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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2014 / Sanghwan A. Lee

거부되어야 마땅한 백장회해(百丈懷海)적 성경읽기 방식

직지심경(直指心經)에는 해탈을 염원하는 제자들에게 선(禪)의 스승인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준다.

너는 머리를 잃어 버려야 한다. 머리를 갖고 있는한 깨달음이 임할 수 없다. 머리를 잃어버리는 바로 그 때가 너의 수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이다. 그때가 되어야 비로서 진정한 배움이 임하게 될 것이다. (의역)

문맥에 따라 쉽게 표현하면 ‘생각을 버려야 해탈에 입문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백장회해가 의미한 “생각”은 “잡념 (雜念)”이 아니라 생각이다. 불경을 읽어도 생각 없이 읽고, 불법을 들을 때에도 생각 없이 들을때 깨달음이 임한다는 말이다. 불교의 공(空)의 자세는 곧 무념(無念)의 자세로 이어지나보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르침은 이와 정반대다.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로 깨달음이 임할 수 없으니 반드시 생각하며 성경을 읽고 들으라는 말이다. 다음의 구절들을 보자.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브리서 8:10)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히 10:16) [1]

두 구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생각에 두어지고(δίδωμι) 기록되는 것(ἐπιγράφω)이다. 하나님을 주어로 “둔다”고 번역된 헬라어(δίδωμι)는 인간의 입장에서 “받는다”는 의미가 되고, 역시 하나님을 주어로 “기록한다”고 번역된 헬라어(ἐπιγράφω)는 인간의 입장에서 “새겨지다”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각으로 받고 생각에 새겨지는 것이란 말이다. 그렇다. 성경은 생각과 분리되어 읽혀질 수 없다. 생각과 분리되어 들려질 수도 없다. 반드시 생각을 거쳐 이해되고 깨달아져야만하며 그 때야 비로서 참된 의미가 전달되는 것이다 (General Hermeneutics). 이러한 태도는 무뇌(無腦)의 바다에서 생각 없이 표류하는 돛단배처럼 아무렇게나 읽고 들을 수 있는 불경을 대하는 태도와 판이하게 다르다. 성경은 생각의 노를 단단히 잡고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읽어야만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이 시대의 많은 자들이 불경을 읽듯이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성경을 남용한 자들의 글까지 생각 없이 읽기에 무작정 수용까지 하기도 한다.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행 17:11에 따르면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만 하지 않았다. 그 후에는 그 말씀이 정말 참인가 아닌가를 분별하기 위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 여기에 “상고”라고 번역된 헬라어(ἀνακρίνω)는 ‘신중하게 조사하고 검토하다’는 의미이다. 말씀을 검증하기 위하여 성경을 날마다 면밀하게 탐독했던 자들이 베뢰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유명한 목사가 쓴 글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이려 하는 태도가 없었다. 검증없이 받아들이고,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며, 받아들인 후에는 신중하게 조사하지도 않는 태도도 없었다. 우리가 이러한 베뢰아 사람들 같지 않기때문에 오늘 날의 교회를 만든 것이다.

만약 성경이 몰몬경처럼 초판이 나온 시기부터 최근까지 3,913 군데를 뜯어 고친 책이라면 생각 없이 읽고 생각 없이 인용된 부분을 받아 들이겠다. 
만약 성경이 코란처럼 이슬람 사람조차도 읽을 수 없는 문법투성이의 오류로 가득 찬 책이라면 생각 없이 읽고 생각 없이 인용된 부분을 받아 들이겠다.
만약 성경이 베다처럼 네모난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책이라면 생각 없이 읽고 생각 없이 인용된 부분을 받아 들이겠다.
만약 성경이 불경처럼 생각 없이 읽어야 깨달아지는 기괴한 책이라면 생각 없이 읽고 생각 없이 인용된 부분을 받아 들이겠다.

그러나 성경은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사람의 생과 사를 분류하고 검증하는 유일한 책이지 않던가? 게다가 참된 하나님을 계시하는 유일한 책이지도 않던가?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 귀한 말씀을 존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생각의 줄을 놓지 않고 성경을 읽고, 냉철한 생각으로 남으로부터 전달받은 말씀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기본적인 자세도 없이 성경을 대하는 것은 말씀을 말씀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리라. 설교자와 청중이 이런 자세로 말씀을 대할때 설교자들은 더욱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준비할 것이고, 성도들은 더 바르고 정확한 말씀을 지속적으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인 나부터 이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그리고 청중인 여러분들도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설교자는 설교자의 자리에서, 청중은 청중의 자리에서 말씀을 존귀하게 여길 때에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해 질 것이다.

