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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0/2014 / Sanghwan A. Lee

요나서는 허구인가?

문제 제기: 얼마 전 한 목사님께서 참된 설교자라고 소문이 나있기에 설교를 들어보라는 권유를 받고 몇 편을 들었다가 크게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 한 대형 교회에 초대를 받은 목사님께서 히브리어로 창세기 1:1을 칠판에 쓴 후에 잘못 푸는 게 아닌가? 1절에 등장하는 주어인 엘로힘(אֱלֹהִים)이 바라(בָּרָא) 동사의 수(數)와 일치하기 않기 때문에 바라 동사의 주어는 창세기 1:1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히브리어의 기초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만이 할 수 있는 소리이다. 히브리어에는 복수 명사를 단수 동사가 받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1] 물론 목사가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대중들 앞에서 강의할 때에는 반드시 진리만을 말해야 함이 옳다는 말이다.
오늘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경험했다. 한 성도님께서 “신학 펀치”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신학자가 히브리어 사용법을 근거로 요나서를 허구로 판명했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요나서 1:17, 2:10에 있는 물고기와 2:1에 있는 물고기의 성(性)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단다. 히브리어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요나서 1:17과 2:10에 등장하는 물고기는 히브리어로 다그(דָּג)라고 하는 남성형 명사인데, 2:1에 있는 물고기는 다가(דָּגָה)라고 하는 여성형 명사이다. “신학 펀치”에 나온 신학자는 이를 근거로 ‘요나를 삼키고 뱉은 물고기는 수컷인데, 요나가 뱃속에서 기도한 물고기는 암컷으로 되어 있으니 요나서는 허구이다’라고 판명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

문법적 사례: 히브리어 명사에는 두 개의 성이 있다. 남성형과 여성형이다. 명사에 성이 없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가 쉽게 빠지기 쉬운 함정은 남성형 명사는 항상 남성/수컷을 의미하고, 여성형 명사는 여성/암컷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남성형 명사들은 성을 떠나 ‘복수’나 ‘집단에 속한 단수’를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고, 여성형 명사들은 ‘낱개로써의 단수’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2] 위에 언급한 확실한 예를 들자면 요나 1:3~5와 왕상 9:26에 등장하는 단수 “배”의 사용법일 것이다. 두 구절들을 비교해 보자. 우선 요나 1:3~5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אֳנִיָּה : 여성형 단수)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אֳנִיָּה : 여성형 단수)에 올랐더라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אֳנִיָּה : 여성형 단수)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요나 1:3~5를 보면 다시스로 가는 배가 등장한다. 여기에 “배”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오니아(אֳנִיָּה)는 여성형 단수로써 ‘여자 배’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한 척의 배’를 의미한다. 그래서 단수와 복수의 개념이 철저한 영어권의 성경들(ESV, KJV, NAS, NIV, NLT, RSV, NET…)은 “a ship”으로 번역했다. 이제는 왕상 9:26을 보자.

솔로몬 왕이 에돔 땅 홍해 물 가의 엘롯 근처 에시온게벨에서 배들(אֳנִי: 남성형 단수)을 지은지라

여기에는 “배”의 남성형 단수인 오니(אֳנִי)가 쓰였다. ‘남자 배’를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다. “배들”을 의미하기 위해서 쓰인 것이다. 위에 언급했듯이 히브리어의 남성형 단수 명사들은 남자/수컷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문맥에 따라 ‘복수’를 의미하거나 ‘무리에 포함된 단수’를 의미하기 위해 쓰일 수 있다. 그래서 영어권의 NAS, ESV, RSV, NLT는 오니(אֳנִי)가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남성형이기 때문에 “a fleet of ships”라고 번역했고, KJV은 “a navy of ships”라고 번역했으며, NET와 NIV는 “ships”라고 번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나를 삼키고 뱉은 물고기가 남성형 명사로 되어있는 이유는 물고기 떼에 포함된 한 마리의 물고기를 의미하는 것이고, 요나가 뱃속에서 기도한 물고기가 여성형으로 쓰인 이유는 낱개로써의 물고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셈이다.

