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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1/2014 / Sanghwan A. Lee

성경을 사랑하시는 분들께…

문제 제기:구절은 하나지만 가능한 해석은 여러 가지다는 말이 있습니다. 두 명의 신학자가 같은 구절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일 때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해결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잘못 만들어진 해석에게까지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위험성을 수반합니다. 가능한 해석들이라고 해서 다 건전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잘못된 해석이 있을 수 있고, 심지어는 참된 해석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해석이라 하여 무작정 관용하려는 태도는 피하고 베뢰아 사람들과 같이 그것이 정말 그러한지 성경을 통하여 검증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제시된 해석들을 검증할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나 이 글에서는 가장 기본적이지만 가장 간과되고 있는 방법 하나만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수학의 법칙: “(2+9)×2-2=?” 라는 문제가 있다고 합시다. 수학자 A는 답이 20이라고 말하고 수학자 B0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문제인데 다른 답들이 제시된 것입니다. 이럴 경우 문제는 하나지만 가능한 답은 여러 가지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위와 같은 수학 문제에는 오직 하나의 답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수학자 AB가 제시한 답이 다를까요? 둘이 제시한 답 중에 정답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정답을 제시하지 못한 수학자는 수학의 연산 법칙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산 법칙이란 사람들이 수학 문제를 푸는데 있어, 구속되고 준거하도록 동의한 계약을 말합니다. 위의 문제도 이 계약에 맞추어 연산해야 하는데, 첫째는 곱셈과 나눗셈은 덧셈과 뺄셈 보다 먼저 계산 되어야 한다.’이고, 둘째는 괄호 안에 있는 연산이 괄호 밖의 연산보다 먼저 계산 되어야 한다.’입니다. 이런 연산 법칙을 따라 위의 문제를 계산하면 다음과 같은 순서가 될 것입니다:

(1) 괄호에 들어있는 2+9를 먼저 연산하여 11이란 중간 값을 낸다.

(2) 그 값을 괄호 밖에 있는×2와 연산하여 22란 중간 값을 낸다.

(3) 그 값을 -2와 연산하여 20이란 최종 값을 낸다.

(4) 문제의 답을 20으로 제시한다.

수학자 A가 제시한 답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학자 B는 왜 오답을 최종 값으로 냈을까요? 수학의 세계에서 동의된 연산 체계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연산 과정을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괄호 안에 있는 2+9를 연산하여 중간 값 11을 낸다.

(2) 밖에 있는 2-2를 연산하여 0이라는 또 하나의 중간 값은 낸다.

(3) 중간 값 110을 곱셈으로 연산하여 0이라는 최종 값을 낸다.

(4) 문제의 답을 0으로 제시한다.

동의된 연산체계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오답이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 해석에도 반드시 따라야 할 연산 법칙과 같은 계약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언어의 법칙입니다.

빠지기 쉬운 함정: 언어의 법칙에 대해서 다루기 전에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하나를 먼저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대다수의 성도들이 공학과 인문학은 다르기 때문에 수학의 연산 체계를 신학의 성서 해석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성서 해석에는 공식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으니 딱 부러진 답을 찾으려고 하는 태도는 피해야 한다.”는 자세이지요.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서 해석이 잘못 이루어지는 대다수의 이유가 바로 이런 생각으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성서 해석에는 반드시 따라야 할 공식이 존재하고, 그 공식에 따라 본문을 연산할 때에 바른 해석이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공학과 인문학은 다릅니다. 그러나 이 둘은 같은 공통 분모위에 세워졌습니다. 예컨대 공학의 꽃인 수학에 있는 0의 개념, 복소수의 개념, 12 사이에 넣을 수 있는 무한의 소수점 수의 개념 등은 인문학적 요소가 반영된 예입니다. 그리고 인문학의 꽃인 신학에서 열역학 법칙을 통한 신존재 증명, 보렐의 법칙을 통한 창조론 증명, “(a+b)/n=x이니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오일러의 변증 등은 공학적 요소가 반영된 좋은 예입니다. 무엇보다 수학처럼 기호를 사용해 귀류법을 (~A (B & ~B)) A, 부정논법을 (~B & (AB))~A, 이중 부정의 법칙을 ~(~A) A, 드모르간의 법칙을~(A V B) (~A & ~B)/ ~(A & B) (~A V ~B)으로 형식화 하는 기호 논리학도 좋은 예이고, 생물학에 멘델의 유전 법칙, 심리학에 일관성의 법칙, 경제학에 파레토의 법칙 등이 있다는 것도 좋은 예입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공학과 인문학이 서로를 배격하지 않고 상호작용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같은 공통분모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공통분모를 가리켜 논리적 질서라고 부릅니다. 공학도 논리적 질서 위에 세워졌고, 인문학도 논리적 질서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상호작용이 가능한 것입니다.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전향한 Antony Flew의 말을 들어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토마스주의 철학자 Ralph McInerny는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은 자연의 사건들에 담긴 질서,’ ‘배열,’ ‘법칙과 유사한 특성때문에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논증했다. 그는 그 자연스러움이 너무나 크기에 신 개념은 거의 본유적인 것이라 할 만하고, 반증이 없는 한 그 자체로 무신론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논증이 된다고 말했다.[1]

