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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2014 / Sanghwan A. Lee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말할 수 없었던 것

문제 제기: 내가 언어 철학자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처음 만난 것은 약 10년 전 가을, 그의 “논리-철학 논고”를 통해서였다. 2×2=4라는 명제를

(Ων)µ’x = Ων×µ’x Def.
2×2′x = (Ω2)2′x = (Ω2)1+1′x = Ω2′2′x = Ω1+1′1+1′x
= (Ω’Ω)’ (Ω’Ω)’x = Ω’Ω’Ω’Ω’x = Ω1+1+1+1′x = Ω4′x.

라는 공식으로 증명한 그는 내가 팝콘을 먹으면서 대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그와 대화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켜 고립시킨 후 그의 논고와 씨름을 해야만 했다. 나에게 있어서 그는 골리앗과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는 보이기 시작한다. 그 중에 하나가 그의 정직성이다. 예전에는 그의 지식에만 매료됐던 내가 이제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 그의 정직성에 매료된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본글을 통하여 나누고 싶은 부분이다. 우선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를 간단하게 설명한 후 그가 고백한 한계에 대해서 나눠본다.

“논리-철학 논고” 분석: 칭찬에 인색했던 버트란트 러셀로부터 유일무이하게 극찬을 받았던 언어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켄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를 통하여 형이상학적인 부분과 물리적인 부분을 절제된 철학적 사유의 틀 속에서 잘 다듬어진 언어학적 논리로 풀어 나간다. 그가 이 논고를 통하여 다루는 부분은 크게 언어적 사유, 수학적 사유, 물리적 사유, 윤리적 사유, 그리고 종교적 사유이다. (이것은 내가 거시적으로 나눈 분류일 뿐이다. 다른 분류를 보기 원한다면 러셀, 글록, 혹은 랑게의 것을 참고하라.) 내가 본글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부분을 다루기 위해 언어적 사유에서부터 윤리적 사유까지 연계되는 흐름을 먼저 엿본 후 종교적 사유로 넘어간다.

A. 언어적 사유

2.012 논리에서는 아무것도 우연적이지 않다: 사물이 사태 속에 나타날 수 있다면, 그 사태의 가능성은 사물 속에 이미 선결되어 있어야 한다.

2.0121 만일 그 자체로 홀로 존립할 수 있을 터인 사물에 어떤 상황이 나중에 가서 걸맞게 된다면, 그것은 말하자면 우연으로 보일 것이다. 사물들이 사태들 속에 나타날 수 있다면, 이 점은 이미 그 사물들 속에 놓여 있어야 한다. 논리적인 어떤 것은 단지 가능한 것일 수 없다. 논리는 모든 가능성을 다루며, 모든 가능성들은 논리의 사실들이다. 우리가 공간적 대상들을 결코 공간 바깥에서, 시간적 대상들을 시간 바깥에서 생각할 수 없듯이, 우리는 어떠한 대상도 그것과 다른 대상들과의 결합 가능성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내가 대상을 사태라는 연합 속에서 생각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이러한 연합을 가능성 바깥에서 생각할 수 없다.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적 사유에 존재가 가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존재는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써 결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B. 수학적 사유

3.332 어떤 명제도 자기 자신에 관해 무엇인가를 진술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명제 기호는 자기 자신 속에 포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형 이론”의 전부이다.

3.333 함수는 그 자신의 독립 변수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함수 기호는 이미 그것의 독립 변수의 원형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 그것은 자기 자신을 포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함수F(fx)가 자기 자신의 독립 변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F(F(fx))”라는 명제가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 명제에서 외부 함수 F와 내부 함수 F는 상이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 내부 함수는 φ(fx)의 형식을 지니고, 외부 함수는 ψ(φ(fx))의 형식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 두 함수에는 단지 “F”라는 문자만이 공통적인데, 그러나 그 문자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F(F(u))”대신에e “(∃φ):F(φu).φu = Fu”라고 쓴다면 곧 분명해진다.