정황적 사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있다. 히브리어와 같은 고대의 언어들은 동물의 성이 중요하지 않은 문맥에서는 한 동물을 나타낼 때에 양성을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Jack M. Sasson이 연구하여 번역한 아카디안의 두 편지들은 이러한 사실을 명시하는 결정적인 예이다. 이 편지들을 보면 비트-아카카라는 곳에서 잡힌 사자 한 마리가 등장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사자의 근황에 대해서 쓴 야큄 아두의 첫 번째 편지는 사자를 수컷으로 표기하는 반면 두 번째 편지는 수컷과 암컷으로 표기한다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 편지의 영어 역을 보자.[3]

Previously, I had sent the following message to my lord, saying, “A lion(남성형 명사) was caught in a loft at Bit-Akkaka. My lord should write me whether this lion(남성형 명사) is to remain in the loft until my lord’s arrival or whether I should have it conveyed to my lord.” Now then, since my lord’s letter is slow to come to me and the lion(남성형 명사) has been stuck within the loft for five days now—a dog and pig were thrown to him(남성형 인칭대명사), but he(남성형 대명사) refused to eat—, I thought, “The lion(남성형 명사) might yet become depressed.” Fearing this, I have forced the lion(남성형 명사) into a wooden cage, loaded it on a boat, and had it conveyed to my lord.[4]

이번에는 두 번째 편지의 영어 역을 보자. 

A lioness(여성형 명사) was caught at night in a loft at Bit-Akkaka. The next day, when they notified me, I made my way (there). In order not to allow striking this lion(남성형 명사), I am remaining in Bit-Akkaka all day. I thought to myself, “I want to have it reach my lord in full health.” So I threw him(남성형 대명사) a [dog and] a pig, and he(남성형 대명사) killed them. I left them (there), but he(남성형 대명사) would not take them for food. I have myself written to Bida to bring (me) a wooden cage. While they were transferring the cage, on the day following, the lion(남성형 명사) died. I inspected this lioness(여성형 명사): she(여성형 대명사) was old and sickly. My lord may want to say, “they have willfully killed this lion(남성형 명사)!” If anyone had even touched this lion(남성형 명사), (may I be treated) as if I have transgressed my lord’s ban! Now then, since this lion(남성형 명사) died, I have had his(남성형 대명사) skin flayed, handing it over for tanning. This lion(남성형 명사) was old, it died from depression.[5]

보시다시피 첫 번째 편지에는 남성형 명사로 사자가 표기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편지에는 남성형 명사와 여성형 명사로 표기되어 있다. 같은 사자인데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사자의 성이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나서도 마찬가지이다. 요나서의 핵심은 물고기가 암컷이었는지 수컷이었는지가 아니다. 게다가 혼자 다니던 물고기였는지 무리와 함께 다니던 물고기었는지도 아니다. 그대신 니느웨의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또 하나의 죄인을 살리신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요나를 삼키고, 요나가 뱃속에서 기도했으며, 요나를 뱉은 한 물고기의 성이 남성과 여성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결론: 이러한 문법적, 정황적 사례를 통하여 볼 때에 물고기를 지칭하는 명사의 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요나서를 허구로 판단하는 행위는 옳지 못하다.

[1] “아이들,” “사람들,” “동물들,” “우상들”등도 단수 동사를 취하기도 한다.
[2] 때로는 정 반대로 여성형 명사가 집단에 속한 단수를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에 반드시 문맥으로 그 사용법을 규명해야 한다.
[3] 한국어에는 사자의 남성형과 여성형 명사가 없으니 성구별이 되어있는 영어의 번역을 그대로 옮기기로 한다.
[4] Jack M. Sasson의 Jonah: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Commentary, and Interpretation, vol. 24B, Anchor Yale Bible (New Haven;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8), 156–157. 편지 안의 괄호는 필자가 첨가한 것임.
[5] Ibid, 157. 편지 안의 괄호는 필자가 첨가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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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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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재환 / 3월 22 2014 11:51 오전