하나님께서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연의 다른 분야를 다루는 공학과 인문학에도 질서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해석함에도 반드시 따라야 할 법칙들이 있음을 말하는데 그 중에 가장 우선적이고 기본적인 것이 언어의 법칙입니다. 이제 언어의 법칙에 대해서 다룰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언어의 법칙: 언어의 법칙이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하는데 있어, 구속되고 준거하도록 동의한 계약을 말합니다. 마치 수학 사회에서 문제를 풀기 위해 동의된 우주적 질서로써의 연산 법칙이 있듯이 언어의 사회에도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서로에게 동의된 질서로써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언어학자 Marcel Danesi

 글이 의미를 갖거나 해독되려면 기표(記標)가 속해있는 법칙을 알아야만 한다.[2]

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그가 의미한 법칙이 언어의 법칙입니다. 언어의 법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1) 철자법, (2) 문법, (3) 논법입니다. 철자법은 언어를 표기하는 법칙으로써 단어를 통제하고, 문법은 단어들을 배열하는 법칙으로써 문장을 통제하며, 논법은 문장들의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법칙으로써 문단을 통제합니다. 이러한 법칙들은 언어를 사용하는 저와 여러분 사이에 암묵적 계약으로 자리하고 있고, 우리는 그 법칙을 기반으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일면식도 없는 우리가 지금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글이 서로 공유하고 있는 언어 법칙을 따랐기 때문이겠지요? 만약 철자법, 문법, 논법에 어긋나게 이 글이 쓰였다면 여러분은 여기까지 읽어 내려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에 Ferdinand de Saussure가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을 체스 게임에 비유한 것은 탁월한 접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언어에는 자기 고유의 질서를 인정하는 법칙이 있다. 체스 놀이와 비교해 보면 이 사실을 더 잘 알 수 있다… 예컨대 만약 나무로 된 체스 말들을 상아로 된 말들로 교체해도 게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체스 말의 수를 늘이거나 줄인다면 체스 게임의 문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3]

Saussure는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 맺어진 법칙이 언어의 법칙이기 때문에 개인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단어의 외양은 바꿀 수 있지만 단어들이 배열되거나 움직이는 법칙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전달자가 나는 좋은 생각이 하나 있어요.”라는 정보를 문자화하여 수신자에게 전달하기를 원한다고 합시다. 그는 위 정보 속에 있는 생각“idea”로 대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체스의 나무 말을 상아 말로 교체하는 것과 일반이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생각들/생강/생식/미각등으로 대치하거나 있어요있었어요/없어요/있을까요등으로 대치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대치는 체스 말의 수나 그 값을 변화시키는 행위와 같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막대한 혼란을 초래할 것이 분명합니다. 수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달자가 생각으로 코드화한 정보를 생각이나 “idea”등으로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들/생강/생식/미각등으로 받아서는 안 됩니다. 언어 사회는 명사를 단수로 쓸 때와 복수로 쓸 때, 동사의 시제를 현재형으로 쓸 때와 과거형으로 쓸 때, 문장의 태를 능동태로 쓸 때와 수동태로 쓸 때의 가치를 다르게 두기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정보 전달자와 수신자는 이러한 법칙 안에서만 의사소통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달자는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를 언어의 법칙에 맞게 문자화해야 하고, 수신자는 문자화 된 정보를 언어의 법칙에 맞게 해석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언어의 법칙과 성경: 성경을 해석할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정보가 문자화 되어 전달된 것이 성경입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요, 산신령이 금도끼를 전해주듯 전해 진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은 40 여 명의 사람들의 손에 의해 철자법, 문법, 그리고 논법과 같은 언어의 법칙을 따라 점진적으로 쓰인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수신자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언어의 법칙에 맞게 성경을 해독함으로써 그 안에 들어있는 정보를 바르게 받는 것입니다. C. S. Lewis는 하나님의 계시가 자연 법칙을 통해 인간에게 가시화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성육신에 빗대어 멋지게 변증했습니다. 그의 변증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정리됩니다.

