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s
컨텐츠로 건너뛰기
03/04/2014 / Sanghwan A. Lee

계영배 (戒盈杯)

계영배

공자가 제나라 환공(桓公)의 사당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이곳 저곳을 둘러보던 그는 기이한 술잔 하나를 보게 된다. 한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술이 새지 않았던 것이다. 무척이나 신통 방통한지라 사당지기에게 물었더니 계영배(戒:경계할 계, 盈:가득 찰 영, 杯:잔 배)라 한다. 계영배는 수압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잔으로 7할이 찰 때 까지는 술을 담아주다가 7할이 넘어가는 순간 몽땅 쏟아버린다. 지나치게 마시는 것은 아예 마시지 않는 것 보다 못하다는 의미가 담긴 잔이었던 게다. 환공은 이 잔을 늘 곁에 두고 봄으로써 과주(過酒)는 물론 과욕(過慾)으로부터 자신을 지켰다고 하니 공자를 크게 감동시킬만도 하다. 유좌지기(宥坐之器)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성경에도 계영배의 정신을 소유했던 한 사람이 등장한다. 아굴이다. 잠언 30:8~9에 기록된 그의 기도를 들어보자.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그는 자신을 가난하게도 말고, 부하게도 만들지 말아달라고 기도한다. 가난하게 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장발장처럼 되기 싫기 때문이요, 부하게 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돈주앙처럼 되기 싫기 때문이란다. 그가 원했던 것은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만 채워짐으로 신실한 예배자로 사는 것이었다.

아굴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 사뭇 비슷하지만 확연히 다른 점이 몇 있다: (1) 우리도 아굴처럼 “나를 가난하게 마옵시고” 기도는 하지만 절대로 “부하게도 마옵시고” 기도하지는 않고, (2) 아굴은 부할 때 찾아오는 위험을 알기 때문에 “필요한 분량의 양식으로만 채워달라”기도하는 반면 우리는 그 위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원하는 분량의 양식”을 구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보자. 우리는 “가난하게는 말고 부하게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던가?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대다수는 필요한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구하는 간구가 아니던가? 그리고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신실한 예배자로 사는게 아니라 돈 많은 부자로 사는 것이지 않던가? 아굴이 필요한 것으로만 자신을 채우기 원했던 환공(桓公)과 라면 우리는 욕심에 눈멀어 무조건 “다고, 다고, 다고”하는 거머리과 이다. 만약 아굴과 우리가 한 자리에 만나 계영배를 기울였다면 어땠을까? 아굴은 단 한번도 쏟지 않았을 반면 우리는 줄곧 쏟았을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의 소유(所有) 개념은 불교의 무소유(無所有)도, 맘몬교의 다소유(多所有)도 아니다. 오직 내게 필요한 것을 소유하는 정소유(正所有)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 아니라 지족지지(知足知止)이며, 대대익선(大大益善)도 아니라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필요한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유하지 않으려 고집하는 것도 기독교의 정신이 아니다. 큰 집이 필요하면 사는 게 옳다. 넓은 예배당이 필요하면 짓는 게 옳다.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욕심에 끌려 소유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 인생들에게는 소유의 그릇이 있단다. 누구에게는 작은 그릇이 있을 테고, 누구에게는 큰 그릇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릇들의 크기는 다 다를지라도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분량에 맞게 특별 제작된 맞춤형 그릇이기 때문에 적당히 채워져 있는 한 하나님을 예배함에는 문제가 없다. 클수록 좋은 게 아니다. 작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내 삶의 분량만큼 적당한 것이 좋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남의 큰 그릇을 보고 내 그릇을 작게 여겨 필요 이상으로 채우려고 하거나 그릇 자체를 큰 것으로 바꾸려 하기에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하는 배은망덕한 부자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유혹이 낭자한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환공의 계영배 정신일 것이다. 만약 그가 오늘 날까지 살아있었다면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을는지도 모른다.

이번 기회에 당신의 소유 그릇을 계영배로 바꾸어 봄이 어떤고?

은 생각인 것 같다. 내 소유의 그릇이 계영배라면 처음부터 필요 이상으로 채우지 않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고, 잠시 욕심에 이끌려 필요 이상을 채우게 되면 바로 쏟아져 버릴 것임으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나”고 말하는 배은망덕한 부자는 되지 않을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나 역시도 이번 기회에 계영배로 바꾸어볼 참이다.

오늘 아침에 재미있는 상상을 해 봤다. 환공과 함께 마주앉아 계영배를 기울인다면 어떨까? 내가 쏟지 않을 수 있을까? 그와 함께 계영배를 기울여 보고 싶은 아침이다.

Advertisements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