    안녕하세요. 좋은 내용의 블로그를 멋지게 잘 운영하시는 것 같네요. 위에 쓰신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김구원 교수님의 요나서 해석에 대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아 생각나는 내용을 간단히 적어보려고 합니다. 우선 제가 방송을 보고 이해하기로는 김구원 교수님께서 요나서를 그렇게 소개하신 것은 물고기의 히브리어 단어의 성이 다르게 나온다는 것을 결정적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요나서가 어떤 문학적인 장치들을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한 가지 예로서 물고기의 두 가지 형태를 예로 들었다고 생각이 되구요, 그 두 가지 문법적 형태에 대한 설명은 참신하고 통찰력이 있는 해석이라고 저는 생각을 했습니다. 블로그 주인님께서 소개하신 두 가지 문법적 성에 대한 설명은 다른 셈어들에서도 발견되는 사용법으로 충분히 설득력이 있고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명이라고 생각이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본문에 대한 해석, 설명, 이해가 단 한 가지만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동시에 다른 해석의 여지도 충분히 열려있다고 생각이됩니다. 결국은 김구원 교수님께서는 왜 요나서를 그렇게 보시는 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증을 하시지 않은 셈이되는데요 그 방송의 성격이나 의도상 충분하게 다룰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이됩니다. 방송에서 다루는 내용과 그 파장을 고려할 때 이런 식으로 방송 프로그램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 단점도 있다는 생각이드네요. 좋은 포인트를 지적해주신 것 같구요 좋은 블로그가 잘 운영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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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3월 22 2014 12:52 오후

      네, 좋은 답글에 감사드립니다. 형제님께서 하신 “본문에 대한 해석, 설명, 이해가 단 한 가지만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동시에 다른 해석의 여지도 충분히 열려있다고 생각이됩니다.”는 말씀에 백번 공감합니다. 그러나 그 해석이 text의 grammar, syntax, semantics에 어긋나게 만들어진 것이라면 가능성에서 제외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제 글의 취지는 히브리어의 단어 사용법에 근거하여 요나의 역사성을 부인할 수 없음을 논증하여 잘못 열린 해석 가능성의 문을 닫으려는 것 뿐이었답니다. 긴 글을 읽어주시고 또한 답글 까지 달아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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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홍택 / 3월 24 2014 6:51 오전

      김구원 교수님께서 차라리 처음부터, ‘저자가 역사적 사실을 표현함에 있어서 이러한 문학적 장치(‘남성형을 사용함으로써 죽음을, 여성형을 사용함으로써 생명을’)를 사용하여 감동의 깊이를 깊게하였다고 하였으면 좋았을 것을…
      마치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듯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일은 허구라는 듯한 인상을 주는 발언을 하신 듯 합니다. 물론 나중에는 역사적 사실이 문학의 옷을 입었다는 궁색한 변명을 뒤늦게 하긴 하셨지만, 처음에 오해의 여지가 있는 듯한 말씀을 하신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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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김재환 / 3월 22 2014 5:41 오후

    네, 감사합니다. 제가 애초에 말씀드리려 했던 것은 김구원 교수님께서 “히브리어의 단어 사용법에 근거하여 요나의 역사성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김구원 교수님의 물고기의 두 가지 형태 해석이 “text의 grammar, syntax, semantics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블로그 운영자님께서 소개해주신 nomen unitatis 나 Jack Sasson의 설명도 좋지만, 김구원 교수님이 소개하신 것처럼 정말 여성형 물고기로 이해하는 것도 좋은 해석인 것 같으며 grammar, syntax, semantics 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이 되네요. 애초에 그렇게 이해하셨던 성도님이 그렇게 이해하시게 된 것은 아마 프로그램 기획자 측의 잘못이 크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성경의 문학적 성격이나 역사성에 대한 배경 지식과 논의들에 대한 소개가 없이 불쑥 이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결코 좋은 결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좋은 의도로 제작된 프로그램이 프로그램 자체의 한계로 인해 진의를 올바로 전달하지 못하고 또 다른 오해를 낳는 것 같은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에 글을 적었습니다. 아마 김구원 교수님은 프로그램에 나오셔서 말씀하신 것 이외에도 더 많은 근거들을 가지고 그렇게 판단을 하시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좋은 논의의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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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3월 22 2014 6:07 오후