한국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만홀히 여기지 않는 설교자와 청중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1] 두 구절은 새 언약 때에 이루어질 일에 대한 예언이다. 언약주의자들은 벌써 일어나고 있고, 진보적 세대주의자들에게는 부분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전통적 세대주의자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제 위의 예언이 일어나는가가 아니다. 말씀이 생각에 두어지고 기록되는 것은 구약과 신약의 Continuity와 Discontinuity와 상관없이 보여지는 불변적 패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구절을 통하여 생각과 말씀의 상관관계를 논하는 것은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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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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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익명 / 10월 1 2014 9:23 오후

    이메일에서 저를 제해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부족해서 직지심경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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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0월 2 2014 5:21 오전

      글을 잘못 읽으신 것 같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부족하지 않기 때문에 직지심경에 있는 백장회해가 의도하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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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강훈 / 10월 4 2014 10:39 오후

    그러게요. 목사님의 글의 의도를 잘 보셔야 겠네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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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이용주 / 10월 22 2014 4:11 오전

    목사님의 글을 흥미있게 그리고 자세히 읽고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위 글 마지막 각주 “[1]두 구절은 새 언약 때에 이루어질 일에 대한 예언이다. 언약주의자들은 벌써 일어나고 있고, 진보적 세대주의자들에게는 부분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전통적 세대주의자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제 위의 예언이 일어나는가가 아니다. 말씀이 생각에 두어지고 기록되는 것은 구약과 신약의 Continuity와 Discontinuity와 상관없이 보여지는 불변적 패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구절을 통하여 생각과 말씀의 상관관계를 논하는 것은 타당하다.” 에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과 비연속성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옛언약과 새언약에 대한 부분을 목사님께서 이해하시는 관점에서 설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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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0월 22 2014 8:04 오전

      안녕하세요. 부족한 글들을 애독해 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쉬운점은 위에 물어보신 질문은 간단하게 설명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답니다. Continuity와 Discontinuity를 다루기 위해서는 (1) 성서해석의 틀 (i.g., sensus plenior, progressive of revelation, etc.)을 먼저 확립한 다음, (2) 단어의 쓰임새 (i.g., 언약, 성취, etc.)를 먼저 정의해야 합니다. (3) 그 후에는 아브라함의 언약, 다윗의 언약, 새언약등을 (2)에서 정의된 단어로 조명하며 언약들의 성취가 (a) “already,” (b) “already-not yet,” 혹은 (c) “not yet”인지 판단해야 한답니다. 이러한 이유로 언약신학자들과 세대주의신학자들의 끊임없는 불협화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짧은 글로 답을 드렸다가는 오히려 더 도움이 안될 수도 있답니다.

      그러나 몇몇의 신학자들이 서로의 주장을 피력하며 논증하고 있는 책들이 출판되고 있습니다. 우선 책 한권을 소개해 드릴께요. (아래의 링크에 있습니다.) 그 후에는 또 다른 책을 소개해 드릴께요. 물어보신 질문에 흡족하실만한 답을 줄수 있을겝니다.

      감사합니다!

      링크: http://www.amazon.com/Continuity-Discontinuity-Essays-Honor-Johnson/dp/0891074686/ref=sr_1_1?s=books&ie=UTF8&qid=1413986201&sr=1-1&keywords=continuity+and+discontinu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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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이용주 / 10월 28 2014 8:02 오전

    감사합니다~
    근데, 영어원서군요 T_T;
    가야할 길이 멀게 느껴지지만 영어공부에 대한 자극도 됩니다^^

    성서해석을 위한 체계적인 접근이
    당장은 힘들게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덜 고생하는 것이라 생각되기에 기억해 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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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종흔 / 1월 3 2015 1:06 오후

