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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4/2014 / Sanghwan A. Lee

부처의 잠 못 드는 밤

오쇼의 금강경 주석에 의하면 부처는 늘 부동의 자세로 잠을 잤다고 한다. 오른 손을 이마 위에 놓고 자면 그 손은 그 다음 날 아침까지 그 곳에 있었다. 왼 손을 배 위에 놓고 자면 역시 그 다음 날 아침까지 그 곳에 있었다. 손을 어딘가에 놓으면 밤이 맞도록 손을 움직이지 않고 잤던 것이다. 움직이지 않기 달인에 참가했다면 단연 일등을 거머쥐었으리라. 십 년 동안 부처와 동거했던 제자 아난다는 이러한 부처의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신기방통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정말 자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깨어 있는 것인지를 물었다. 부처는 대답했다.

나는 늘 깨어있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내가 자고 있음을 자각하지. 피곤한 육체에 서서히 밀려오는 잠은 위에서부터 천근만근의 무게로 나를 누르기 시작하고, 그 무게로 인해 내 몸이 이완되고 팔다리가 느슨해지면, 나는 부동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밤새 자각한다.

부처는 밤마다 찾아오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숙면을 취하지 못했던 것이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번뇌하게 만든 것일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매일 낮 뜬 눈으로 진리를 찾아 헤맸던 부처는 매일 밤 감은 눈으로 진리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 때 마다 하늘 높이 솟은 벽에 부딪힌 그는 점점 굳어져만 갔다. 그에게 정녕 필요했던 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신 그 분이었던 게다.

부처와 전혀 다른 한 사람이 있었다. 사도행전 12장에 등장하는 베드로다. 그는 지금 감옥에 갇혀있다. 그것도 두 개의 쇠사슬에 매여서 말이다. 의례껏 구타와 고문을 당했을 것이고 내일 목이 잘리거나 사자 밥이 되어 죽을 것이라는 협박도 받았으리라. 이러한 상황에 처한 베드로가 뭘 하고 있나? 자고 있다. 그것도 아주 깊이. 베드로의 자는 모습을 묘사하는 헬라어(κοιμάω)는 ‘죽은 듯이 자다’는 뜻이다. 식음을 전폐하고 전전긍긍해도 모자랄 이 판국에 죽은 듯이 자고 있다. 그가 어찌나 깊게 잠들었던지 천사가 나타나도 깨지 않는다. 옥중에 광채가 가득 차도 깨지 않는다. 멋쩍은 천사가 하는 수 없이 그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치자, 그제야 비로소 눈을 비비고 일어난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어쩌면 저리도 깊은 잠을 취할 수 있었을까?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진리의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리라.

안식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이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삶에 변화가 찾아온다. 머리 대는 곳이 잠자리요, 눕는 곳이 꿈자리가 된다. 세상을 이긴 샬롬의 평안을 쉼으로 얻기 때문이다. 베드로를 보라. 풍랑 속에서 잠들지 못하고 “살려달라” 고래, 고래 소리질렀던 그가 풍랑 보다 몇 갑절은 더 위험한 죽음의 상황 속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다. 천사가 나타나도 깨지 않는다. 밝은 광채가 비춰도 깨지 않는다. 샬롬의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예수님이시니이다”는 시편 4:8을 잠꼬대로 중얼거리며 달달한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부처가 예수님을 만난 후 두 다리를 쭉 뻗고 잠을 청하는 모습을 상상을 해 본다. 그의 고백이 이렇게 바뀌지는 않았을까?

나는 잠을 자는 동안에 내가 자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피곤한 육체에 서서히 밀려온 후 위에서부터 천근만근의 무게로 나를 누르던 모든 짐들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가볍다. 내가 눈을 감을 때 내 몸이 이완되고 팔다리가 느슨해 진다. 그리고 아침까지 깨지 않는 깊은 잠으로 빠져든다. 세상을 이기는 샬롬의 평안을 쉼으로 얻었기 때문이다.

내 모든 짐을 내려주신 예수님.
샬롬의 평안을 쉼으로 주신 예수님.

이처럼 좋으신 예수님께 참 감사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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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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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진원 / 2월 15 2014 12:06 오전

    샬롬은 단지 영적인 평안뿐 아니라 영혼육 모두 평안한 온전한 평강을 의미한다는 말이 생각납나다. 주님으로 인해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함을 다시 한번 생각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Liked by 1명

    • Sanghwan A. Lee / 2월 15 2014 8:55 오전

      모든 상황 속에서도 쉴 수 있는 평안을 주신 안식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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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우연히 지나다가 / 6월 2 2014 8:35 오후

    아, 불쌍한 크리스찬이여.