      네, 좋은 의견을 나눠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김 교수님께서 그런 방향으로 의도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방송을 본 많은 성도들이 회의적이 된지라 제가 그 부분에 대해서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그리고 제 짧은 소견으로는 교수님의 접근법은 여전히 text의 grammar, syntax, semantics에 어긋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프로그램 기획자 측에서 교수님의 설명을 잘못 편집해서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아마 김구원 교수님은 프로그램에 나오셔서 말씀하신 것 이외에도 더 많은 근거들을 가지고 그렇게 판단을 하시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신다는 형제님의 생각에 저도 동의합니다.

      제가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위의 본 글을 김 교수님을 향한 인신 공격으로 보지 마시고 방송을 보고 회의적 태도를 갖게된 성도들에게 제시된 하나의 가능성으로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재환 형제님, 외람된 이야기지만 글에 묻어나는 형제님의 인품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형제님의 글을 읽다보니 제 글을 변증하고 싶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형제님을 만나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 다시 한 번 좋은 의견에 감사드리며 이토록 신사적으로 다가와 주셔서 또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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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이학재 교수 / 3월 23 2014 3:47 오전

    김재환씨가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김구원 교수의 전체를 보지 못하는 군요. 여기 이상환 씨는 정말 훌륭한 지적을 했습니다. 저는 모든 사상의 근저를 밝히고자 합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김구원의 성경관 (묻는다).
    “창세기는 100% 인간의 문학이다”?
    과연 고대근동의 지식이 없으면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김구원은 방송을 통하여, 창세기 신화적 배경을 이야기 한다.

