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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2014 / Sanghwan A. Lee

예수님의 신성(神聖)에 관하여 (11): 테트라그라마톤 & 노미나 세크라

테트라그라마톤: 테트라그라마톤은 숫자 “넷”을 의미하는 “테트라”와 알파벳을 의미하는 “그라마”의 합성어로써 하나님의 존함을 יהוה로 표기하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존함은 너무도 거룩했기에 다른 단어들과 분류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 방법으로 테크라그라마톤을 발음하지 않고, 꼭 발음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주”라는 의미인 “아도나이”나 “그 이름”이라는 의미의 “하 셈”으로 대치하여 발음했다. 히브리어에 모음을 기표화 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이어졌다. 테트라그라마톤에는 모음을 붙이지 않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읽기를 기피하도록 격려했던 것이다. 유대인의 문헌을 보면 테트라그라마톤을 발음하며 부모를 저주했을 경우에는 반드시 죽어야만 했고, 테트라그라마톤을 발음하는 자는 아무런 상급 없이 사후의 세계를 맞이한다고 기록됐을 정도니 하나님의 존함이 얼마나 거룩하게 여겨졌는지 엿볼 수 있다.

노미나 세크라: 몇몇의 학자들은 이러한 태도가 신약에 와서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발견되어지는 사본들은 그들의 주장과 사뭇 다르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구약시대의 성도들의 테트라그라마톤의 정신을 이어 받아 새로운 모습으로 성경필사에 적용했는데, 그것이 바로 노미나 세크라이다. 노미나 세크라란 하나님의 존함이 약자로 쓰인 것을 말하는데,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주격형태가 θεός라면 노미나 세크라는 앞글자 θ와 마지막 글자인 ς를 이은 후 단어 위에 선을 붙여 다음 처럼 표기한다: θ̅ς̅. 이것이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존함을 높이는 방법이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신약 성경의 사본을 예를 들도록 한다.  2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쓰여진 사본들 중P1, P9, P13, P28, P39, P49등이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존함이 노미나 세크라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우선 P9을 예로 들어 보겠다.  아래의 그림을 보라.

P9

파피러스 9에 기록되어 있는 구절은 요한일서 4:11~12, 14~17의 부분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 구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동그라미 친 곳에서 볼 수 있듯이 θεός에서 θ̅ς̅나  χ̅θ̅ς̅로 축약된 노미나 세크라로 되어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높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존함: 이러한 사실을 알고 3세기 이전의 성경 사본들을 연구해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의 존함까지도 노미나 세크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크게 세 가지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1) 처음 두 개의 알파벳으로 축약되어 윗 선과 함께 나타나거나 (2) 처음과 나중의 알파벳 두 개로 축약되어 윗 선과 함께 나타나거나 (3) 처음 두 개의 알파벳과 마지막 알파벳으로 축약되어 윗 선과 함께 나타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몇 가지 증거를 보여드리도록 한다.

(1) P1: P1은 마태복음 1:1~9, 12, 13~20의 일부를 담고 있는 파피러스로써 예수님의 존함이 노미나 세크라로 되어있다.

P1

보시다시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 1:1)”는 구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ι̅υ̅ χ̅υ̅로 되어있다.  Ἰησοῦ Χριστοῦ가 노미나 세크라로 표기된 것이다.

(2) P13: P13은 히브리서2:14~5:5; 10:8~22; 10:29~11:13; 11:28~12:17의 일부를 담고 있는 파피러스로써 역시 예수님의 존함이 노미나 세크라로 표기되어 있다.

P13

보시다시피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는 구절에 있는 예수님께서 ι̅ν̅로 되어있다.  Ἰησοῦν이 노미나 세크라로 표기된 것이다.

(3) P28: P28은 요한복음 6:8~12, 17~22의 일부를 담고 있는 파피러스로써 예수님의 존함을 노미나 세크라로 표기하고 있다.

