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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7/2014 / Sanghwan A. Lee

마태복음 1:16b의 어원적, 문법적, 문맥적 접근으로 고찰하는 예수님의 성육신

문제제기: 여호와의 증인 한 분께서 마 1:16b를 예로들어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글을 보내주셨다.  16b에 예수님의 잉태를 묘사하는 헬라어가 발생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게나오(γεννάω)로 쓰였기 때문이란다.  타당한 논증일까?  아니다.  네 가지의 이유에서 비판 받아 마땅하다.  (1) 예수님의 탄생을 나타내는 16b의 문장 구조가 2절부터 흐르고 있는 문맥적 구조와 판이하게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2) 16b에 있는 관계대명사가 여성형으로 쓰인 것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3) 게나오에 담겨 있는 중의적 의미를 간과했고, (4) 16b에 사용된 게나오 동사의 태가 문맥에 등장하는 다른 게나오 동사의 태와 다르다는 것을 직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이것들을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자.

(1) 문장 구조: 2절부터 16절 까지 흐르고 있는 일관된 문장 구조가 있다.  “남자 아버지가 남자 아들을 낳다”는 구조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다”를 시작으로 “다윗은 솔로몬을 낳다”를 거처 “야곱은 요셉을 낳다”까지 일관되게 나온다.  그래서 문장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위해서는 16b에 있는 예수님의 탄생도 “요셉이 예수를 낳다”가 되야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부분 만큼은 “아버지가 남자 아들을 낳다”는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16b를 보라.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는 독특한 구조로 쓰였다. “요셉이 예수를 낳다”도 아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낳다”도 아니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이다.  39번이나 연속적으로 등장하던 “남자 아버지가 남자 아들을 낳다”는 구조가 예수님의 잉태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사라진 것이다.  A. T. Robertson은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며 말했다.

[본문을 이루는 문장 구조는] 16a까지 규칙적인 패턴으로 쓰이다가 예수님의 탄생을 묘사하는 16b에서 급격하게 바뀐다.[1]

마태는 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문화와 언어 사용법을 알아야 한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여성이 자녀를 낳는다고 표현하는 지라 남자가 남자를 낳는다는 마태복음의 표현은 이상하기만 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남자의 정자가 생명을 탄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가 남자를 낳는다고 표현했던 것이다.  가장 적합한 비유는 곡물을 생성하기 위해 필요한 필요한 씨앗과 밭의 관계일 것이다.  아무리 땅이 비옥해도 씨를 뿌려야 곡물이 나오는 것처럼 남자도 생명의 씨앗들을 여자의 안에다가 뿌려야 생명이 잉태된다고 유대인들은 생각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생각은 성경에 근거한다.  구약에 남자의 정자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가 곡식의 씨를 의미하는 제라(זֶ֫רַע)이고[2], 신약에도 남자의 정자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단어가 곡식의 씨를 의미하는 스페르마(σπέρμα)[3]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아버지가 아들을 낳다”는 표현은 아버지의 정자가 아들이 잉태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라는 의미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던 마태는 문맥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맞추어 “요셉은 예수를 낳고”라고 쓸 수 없었다.  예수님의 잉태에는 요셉의 정자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David Stern의 말은 이러한 사실을 간단하게 담아낸다.

“X가 Y의 아버지다”의 문장 구조가 바뀌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연적인 방법으로 잉태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4]

Cornelius à Lapide는 이러한 사실을 조금 더 자세히 풀어서 설명한다.

마태는 “요셉이 예수를 낳다”라고 쓰거나 “마리아가 예수를 낳다”고 쓰지 않았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썼다.  이러한 문법적 차이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전달한다: (1) 예수님은 자연적이 아니 초자연적 발생을 통해 마리아로부터 나왔고, (2) 요셉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처녀 마리아를 통하여 나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처녀인 마리아의 합법적 남편이라는 것 외에 예수님과 아무런 생물학적 관계가 없다고 봐야 한다.[5]

마태는 이러한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서 문법의 구조를 일부러 변화시킨 것이다.

(2) 여성형 관계대명사: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마태는 이러한 사실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16b에 헤스(ἧς)라는 여성형 관계대명사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보시다시피 16b는 누구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는지를 밝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 있는 관계대명사가 여성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은 오직 마리아와만 연결되어 있음을 천명한다.[6]  요셉의 육체적 개입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Ulrich Luz는 이렇게 말했다.

마리아를 의미하는 대명사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동정녀 탄생을 생각하게 한다.[7]

Craig Blomberg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16절에 여성형으로 쓰인 대명사는 요셉이 예수님의 생리적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과 오직 마리아만이 예수님의 생리적 어머니임을 밝힌다.[8]

마태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그 어떠한 이의를 달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작은 관계대명사 하나까지도 주의 깊게 선별했던 것이다.