    1. 인간의 신화가 성경보다 먼저 선례한다? (김구원 주장)
    신화는 인간적인 것이고 구전된 것이며 근동신화가 먼저 일어났고 기록되어, 신화를 통하여 성경저자가 성경을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창세기 저자가 다른 신화들을 인지하고 반응하면서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 신화들을 알면 창세기의 메시지를 더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드시 그럴까?
    -그러나 이 말은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계시적인 측면을 약화시킨다. 신화와 유사성은 결과론적인 것이지 원인론 적인 것은 아니다. 즉 이 신화를 통해서 성경을 기록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신화를 알아야 성경을 안다”는 그의 주장은 철저하게 인문주의적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문학적인 안경으로만 성경을 보려는 시도임이 분명하다.
    2. 따라서 창세기는 인간의 100% 저작물이다? (김구원 주장)
    즉 성경을 통하여 문학적인 메시지를 찾는다고 한다. “창세기 저자는 고대 근동에 영향을 받아 100% 인간 저작물로 성경을 기록했다. 그런데 성경을 기록할 때 성령이 역사함으로 100%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다”라고 설명한다. 이 변증법적 주장은 100% 인간이시며, 동시에 100%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성에 해당되는 것이지, 어떻게 창세기가 100% 인간의 저작물이며, 100% 성령의 영감이라는 말이 어울리는가?
    -영감론에 대해서 다시 질문해보아야 한다. 영감설에는 기계적 영감설이 있고, 역동적 영감설-즉 성경기자들이 다양한 자료들을 배경으로 성경을 기록하였다는 것이며, 성경의 오류발생을 인정하는 관점인데 거의 이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로, 글로, 강의로, 성경의 오류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기적 영감성을 분명히 주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방법은 웨스트민스트 구약교수로 있다가 제명된 Peter Ennssms 성육신 관점 혹은 비유(Incarnational analogy)라고 하는데, 바로 이 근거에서 시작된 것이다(100% 인간 문학의 작품이 100%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영감, 18쪽).
    3. 끝으로 인간론에 대해서
    김구원은 인간은 “하나님의 성소의 우상”이라고 한다. 이것은 정말 문제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닮음이고, 또한 왕과 같은 존재이지, 인간이 하나님의 우상인가? 이것은 고대근동지식이 없이는 성경을 이해할 수 있나?는 그의 주장과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우상”이라는 말과 어떻게 동일해야 하는가? 고대근동의 눈으로만 성경이 보이는가?
    결론 성경은 고대근동 지식없으면 성경을 이해할 수 없는가? 이것은 순서가 바뀐 것이다. 또한 영감론 역시 근동지식을 가지고 영감을 받은 것으로 말할 수 없다. 성경관 역시 철저하게 인문학적, 근동학적인 입장으로 창세기를 근동에 영향 받은 문학책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김구원의 생각은 피트앤즈 교수 밑에서 사사 받으면서 그리고 그가 저술한 Inspriration and Incarnation이라는 책을 번역, 하면서 생각이 동일함을 보여준다. 피트앤즈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웨스트민스트 교수에서 제명되었다. 김구원의 학문적 경향과 또한 “성육신적인 방법”은 바로 피트엔즈에서 차용한 앵무새 같은 고백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는 보수신학에서 떠났다. 그렇다면 김구원은?
    아래 참조. (아래 발췌)
    첫째, 비판가들은 엔즈 교수가 성경의 인간적 특징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강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이 ‘정확무오한 영감된 말씀’이라는 것을 실제적으로 부인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한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총장 릴백 박사(Peter Lillback)는 지난 4월 1일 특별 채플 시간에 엔즈 교수의 책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제1장을 위배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엔즈 교수의 책이 구체적으로 제1장의 어느 부분을 위배하는지에 대한 언급은 피했으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이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본질과 권위를 강조하는 반면 성경의 인간적 특징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에 대한 릴백 총장(또한 이사회의 다수, 그리고 이들의 결정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의 불만이 엔즈 교수가 지나치게 성경의 인간적 특징을 강조한 나머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장에 명시된 ‘정확무오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본질을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엔즈는 이런 비판에 대해 자신의 책에서 성경의 신적 특징(divine nature)을 좀 더 강조하지 못한 점은 유감이나, 자신의 책은 처음부터 복음주의자들의 성경관에서 간과되어온 성경의 인간적인 특징들을 다루고 그것을 기존의 복음주의 성경관과 조화시키려는 것이었음을 상기시켰다. 엔즈는 자신의 책 1장에서 성경의 인간적 특징들을 나열하고 그것들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성육신 유비를 사용한다. 성육신 유비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100% 인간인 동시에 100% 하나님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100%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100% 인간의 책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성경이라는 주장이다. 