P28

보시다시피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요 6:17, 19)”에 있는 예수님께서ι̅ς̅ (주격)와ι̅ν̅ (대격)으로 되어있다.  Ἰησοῦς와Ἰησοῦν가 노미나 세크라로 되어 있는 것이다.

(4) P39: P39는 요한복음 8:14~22의 일부를 담고 있는 파피러스로써 성부의 호칭과 성자의 존함이 다 노미나 세크라로 표기되어 있다.

P39

보시다시피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요 8:19)”에 있는 “아버지”는 π̅η̅ρ로 표기되어 있고, “예수님”은 ι̅η̅ς̅로 표기되어 있다.  πατήρ와 Ἰησοῦς가 함께 노미나 세크라로 표기된 것이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동일한 하나님(삼위일체의 교리 하에서)이시라는 것을 강하게 피력한다.

(5) P49: P49는 에베소서 4:16~29; 4:31~5:13의 일부를 담고 있는 파피러스로써 예수님의 호칭과 존함이 노미나 세크라로 표기되어 있다.

P49

보시다시피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엡 4:17)”에서 예수님의 호칭인 “주”가 κ̅ω̅로 되어 있고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엡 4:21)에 있는 “예수님”도 ι̣̅υ̅로 되어 있다.  κυρίῳ와 Ἰησοῦ가 노미나 세크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6) 그 밖의 사본들: 그 밖에도P4+64+67, P5, P15 + P16, P29, P47, P49+65, P66, P75등에도 예수님의 존함은 노미나 세크라로 표기된다.

맺으며: 기독교 초기의 문서들은 오직 “하나님,” “주,” “그리스도,” “예수”에게만 노미나 세크라가 사용되었다.  그 다음에는 “성령”에게도 노미나 세크라가 사용되었고, 한 참 후에야 비로서 예수님과 관련되어 신성하게 여겨지던 것들에도 허용되었다.  중요한 것은 구약 시대의 테트라그라마톤의 정신을 물려받은 초기의 기독교 성도들은 예수님을 표기하는데 주저 없이 노미나 세크라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유대인들은 가장 존경하던 선지자 모세나 이사야의 이름을 노미나 세크라로 표기하지 않았다.  천사장 미가엘에게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주저없이 사용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이 4세기에 고안된 것이 아니요 기독교 초기부터 당연히 받아들여졌던 사실임을 변증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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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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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hs / 7월 29 2015 8:07 오전

    하나님에 대한 호기심이 자꾸 생겨서 목사님께 자주 묻게 되는데 안그래도 바쁘신데 귀찮게 하는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좋아요

  2. jhs / 7월 29 2015 8:17 오전

    사도행전 15장말씀을 보면 돼지고기는 먹어도 되는것 처럼 나와있는데
    하지만
    이사야 66장 17절 스스로 거룩하게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하게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에 있는 자를 따라 돼지 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심판을 하실때에 대한 예언처럼 보이는 이사야66절 17절 말씀이 돼지고기를 멀는것도 죄가 되는것처럼 말하고 있어 돼지고기를 먹는게 옳은지 의문이 들게됩니다..

    그리고 어떤분이 요한일서 5장 20절의 개역개정성경의 번역이 잘못됫다면서 헬라어로 설명하시는데 개역개정 성경이 오역한게 맞는지 확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글 링크 : http://m.blog.naver.com/brgfreedom/40136191337)

    또 이분글중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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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위일체 교리란 거짓 교사들의 조각한 형상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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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2.15.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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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론부터 말하면 삼위일체 교리는 거짓 예언자들의 신(God)입니다.

    교회나 성당의 속 사정을 모르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냥 하느님, 하나님만 믿으면 경건해지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하느님, 하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교회의 속 실체는 한 하느님, 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하느님,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느님, 하나님은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와 같다.

    머리는 셋인데 몸은 하나인 것이다.

