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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2014 / Sanghwan A. Lee

복음 vs. 변증학?

문제 제기: 변증학을 쓸데 없는 학문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다.  이유를 물었더니 사람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구원의 가능성만 놓고 따진다면 그 분의 말씀이 백번천번 옳다.  복음 이외에 그 무엇이 영혼을 구원할 수 있으리오?  변증학은 쓸데 없는 학문이 맞을 것이다.

변증학의 위치 & 역할: 그러나 성경은 구원이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시작이라고 가르친다. 즉 케리그마를 통하여 구원을 받은 후에는 디다케를 통하여 성장해야만 하는 또 다른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복음은 케리그마로 분류되고 변증학은 디다케의 부분으로 분류될 수 있다. 변증학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복음을 통하여 받아들인 신앙이 얼마나 견고하고 확실한지를 이성적으로 맛볼 수 있게 함으로 그들의 영적 성장을 도울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변증학을 케리그마로 분류하여 복음을 대치하면 안 된다. 이성에 호소하는 변증학은 영혼을 살릴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학을 디다케로 분류하여 적시적소에 활용하면 신앙을 더욱더 견고케 함으로 영적 성장에 일조할 수 있다.  William L. Craig의 말처럼 “변증학은 믿는 자들의 신앙을 더욱더 견고하게 해 주는 보조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는 말이다.

의심할 수록 보이는 믿음: 나는 도마처럼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학창시절 때 겪었던 충격적인 일 때문이었다.  그저 부모님을 따라 맹목적으로 교회를 다니던 내가 다음과 같은 꿈을 꾼 적이 있다.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심판대에 앉아있는 분이 예수님이 아니라 부처이지 않은가?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의당 예수님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자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처는 찢어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나님인데 너는 예수를 믿었구나.  그 대가는 영원한 지옥이다.”  그런 후 나를 들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 속에 던져 넣었다.  꿈에서 일어난 나는 온 몸이 식은 땀으로 졎어 있었다.  그 때부터 나는 신앙의 순례를 시작했다.  기독교를 믿고 싶기에 믿는 행위를 버리고 믿어져야 믿게 되는 신적 수동태적 신앙을 찾아 순례를 떠난 것이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신적 항복을 복음을 통하여 경험하게 되었고, 이제는 믿고 싶어서 믿는 믿음이 아니라 믿어지기 때문에 믿을 수 밖에 없는 신앙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신앙의 순례를 멈춘 것은 아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그저 신앙만으로는 넘어갈 수 없는 이성적 장애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문제들은 (1) 신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 (2)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신과 시공간 속에 존재하시는 신 사이의 괴리성, (3) 신 존재와 악의 문제, (4) 성경 사본들의 불일치성 문제 등이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러한 나를 불쌍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이쪽 방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변증가들을 만나게 해 주셨다.  Luis de Molina의 On Divine Foreknowledge: Part IV of the “Concordia”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충돌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줬고, William L. Craig의 God, Time, and Eternity: The Coherence of Theism II: Eternity는 하나님께서 시공간을 초월하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게 해 주었으며, Alvin Plantinga의 God, Freedom, and Evil은 선하신 하나님과 이 세상에 만연한 악과의 상관관계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고, Bruce Metzger의 The Early Versions of the New Testament: Their Origin, Transmission and Limitations는 성경의 사본들이 단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기독교 성경의 무오성을 파괴할 수 없다는 논증이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도와주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Slavoj Zizek, Michel Foucault, Richard Dawkins, Christopher Hitchens와 같은 기독교 반(反)증가들의 글들도 이성적으로 결정불가능성에 속한 성경의 논제들에게 논리적으로 합당한 답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반면교사적으로 배우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난해한 부분들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성경이 쓰여질 당시의 관용어구들을 통하여 쉽게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도 발견하게 되었다.  어디 이 뿐인가?  고고학의 발전 역시도 내 신앙을 견고케 하는데 크게 일조했다.  한가지의 예를 들자면 P⁵²의발견이다.  이 손바닥 크기만한 파피러스의 발견은 무척이나 경이로웠다. 성경 번역이 얼마나 정확하게 이루어 졌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P⁴, P³², P⁵², P⁹⁰, P¹⁰⁴, P⁶⁶, P⁴⁶, P⁶⁴, P⁶⁷, P⁷⁷, P⁹⁸등의 지속적 발견 역시도 나의 신앙을 더욱더 견고하게 세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게다가 1945년에 이집트의 Nag Hammadi에서 발견된 영지주의 문서들은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로 치부받던 초대 교회의 교부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검증케 하는데 일조했다. Nag Hammadi의 문서 발견이 기독교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우려와는 정반대로 역사된 것이다. 과학도 마찬가지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프리드만과 르메르트의 우주 팽창 방정식, 그리고 허블의 적색편이 발견 등은 성경의 권위를 더욱 빛나게 했다. 그리고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은 이슬람과 힌두교의 경전의 가치를 가차없이 하락시켰고 성경의 정확성을 또 한 번 검증토록 했다. 이처럼 인간이 “~학”을 붙이는 모든 학문들의 발전은 기독교를 변증한다는 쪽으로 귀결되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보인다.

설명할 수 있는 믿음 & 설명할 수 없는 믿음: 믿는 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믿는 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전자가 후자보다 더 깊은 믿음이라고 당신이 논증한다면 반증하지 않겠다.  당신이 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의심 많음은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에서 밝힌 종류의 의심이 아니다.  단지 내가 믿고 있는 진리가 진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수용한 믿음일지도 모른다는 자기 불신의 의심이다.  Faith upon Faith를 향한 의심이지 Faith upon Divine Reason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후자의 신앙을 택한 것이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기독교의 모든 신앙이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말에 백번천번 동의한다.  예컨대 나는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설명할 수 없다. 이성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어떻게 ‘나처럼 더럽고 흉악한 놈팽이를 사랑하실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말고 설명될 수 있는 부분까지도 설명이 필요없다고 치부하는 것은 맹목적인 믿음일 경우가 높지 않을까?

결론: 베드로 사도는 벧전 3:15에 이렇게 말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ἀπολογία) 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나는 타인에게 대답하기 위하여 변증을 공부하지 않는다.  나 스스로에게 대답하기 위하여 공부한다.  나에게 존재하는 the worst enemy는 의심많은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증학은 나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만큼은 쓸데없는 학문은 아닌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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