육화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천상의 언어가 아니라, 당시 계시의 대상이었던 이스라엘의 언어와 문화, 세계관을 통해 기록되었고, 나아가 당시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 문화권의 일부였으므로 성경의 언어, 문화, 세계관이 고대 근동의 그것들과 유사성을 가지는 것은 성육신 계시의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이다. 또한 엔즈에 따르면 이런 ‘육화된 말씀’은 우리와 소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기존의 복음주의 성경 영감설을 부정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엔즈는 복음주의자들이 ‘영감’ 혹은 ‘정확무오’에 대한 계몽주의적 선이해를 가지고 그것에 성경을 끼워 맞추려 한다고 꼬집는다. 엔즈는 ‘영감’ 혹은 ‘정확무오’라는 교리적 언어를 성경의 성육신적 실제에 근거해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비판가들은 엔즈 교수의 책이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엔즈는 그의 책 2장에서 ‘신화’를 ‘인생의 궁극적 문제들에 대답하는 고대인의 근대 이전의, 과학 이전의 방법’이라고 정의한 후, 창세기의 처음 부분이 그런 의미에서 신화적 성격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비판가들은 이런 설명에 대해 엔즈가 창세기 처음 부분의 역사성을 부인한다고 발끈한다. 이에 대해 엔즈는 자신의 책에서 창세기 창조 기사가 ‘기본적인 역사적 참조점’(basic historical referential nature)을 가진다는 사실을 좀 더 자주 강하게 강조하지 못한 점을 유감으로 생각하지만 자신이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엔즈가 강조하는 바는 창세기에 사용된 역사 서술의 성격이다. 창세기에서 보인 역사 서술 방법은 오늘날 신문기자가 기사를 쓰듯 하나님의 천지창조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한 천지창조의 과정(역사적 실재)을 창세기 기자는 자신의 신화적 세계관이 반영된 문학 언어를 통해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런 계시의 성육신 과정이 인간과의 소통을 위해 자신을 그들의 제한적인 문화와 언어 속으로 낮추신 의도적인 사랑의 표현이었다면, 인간 저자들에게는 모국어 구사와 같이 다분히 무의식적 과정이었을 것이다. 엔즈 교수가 창세기를 ‘신화적’이라고 말했을 때 그의 초점은 천지창조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소통을 위해 천한 인간 문화의 옷을 입기를 마다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있는 것이다.
    셋째, 피터 엔즈가 비판받는 세 번째 이유는 성경의 모순적인 부분들을 조화하여 설명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엔즈 교수는 성경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성경의 본질로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판가들은 엔즈가 구약성경의 소위 ‘문제’들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9조에 나오는 해석 원리를 근거로 성경에 모순되어 보이는 구절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서로 조화되도록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때 강조되는 것은 성경의 궁극적 저자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고 그분은 절대로 자기모순적일 수 없다는 신학적인 명제이다. 이에 대해 엔즈 교수는 성경에 다양한 신학적 목소리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일종의 긴장 관계를 형성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경이 인간의 실존과 무관한 ‘철학적인 개념’으로서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질구질한 역사에 큰 사랑으로 깊이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엔즈의 설명에 따르면 인생의 문제가 여러 가지로 복잡한 것처럼 그분의 역사적 계시도 단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 문제에 해답으로 주신 하나님의 계시에 그런 인생의 복잡성이 반영되는 것은 계시의 성육신성에 필연적 귀결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성경에 내재하는 신학적 다양성은 성경이 오류임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이 우리의 못난 현실 속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고통당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역동적인 하나님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엔즈 교수는 이런 신학적 다양성에 다소 실망하는 사람들에 대해 ‘서로 화해될 수 없는 세계관들’이 공존하는 성경을 주신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임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우리 신앙(혹은 신학)의 출발은 특정 도그마가 아니라 성경 말씀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나는 말한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100% 문학작품으로 보지는 않는다. 문학적 요소가 있지만, 나는 말한다. 성경은 100% 영감된 계시의 말씀이다. 신학의 대상으로 나의 이성을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이 우선되어야 하는 책이다. 문학과는 차원이 다르다. 따라서 문학작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성경은 문학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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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학재 교수 / 3월 23 2014 3:53 오전