    예호와(여호와)를 한 분으로 믿지 않고, 아니 이제 거짓 인도 자들은 다른 신을 만들어서 삼위일체라는 신이 아버지, 아들, 성령을 모두 포함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런 교리라면 신약은 아주 쉽게 조물딱 조물딱 거릴 수 있는 그들의 밥이 된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나를 보는 것이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등등

    이런 것들을 들어 삼위일체 교리와 접목시키는 방법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주님의 말씀은 누구도 보지 못한 참 신을 우리는 예슈아 하마쉬아흐(Jesus the Christ)를 통하여 볼 수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예호와(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신앙의 기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보지 못한 참 신을 아들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는 그런 한 분이신 참 신에게 신앙(faith)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아들, 성령이 하나가 되어 다른 한 몸을 이룬다는 그리고 그 몸이 다른 한 신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즉 삼위일체 교리 안에 아버지도 있고 아들도 있고 성령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 교리가 신이 되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의 그 신과 예호와(여호와)는 별개이다.

    예호와는 그분 스스로 주권을 가지고 계시며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온 것과 같이, 남자도 여자를 통하여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엘로힘(the God)에게서 나왔습니다.
    For just as woman came from man, so man comes through woman; but all things come from God. (1Co 11:12)
    그별들의 수를 세시고, 그 모두를 그 이름으로 부르시는 분. [테힐림(시편) 147:4)
    He determines the number of the stars; he gives to all of them their names. (Psa 147:4)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는 그 이름답게 아들도 심판 날을 안다고 말한다. 이유는 “삼위일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 날과 시간에 관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하늘의 말라킴(천사들)도 그아들도 모르고 오직 나의 아버지만이 아신다
    But about that day and hour no one knows, neither the angels of heaven, nor the Son, but only the Father. (Mat 24:36)
    “nor the Son”이다 “그아들도 모르고”가 된다.

    삼위일체 교리가 바로 거짓이라는 것이 이런 데서 나타난다.

    그들의 주장으론 “삼위일체의 신”이기 때문에 아들도 그 날에 대해 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들은 참 신을 닮은 그런 분이셨지만 그런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하지만 삼위일체는 동등하다는 것을 끝까지 강조한다.

    일단 삼위일체 교리가 짙은 KJV를 보자
    
    Who, being in the form of God, thought it not robbery to be equal with God: (Phi 2:6 KJV)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흠정역)
    아들이 신의 형체이니까 신과 동등 됨을 강탈로 여기지 않았다라는 말이다.
    바로 삼위일체 교리에 근거해서 번역된 구절이다.

    하지만 조금은 삼위일체 교리 색깔이 덜한 성경을 보자

    who, though he was in the form of God, did not regard equality with God as something to be exploited, (Phi 2:6 NRS)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개역개정)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는 분명히 구별된다.
    두 눈들이 색맹인 자들은 “그거나 그거나”라고 말하겠지만 아래를 더 보면 더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내가 말한 색맹은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을 말한 것이다.

    하지만 개역개정도 삼위일체 교리가 짙다. 내가 “삼위일체 교리 색깔이 덜한 성경을 보자”라고 말한 것을 그들은 “아니야! 아니야!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을 믿고 있어” 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반삼위일체 종교단체 성경인 신세계역을 보자

    who, although he was existing in God’s form, gave no consideration to a seizure, namely, that he should be equal to God.
    그분은 비록 하느님의 모습으로 존재하셨지만, 장악하려고 곧 하느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세계역과 개역개정은 비슷하다 하지만 KJV는 뚜렷하게 삼위일체 교리가 드러난다.

