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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2014 / Sanghwan A. Lee

장자(莊子)의 나비

장자의 꿈: 어느 날 장자는 나비가 되어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꾼다. 나비는 이곳 저곳을 다니며 자연을 만끽했고, 원하는 곳을 다니며 삶의 무게를 잊어버린다. 얼마를 날았을까? 나비는 잠시 나뭇가지에 앉아 쉼을 청하다가 깊은 잠에 빠지다가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그 꿈을 통하여 장자는 현실의 세계로 깨어난다. 그제야 비로서 자신이 나비가 아님을 인지한 장자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장자가 되는 꿈을 꾸는 나비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약간 기괴하게 들릴지 모르는 장자의 질문은 많은 해석의 문을 열어 놓는다. “물아일체”와 연결될 때에는 ‘너와 내가 다 하나이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일장춘몽”과 연결될 때에는 ‘인생은 덧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을 만날 때는 변증법적 분열로 해석된다.

라캉의 정신분석: 변증법적 분열이란 실재와 환상 사이의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라캉은 이런 능력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첫 째는 바보이면 안되고, 둘 째는 자고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오직 정상적이고도 깨어있는 사람들 만이 둘의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장자는 어떨까? 그는 “장자와 나비” 혹은 “나비와 장자”의 대칭적 관계 구조를 의식적으로 만들어 냄으로써 실재와 환상을 동일시 하는 바보가 아님을 역설함과 동시에 스스로 깨어있는 존재임을 알렸다. 그래서 라캉은 “결코 바보일 수 없는 깨어있는 사람”이 장자라고 진단한다. 어찌 보면 너무도 단순한 정신분석인 듯 하다. 그러나 라캉의 분석은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와 맞물려 질 때 그 의미가 구체화 된다고 생각된다. (물론 슬라보예 지젝처럼 루이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연결하여 풀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연결함으로써 더 근본적인 사유를 말하고 싶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를 통하여 사유행위 속에 자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재와 환상의 거리는 의심을 통하여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데카르트의 말을 좀더 과장하여 설명하자면 자신을 향한 끝없는 의심의 사유만이 자신을 바보가 아닌 깨어있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깊이 공감한다.

목사와 변증법적 분열: 설교학 시간에 교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있다. “네 자신을 너무 믿지마.” 그러신 후에는 “말씀을 온전히 모르는 실재의 나”와 “말씀을 온전히 아는 환상 속의 나”를 구별해 주셨다. “말씀을 온전히 모르는 나”가 실재의 장자라면 “말씀을 온전히 아는 나”는 꿈 속에서만 등장하는 나비라는 말이다. 그러신 후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주셨다. “설교문을 만들기 전에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을 반드시 살펴라.” 목회를 하면서 교수님의 말씀이 뼈저리게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마가복음 강해를 할 때였다. 다음 주에 설교할 본문이 무척이나 유명한 구절이라서 원문을 보지 않고 들었던 풍월로 설교문을 작성했다. 당연히 평소보다 원고작성이 빨리 끝났던 지라 “성령님께서 도와주셨다”고 고백하며 여유를 만끽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편안하게 지나갔고 토요일 저녁이 돼서야 비로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원문을 살폈다. 아뿔싸… 중간태로 해석돼야 하는 동사를 풍월을 따라 수동태로 해석하여 설교문을 작성했던 것이다. 당연히 주객이 전도되게 작성된 설교문은 휴지통으로 들어갔고 나는 황금과 같은 토요일 저녁을 새로운 원고를 작성하는데 다 쏟아야만 했다. 이 모든 일이 “말씀을 온전히 모르는 실재의 나”와 “말씀을 온전히 아는 환상 속의 나”의 거리를 가늠하기를 잠시 포기한데서 자초된 것이다.

우리의 나비: 이것이 내가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장자에게 나비가 있듯이 나에게도 나비가 있다. 환상 속에만 존재하는 나비는 오늘도 나에게 날아와 내가 곧 그 나비라고 속삭인다. 만약 내가 라캉이 정의하는 바보라면 나비와 내 사이에 있는 거리를 가늠하지 못하고 내가 마치 나비인듯 행동할 것이다. 결국 내가 만들어낼 수 많은 실수들로 인하여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겠지. 나는 내가 이렇게 될까봐 두렵다.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도 나비가 있다는 것을 아는가? 나는 그 나비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안다. 아니 알아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잘 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맺으며: 이런 이유에서일까? 내놓으라는 소피스트들이 가장 많았던 그리스에 위치한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는 “γνῶθι σεαυτόν (네 자신을 알라)”는 격언이 새겨져 있단다. 이 문구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유했던 지방에서 나왔다는 것은 큰 의미를 부여한다. 참된 소피스트가 되는 첫 발걸음은 실재와 환상의 거리를 명확히 인식하는 변증법적 분열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임을 역설하기 위함이 아닐까? 정보의 홍수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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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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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종흔 / 12월 21 2014 10:51 오전

    장자의 나비의 꿈에 대한 님의 해석과 실례를 든 철학자들의 해석 모두 틀렸습니다.
    장자가 실제고 나비는 꿈이고 환상이기에 경계하고 깨어있어라는 결론이 나와야 하는것이 아니라 장자처럼 장자가 나비인지 나비가 장자인지 진
    실로 몰라 심각하게 고민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실재와 환상을
    갈라놓는 예의 상완님의 고질적 실수를 합니다.또한 물아일체인 개념보다는 일체무아 사상에 가깝고 꿈과 실재의 구분이 없는 진리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 의문이지 기독교의 분명한 내가 예수를 믿고 내가 천국가는 나와 세상을 구별짓는 세계관으로는
    항상 같은 실수를 범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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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2월 21 2014 2:12 오후

      종흔님! 오랜만입니다. 이름을 보고 무척이나 반가워 했답니다.