    부처란 뜻은 번뇌망상을 완전히 끊어버린 사람, 그래서 각성된 의식이 만개한 지성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부처가 잠을 못자는게? 진리를 찾지 못해서 번뇌망상에 사로잡혀서? 즉 불면증이란 것인가 푸하하

    보통사람은 몸은 잠들지만 여전히 마음은 번뇌망상(꿈)이 들끓는다. 꿈을 꾼다는 얘기다.
    하지만 부처는 꿈을 꾸지 않는다. 몸이 잠든 상태에서도 의식은 철저하게 깨어 꿈을 꾸지 않는다는 말이다. 중생은 꿈(번뇌망상)을 꾸며 에너지를 소비하지만 부처는 꿈을 꾸지 않기 때문에 에너지를 낭비할 일이 없다.

    부처의 각성(깨어있음)은 육체의 깊은 잠속에서나 얕은 잠속에서나 잠을 자지 않는 상태에서나 일관되게 깨어있다. 이게 부처가 늘 한결같은 자세로 잠을 자는 이유이다.
    부처의 모든 것을 닮고 싶어하는 티벳승려들은 모두 오른쪽으로 누운자세로 잔다. 오른손을 오른쪽뺨에 대고…부처가 늘 잠들던 모습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찬양하기 위해 부처를 깎아 내려야 하는 그대들, 그렇해도 부처에 대해 제대로 알고 비판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선불교에서 오매일여, 뭉중일여라는 말이 있다.
    잠속에서도 깨어있는가
    깊은 잠속에서도 깨어있는가를 점검하는 말이다.
    부처는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건 자기의 몸과 의식에 대해 철저하게 깨어있다.
    그렇게 완전하게 깨어있는 상태가 니르바나(열반)이다.
    완전하게 깨어있는 의식을 가져본 일이 있는가?
    아니 꿈도 꿔보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상황 속에서도 완벽히 쉬는 붓다, 깨어있는 붓다에게 뭐? 불면증? 번뇌? ㅋㅋㅋㅋㅋㅋㅋ
    이 불쌍한 크리스찬을 어쩌면 좋냐.
    편견의 무서움을 그대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한다.
    가장 깊은 망상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가장 깨어있는 성자, 붓다를 가련하게 생각하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ㅋㅋㅋㅋㅋ

    아 정말 세상엔 웃기는 자들이 많아 행복하다.

    대승기신론이라고 들어봤을 것이다.
    불교라고 여기지 말고 볼 수만 있다면
    사람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마음’에 대해 명징하게 설명해 주는 좋은 선생님이 될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이 번뇌고 무엇인 진리인지 가르쳐준다.
    성경에서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 마음의 구조, 작동방식 말이다.
    당신의 믿음이란 것 역시 당신이 만든 마음의 구조일 뿐이다.
    그 믿음이 바른 믿음인지 아닌지 당신 스스로 판단할 능력도 없다.
    그저 맹목적으로 믿으면 끝인 당신내 종교, 하지만 그 믿음이 당신을 가두는 감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윗 글로 증명된다. 당신의 독실한 믿음이 부처를 왜곡하는 순간을 당신은 모르지만 나는 보고 있다.

    평안, 안식은 모든 편견(물론 이 편견도 자기 스스로 만든 것)으로 부터 벗어났을 때 생긴다.
    불교에서 그 상태를 붓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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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6월 2 2014 10:18 오후

      네, 긴 댓글 감사합니다. 님께서 범하고 계신 오류는 역사학자 버터필드가 지적한 휘그적 오류라고 합니다. 휘그적 오류란 미래에 벌어진 사건으로 과거를 해석하는 흔한 오류지요. 본글에 등장하는 부처는 고타마 싯타르타를 말하지 나중에 의미화 된 “번뇌망상을 완전히 끊어버린 사람, 그래서 각성된 의식이 만개한 지성을 가진 자”로써의 부처가 아니지요. 고타마 싯타르타가 십사무기(十四無記)의 요소들을 만들어 이에 대해서 함구했다는 사실과 고집멸도(苦集滅道)를 가르쳤다는 사실은 부처에 대한 제 견해가 더 정확함을 지지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제가 위에 인용한 “나는 늘 깨어있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내가 자고 있음을 자각하지. 피곤한 육체에 서서히 밀려오는 잠은 위에서부터 천근만근의 무게로 나를 누르기 시작하고, 그 무게로 인해 내 몸이 이완되고 팔다리가 느슨해지면, 나는 부동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밤새 자각한다.”를 못보셨나요? 🙂 혹시 제가 연구한 부처의 삶을 들여다 보기 원하신다면 아래의 링크를 참조해 주세요. 님의 진리탐구 여정에 밝은 빛이 도달하기를 기도합니다.