    백장회해를 욕하시네요!참네, 또한마디 해야겠습니다.너무 언어를 편하게 해석하십니다.같은 단어라도 듣는자의 수준이나 상황에따라 다른의미로 해석되는줄 모릅니까? 긴설명도 필요없이 이구절은 너무 쉬워 단도 직입으로 얘기하겠습니다.예수님이 누구든지 자기를 죽이고 십자가를 지지않으면 아버지께 갈자가 없다 했나요? 여튼 이와 비슷한말씀을하셨죠?똑같지않나요? 자기를 죽이라는 뜻이 뭐라 생각하세요? 육신에 칼을 꽂으라는 말은 아닌란건아시죠?그럼 당연히 생각을 죽이라는것인데 어떻게 똑같은 의미를 이렇게 크게 오해를 하시나요?그리고 생각으로 정녕 님이 찿는 구원에 오를수있다 생각나요?물어볼께요?상환님은 상환님의 고뇌와 노력으로 예수님을 영접했다하나요? 예수님이 상환님을 택했다하나요? 설교할때는 택함을 받았다 얘기할것인데 어찌 개인 생각으로 신을 받아들였다 하나요? 생각은 도구에 불과합니다.불경에 뗏목에대한 비유가있지요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놓아주어 야지 고맙다고 머리에 이고 다니면 어떡합니까?상환님의 생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기독교의 표현을 빌어도 영을받아 고귀한 인간이되었다가 생각으로 말미암아 죄를범했고 예수가 대속해서 죄를 씼었으면 두번다시 생각을 말고 영으로 살려 해야지 어찌 얄팍한 생각으로 또다시 죄를 지으려하나요?너무 오버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백장같은 대선사의 참뜻을 너무 모르는것같아 또한말씀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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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Sanghwan A. Lee / 1월 4 2015 7:50 오전

    긴 글로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에서 꾸지람 보다는 나눔의 자세가 느껴지네요. 감사합니다. 잠시 제 생각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 째, 저는 모든 불경을 다 생각 없이 읽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랍니다. 생각 없이 읽어야 할 부분도 있고 생각하며 읽어야 할 부분도 있지요. 참고로 저는 불경을 읽으며 많은 도움을 받곤 한답니다. 단지 종교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뿐이지요. 제가 직지심경을 읽으면서 이 책은 결코 쉬운 책은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중 금강경을 깨닫기 바라는 황제와 부대사, 그리고 지공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지요. 결국 도가도 비상도의 관점으로 불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 거의 모든 불경을 읽을 때 갖춰야 하는 자세라고 판단했답니다. 사실 금강경을 바라보는 선사들의 공통적인 관점은 아무것도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벼락과 섬광처럼 임하는 깨달음이 와야 이해할 수 있다고 보지요. 제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이것이었답니다. 기독교의 성경은 그런 자세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많은 자들이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기 때문에 21세기의 기독교가 추해졌습니다. 유명한 목사들이 여색과 세상의 부귀영화를 탐해 생각 없이 성경을 읽고 생각 없이 성경을 해석하지요. ‘어차피 이해할 수 없는 거 내 생각으로 한 번 이해해 보자’라는 식이지요. 제가 블로그 앞 자리에 썼던 글을 발췌해 보겠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려했던 성경은 벧후 1:20과 3:16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거짓 선지자들이 성경을 사사롭고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사사롭게 풀다”고 번역된 헬라어는 ‘자기 생각대로 해석하다’는 의미이고, “억지로 풀다”고 번역된 헬라어는 ‘왜곡하여 해석하다,’ ‘뒤틀어 해석하다’는 의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풀지 않고 자기 멋대로 말씀을 비틀어 해석하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들만 멸망하는게 아니라 이들의 해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까지도 멸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고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 글이 써진 것이지요.

    둘 째, 로마의 역사에 따르면 예수님 시대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들은 약 30,000 정도였습니다. 문서로 기록된 자들의 수만 30,000이었으니 더 많은 자들이 죽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죄인들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모습을 하루에도 수 없이 많이 봤다는 뜻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오늘 날의 우리가 생각하는 피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보고 두려워하는 실체적인 것이었지요.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네 십자가 지고…” 제자들은 언제나 죽을 준비를 하고 따라오라는 말로 들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도 마찬가지지요. 이 말은 문자적으로 옛 자가 죽고 새로운 자아기 없이는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다는 문자적 의미로 해석됨이 마땅합니다. 구원의 시작인 중생도 이런 해석을 지지하지요. 그러므로 이 부분도 단지 “생각”을 죽이라는 것으로 볼 수 없답니다.

    셋 째,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저는 신앙이 가장 큰 선물이라면 의심은 그 다음을 큰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신앙이라고 다 참된 신앙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물론 저는 예수님께서 저를 택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정말 제가 택함을 받았는지는 의심합니다. 삶에서 보여지는 열매가 없다면 택함을 받은게 아니니까요. 그러므로 저는 예수님께서 저를 택하셨다는 믿음으로 제 자신의 의심하며 검증한답니다. 종흔님께서 말씀하신 땟목위에 여전히 올라가 있는 것이지요. 이 땟목은 죽는 그 순간까지 버리지 못할 듯 합니다.