(1) 동정녀의 몸속에 성자 하나님께서 입으실 육신이 씨앗으로 창조 되었다.

(2) 그 씨앗은 다음 날 바로 육신이 되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3) 엄마의 자궁 속에서 열 달의 시간을 거치며 육신으로 조직되는 과정을 거쳤다.

(4) 그 후에는 평범한 아이가 태어나는 방식으로 세상에 태어나 가시화 되었다.[4]

위의 순서에서 첫 번째 단계인 동정녀가 잉태한 것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그러나 그 기적은 또 다른 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잉태한 바로 다음 날 아이가 태어났다거나, 아이가 어른의 모습으로 태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동정녀의 몸속에서 조직된 성자 하나님의 육체는 평범한 아이들처럼 열 달이라는 시간을 보낸 후에 평범한 아이들이 태어나는 방식으로 태어났습니다. 기적이 자연 법칙을 통해 가시화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이 40여 명에게 임한 것은 기적입니다. 그러나 그 기적은 뻥튀기가 튀어나오듯 성경을 탄생시키지 않았고 철자법, 문법, 그리고 논법과 같은 언어의 법칙을 따라 서서히 문자로 가시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수신자들은 철자법에 맞추어 단어와 그 안에 들어있는 중의적 의미 등을 고려하고, 문법에 따라 동사의 태와 조사의 쓰임새 등을 인지하며, 논법을 구성하는 접속사와 동사의 시제 등을 연결하며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 해석을 검증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무시하기 때문에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잘못된 해석들이 만들어지고, 또한 무분별하게 수용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당부 드리지만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어의 법칙을 고려하는 것이 성경 해석의 모든 것이라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배경이나 시대적 상황 등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님의 조명하심과 깨닫게 하심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반드시 선행 되어야 할 것이 언어의 법칙을 고려하여 문자에 담겨 있는 순수한 의미를 꺼내는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서를 거치지 않고 만들어지는 해석은 사상누각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예를 몇 개 들어보겠습니다.

철자법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마가복음 3:17에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5]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에는 철자법이 틀린 단어가 하나 있는데, “우뢰입니다. “우뢰우레로 표기함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뢰로 표기한 이유는 우리말 우레가 한자라고 잘못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6] ‘겨우 몇 자 잘못 표기한 것이 뭐 그리 대수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겨우 몇 자 잘못 표기한 것때문에 만들어 질 수 있는 극단적 해석의 예는 심각합니다. “우레로 번역된 헬라어 브론테(βροντή)천둥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레우뢰로 표기할 경우 우뢰(雨雷)”우뢰(又賴)”를 의미하게 됩니다. 만약 우뢰(雨雷)”로 쓰일 경우에는 천둥과는 다른 비와 벼락의 뜻이 되고, “우뢰(又賴)”로 쓰일 경우 의뢰를 받은 사람이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의뢰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한자 표기 없이 우뢰의 아들로 빗대어진 야고보와 요한은 천둥과 상관없는 비와 벼락의 아들이 되기에 해석의 어려움을 만나게 되고, 혹은 의뢰 받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의뢰하는 아들이 되기에 무책임한 자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7] 이런 극단적인 해석이 만들어질리 없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바로 야고보와 요한을 무책임한 형제로 만들어 버린 한 전도사님의 설교를 들은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철자법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극단적 해석의 예입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1998년 대한성서공회가 개역 한글판에 있는 우뢰우레로 수정하여 개정개역 판으로 출간한 것은 잘한 일이라 하겠습니다.[8]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가 된 Antony Flew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성경학자들이 구약성경의 특정한 개념을 이해하려 할 때 혼자서 그것을 골똘히 생각하는 식으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해당 히브리어 단어가 사용된 용례들을 여러 맥락에서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해 검토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학문적 접근법은 여러 면에서 유년기의 나에게 지적 탐험의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9]

