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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7/2014 / Sanghwan A. Lee

아라한(阿羅漢)과 보살(菩薩), 사도 바울과 목사

[본글로 들어가기 전에 저는 불교인이 아니라 기독교인임을 밝혀둡니다. 제가 뜻하는 기독교인이란 ‘오직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고, 그 구원은 십자가 위에서 대속적 죽음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고 고백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글의 서두에 불교의 교리에 대해서 설명하는 이유는 제가 그것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전달코자 하는 바를 보다 명료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라한(阿羅漢): 불교에는 사위(四位)라 하여 성인(聖人)을 나누는 네 가지 단계가 있다. 예류(預流)가 가장 낮은 단계이고, 일래(一來)가 그 다음이며, 불환(不還)이 세 번째요, 아라한(阿羅漢)이 최고의 경지이다. 아라한에 도달한 불자들은 무학(無學)의 경지에 올랐다 하여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속세(俗世)를 떠나게 되고, 그렇게 부처가 된단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解脫)의 또 다른 설명이다.

보살(菩薩): 헌데 여기에서 알아야 할 불교 교리 하나가 더 있다.  불환(不還)과 아라한(阿羅漢) 사이에 있는 보살(菩薩)의 단계이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불환(不還)의 단계에 있다가 아라한(阿羅漢)이 되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자들이 보살이다.  잠깐… 아라한이 되길 스스로 거부한다고? 그 이유가 무엇일까? 속세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란다. 위에 언급 했듯이 아라한이 되면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지라 속세에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없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기를 포기하면 세상에 남아 타인의 해탈을 도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위로는 아라한이 되기를 구하지만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구도자”가 보살이라고 불교는 말한다. 이것이 불교의 사위(四位)와 보살(菩薩)의  교리이다.

사도 바울: 이것을 기억한 채 빌 1:22b~24로 가 보자.  불환과 아라한 사이에 끼인 보살처럼 세상과 천국 사이에 끼어 갈등하는 바울을 만나게 된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바울은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저 세상이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다.  이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고전 13:12에 있는 바울의 고백은 그가 얼마나 간절하게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싶어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 끼어 갈팡질팡하게된 이유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많은 교회가 잊어버린 기독교의 반쪽을 보게 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하기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도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수 없이 가르치지 않던가?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일 3:10)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 3:16)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7~8)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1)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일 4:12)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일 4:20~2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요일 5:1)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요이 1:5)

이렇듯 기독교는 하나님만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물론 인간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실 만큼 사랑하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본주의 자들은 인간이 최고이기에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신본주의 자들은 하나님이 최고이기에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 증거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인간들을 사랑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도 구약의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해 주시면서 이러한 사실을 피력하지 않으셨던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ὁμοία)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잠시 첫 번째와 두 번째 율법을 연결하고 있는 “같으니”라는 단어를 보자.  헬라어 호모이오스(ὁμοιος)에서 번역된 이 단어는 두 번째 계명이 첫 번째 계명과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 둘 다 동일한 비중으로 중요하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으르 깨달았던 사도 바울은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 끼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목사: 잠시 목사라는 직분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목사들이야말로 이러한 정신을 갖추어야 할 제 일의 기독교인이어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를 대표하는 목사는 하나님만 사랑해선 안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자신의 목숨을 버릴 만큼 양을 사랑하는 목자가 참된 목자요 선한 목자이기에 자신의 목숨을 버릴 만큼 성도를 사랑할 수 있는 목사가 참된 목사요 선한 목사이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기에 예수님께서 너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는 목사…  사도 바울처럼 성도를 무척이나 사랑하기에 예수님께 속히 가고자 하는 열망까지도 고삐로 묶어둘 수 있는 목사… 이런 목사를 만난 성도들은 참 행복할 것이다.  부끄럽지만 이 글을 쓰는 나는 목사다. 엉터리 목사… 엉터리로 사역을 시작했고, 엉터리로 사역을 했으며, 엉터리로 사역을 마무리했다. 양들을 깊이 사랑하지 않았고, 양들을 위해 내 자신을 많이 희생하지도 않았다. 위에 언급한 하나님”” 사랑했던 목사가 바로 나다. 내가 얼만큼 엉터리였는지 고백하자면 다음과 같다.  목회를 하면서 나름대로 씨름했던 구절이 있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구절이고,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구절로 남아 있다.  출 32:32에 있는 모세의 기도… 그는 범죄한 히브리 민족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한다.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니! 아무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한 번도 이렇게 기도한 적이 없다. 앞으로도 오랫동안은 이렇게 기도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처럼 엄청난 기도를 모세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얼만큼 사랑하셨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결론 밖에 나지 않는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 끼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휴… 참된 도를 가르치지 않는 불교에도 보살의 정신이 있건만 유일한 참된 종교인 기독교를 믿는 목사인 나에게 바울의 정신이 빠져있다니…  가슴이 쓰릴 뿐이다.  사도 바울에 의해 신약의 목회서신이 쓰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글을 맺는다.

맺으며: 한국 교회를 사랑하는 목사로써 바울과 같은 목사가 많이 나오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그런 목사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  주여, 저를 긍휼히 여겨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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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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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선근 / 4월 27 2018 11:19 오전

    제 안목에 대해 잘은 몰라도 훌륭한 말입니다

    Liked by 1명

  2. kay kim / 9월 4 2018 11:10 오전

    검색을 하다 목사님 사이트 을 알게됐읍니다. 이사이트에 실린 한글성경해설이 쉽게 이해가 잘돼서 문의 합니다, 어떤 성경을 쓰시는지 답변 부탁합니다.
    성경을 알기쉽게 해서 많은 도움이 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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