    그리고 빌립보 2:7을 보면 KJV가 얼마나 노골적인 삼위일체 신봉자들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But made himself of no reputation, and took upon him the form of a servant, and was made in the likeness of men: (Phi 2:7 KJV)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KJV흠정역)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라고 말한다. 즉 삼위일체의 신이기 때문에 “자기 위에”가 적당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 성경들을 보자

    but emptied himself, taking the form of a slave, being born in human likeness. And being found in human form, (Phi 2:7 NRS)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Phi 2:7 개역개정)
    No, but he emptied himself and took a slave’s form and came to be in the likeness of men.
    그렇습니다. 도리어 자기를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하여 사람의 모양이 되셨습니다 (신세계역)
    “자기 위에”와 “오히려 자기를 비어”는 분명히 구별된다.

    삼위일체 교리라면 이 구절은 KJV가 옳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가 사람의 것이라면 KJV는 거짓 교사들의 작품이 분명하다.

    여러분들은 이 빌립보 2장이 삼위일체 교리로 인해 어떻게 변했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삼위일체 교리는 다른 신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한 분이신 신을 믿는 그런 교리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삼위일체 교리는 우상숭배이다. 진리를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아들이 아버지와 같으니까 신의 자리를 강탈해도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마쉬아흐 예슈아 안에 있던 이러한 정신 태도를 여러분 안에도 가지십시오. 그분은 엘로힘의 닮은 모양으로 계셨지만, 장악하려고 곧 엘로힘과 동등하게 되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자기를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하여 사람의 모양이 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계셨을 때에 그분은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아니, 첼라브(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또한 엘로힘께서는 그를 높게 올리시어, 그에게 다른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슈아의 이름으로, 그하늘에 있는 자들과 그땅에 있는 자들과 그땅 아래 있는 자들의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혀들이 예슈아 하마쉬아흐를 하아돈으로 고백하며 엘로힘 하아브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필립비(빌립보) 2:5~11]
    *(이 성경은 내가 직접 히브리어 신약과 비교 수정해서 보는 성경임 블로그 메뉴 참고)
    “장악하려고 곧 엘로힘과 동등하게 되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라면 아까 말한 대로 이 구절은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이런 식으로 바뀌게 된다.

    “여기지 아니하셨으나”는 이미 나는 신의 형체이니 강탈을 하고 있었다라는 얘기가 된다.

    여러분들은 분명히 알아 두셔야 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거짓이다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신을 강탈해도 된다고 가르치고 아들이 신보다 뛰어나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 성경 구절들을 보십시오

    28 내가 떠나갔다가 너희에게로 돌아온다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하아브(the Father)께로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답례로 나의 아버지는 나보다 더 크시다.
    You heard me say to you, ‘I am going away, and I am coming to you.’ If you loved me, you would rejoice that I am going to the Father, because the Father is greater than I. (Joh 14:28)
    분명히 “나의 아버지는 나보다 더 크시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삼위일체론 자들이 주장하는 것들을 절대 귀담아 듣거나 읽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가르칩니다.

    I am Alpha and Omega, the beginning and the ending, saith the Lord, which is, and which was, and which is to come, the Almighty. (Rev 1:8 KJV)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says the Lord God,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the Almighty.” (Rev 1:8 NIV)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개역개정 요한 계시록 1: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주 곧 전능자께서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마침이라, 하시더라. (흠정역)
    이 구절을 들어서 예수님이 유일신,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말합니다. 이유는 “주님”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삼위일체론 자들이 예호와(여호와)의 이름을 모두 主로 바꾸어서 이 구절이 이렇게 있는 것이지 사실은 이 부분은 예호와의 이름이 들어가는 부분입니다.

    “나는 하알레프와 하타브다” 예호와 엘로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또 장차 올 자 만군의 엘로힘이다.” *[알레프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처음 타브는 끝]
    히브리어 신약도 말해 줍니다.

    “אֲנִי הָאָלֶף אַף אֲנִי הַתָּו”, נְאֻם יהוה אֱלֹהִים, “הַהוֶֹה וְהָיָה וְיָבוֹא, אֱלֹהֵי צְבָאוֹת.”
    분명히 יהוה 가 들어갑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의 말 헬라어로 기록되면서 יהוה 는 Lord, 주, 主로 바꿔버렸습니다.