      1. https://sanghwanlee.com/2014/02/01/%EC%8B%AD%EC%82%AC%EB%AC%B4%EA%B8%B0%E5%8D%81%E5%9B%9B%E7%84%A1%E8%A8%98%EC%9D%98-%EB%8B%B5%EC%9D%B4%EC%8B%A0-%EC%98%88%EC%88%98/
      2. https://sanghwanlee.com/2014/02/01/%EB%B6%80%EC%B2%98%EC%9D%98-%EC%9C%A0%EC%96%B8%EA%B3%BC-%EC%98%88%EC%88%98%EC%9D%98-%EC%95%BD%EC%86%8D/
      3. https://sanghwanlee.com/2014/02/01/%EB%B6%80%EC%B2%98%EC%99%80-%EC%98%88%EC%88%98-%EA%B7%B8%EB%A6%AC%EA%B3%A0-%EC%A3%BD%EC%9D%8C/
      4. https://sanghwanlee.com/2014/03/27/%EB%82%98%EB%8A%94-%EC%9D%B4%EB%A0%87%EA%B2%8C-%EB%93%A4%EC%97%88%EB%8B%A4-vs-%ED%95%98%EB%82%98%EB%8B%98%EA%BB%98%EC%84%9C-%EB%A7%90%EC%94%80%ED%95%98%EC%85%A8%EB%8B%A4/
      5. https://sanghwanlee.com/2014/03/14/%EC%9E%90%EA%B8%B0-%ED%99%95%EC%8B%A0%EA%B3%BC-%EB%AF%BF%EC%9D%8C/
      6. https://sanghwanlee.com/2014/02/01/%EA%B3%A0%EC%A7%91%EB%A9%B8%EB%8F%84%E8%8B%A6%E9%9B%86%E6%BB%85%E9%81%93-%EA%B7%B8%EB%A6%AC%EC%8A%A4%EB%8F%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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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연히 지나가다가 / 6월 5 2014 12:46 오전

        님은 명상에 대한, 그리고 마음구조에 대해 전혀 이해하는 바가 없어요.
        “깨어 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어요.

        <>

        분명히 봤구요 그래서 댓글을 달았던 것입니다.
        부처가 말한 뜻도 님은 님의 편견에 입각해서 해석을 하시고 계시네요.
        세계의 어떤 불교석학자들도, 소위 깨달았다고 알려진 유명한 승려들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붓다의 깨어있음에 대해 님처럼 “잠못이루는” 불면증자로 해석하는 사람이 없어요. 일반 불자도 저지르지 않는 오류를 님은 확신과 편견에 사로잡혀 마치 사실인양 주장하고 있으니 코미디라는 것입니다. 정말 죄송한 말이지만 님의 글을 읽고 배꼽빠지게 웃었습니다. 님은 라즈니쉬 글을 읽지도 않았습니다. 제대로 읽었다면 석가모니 붓다를 번뇌로 인해 잠못드는 불면증자로 해석할 수 없거든요. 만일 읽은게 사실이라면 지적으로 매우 무능하신 분입니다. 진리를 말하기 이전에 언어학을 먼저 배우셔야 할 것입니다.