문법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이번에는 문법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를 보겠습니다. 주기도문을 구성하고 있는 마태복음 6:13b에는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국어사전을 보니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착하지 않음. 물질적 손해나 질병을 뜻하는 물적 악, 도덕률을 어기는 도덕 악, 불완전으로부터 일어나는 형이상학적 악의 이름.[10]

주기도문이 의미하는 이 이런 개념으로써의 악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에 사용된 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헬라어에 있는 형용사의 용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헬라어의 형용사는 (1) 한정적 용법, (2) 서술적 용법, (3) 독립적 용법으로 쓰입니다. 형용사가 한정적 용법으로 쓰일 때에는 관사+형용사+명사, 혹은 관사+명사+관사+형용사의 구조를 갖게 되며 명사의 의미를 제한합니다. 서술적 용법으로 쓰일 때에는 관사+명사+형용사, 혹은 형용사+관사+명사의 구조를 갖게 되며 명사의 상태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독립적 용법으로 쓰일 때에는 관사+형용사, 혹은 형용사의 구조를 갖게 되며 명사 대용으로 쓰입니다.[11] 이러한 형용사의 용법을 인지한 후 마태복음 6:13b를 보면 이라고 번역된 헬라어가 관사(τοῦ) + 형용사(πονηροῦ)의 구조로 되어 있어 독립적 용법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형용사는 명사의 의미로 쓰이게 되어 추상적인 개념으로써의 악이 아니라 존재자로써의 악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에 있는 은 악마를 의미하는 악한 자로 번역 되어야 맞습니다. 그래서 NIV, NLT, HCS, ISV, NET, GWT, ASV, ERV, WNT 성경 등이 “the evil one”이라고 번역한 것은 훌륭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잠시 원문 비평가이자 헬라어 학자인Daniel B. Wallace의 말을 들어봅시다.

형용사의 쓰임새는 필적할 수 없을 만한 신학적 중요성을 내포한다. 형용사는 동사를 수식할 수도 있고, 명사에 관한 것을 주장할 수도 있으며, 명사의 자리에 대신 설 수도 있다… 마태복음 6:13b이라고 번역된 형용사는 수식하고 있는 관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독립적 용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관사가 있는 것과 없는 것과의 신학적 차이는 크다. 성부께서는 그 분의 자녀를 세상의 위험이나, 재앙이나, 좋지 않는 일들과 같은 악으로부터 항상 구하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악마로부터는 항상 구하신다.[12]

이러한 사실을 기억한 후 요일 5:18b~19를 봅시다. 형용사의 독립적 용법이 잘 번역된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ὁ πονηρς)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τπονηρῷ) 안에 처한 것이며

이 구절에는 악한 자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헬라어를 보니 주기도문과 같이 관사+형용사의 구조로 되어있어 형용사의 독립적 용법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을 악마를 의미하는 악한 자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렇게 마 6:13b과 요일 5:18b~19이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마 6:16b의 번역은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논법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이제는 논법을 무시했을 경우를 보겠습니다. 4:13에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구절은 가정이나 직장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구절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액자에 들어가 벽장식 용으로 사용되는 것은 물론 예쁘게 코팅이 되어 책갈피로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이 구절에 있는 능력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문맥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고 있는 논법을 무시한 채 이 구절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한 성도가 필요 이상으로 큰 사업을 연 후에 저를 초대했습니다. 그곳에 가 보았더니 빌 4:13이 들어있는 액자가 출입구 위에 부적처럼 걸려 있었습니다. 왜 이 구절을 걸어 놓았냐고 여쭈었더니 하나님께서 사업을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을 소망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분의 생각대로 사업이 번창하지 않자 하나님을 원망하며 교회를 떠나더군요. 그 때 저에게 하셨던 말씀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업을 열었는데 잘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문맥을 이루는 논법을 벗어나 구절을 적용할 때 일어날 수 있는 폐단입니다. 13절에 있는 능력은 내 욕심대로 사업을 열었을 때 그것을 성공적으로 일구어 나갈 수 있는 힘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13절을 문맥에서 떼어내어 내 멋대로 적용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능력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질문의 답은 13절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12절에 그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어떠한 상황에도 처할 수 있는 힘이 바울이 말했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Richard R. Melick이 잘 지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13절을 문맥에서 떼어내 남용한다. 그들은 믿는 자들에게 무한한 영적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이 구절에 쓰였다고까지 짐작한다. 게다가 몇몇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행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러한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 속에도 처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하는 것이다.[13]