      장자 선생이 살아 돌아와 자신이 말한 의미를 직접 설명하기 전까지는 다른 분들의 해석도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종흔님께서는 불교적 사유로 접근하신 것이고 저는 기독교적 사유로 접근한 것이지요. 게다가 저는 라캉의 분석이 제법 그럴듯 하다고 여겨지던데, 그렇지 않으신가요?

      그건 그렇고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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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종흔 / 12월 21 2014 4:39 오후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지 말라는 보장이없고 이 현실이 꿈이 아니라 장담할 확신이 없는데 그래서 장자가 푸념조로 내뱉은 진정한 물음인데 현실과 꿈을 분리하는 서양 철학자의 해석이 통할수 있겠습니까? 도교와 일맥 상통하는 불교도의 관점에서는 에누리없이 쉽게 와닿는 내용인데 님과 그분들은 그렇치 않고 너무 어렵게 해석한것같아 한말씀 올렸습니다.항상 계시니 왠지 좋고 제 사정상 꾸준히 연락 못합니다.어디까지나 홀가분한 객으로서 들락거리는점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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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2월 21 2014 9:38 오후

      아닙니다. 이렇게 종교가 다르다고 거절하지 않으시고 사랑방 손님처럼 방문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끔씩 생각나서 기도했는데 이렇게 다시 뵙게되어 너무 즐겁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함께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필요할 듯 합니다. 하하…

      제게는 아직도 현실과 꿈을 분리시켜 해석하는 것이 더 이치에 맞다고 생각되는데 종흔님은 어떠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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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종흔 / 12월 23 2014 2:16 오후

    현실과 꿈이 분간되지 않을수있음을 얘기해보겠습니다.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꿈을 꿀때와 깨어있을때 별반 차이없음을 먼저 상기 시켜드리며, 이점에 대해 이해할수없다면 다음에 의식상태는 따로 얘기하도록하고,지금 현재 님이 현실과 꿈의 가장 큰차이를 사물의 유무와 현상의 뚜렷한 존재에서 찾는것이라 여김니다만,그렇다면 현실에서 사물이 없는 상태라면 또한 현상이 신기루라면 더이상 꿈과 현실을 구분한다는게 의미 없어 지겠지요.님의 앞에 사과가 있는데 불이 꺼진다면,만져도 님의 신경이 마비 되어 느끼지 못한다면 그사과는 최소한 님에게는 없는 것이 됩니다.그래도 존재한다며 나의 오류를 지적하겠지만 그렇다면 가장 신빙성있는 과학의 관점으로 보면 사과는 텅빈 원자로 이루어져있습니다.물론 원자도 핵등이 있지만 빈공간이 차지하는 영역에 비하면 무시해도 될수준이죠.결국 빈것이모여 빈것을 만든격입니다.정확하게 불교적으로 말하면 텅빈것도 텅비어있지 않은것도 아닌상태로 묘사하지만 요는 님이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과는 아니라는 거죠.확대하면 온우주가 구렇게 구성되어 있고 우리는 우주의 일점도 제대로 알도있지 않은것이됩니다.또한 현상은 어떻습니까? 지구에 꺼꾸로 걸어 다니는 우리를 상상 할수있었겠습니까?지구도돌고 태양도 돌고 ,더 정확하게 뭐가 바로고 뭐가 꺼꾸로인지도 우리는 아직도 모를 뿐입니다.모든게 인간의 개인적 느낌과 경험에 의지할뿐이지 본질을 못보는 자에게 과연 꿈과 현실의 차이가 그렇게 크겠습니까?현실을 알아야 깨어있다 할수있는데 보시다시피 과학의 힘만 빌어도 오류투성이인데 꿈에서의 오류나 어떻게 딱꼬짚어 분간할수있나요?그래서 우리모두는 꿈보다 더한 꿈을 꾸면서 깨어있다 착각할수도있는것이고 그래서 깨달음을 갈구하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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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2월 24 2014 9:17 오전

      긴 댓글로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까지 저는 꿈을 꿈으로 보고 현실을 현실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게 생각됩니다. 내가 만졌음에도 불구하고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만져진 사물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듯 해서요. 게다가 원자가 무가 차지하는 공간에 비해 아무리 보잘 것 없다 할지라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듯 합니다. 물론 종흔 님의 말씀처럼 제게 서양의 구조주의적 사유의 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흔 님의 글을 통하여 불교가 말하는 공의 개념을 좀 더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좀 더 깊고 넓은 대화 속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는 저와 종흔님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 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꿈을 꿀때와 깨어있을때 별반 차이없음을 먼저 상기 시켜드리며, 이점에 대해 이해할수없다면 다음에 의식상태는 따로 얘기하도록하고 …”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부분도 듣기 원합니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연말이라 바쁘실 텐데 천천히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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