(3) 게나오에 담긴 중의적 의미: 이러한 사실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접근이 있다.  게나오에 담겨있는 동음이의적 특성을 인지하여 본문을 바라보는 것이다.  게나오는 위에 설명한 씨앗의 개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되다”는 의미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9]  쉽게 말해서 “A 게나오 B”은 “A가 B의 부모가 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영어 KJV성경은 “A begat B”라는 표현을 택한 반면 ESV나 NET성경은 “A was the father of B”라고 번역했다.  게나오에 있는 동음이의적 뜻을 고려하여 다르게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의거하여 Raymond E. Brown가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문장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게나오가 ‘A가 B의 부모가 되다’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요셉이 예수를 낳다’라고 기록해도 동정녀의 탄생을 부인하는게 아니다.[10]

그렇다면 왜 마태는 게나오의 중의적 쓰임새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맥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깨는 독특한 문장 구조로 예수님의 탄생을 묘사한 것일까?  게나오에 담겨있는 동음이의적 특성상 요셉의 씨앗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해석의 불필요한 가능성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KJV성경도 이러한 마태의 의도에 충실하게 16b를 “Jacob begat Jesus”대신 “of whom Jesus was born”이라 번역했고, ESV와 NET도 “Jacob was the father of Jesus”대신 “by whom Jesus was born”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마태는 단어의 동음이의적 특성까지도 치밀하게 고려하여 신중하고 노련하게 글을 썼던 것이다.

(4) 태의 변화: 이번에는 태의 변화를 보자.  하나의 문맥으로 흐르고 있는 2절부터 16절에는 40 번의 게나오가 등장한다.  특이한 점은 39번은 능동태로 쓰였지만 1번은 수동태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 한 번이 어디일까?  그렇다.  예수님의 잉태를 묘사하는 부분이다.  Warren Carter의 말을 들어보자.

16절에 있는 예수님의 잉태를 묘사할 때 쓰인 수동태 동사형 게나오는 문맥에 39번이나 쓰인 능동태 구조를 깨버린다.[11]

그렇다.  2절부터 16a에 등장하는 게나오는 전부다 능동태 형으로 쓰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을 묘사하는 16b만큼은 수동태가 쓰였다.  39번이나 평범한 인간의 탄생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된 에게네센(ἐγέννησεν)이 예수님의 탄생에서는 에게네떼(ἐγεννήθη)가 된 것이다.  이것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다.  헬라어에서 이러한 태의 변화는 상당한 신학적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신약학 교수이자 헬라어 학자인 Donald Hagner까지도 이 부분을 가리켜 “족보에 담겨있는 가장 큰 충격”[12]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명시한다.  잠시 헬라어의 수동태 용법이 담을 수 있는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헬라어에는 주어 없이 수동태가 쓰일 수 있는 8개의 상황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능동적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다.[13]  물론 하나님을 주어로 사용하여 동사를 능동태로 표기할 수도 있지만 유대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함을 사용하기를 꺼려하는 태도로 인하여 이런 문법 형태가 만들어 졌다.[14]  유대인들은 능동태 동사를 사용할 때 불가피하게 사용해야 하는 주어로써의 하나님의 존함을 수동태 동사를 사용함으로 생각시킬 수 있는 문법 형태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수동태를 가리켜 “신적 수동태,” 혹은 “신학적 수동태”라고 부른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함이 테트라그라마톤(τετραγράμματον)[15]으로 표기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강력히 지지한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 해 두고 16b를 보라.  게나오의 수동태형인 에게네떼(ἐγεννήθη)가 주어 없이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ἧς:여성형 관계대명사)에게서(ἐξ:전치사)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오니라(ἐγεννήθη:수동태)

‘요셉이 주어로 예수를 낳다’도 아니고 ‘마리아가 주어로 예수를 낳다’도 아니라 ‘관계대명사인 마리아로부터 주어 없는 신적 수동태적 행위에 의해 예수님께서 나오셨다’는 말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예수님의 잉태하심은 하나님의 독자적 행위라는 뜻이다.  요셉과 마리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어로 행하신 독자적 일이라는 말이다.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18절을 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예수님께서 성령에 의해 잉태 되셨다고 증거되어 있다.  그러므로 16절의 에게네떼(ἐγεννήθη)는 분명한 신적 수동태인 것이다. 그래서 Jack Kingsbury는

마태는 16b에서 신적 수동태 동사를 사용한다.  이것은 독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신적 행동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잉태하셨다는 것을 의미하기 위함이다.[16]

고 말함과 동시에 16b는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고 제시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신적 행동에 의해서] 태어나셨다.[17]

예수님의 잉태는 하나님의 신적 행위였던 것이다.  마태는 이러한 사실을 규명하기 위하여 일부러 신적 수동태를 사용하여 16b를 기술한 것이다.