J. Vernon McGee도 풍자적으로 잘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당신이 원하는 것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끝없는 힘을 당신의 손에 쥐어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힘은 당신이 오직 그분 안에 있을 때에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14]

이처럼 철자법과 문법을 고려한 후에는 논법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바른 해석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근간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코란의 예: 잠시 코란에 대해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삼대 종교 중 하나인 이슬람교가 지성인들로부터 매도를 당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언어의 법칙에 위배된 철자법, 문법, 그리고 논법이 코란에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코란은 철자법은 물론 문법과 논법이 오류로 가득하여 이슬람 인들 조차도 읽을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란의 작가인 ʻAlī Daštī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코란에는 문법적 오류가 너무 많기 때문에 코란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기 위해서 기존에 있던 문법의 법칙을 바꾸어야만 했다.[15]

코란이 언어의 법칙에 따라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제대로 읽을 수 없자 기존에 있던 문법 체계를 바꿔야만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야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코란에 오류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슬람교에서 Sunnis다음으로 큰 교단이 Shiite입니다. Shiite는 약 23%의 이슬람 교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들은 코란의 문법과 논법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코란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16] 이러한 사실은 언어의 기본적인 법칙을 무시하고 쓰인 책 위에 신앙을 세운 종교가 이슬람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냅니다. 이성적인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좋게 받아들일 리 없습니다. 그래서 언어에 무척이나 민감했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코란을 이렇게 혹평했습니다.

코란을 보라. 그렇게 유치하게 꾸며진 책이 하나의 종교를 탄생시키고 그 종교는 전 세계에 보급되어 1,200년 이상이나 수천만 명의 열광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고 그들의 도덕적 이념이 되어 죽음까지도 돌보지 않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읽히고 있는 코란은 여러 번 번역되면서 개악된 부분도 있겠지만 나는 거기에서 어떤 의미나 가치가 있는 대목을 전혀 찾아보지 못했다.[17]

만약 코란을 쓴 신이 살아있다면 그는 인간들과 소통하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소통하는데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계시적이심과 동시에 논리적이시고, 초월적이심과 동시에 질서적이시기 때문입니다. 40여 명의 선진들은 성령님의 영감을 받아 성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성자 예수님에 대해서 언어의 질서를 따라 논리적이고 질서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쓴 성경은 문자이지만 살아있고, 논리적이지만 계시적이며, 초월적이지만 질서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렇게 쓰인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해독함으로 그 말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이제 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구절은 하나지만 가능한 해석은 여러 가지다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가능한 해석이라고 해서 다 옳은 해석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잘못된 해석이 있을 수 있고, 심지어는 참된 해석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능하다고 제시된 해석들을 무비판적으로 다 수용하며 너도 맞을 수 있고, 쟤도 맞을 수 있다는 태도를 버리고 그것들을 바르게 검토하여 참된 해석을 찾겠노라는 태도를 갖는 게 필요합니다. 그 첫 걸음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언어의 법칙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서양의 구조주의를 싫어하여 해체하려 했던 쟈크 데리다도 동음이의어나 이음동의어를 가지고 말장난은 했지만 언어의 법칙은 손대지 않았습니다. 언어를 심리학에 적용하여 상징계, 상상계, 실제계로 나누었던 쟈크 라캉도 언어의 법칙에는 손대지 않았습니다. 기호학자인 찰스 샌더스 퍼스도 언어의 법칙을 글을 형성하고 이해하는데 필수적 요소로 생각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언어의 법칙은 소통을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법칙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여 반드시 언어의 법칙에 맞게 바른 해석을 제시해야 할 것이고, 제시된 해석을 받은 자들은 언어의 법칙에 따라 그것들을 검토하여 바른 해석을 찾아야 함이 마땅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후 1:20~213:15를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확실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듯이 하나님의 말씀께서 문자를 입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하나님을 잘못 해석했기에 그분을 잘못 적용했듯이 문자화된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그것을 잘못 적용하고 있습니다. 두려운 사실은 이러한 현상이 초래할 수 있는 극단적인 결과는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그분께서 쓰신 대로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제시된 해석들을 바르게 검토하려는 태도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진리를 추구하는 여행길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기를 기도하며 조직 신학자 Malcolm B. Yarnell III의 말로 글을 맺겠습니다.

