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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2014 / Sanghwan A. Lee

예수님의 공로

부정하신 하나님: 로마서 3:23~24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단어가 두 개 있다. “이르지 못하더니(ὑστεροῦνται)”와 “의롭다 하심을 얻[다](δικαιούμενοι)”이다.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떨어져 나가다’는 뜻이고, “의롭다 하심을 얻[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옳다 여김을 받다’는 뜻이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이르지 못하더니”는 현재 진행형, “의롭다 하심을 얻[다]”는 현재 분사형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사의 시제를 살려 본문을 재해석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쉬지않고 멀어지고 있는 그 순간에 의롭다 하심이 임했다”가 된다. 우리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을 때에 칭의가 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 지고 있을 때에 칭의가 임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악을 향하여 거침없이 치닫고 있을 그 때에, 죄의 나락으로 사정없이 떨어지고 있을 그 때에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이 임했다는 것이다. 이럴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 성경의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 아니시던가? 죄를 관용하지 아니하시고, 죄인을 죄 없다 하지 아니하시는 분이 아니시던가? 헌데 어찌 위와 같은 부정을 저지르실 수 있단 말인가? 잠깐… 부정이라고 말하기 전에 본문을 다시 보자. “이르지 못하더니”와 “의롭다 하심을 얻[다]” 사이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이다.

예수님의 속량:  “속량”이라고 번역된 헬라어(ἀπολύτρωσις)는 ‘값을 지불하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갚아야 했던 죗값을 대신 지불하셨다는 게다. 어디에서? 십자가에서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던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기억한다. ‘테텔레스타이(Τετέλεσται)’에서 번역된 이 단어는 ‘값을 다 지불하다’는 의미의 법정 용어이다. 우리가 갚아야 했던 모든 빚을 예수님께서 다 갚아 주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악을 향하여 치닫고 있을 그 때에, 죄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을 그 때에 말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이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뒹굴고 있던 우리에게 현재 분사형으로 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그렇다. 기독교가 말하는 은혜는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공로로 획득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인간에게 눈 멀어버린 예수님의 공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벌레보다도 못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결단적 사랑이다. 로마서 5:8도 이를 뚜렷하게 증거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속량이 우리에게 임했단다. 언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말이다. 우리가 뼛속까지 죄인 되었을 그 때에…

필리핀에는 일 년에 한 번씩 특이한 행사가 열린단다. 기독교인들이 모여 스스로의 등에다가 피가나도록 채찍질을 하거나, 십자가를 등에 지고 몇 마일을 걷거나, 심지어는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고 몇 시간 동안 달려 있는 행사이다. 얼핏 보면 참으로 거룩하고 고귀한 모습인 것 같다. 그러나 그 내막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루는 미국 기자가 직접 필리핀에 가서 그들에게 왜 이런 행사를 하는지 물었다. 그들이 답하기를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원죄를 씻고, 우리의 피는 우리의 자범죄를 씻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장은 예수님의 피만으로는 구원이 임할 수 없기에 예수님의 피에 자신들의 피를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예수님께서 다 하셨기에 내 공로가 없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용서받기 위해 거룩한 삶을 사는게 아니라 용서를 받았기에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칭의받기 위해 죄와 싸우는게 아니라 칭의를 받았기 때문에 죄와 싸우는 것이다. 중생하기 위해 바른 삶을 사는게 아니라 중생이 되었기 때문에 바른 삶을 사는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론: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뚜렷한 다른점이 하나 있다. 구원론이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내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론을 갖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론은 철저히 다르다. ‘내 노력으로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니 구원자 예수님만을 믿는 전적인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믿음 조차도 하나님에 의해 발출된다’고 한다.  (태그: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  이게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구원론이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공로를 돌리지 않는다. 쌀 한 톨 만큼도 돌리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공로를 돌린다. 기독교의 구원론은 성부의 예정을 시작으로 성자의 십자가를 거처 성령의 인치심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라. 왜 우리는 면류관 벗어 예수님께 드리는가? 그 분께서 다 하셨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영원토록 예수님을 예배하는가? 그 분께서 다 하셨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체에 있는 상처를 봐야만 하는가?   (태그: 상처난 예수 그리스도) 그 분께서 다 하셨기 때문이다.  정말 그 분께서 다 하셨기 때문에…

맺으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현재 진행형으로 점점 멀어지고 있던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이 현재 분사형으로 임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천군과 천사는 이렇게 노래한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계 7:10)

그리고 우리도 이렇게 노래한다.

예수 가장 귀한 그 이름 예수 언제나 기도들으사 오 예수 나의 손 잡아주시는 가장 귀한 그 이름
예수 찬양하기 원하네 예수 처음과 나중 되시는 오 예수 날 위해 고통 당하신 가장 귀한 그 이름
예수 왕의 왕이 되신주 예수 당신의 끝없는 사랑 오 예수 목소리 높여 찬양해 가장 귀한 그 이름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 우리의 구원은 순전히 그 분의 공로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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