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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4/2014 / Sanghwan A. Lee

체휼하시는 예수님

지젝을 다시 보다: 때때로 무신론 철학자들의 기독교 비판은 내 시야를 넓혀준다.  워낙 좁고 단순무식한 나에게 있어서 이들의 견문은 새로운 해석을 향한 문을 여는 마중물처럼 작용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롭게 만난 슬라보예 지젝의 글이 그랬다.  2008년 기독교의 신정론과 속죄론을 이해하지 못한채 기독교 비판에 나선 그를 보고 크게 실망했지만 이번에 접하게 된 그의 책은 그에게 면죄부를 선사했다.  헤겔의 관점으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재해석한 그의 작업은 참으로 탁월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물론 신본주의자인 내가 인본주의자인 지젝의 해석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본주의자가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생각의 흐름을 접할 수 있어서 감사할 수 있었다.  잠시 그의 해석을 소개한다.

헬라의 신들이 인간들에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자신에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헤겔에게 있어서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접근하거나 보여지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의 관점에서 자신을 보기위한 수단이었다.

그런후 프로이드와 라캉 학파의 “부분 사상(몸이 없는 독립적 개체)”이란 개념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에서 눈을 뽑으사 그 눈으로 당신을 보신 것”이 성육신이라고 유비한다.

지젝의 논증 분석: “기독교의 하나님은 자신에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부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관점으로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다는 뜻이다.  이러한 지젝의 인본주의적 관점은 기독교의 관점으로 볼 때 틀렸다.  그러나 그의 관점은 신본주의자들이 역으로 사용할 수 있는 논증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경험을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으로 분류하여 직접 경험을 통한 하나님의 인간고뇌의 체율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다음을 보라.  지젝의 설명을 분석하면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사 인간의 눈으로 자신을 보시기 전까지는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보는지 알 수 없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  이러한 전제는 하나님의 전지성에 타격을 주지만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으로 분류하여 적용할 때에는 전지성에 타격을 주지 않고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전제 1: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휼하실 수 있으셨다. (전지성)
전제 2: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체휼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 (전능성)
결론: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간적접이 아닌 직접적으로 체휼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물론 전제 2가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간접 경험과 직접 경험의 틀 안에서는 교리적 모순없이 사용될 수 있다.  이러한 논증은 예수님의 위로가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인지를 강하게 피력한다.

위로의 예수님: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사 인간의 고뇌를 간접적이 아닌 직접적으로 체휼하셨다.  그러므로써 그분의 위로는 경험한 자의 위로가 되어 위로받는 자를 깊게 위로할 수 있게 된다.  히 4:15의 증언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동정”이라고 번역된 헬라어(συμπαθῆσαι)는 ‘느끼다’에서 파생되었다.  그리고 “연약함”이라고 번역되니 헬라어(ἀσθένεια)는 ‘인간사의 모든 고뇌’를 뜻한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인간사의 모든 고뇌를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직접적으로 동정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등을 두드리는 예수님의 손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우리와 함께 걸어주시는 예수님의 발에도 구멍이 뚫려있다.  우리의 옆에서 도우시는 예수님의 허리에도 구멍이 나 있다.  그분의 머리와 등, 그리고 온 몸에도 찢겨진 상처가 나 있다.  무엇보다 그 분의 마음에는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버림받으며, 억압받아 갈기 갈기 찢껴졌던 상처가 아물어 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아픔을 예수님께서도 경험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리셨던 피땀과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던 외침은 인간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경험하신 하나님의 외침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경험하신 인간의 외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위로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강력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이를 떠나보낸 한 어머니가 있었다.  그 어머니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 위로의 말들을 건넸지만 어머니를 위로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한 여인이 어머니를 찾아갔다.  그 여인은 아무런 말도 전하지 않았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머니와 함께 울어줬다.  그랬더니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크게 위로를 받았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어 그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니 어머니와 함께 울었던 그 여인도 얼마전 아이를 잃었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위로의 기반이 아닐까?  물론 예수님께서는 내가 받는 고통의 모양새와는 다른 고통의 모양새를 경험하셨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고통의 모양새는 다르다 할지라도 같은 종류의 고통을 동반하는 경험이기 때문에 나를 이해하실 수 있으시다.  그래서 예수님의 위로로 말미암이 내 멍든 몸과 찢겨진 가슴은 아물게 된다.

끝으로: 고타마 싯타르타는 인간사가 고뇌의 수레바퀴라고 말했다. 참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고뇌의 수레바퀴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나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체휼하사 고통보다 더 큰 위로로 나를 덧입히시는 예수님 때문이리라. 나를 아시는 예수님. 나를 이해하시는 예수님. 나와 같은 고통을 겪으신 예수님. 이러한 예수님의 위로로 인해 오늘도 나는 환하게 웃는다. 지젝에게 고마운 토요일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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