성경은 아무나 읽을 수 있다. 아무나 소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나 그 의미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말씀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받은 말씀이 정말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상고하며, 그 말씀이 무엇이라 하나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는 자들만이 말씀을 깨닫게 될 것이다.[18]

두 번째 글 링크: 완전한 성서해석 vs. 건전한 성서해석

추신: 진리 탐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몇 권의 책들을 추천합니다.

 (1) Charles S. Peirce, Peirce on Signs: Writings on Semiotic (North Carolina: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91)

(2) Daniel B. Wallace, Greek Grammar Beyond the Basics: An Exegetical Syntax of the New Testament, (Michigan: Zondervan, 1996)

(3) Ferdinand La Saussure, Course in General Linguistics (Illinois: Open Court Classics, 2006)

(4) Jacques Derrida, Of Grammatology (Maryland: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7)

(5) Michael H. Burer and Jeffrey E. Miller, A New Reader’s Lexicon of The Greek New Testament (Michigan: Kregel, 2008)

(6) Ronald H. Nash, Faith and Reason: Searching for a Rational Faith (Michigan, Zondervan, 1988)

 

 각주:

[1] 앤터니 플루, 존재하는 신: 신의 부재는 입증되지 않는다, 홍종락 옮김 (서울: 청림출판, 2011), 72.

[2] Robert S. Corrington, A Semiotic Theory of Theology and Philosoph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3.에서 재인용.

[3] Ferdinand La Saussure, Course in General Linguistics (Illinois: Open Court Classics, 2006), 14, 23.

[4] C. S. Lewis, Miracles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47), 72.

[5] 개역한글판.

[6] 15세기과 16세기의 옛 문헌에 울에우레가 나온다.

[7] 동음이의어에서도 나올 수 있는 실수이다. 그러나 필자는 철자법을 잘못 쓸 때 올 수 있는 예에 국한시켜 사용한다.

[8] 자세한 정보를 보기 원한다면 [http://www.bskorea.or.kr/bskorea/pr/bibkorea/bibkor_read.aspx?idx=222]를 보라.

[9] 앤터니 플루, 존재하는 신, 34.

[10] 이숭녕, 새 국어 대사전 (서울: 한국도서출판중앙회, 1997), 789.

[11] 예컨대 그(관사)+사람(명사)+(관사)+나쁜(형용사)이라는 구조는 형용사의 한정적 용법이기 때문에 그 나쁜 사람라는 뜻이 된다. (관사)+사람(명사)+나쁜(형용사)이라는 구조는 서술적 용법이기 때문이 그 사람은 나쁘다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관사)+나쁜(형용사)이라는 구조는 사람이라는 명사가 없을 지라도 독립적 용법이기 때문에 그 나쁜 존재가 된다.

[12] Willam D. Mounce, Basic of Biblical Greek Grammar: Third Edition (Grand Rapids, Michigan: Zondervan, 2009), p. 64.에서 재인용. Wallace가 한 말의 의미를 보충하자면 다음과 같다. 때때로 악이라는 형용사가 포함하고 있는 아픔이나 슬픔, 고통이나 비애 등은 우리를 더욱 더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5:3~4도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이루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좋지 않은 상황을 만날 때에 무작정 악으로부터 구하시옵소서기도하며 도망갈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당당히 맞서 싸우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나야 하는 것이다.

[13] Richard R. Melick, Philippians, Colossians, Philemon, vol. 32,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54155.

[14] Max Anders, Galatians-Colossians, vol. 8, Holman New Testament Commentary (Nashville, TN: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264.에서 재인용. 매끄러운 글의 흐름에 맞추기 위해 필자가 의역함.

[15] ʻAlī Daštī, Twenty-Three Years: A Study of the Prophetic Career of Mohammad (New York: Mazda Publisher, 2008), 51.

[16] Joseph Shafi, Unmasking Muhammad’s Life: Behind The Veil, Vol. 2, (Maltland, Florida: Xulon Press, 2008), 118.

[17] 쇼펜하우어, 인생론 에세이: 사랑은 없다, 이동진 옮김 (서울: 해누리, 2012), 121.

[18] Yarnell, Malcolm. “Pneumatology.” Lecture,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Fort Worth, TX, October 2, 2008.

페이스 북: https://www.facebook.com/sanghwan.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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