함께 하기를 원하는 모습, 때로 동생들에게 잘못함으로 인해서 벌을 더 받는 모습 등등을 통해 먼저 사랑받고 성장했기 때문에 지불해야 한는 댓가가 있었습니다. 반대로 둘째는 형보다는 자유분방하고 가끔은 부모가 설정한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형을 괴롭히기도 해서 자주 혼나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훈육이라는 면에서 때로는 다른 기준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게 아닌가 고민해 보지만, 형은 동생이 없었을 때의 사정이 있고, 동생은 형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사정이란 게 있었습니다. 부모는 그 모든 사정을 염두에 판단을 내리고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더군요. 물론 부모의 인간적인 약함으로 인한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있기에 과하다 싶으면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번 하게 됐습니다. 그 때마다 아이들로부터 듣는 “미안해요” 소리는 참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내 안에 계신 나를 지으신 주님도 동일한 역사를 우리 가운데 이루시는 것을 봅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의 판단을 신뢰하고 혼나고 기뻐하고 사랑하는 그 관계가 참 평안을 줍니다. 언제고 우리 아이들이 진정한 아버지인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가는 모습을 볼 때 인간적인 육신의 아버지의 제 짐과 수고도 많이 덜어지겠지요?
    앞에 쓰신 비트켄슈타인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글들을 다시 찾아보고 영화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겨우 씨를 뿌린 단계라 언제 답글을 달 수 있을 지 알 수 없지만, 아이에 대한 글을 읽고 나니 이 글에는 답글을 달 수 있겠더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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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Sanghwan A. Lee / 10월 30 2014 8:57 오후

    감사합니다. 마음으로 쓰신 글에 제 마음이 따뜻해 집니다. 주신 조언들 마음에 고이 간직하고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저희도 둘 째를 위해서 기도중인데 위에 쓰신 글을 통하여 많은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제가 정의한 비트겐슈타인의 침묵은 제 글 속에서 의미의 값을 찾으셔야지 혼동이 되지 않으실 듯 합니다. 몇분들께서 제가 제한한 의미의 값을 벗어나셔서 읽으셨기 때문에 혼선이 빚어졌답니다.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샬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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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Leah / 6월 23 2018 12:11 오전

    첫째 아이가 지고 있는 짐의원리로 저희 또한 몫이 있음을
    표현된 글을 읽게되어 기뻤어요.
    좋은아빠 가 있음으로 잘 자라날 아이가 있어서 그아이는 100을 갖겠지만 0 인 아이도 평균점이50은 되리라 생각하며…하나님께 아픔을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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