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s
Skip to content
10/26/2014 / Sanghwan A. Lee

예수님의 신성(神聖)에 관하여 (12): 헤라클레스와 그리스도

한 때 독일의 자유신학자들은 예수님과 헬라의 신들 사이에 있는 유사점을 조사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강등시키려 했다. 이 연구의 목적은 예수님의 신성은 Incarnation (신이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Deification (인간이 신격화 된 것)임을 논증하려 함이다. 이 연구를 감행한 자유주의 사조의 대표적 신학자는 Friedrich Pfister로써 헤라클레스와 예수님 사이에 있는 (1) 탄생: 헤라클레스와 그리스도는 신에 의해 탄생되었다, (2) 유년기: 헤라클레스와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고통을 당했다, (3) 죽음: 헤라클레스와 그리스도는 폭력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4) 유언: 헤라클레스와 그리스도는 죽기전에 “다 이루었다”고 말했다, (5) 음부하강: 헤라클레스와 그리스도는 음부에 하강했다가 올라왔다, (6) 승천: 헤라클레스와 그리스도는 승천했다, 그리고 (7) 호칭: 헤라클레스와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긴자”라는 호칭을 받았다는 등의 유사성을 그의 책 “Herakles und Christus”을 통하여 논증한다. 그러나 Pfister가 범한 치명적 오류가 몇개 있다. 구성의 오류, 용어사용의 오류, 의존의 오류, 연대기적 오류, 의도론의 오류와 인과관계의 오류이다. 앞에 있는 다섯 개의 오류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이 잘 다루었으니 생략하기로 하고 마지막에 있는 인과관계의 오류만 다뤄보자.

인과관계의 오류란 특정한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거나 단순한 선후 관계를 인과 관계로 혼동함으로써 발생하는 오류이다. Pfister가 범한 오류는 이러한 인과관계의 오류에서 조금 변형된 것으로써 전체적 사건을 다 조명하지 않은 데에서 나타난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B라는 사건이 있다고 치자. 역사가들은 B를 조사할 때 B 이전에 일어났던 일들인 A만 조사해서는 안된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인 C 까지도 조사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B에 대한 더 정확한 역사적 해석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A – B – C 라는 역사의 흐름을 다 조사하지 않고서는 B에 대한 역사성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는 말이다. 특히 종교를 논할 때에는 더 그렇다.

이러한 역사적 연구 방법으로 Pfister의 연구를 검증해보면 역사의 순차성에 따라 A를 헤라클레스 신화, B를 그리스도 사건으로 놓고 대조한 후 자신의 thesis인 Deification을 주장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주장은 A와 B와의 연계성만을 근거하여 만들어졌다는데 있다. C는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서 그의 치명적인 헛점이 나타난다. Pfister가 침묵한 C는 순교자들의 역사성이다. 자신의 목숨을 송두리채 바치며 그리스도를 따랐던 자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는 기독교 역사 뿐 아니라 세속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성은 예수님께서 헤라클레스와 같은 신화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변증하는데 탁월하게 사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Pfister는 침묵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헤라클레스를 위해서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던 자들이 있었던가? 헤라클레스를 위해 사자밥이 되고, 교수형을 당하며, 능지처참을 당하며 죽은 자들이 있었던가? 헤라클레스를 위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고, 화형을 당하며, 사지가 찢겨 죽은 자들이 있었던가? 없다. 단 한 명도 없다. 이것은 그 당시 헤라클레스를 알았던 자들은 그를 신화속의 인물로만 여겼다는 것을 변증하는 타당한 논리적 자료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자들은 사뭇 달랐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히 11:33-37)

이럴수가…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이 되게 하였던가? 그리스도 사건이 신화적 자료에 기인한 Deifica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Incarnation이라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 들였기 때문이리라. 그렇다. 이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사건은 일개의 신화가 아니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하기에 목숨을 버리면서까지도 반드시 따를 수 밖에 없었던 자명한 사실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미친 네로도 이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사도 요한을 유배보낸 도미티아누스도 이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교회를 불구자들로 가득차게 했던 데시우스도, 기독교인들의 씨를 말린다는 의미로 연좌제(連坐制)를 시행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도 이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들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서 역사하는 실체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기독교를 논하기 위해서라면 역사의 흐름을 일괄되게 고려해야 한다. A (헤라클레스 신화) – B (그리스도 사건)만 보고 B (그리스도 사건)를 판단(Deification)해선 안된다. 혹은 B (그리스도 사건) – C (순교자들의 등장) 만 보고 B를 판단(Incarnation)해서도 안된다. 반드시 A (헤라클레스 신화) – B (그리스도 사건) – C (순교자들의 등장)를 다 보고 판단(Either Deificatino or Incarnation)해야만 한다. 나는 이런 이유로인해 A – B만 보고 기독교를 Deficiation에 근거한 종교라고 비하하는 반증가들을 존경하지 않는다. 게다가 B – C 만 보고 기독교를 Incarnation에 근거한 종교라 칭송하는 변증가들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A – B – C의 흐름 속에서 조명해 볼 때에도 결코 흔들릴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알파와 오메가시요, 처음과 마지막이시며, 시작과 마침이신 그분은 더이상 내게 있어서 책 속에만 계신 인물이 아니시다. 물론 나는 그분을 책을 통하여 만났지만 지금 내가 사랑하고 예배하는 예수님은 책 밖의 역사 속에서도 살아 숨쉬고 계신 영원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심장 소리가 들리고, 끊임없이 흐르는 그분의 핏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오늘도 나를 살게 하시는 그분의 힘이 느껴진다. 나와 같은 이유로 요한 크리소스톰은 외쳤던 것이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ουκ ανθρώπων αποθεωθεντα (신이된 인간이 아니)”라 “εν ομοιωματι ανθρωpων (인간이 된 신)”이라고 말이다. 이 고백이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내 삶 속에 시퍼렇게 살아 숨쉬고 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Advertisements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w

%s에 연결하는 중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