      김구원의 성경관 (묻는다).
      “창세기는 100% 인간의 문학이다”?
      과연 고대근동의 지식이 없으면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김구원은 방송을 통하여, 창세기 신화적 배경을 이야기 한다.

      1. 인간의 신화가 성경보다 먼저 선례한다? (김구원 주장)
      신화는 인간적인 것이고 구전된 것이며 근동신화가 먼저 일어났고 기록되어, 신화를 통하여 성경저자가 성경을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창세기 저자가 다른 신화들을 인지하고 반응하면서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 신화들을 알면 창세기의 메시지를 더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드시 그럴까?
      -그러나 이 말은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계시적인 측면을 약화시킨다. 신화와 유사성은 결과론적인 것이지 원인론 적인 것은 아니다. 즉 이 신화를 통해서 성경을 기록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신화를 알아야 성경을 안다”는 그의 주장은 철저하게 인문주의적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문학적인 안경으로만 성경을 보려는 시도임이 분명하다.
      2. 따라서 창세기는 인간의 100% 저작물이다? (김구원 주장)
      즉 성경을 통하여 문학적인 메시지를 찾는다고 한다. “창세기 저자는 고대 근동에 영향을 받아 100% 인간 저작물로 성경을 기록했다. 그런데 성경을 기록할 때 성령이 역사함으로 100%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다”라고 설명한다. 이 변증법적 주장은 100% 인간이시며, 동시에 100%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성에 해당되는 것이지, 어떻게 창세기가 100% 인간의 저작물이며, 100% 성령의 영감이라는 말이 어울리는가?
      -영감론에 대해서 다시 질문해보아야 한다. 영감설에는 기계적 영감설이 있고, 역동적 영감설-즉 성경기자들이 다양한 자료들을 배경으로 성경을 기록하였다는 것이며, 성경의 오류발생을 인정하는 관점인데 거의 이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로, 글로, 강의로, 성경의 오류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기적 영감성을 분명히 주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방법은 웨스트민스트 구약교수로 있다가 제명된 Peter Ennssms 성육신 관점 혹은 비유(Incarnational analogy)라고 하는데, 바로 이 근거에서 시작된 것이다(100% 인간 문학의 작품이 100%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영감, 18쪽).
      3. 끝으로 인간론에 대해서
      김구원은 인간은 “하나님의 성소의 우상”이라고 한다. 이것은 정말 문제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닮음이고, 또한 왕과 같은 존재이지, 인간이 하나님의 우상인가? 이것은 고대근동지식이 없이는 성경을 이해할 수 있나?는 그의 주장과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우상”이라는 말과 어떻게 동일해야 하는가? 고대근동의 눈으로만 성경이 보이는가?
      결론 성경은 고대근동 지식없으면 성경을 이해할 수 없는가? 이것은 순서가 바뀐 것이다. 또한 영감론 역시 근동지식을 가지고 영감을 받은 것으로 말할 수 없다. 성경관 역시 철저하게 인문학적, 근동학적인 입장으로 창세기를 근동에 영향 받은 문학책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김구원의 생각은 피트앤즈 교수 밑에서 사사 받으면서 그리고 그가 저술한 Inspriration and Incarnation이라는 책을 번역, 하면서 생각이 동일함을 보여준다. 피트앤즈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웨스트민스트 교수에서 제명되었다. 김구원의 학문적 경향과 또한 “성육신적인 방법”은 바로 피트엔즈에서 차용한 앵무새 같은 고백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는 보수신학에서 떠났다. 그렇다면 김구원은?
      아래 참조. (아래 발췌)
      첫째, 비판가들은 엔즈 교수가 성경의 인간적 특징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강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이 ‘정확무오한 영감된 말씀’이라는 것을 실제적으로 부인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한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총장 릴백 박사(Peter Lillback)는 지난 4월 1일 특별 채플 시간에 엔즈 교수의 책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제1장을 위배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엔즈 교수의 책이 구체적으로 제1장의 어느 부분을 위배하는지에 대한 언급은 피했으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이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본질과 권위를 강조하는 반면 성경의 인간적 특징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에 대한 릴백 총장(또한 이사회의 다수, 그리고 이들의 결정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의 불만이 엔즈 교수가 지나치게 성경의 인간적 특징을 강조한 나머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장에 명시된 ‘정확무오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본질을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엔즈는 이런 비판에 대해 자신의 책에서 성경의 신적 특징(divine nature)을 좀 더 강조하지 못한 점은 유감이나, 자신의 책은 처음부터 복음주의자들의 성경관에서 간과되어온 성경의 인간적인 특징들을 다루고 그것을 기존의 복음주의 성경관과 조화시키려는 것이었음을 상기시켰다. 엔즈는 자신의 책 1장에서 성경의 인간적 특징들을 나열하고 그것들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성육신 유비를 사용한다. 