    신약에 예호와의 이름이 200번 이상 나오는데 그 성경을 보려면 저의 블로그 메뉴에 있는 신약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절대 속임수 없이 진리만을 저는 말합니다.

    (링크 :http://m.blog.naver.com/brgfreedom/40180655508)

    히브리어 신약성경이 헬라어 신약성경보다 더 바르다고 주장하는데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꾸 원어로 설명하니 위축되고 이게맞나? 싶기도 하고 많이 헷갈리네요
    자꾸 물어서 귀찮으실지라도 시간나실때 읽어보시고 짧게라도 답변부탁드립니다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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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Sanghwan A. Lee / 7월 29 2015 3:14 오후

    1. 성경은 구약의 법에 대해 세 개의 동사로 설명합니다: (1) 변함없다, (2) 완성됐다, (3) 폐지됐다. 왜일까요? 구약의 법은 (1) 도덕법, (2) 정결법, (3) 사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1) 도덕법은 일점일획도 변경될 수 없기에 구약과 신약이 같고 (i.g. 네 부모를 공경하라), (2) 정결법은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으며 (i.g. 번제, 속죄죄, 속건제, etc.), (3) 사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으로 십자가 사건 이후에 폐지되었습니다 (i.g., 돼지고기를 먹지말라). 그러므로 이제 돼지고기는 먹어도 되는 것이지요.

    2. “그 날과 시간에 관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하늘의 말라킴(천사들)도 그아들도 모르고 오직 나의 아버지만이 아신다” 는 구절은 제가 케노시스 설에서 벌써 답했습니다.

    3. “그리고 아들은 참 신을 닮은 그런 분이셨지만 그런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하지만 삼위일체는 동등하다는 것을 끝까지 강조한다.”는 부분도 역시 케노시스 설에서 답했습니다.

    4. 제가 자꾸 말씀드리지만 사역적 질서와 본질적 질서를 구별하셔야 합니다. “아버지가 크다”는 표현은 “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양”입니다. 본질적 질이 아니라 사역적 위치에 놓인 양이라는 것이지요.

    5. “삼위일체론 자들이 예호와(여호와)의 이름을 모두 主로 바꾸어서 이 구절이 이렇게 있는 것이지 사실은 이 부분은 예호와의 이름이 들어가는 부분입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모순 전제의 오류요 잘못된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입니다. 학계 어디에도 히브리어 신약성경을 헬라어 신약성경보다 위에 두지 않습니다. 심지어 유대인 학자들도 저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이 앞서 있으니까요. 죄송한 말이지만 정말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만이 위와같이 주장하지요.

    6. 또한 학계 그 어디에도 킹제임스 성경을 원어 성경 위에 두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번역된 사본 자체가 잘못되어 있으니까요. 비전문가들이 헬라어 원어성경대신 킹제임스 성경을 인용하며 삼위일체를 반증하려 하는 시도는 벌써 반증된 케케묵은 시도랍니다 (https://sanghwanlee.com/2013/10/13/%EC%84%B1%EA%B2%BD%EC%9D%98-%EC%A7%84%EC%8B%A4-2/).

    7. 논리학에서 “증명의 짐”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삼위일체를 반증하려는 사람들은 성경에 삼위일체를 인정하는 구절들을 다 찾아다가 반증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입니다. 제가 이 블로그에다가 쓴 글도 반증하지 못하지요.

    8. 제가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전문 서적을 사셔서 읽어보세요.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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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비공개 / 12월 30 2015 2:52 오전

    진리를 찾는 한 청년입니다.
    삼위일체문제로 오랜기간 고민을 해왔지만 해결이 되지않아 댓글을 남겨 도움을 청하고자 합니다.