역시 그의 수학적 사유에도 존재가 다뤄진다. 어찌 보면 언어적 사유에서 어느 정도 밝히려 했던 존재성을 수학적 사유라는 다른 관점으로 더 구체적으로 정의하려는 듯 하다. 함수에 빚대에 설명된 “어떤 명제도 자기 자신에 관해 무엇인가를 진술할 수 없다”는 표현은 존재의 자기 설명 불가능성에 대해서 말함을 나타낸다.

C. 물리적 사유

6.3611 우리는 어떠한 과정도 “시간의 흐름”과 비교할 수 없고, 단지 다른 하나의 과정과 비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시간적 경과에 대한 기술은 다른 하나의 과정에 의지해서만 가능하다. 전적으로 유사한 점이 공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예컨대 상호 배제하는 두 사건 중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발생해야 할 아무 원인도 없기 때문에 그 두 사건 중 어느 것도 발생할 수 없다고 사람들이 말할 경우, 거기서 실제로 중요한 것은, 그 어떤 비대칭이 현존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그 두 사건 중 하나를 전혀 기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러한 비대칭이 현존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한 사건의 발생 및 다른 사건의 비발생에 대한 원인으로서 파악할 수 있다.

6.36111 서로 겹치게 만들 수 없는 왼손과 오른손에 관한 칸트의 문제는 평면에서도 이미 존립하며, 심지어 일차원 공간에서도 존립한다:

– – – o —–—– x – – x —–—– o – – –

 a                    b

여기서  합동하는 두 도형 a 와 b는 이 공간을 빠져 나오지 않고서는 서로 겹치게 만들어질 수 없다. 왼손과 오른손은 사실상 완전히 합동이다. 그리고 그 두 손을 서로 겹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은 그 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만일 오른손 장갑이 4차원 공간에서 회전될 수 있다면, 우리들은 그 장갑을 왼손에 낄 수 있을 것이다.

비트켄슈타인은 존재가 존재할 수 있는 시공간을 물리적 사유를 통하여 다루며 A와 B를 통하여 사유했던 존재성을 더 깊이 다루려는 것처럼 보인다.

A, B, & C로 연계되는 사유: 잠시 A와 B와 C로 나열된 순차적 사유들을 보자. 물리적인 것에서 형이상학 적인 것으로 옮겨지는 것이 보인다. 나는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사유의 흐름이 의미 없이 진행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정직하려고 애쓴 그는 일반계시가 흐르는 논리적 흐름을 역행하기 위해 사유의 노를 저은 것이 아니라, 논리적 흐름을 바람 삼아 사유의 돛을 펼쳤던 것이다. 보라. 언어적 사유에서 수학적 사유로 넘어가는 비트겐슈타인의 첫 번째 이동은 기호 논리학를 통하여 연결이 된다. 수학적 사유로부터 물리적 사유로 넘어간 두 번째 이동도 물리학이 수학을 분모를 구성하는 필수적 한 요소로 여기고 있음을 통하여 생각의 논리적 진화로 볼 수 있다. 물리적 사유로부터 윤리적 사유로 넘어간 이동도 물리의 끝에는 형이상학적 문이 있다는 플라토닉적 사유에 의해 설명된다. 이처럼 비트켄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는 눈에 보이는 사물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생각의 흐름을 연계시킬 수밖에 없는 일반계시의 흐름을 명시하고 있는 존재적 논고인 것이다. 결국 탁월한 지성으로 기독교가 말하는 일반 계시의 종착역에 도달한 그는 역시 논리적 사고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종교적 사유를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그의 종교적 사유는 다른 사유들에 비해 지나치게, 정말 너무 지나치게 단순하다 것이다. 겨우 두 장의 지면만 할애하여 다루는 종교적 사유는 읽는 자들의 기대에 큰 실망을 주기까지 한다. 그 두 장에는 인간의 영혼과 영원의 관점, 신과 계시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 있다.