성육신 유비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100% 인간인 동시에 100% 하나님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100%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100% 인간의 책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성경이라는 주장이다. 육화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천상의 언어가 아니라, 당시 계시의 대상이었던 이스라엘의 언어와 문화, 세계관을 통해 기록되었고, 나아가 당시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 문화권의 일부였으므로 성경의 언어, 문화, 세계관이 고대 근동의 그것들과 유사성을 가지는 것은 성육신 계시의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이다. 또한 엔즈에 따르면 이런 ‘육화된 말씀’은 우리와 소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기존의 복음주의 성경 영감설을 부정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엔즈는 복음주의자들이 ‘영감’ 혹은 ‘정확무오’에 대한 계몽주의적 선이해를 가지고 그것에 성경을 끼워 맞추려 한다고 꼬집는다. 엔즈는 ‘영감’ 혹은 ‘정확무오’라는 교리적 언어를 성경의 성육신적 실제에 근거해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비판가들은 엔즈 교수의 책이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엔즈는 그의 책 2장에서 ‘신화’를 ‘인생의 궁극적 문제들에 대답하는 고대인의 근대 이전의, 과학 이전의 방법’이라고 정의한 후, 창세기의 처음 부분이 그런 의미에서 신화적 성격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비판가들은 이런 설명에 대해 엔즈가 창세기 처음 부분의 역사성을 부인한다고 발끈한다. 이에 대해 엔즈는 자신의 책에서 창세기 창조 기사가 ‘기본적인 역사적 참조점’(basic historical referential nature)을 가진다는 사실을 좀 더 자주 강하게 강조하지 못한 점을 유감으로 생각하지만 자신이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엔즈가 강조하는 바는 창세기에 사용된 역사 서술의 성격이다. 창세기에서 보인 역사 서술 방법은 오늘날 신문기자가 기사를 쓰듯 하나님의 천지창조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한 천지창조의 과정(역사적 실재)을 창세기 기자는 자신의 신화적 세계관이 반영된 문학 언어를 통해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런 계시의 성육신 과정이 인간과의 소통을 위해 자신을 그들의 제한적인 문화와 언어 속으로 낮추신 의도적인 사랑의 표현이었다면, 인간 저자들에게는 모국어 구사와 같이 다분히 무의식적 과정이었을 것이다. 엔즈 교수가 창세기를 ‘신화적’이라고 말했을 때 그의 초점은 천지창조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소통을 위해 천한 인간 문화의 옷을 입기를 마다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있는 것이다.
      셋째, 피터 엔즈가 비판받는 세 번째 이유는 성경의 모순적인 부분들을 조화하여 설명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엔즈 교수는 성경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성경의 본질로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판가들은 엔즈가 구약성경의 소위 ‘문제’들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9조에 나오는 해석 원리를 근거로 성경에 모순되어 보이는 구절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서로 조화되도록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때 강조되는 것은 성경의 궁극적 저자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고 그분은 절대로 자기모순적일 수 없다는 신학적인 명제이다. 이에 대해 엔즈 교수는 성경에 다양한 신학적 목소리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일종의 긴장 관계를 형성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경이 인간의 실존과 무관한 ‘철학적인 개념’으로서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질구질한 역사에 큰 사랑으로 깊이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엔즈의 설명에 따르면 인생의 문제가 여러 가지로 복잡한 것처럼 그분의 역사적 계시도 단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 문제에 해답으로 주신 하나님의 계시에 그런 인생의 복잡성이 반영되는 것은 계시의 성육신성에 필연적 귀결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성경에 내재하는 신학적 다양성은 성경이 오류임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이 우리의 못난 현실 속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고통당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역동적인 하나님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엔즈 교수는 이런 신학적 다양성에 다소 실망하는 사람들에 대해 ‘서로 화해될 수 없는 세계관들’이 공존하는 성경을 주신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임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우리 신앙(혹은 신학)의 출발은 특정 도그마가 아니라 성경 말씀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나는 말한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100% 문학작품으로 보지는 않는다. 문학적 요소가 있지만, 나는 말한다. 성경은 100% 영감된 계시의 말씀이다. 신학의 대상으로 나의 이성을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이 우선되어야 하는 책이다. 문학과는 차원이 다르다. 따라서 문학작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성경은 문학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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