    1. 엘로힘은 복수명사임에도 단수동사를 사용한것은 삼위일체되시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하셨는데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어찌 내게 낙이 있으리요 [창18:12]”
    여기서 주인(ואדני)은 아브라함 1명이지만 복수명사인 ואדני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저 구절말고도 창24:65, 창39:2, 삼상24:8 등등 많더군요.

    2. 약히드는 하나, 엑하드는 집합체를 의미하는가에 대한 의문점입니다.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엑하드)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엑하드)이요 [아가6:9]”
    이구절에선 오직하나뿐인 외딸에도 약히드 대신 엑하드가 쓰입니다.
    이것외에도 겔33:24, 말2:15, 겔34:23 등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엑하드가 강력하게 삼위일체를 뒷받침한다는데는 좀 무리가 있는것으로 보입니다.

    이 두질문은 제지식이 아니라 https://www.youtube.com/watch?v=Lbk_C5yiK_w 이곳 댓글의 Divine Nation님의 것이구요. 댓글을 읽어보니 의구심이 생겨 목사님께 질문드립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늘 요10:34-35” 이구절을 생각해보면 이사야 9장6절, 요한복음1장 등에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칭하는 구절이 하나님을 말씀을 받은 사람도 신이라고 칭해지는데 말씀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 칭해지지 않을이유가 뭐가 있나 생각됩니다.

    전 어릴때부터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지금도 교회를 다니고 목사님과 상담도 해봤지만 이문제는 해결이 잘되지않습니다. 이단이라 생각하시지 마시고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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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2월 30 2015 7:20 오후

      1. 아도나이는 장모음과 단모음에 따라 대상을 달리합니다. 아돈이 사람과 하나님께 사용되듯이 아도나이도 사람과 하나님께 사용됩니다. 맛소라 학파는 둘의 쓰임새를 구별하기 위해 서로 다른 모음을 사용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을 지칭하는 성호로 쓰일 때는 카메츠라는 장모음 아를 접미어에 붙였고, 사람들을 의미할 때는 파타흐라는 단모음 아를 붙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을 지칭하는 아도나이를 다음과 같이 구별했습니다: 하나님 – אֲדֹנָי, 사람 – אֲדֹנַי. 그래서 히브리어 문법학자 Christo Van der Merwe는 모음이 붙은 히브리어 성경을 읽을 때 장모음을 갖고 있는 아도나이(אֲדֹנָי)와 단모음을 갖고 있는 아도나이(אֲדֹנַי)를 반드시 분리시켜 생각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2. 언어학적으로 한 단어가 여럿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입니다.

      3. 요 10:35은 36절과 함께 봐야 하고, 시편 82:6에 사용된 엘로힘의 언어학적 쓰임새를 알아야 합니다.

      (1) 요 10:35는 시편 82:1-2, 6-8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구절입니다. 언급한 시편을 번역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로힘 사이에서 심판하신다
      너희는 얼마나 공의롭지 못하게 심판할 것인가?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엘로힘이라, 너희는 모두 가장 높으신 이의 아들들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사람처럼 죽을 것이며 왕자들 중에 하나처럼 넘어지리라.
      엘로힘이여 일어나소서 그리고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당신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보시다시피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하나님과 사람, 혹은 천사들을 다 나타냄을 알 수 있습니다. 인용한 구절 넘어에서 보면 엘로힘은 (1) 하나님, (2) 재판장, (3) 천사, (4) 사람들, (5) 우상들 등을 지칭하기 위해서 쓰였는데, 정확한 용도는 문법과 문맥에서 나타납니다. (예컨대 엘로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지칭할 때는 복수형임에도 불구하고 단수의 술부를 받습니다. 반면에 다른 존재들을 가르킬 때는 이런 문법 구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 블로그에 있는 엘로힘에 관한 글을 찾아 읽어주시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이 있는 구절을 예수님께서 요 10:35에 인용되었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제 요 10:35-36으로 가보지요.