 

맺으며: 우리가 위에서 알아보았듯이 게나오라는 동사 하나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  문장 속에서 어떠한 태로 쓰이고, 어떤 관계 대명사로 수식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가 된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반증하기 위해 만들었던 논증은 “게나오로 묘사되는 잉태는 오직 남녀의 성적 결합에 의한 잉태만을 의미한다”는 전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서부터 시작한 불건전한 논증이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란 제한된 정보, 불충분한 자료, 대표성을 결여한 사례 등 특수한 경우를 근거로 하여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오류를 뜻한다.  게나오의 쓰임새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던 그는 오직 한 가지의 용례만을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여 그것으로부터 논증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시도는 잘못된 전제 위에 논증을 세워 나가는 사상누각적 모순 전제의 오류로 발전하게 된다.  아무리 세워지는 논증이 튼튼해도 그 논증이 기초한 전제 자체가 잘못 되었다면 아무 쓸모가 없지 않은가?  우리가 만약 성경을 펴고 솔직하게 읽어본다면, 형태소에서부터 단어와 문장, 그리고 문단과 문맥을 고려하여 천천히 정확하게 읽어본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     영원 전부터 존재해 오신 성자 예수님께서 성령에 의해 잉태하사 죄 없으신 완벽한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
  •     그러므로 나 같은 죄인을 위한 흠 없고 온전한 제물이 되사 대속적 죽음을 이루실 수 있으셨다는 사실.
  •     그러므로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나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

이러한 아름다운 사실은 우리의 손에 성경이 들려 있는 한 절대로 부인되거나 부정될 수 없는 진실이다.

 

[1] A.T. Robertson, Word Pictures in the New Testament (Nashville, TN: Broadman Press, 1933), Mt 1:2.  문장의 매끄러운 의미를 위하여 필자가 의역함.

[2] Francis Brown, Samuel Rolles Driver, and Charles Augustus Briggs, Enhanced Brown-Driver-Briggs Hebrew and English Lexicon (Oak Harbor, WA: LRS, 2000), 282.; Wilhelm Gesenius and Samuel Prideaux Tregelles, Gesenius’ Hebrew and Chaldee Lexicon to the Old Testament Scriptures (Bellingham, WA: LBS, 2003), 254–255.

[3] William Arndt, Frederick W. Danker, and Walter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0), 937. 헬라어 스페르마(σπέρμα)에서 정자를 의미하는 영어의 Sperm이 나왔음도 유념하라.

[4] David H. Stern, Jewish New Testament Commentary : a Companion Volume to the Jewish New Testament, electronic ed. (Clarksville: Jewish New Testament Publications, 1996), Mt 1:16.

[5] Cornelius à Lapide, The Great Commentary of Cornelius à Lapide: S. Matthew’s Gospel—Chaps. 1 to 9, trans. Thomas W. Mossman, vol. 1, Third Edition. (London: John Hodges, 1887), 14.

[6] Albert L. Lukaszewski, Mark Dubis, and J. Ted Blakley, The Lexham Syntactic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Expansions and Annotations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1), Mt 1:16.

[7] Ulrich Luz, Matthew 1–7: a Commentary on Matthew 1–7, ed. Helmut Koester, Rev. ed., Hermeneia—a Critical and Historical Commentary on the Bible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2007), 85.

[8] Craig Blomberg, Matthew, vol. 22,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2), 56.

[9] Ibid., 193.

[10] Raymond E. Brown, The Birth of the Messiah: a Commentary on the Infancy Narratives in the Gospels of Matthew and Luke, New Updated Edition. (New York;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93), 61–62.  문장의 매끄러운 흐름을 위해서 필자가 의역함.

[11] Warren Carter, Matthew and the Margins: a Sociopolitical and Religious Reading, vol. 204,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Supplement Series (Sheffield, England: Sheffield Academic Press, 2000), 65.; Barclay Moon Newman and Philip C. Stine도A Handbook on the Gospel of Matthew,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2), 18.에서 이 사실을 지적한다.

[12] Donald A. Hagner,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3a, Matthew 1-13 (Dallas, Texas: Word Books, 1993), 12.

[13] 이러한 수동태의 종류에 대해서 자세히 알기 원한다면 Daniel B. Wallace의 Greek Grammar Beyond the Basics: An Exegetical Syntax of the New Testament, 1996: 435~438을 보라.

[14] Max Zerwick, Biblical Greek Illustrated by Examples, vol. 114, English ed., adapted from the fourth Latin ed., Scripta Pontificii Instituti Biblici (Rome: Pontificio Istituto Biblico, 1963), 76.

[15] “네개의 단어”라는 뜻으로 “יהוה”로 표기된다.

[16] Jack Dean Kingsbury, Matthew As Stor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86), 149.

[17] Jack Dean Kingsbury, Matthew: Structure, Christology, Kingdom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89),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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