D. 종교적 사유

6.4312 인간 영혼의 시간적 불멸성, 즉 죽음 이후에도 인간 영혼이 영원한 삶을 계속한다는 가정은 어떤 방식으로도 보증되어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 가정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늘 그런 가정으로 달성하고자 한 것을 전혀 성취하지 못한다. 내가 영원히 산다는 것에 의해 도대체 수수께끼가 풀리는가? 도대체 이 영원한 삶이란 현재의 삶과 똑같이 수수께끼 같지 않은가?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은 공간과 시간 밖에 놓여 있다.

6.52 비록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되어 있다 해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고 느낀다. 물론 그렇다면 과연 아무런 물음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대답이다.

6.522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보다시피 신기하게도 또한 이상하게도 종교적 사유에서 대해서 만큼은 지나치게 말을 절제하는 비트겐슈타인을 볼 수 있다. 그 이유가 뭘까? 그가 논리적이기를 포기한 것일까? 생각의 흐름을 그냥 끊어버린 것일까? 아니다. 그는 명확하게 논리적이고 생각이 바르게 흘렀기 때문에 말을 절제한 것이다. 종교란 논리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그가 다음과 같은 단일 문장으로 그의 논고를 마무리한다는 것이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솔직했던 언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논리를 통하여 종교를 말할 수 없음을 인지했던 것이다.

일반 계시의 한계: 비트겐슈타인 연구가들은 그의 정체성에 대해 각각 다른 답을 제안한다. 혹자는 그가 유신론자였다 말하고, 혹자는 무신론자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혹자는 불가지론자였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이 글에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논리 철학적 사유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문장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한 시대를 보내며 역사의 획을 그었던 천재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류하여 말할 수 있는 것 만 말해야 함을 분석 철학적으로 제시했던 정직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특별 계시의 필요성: “논리-철학 논고”를 덮는 내 손길은 다른 책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게 가장 소중한 책, 성경. 하나님의 계시의 책, 성경.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이라 규정했던 것들의 답이 들어있는 책, 성경.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성경은 인생들이 먼 옛날 부터 찾고 찾았던 그 답들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누구이시고, 인간 영혼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며, 또한 영원이란 무엇인지가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물었다. “세상은 우연히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디로부터 왔는가?” 그가 찾을 수 없던 답을 성경은 답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바로 여기가 모든 피조된 존재들의 시작점이 아니던가? 비트겐슈타인은 또 물었다.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성경은 이 질문에도 답한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격적 관계를 맺기 위하여 당신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라고.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목적이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어떤 명제도 자기 자신에 관해 무엇인가를 진술할 수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논증처럼 인간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발견된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던 시공간 밖의 답은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주인이사 일곱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그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가 찾던 답이었다. 그렇다.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시공간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굽이쳐 흐른다. 그 분께서 시공간의 창조자이심과 동시에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소중한 특별 계시를 소중하게: 글을 정리 하며 다음의 생각들을 반추해 본다. 논리의 끝은 물음표지만 계시의 시작은 느낌표라는 것. 그리고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주는 계시는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말씀인 성경이라는 것. 그러므로 성경을 소중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연할 일이여만 한다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성경을 존대하는 것일까? 그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가장 기본적인 방법 몇을 말하자면 (1) 성경에 확실히 계시된 부분만 선포하는 것, (2) 확실하게 계시되지 않은 부분은 계시적 논리로 풀되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둬야 할 것, 마지막으로 (3) 계시적 논리로도 풀 수 없는 부분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분류하여 “침묵”해야만 할 것.

맺으며: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신학적 소양이 없는 목사나 신학교 교수들이 성경에 위배되는 말들을 서슴없이 남발하며 정치몰이나 유명세를 조장하는 시대이다. 영적으로 뒤틀리고 왜곡된 이 시대,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생각이 모든 목사와 신학자들의 마음 속에 경종으로 울려 퍼지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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