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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2014 / Sanghwan A. Lee

플라톤의 분유론(分有論)

플라톤은 A라는 사물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의 에이도스(εἶδος)”에 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에이도스란 “~인 것 자체”라는 뜻으로 “~인 것”을 정의, 규명하는 본질을 의미한다. 예컨데 사물 A가 아름답다고 치자. 사물 A가 아름다운 이유는 사물 A가 본래부터 아름다웠기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에이도스”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사물 A가 “아름다움의 에이도스”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결코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분유론에 따르면 그 어떠한 사물도 “아름다움의 에이도스”를 떠나 스스로 아름다울 수 없다. 아름다워지기 원한다면 반드시 “아름다움의 에이도스”에 관여해야만 한다.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이 아름다움 자체에 의해서 아름답게 된다”고 말한 이유가 이것이다.

플라톤의 분유론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름다웠다가 추하게 변한 존재들의 상태를 진단해 주기도 한다. 예컨데 아름다웠던 사물 A가 추해졌다고 치자. 그 이유는 사물 A가 더이상 “아름다움의 에이도스”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물이라 할지라도 사물을 아름답게 하는 “아름다움의 에이도스”를 떠나는 순간 아름다움을 잃어버린단 말이다.  이 세상에 스스로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의 에이도스” 외에는 없으니 말이다. 만약 추해진 사물 A가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 “아름다움의 에이도스”에 다시 관여해야만 한다.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움의 에이도스”에 관여하고 있는 사물만이 누릴 수 있는 사후적(事後的) 축복인 게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의 에이도스”가 무엇일까? 플라톤은 이 질문의 답을 주지 못했다. 때때로 사변적이면서도 궤변적이었던 그는 죽음이 이 질문의 답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죽음을 찬양하기도 했다. 그도 답을 몰랐던 게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 질문에 확실한 답을 준다. “아름다움의 에이도스”는 예수님이시라고. 당신은 예수님께서 아름다우시다는 것을 아는가? 이 세상에 성육신 하신 그분의 외모를 말하는게 아니다. 그분의 본체를 말하는 게다. 다윗은 시편 27:4에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נעם)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예수님께서는 그저 아름다우신 분이 아니시라 “아름다움의 에이도스”이시다.  그 무엇도 예수님을 아름답게 할 수 없다.  그분은 스스로 아름다운신 아름다움의 에이도스이시며 더이상 아름다워 질 수 없는 아름다움의 극치이시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이분을 통하여 아름답게 되었고, 모든 추한 것들도 오직 이분을 통하여서만 아름다워질 수 있다.  당신이 얼만큼 추한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추한 존재라 할지라도 예수님께 관여하는 자들은 아름다워진다. 그분께서는 모든 추함을 아름다움으로 바꾸실 수 있는 “아름다움의 에이도스”이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당신과 나는 죄로인해 하나님의 형상으로써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  우리를 아름답게 하셨던 “아름다움의 에이도스”로부터 단절된 것이다.  이러한 우리가 다시 아름다움을 찾기위하여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아름다움의 에이도스”이신 예수님께 관여하는 것이다.  머리이신 예수님의 몸으로,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로, 주이신 예수님의 종으로, 선한목자이신 예수님의 양으로 관여할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써의 아름다움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강남 언니들이여, 당신이 아무리 쭉쭉빵빵한 몸매에 마를린 몬로를 뺨치는 얼굴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께 관여하지 않는다면 결코 아름답지 않다.  강남 오빠들이여, 당신이 아무리 훤칠한 키에 조각같은 얼굴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께 관여하지 않는다면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대들이 참된 아름다움을 원한다면, 영원한 아름다움을 원한다면 아름다움의 에이도스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아름답게 하신 그 분, 예수 그리스도께 관여하라.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리라. Keith Green의 찬양으로 글을 맺는다.

Oh Lord, You are beautiful 예수님,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Your face is all I see 당신의 얼굴만이 제 눈에 가득 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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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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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양천 / 5월 31 2014 4:29 오후

    칸트가 물자체를 이야기할 때까지만 해도 절대자에 대한 관념이 존재했는데… 실존주의로 넘어오며 사유의 주체로서의 인간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돼버린 후에는 인간 자체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시켜버려 결국 신을 죽인 철학은 인간마저 죽여버렸네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신을 떠나면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규정할 근거를 잃어버리는 거죠. 이걸 깨달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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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5월 31 2014 6:31 오후

      맞습니다. 인간의 가치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요. “인간은 신의 항문에서 떨어진 똥덩어리”라고 루터의 말을 거칠게 재표현한 지젝의 말을 기억해야 할 시대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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