      (2)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보시다시피 예수님께서 A와 B를 비교하시면서 설명하시는 구조가 나타납니다. 이런 구조는 유대인 서기관들이 즐겨 사용하던 קל וחומר(가벼운 것에서부터 무거운 것으로)라 불리는 성서해석방법 입니다. 이런 성서해석방법은 유대인에게 있는 일곱 개의 방법론 중 하나로 덜 중요한 것들을 예로들어 더 중요한 것의 포인트를 나타내는 방식이지요 (가장 좋은 예는 마 6:30이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께서는 이런 구조에다가 히브리어 시편 82편에 있는 엘로힘을 언어유희로 사용하사 상대방의 논리를 침몰 시키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공의롭지 못하게 심판하는 악한 자들도 엘로힘이거늘 선한 일을 하는 의인인 예수는 얼마나 더 엘로힘이겠느냐? 만약 너희 모든 자들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들이라면 하나님의 아들인 나는 얼마나 더 높겠느냐?”

      제가 위에 엘로힘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음을 말씀드렸지요? 즉, 예수님께서는 히브리어 시편을 근간으로 언어 유희를 통해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일격에 잠재우신 것입니다.

      (4) 끝으로 요 10:35를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εἰ가 들어간 조건적 부사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εἰ ἐκεινους εἰπεν θεους. 이럴경우 36절의 “너희가 … 하느냐 (ὑμεις λεγετε)”에 강세가 더 강하게 주어집니다. קל וחומר을 사용하시되 아주 강한 의미로 사용하신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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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공개 / 1월 1 2016 12:01 오전

        답변감사드립니다
        1번에서 목사님깨서 말하시는바가 잘이해가지 않습니다
        저위의 많은 성경구절들에서 단수명사에게 복수동사를 사용하는것이 장엄복수가 아닌가 라고 여쭙고 싶습니다
        목사님의 장엄복수의 관한글도 읽어봤지만 잘모르겠네요
        그때 장엄복수개념이 없었으면 왜 단수명사에 복수동사를 쓴것인가요?
        제가 무지하니 알아듣기 쉽게 살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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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월 1 2016 6:34 오전

        제가 드린 첫 번째 부분의 설명을 조금 확장시켜 설명하겠습니다. 모음이 붙어있지 않은 ואדני는 단수인지 복수인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학과 문법적 해석으로 그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님께서는 ואדני가 당연히 복수인 것 처럼 전제하신 후 말씀하셨는데, 제가 1번에 말씀드렸다시피 맛소라 학파들은 카메츠와 파타흐를 통해 단수와 복수를 구분했습니다. 이들의 구분법을 따를경우 (물론 이들의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 신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음이 없는 히브리어 텍스트로 해석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요. 저도 이 부분에 동의합니다.) 위에 언급하신 창 18:12의 “주인”에는 파타흐가 붙어 있습니다. 맛소라 학파들이 단수로 분류한 것이지요. 즉 사라가 아브라함을 부를 때 복수로 부른 것이 아니라 단수로 불렀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물론 맛소라 학파들의 신학적/문법적 접근이 절대적으로 들어맞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히브리어에 능통했던 랍비들도 이것을 단수로 봐야 하는냐 복수로 봐야 하느냐를 놓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예컨대 랍비 라쉬와 아스라는 복수로 이해했고, 마이모니데스는 단수로 이해했지요. 그러므로 이 부분은 단지 단어 자체를 통해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가 명확히 등장하는 많은 구절들을 통해서 단어의 분석을 시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추신: 그리고 아돈과 아도나이를 하나의 단어로 묶으셨는데 이 부분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일치를 내지 못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아도나이가 “나의 주”로 해석되야 하는지 혹은 고유명사처럼 “주”로 해석되야 하는지 의견이 분분하지요. 아도나이가 “주”라는 개념으로 해석되야만 하는 구절이 성경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돈”을 분석할 때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합니다.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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