    제가 미처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자의 나비에 대한 답글은 시간을 내어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아직 꿈과 현실에 대한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생각이 정리되면 글을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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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종흔 / 1월 4 2015 1:15 오후

    자아란 무엇인가?각 학파나 교단의 학술적 정의를 넘어 마음을 통찰 극복하는데 중점을 두는 불자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얘기를 풀겠습니다.자아는 나의 육체도 나의 영도 아닙니다.인간이 영과육과혼으로 이루어 져있다할때 육이 내가 아님은 내 팔다리가 짤려도 나는 있고 심장을 남의심장으로 이식해도 나는 있고 머리를 다쳐 다소 맹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다들 당연함으로 알고 있으니 육체가 내가 아니라는것은 분명할것입니다.그러면 영은 어떻습니까?동서양을 막론하고 영혼이라는 단어를 씁니다.영혼이 육체와 대비되는 개념이고 보이지 않는 정신적 요소임은 알수있는데,그러면 영과혼이 하나냐 아니면 나누어지냐인데,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교회다니는 사람은 영을 혼과 분리시킨성경 내용을 무수히접하고 우리조상들 신앙은 물론이고 불교에서도 영과 혼을 분리시킨다는것을 알수있을것입니다.물론 익히 알고 있으시겠지만 자아에대한 보다 명확한이해를 위해 언급하는것이니 양해 바랍니다.그러면 영은 흔히 하나님의 영,영적삶,등 영은 진리의 보편적 요소에 해당한다는것을 알수있을것이고 그러기에 누구나 영적으로 산다면 이세상은 정토가 되는것이고 영적삶은 종교적 이상인것입니다.그러니 영에서는 너와나의 구별이 없고 진리에 속하기에 영은 나의것 다시말하면 나라고 할수없는것이지요.영은 내속에 있지만 하늘에 속했다 할수있지요.여기까지 동의 하신다면 이제 남은게 혼인데 별의심의 의지없이 우리가 나다 라고하는 자의식 즉 자아는 혼을 가르킨다는것을 알수있는것입니다.혼이 나라면 아니 혼이 정녕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의 실체라면 이제 어떡해야합니까?다시 위에서 언급한 구절 영적 거듭남,영적삶이 될려면 자아를 버려야지요.바로 혼을 죽여야 하는것입니다.성경 어느구절에 나의 혼이 성숙해서 영으로 변한다 하던가요? 혼,즉 혼의 실체인 생각은 어떤 고귀함을 품고 빛을 내는듯해도 결국 버려야할 대상이고 그래야만 영적인 삶을 영위할수가 있고 구원을 받을수있는것입니다.왜 선사들이 평생 함께한 불경을 아궁이에 처박고 토굴에 들어앉는지 위 내용을 이해하셨다면 수긍이 될것입니다.자아는 혼은 생각은 처음엔 그럴듯 하나 결국 죄로 돌아서게 마련입니다.그래서 기독교는 복종을 중요시한게 아닙니까.물론 그숭고한 내막을 인간이 이용해서 폐악이 생겨나고 개혁 까지 이를 지경이었지만 말입니다.선사들이 생각이 모잘나 지식이 모잘라서 오로지 무자 화두한가지만 평생을 잡고있다 여기세요? 생각으로 나온 모든 이론은 인간사일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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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월 4 2015 6:49 오후

      이번에 쓰신 글은 대부분이 동의할 수 있겠습니다. 자아에 대한 개념이라던지, 육체와 영과 육의 관계라던지 다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랍니다. 이번에도 글을 통하여 생각을 나누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종흔님과 저와의 차이는 오직 하나입니다. 성경을 무엇으로 볼 것인지 이지요. 종흔님께서는 성경 역시도 사람의 생각으로부터 온 것인지라 인간사의 소산물로 보시지만 저는 계시를 믿기 때문에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부터 우리의 생각이 나눠지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 일치할 수 없는 부분이 생기는 것이랍니다. 그래도 종흔님의 글을 통하여 제가 많이 배우고 있으니 글 쓰시는 것을 멈추지 마시고 시간이 되시는 한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도 종흔님께서 쓰신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에 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역시 제가 볼 때에는 둘은 분리가 되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며칠 더 생각해 보고 제 생각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추신: 인사가 늦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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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Daniel Choi / 1월 4 2015 1:24 오후

    고맙고 감사합니다. 진작에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좀 늦은감이 드네요. 이 블로그를 통해서 바른 신앙 생활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 블로그와 함께 목사님을 알게 된것 또한 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요… 늘 깨어있는 영성으로 주님께 귀히 쓰임 받으시는 종이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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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월 4 2015 6:49 오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신다니 기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찾아와 주시고 생각을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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