        1. 님은 불교에서 말하는 ‘깨어있음’에 대해 제대로 이해부터 하세요. 완벽히 깨어있을때는 번뇌망상(탐.진.치=탐욕,분노,어리석음)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번뇌망상이 사라졌는데 꿈은 왜 꾸나요? 불교도들은 저의 이 말에 대해 아주 쉽게 이해하는데 님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번뇌망상이 없는 상태= 꿈 꾸지 않은 상태 라는 것을. 선불교에서 이런 상태를 ‘무념’ ‘무심’이라고 해요. 무념= 생각이 없다 이고 무심(無心)= 마음이 없다. 입니다. 깨어있음=무념=무상 입니다. 꿈을 꿀 수가 없어요. 마음이란게 텅비어서 아무것도 없고(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다만 마음이 텅 비어 있다는 것만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근현대 깨달은 승려들도 잠을 안자는 것입니다(불면증이 아니라 육체가 잠든 상태에서도 자각이 성성하다는 뜻). 님은 ‘잠을 안잔다’는 표현에 대해 ‘아 잠을 ‘못’ 자는 것이구나’하고 엉뚱하게 해석하고 있는 거에요. 불교도들은 붓다의 잠을 안잔다는 표현에 대해 아 ‘무의식적이지 않고 깨어있구나’로 해석해요. 꿈은 무의식의 영역인데 붓다는 무의식이 없어요. 무의식의 영역을 전부 의식의 영역으로 탈바꿈 시켰으니까요.육체가 잠을 자는 순간에도 “의식적”으로 깨어있는게 붓다입니다.

        불면증으로 인해 잠을 못 자는 것은 스트레스 상태죠. 몸과 마음이 매우 피곤하고 무기력하고 짜증도 나고요. 석가모니가 그런 자에요? 이런 불면증자를 진리를 깨친분이라고 오해?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추앙하는거에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합시다.

        님이 거론한 부분을 다시 봅시다.

        석가모니 붓다는 자신의 잠든 상태를 상세히 말해서 보통사람들의 잠든 상태와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육체가 이완되어 잠드는 과정은 일반사람들과 똑같지만 다른 점은 잠이 드는 매 단계마다 “깨어있음”이 작동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육체가 완벽히 잠에 빠진 상태에서도 “깨어있음” 계속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보통사람은 무의식에 빠져서 꿈을 꾸지만 붓다는 그렇지 않다는 거에요. [붓다는 일반사람들 보다 육체에 관한한 더 깊은 잠을 자요,그렇지만 깨어있음은 낮이나 밤이나 똑같이 유지된다는 것이죠. 작은 행동하나 하나 무의식적으로 허투루 하는게 없어요. 생각을 할때도 생각자체에 대해 깨어있음이 유지된다구요] 이 말을 이해 못하실 것 같은데 그건 님이 참선(명상)에 대해 모르거나 해 본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라즈니쉬는 붓다가 불면증이라고 얘기한 적이 없어요. 라즈니쉬를 왜곡하지 마세요. 주변의 명상 고수들이 없나요? 깨어있음이 매우 성성해 지면 육체는 깊은 잠에 빠져도 의식은 잠들지 않는…그렇지만 그것이 번뇌망상이 있어서 불면증?은 전혀 아닌 상태에 대해서 여쭤보세요. 님의 글이라고 말하지 않고 복사해서 불교 10년정도 공부한 분들에게 보여줘 보세요. 하나같이 배꼽잡고 웃는다!, 장담하죠. 진심으로 걱정돼서 어제 오늘 긴 글 남긴 것입니다. 님의 편견때문에 망신 당하시지 말라구요.

        우리집도 전부 기독교인들입니다. 손만 뻗으면 성경책을 만질 수 있죠. 그렇지만 나 홀로 불교를 선택했어요. 마음의 구조에 대해 어떤 종교보다 상세히 가르쳐 주고 번뇌를 제거하는 법도 쉽게 가르쳐 주기 때문이죠. 다니는 절 큰스님도 대구의 가장 큰 교회 전도사 출신이구요 스님의 가족분들도 대형교회 목사가 여럿입니다. 목사,전도사분들이 절에 와서 스님과 성경불경에 대해 많은 대화를 합니다. 저도 그 대화에 자주 끼어서 담소를 즐겼습니다.

        불교를 사탄의 자식들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한국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배우지 못하는 것들을 스님의 가족 크리스찬들은 배웁니다. 현각(숭산스님의 하버드 제자-보수 크리스천가문)스님도 불교를 통해 예수님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역사적 인간, 고오타마 싯타르타는 진리를 알기 위해 번민하였죠. 그러나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달은 이후의 석가모니 붓다는 진리 그 자체가 됐기 때문에 진리가 뭘까하고 번민하지 않습니다. 석가모니 붓다의 고민이란 어떻게 하면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도와서 깨우쳐 줄까, 진리를 맛보게 할까하는 방법상의 고민은 했겠죠. 그러나 그것은 사실 타자에 대한 사랑, 자비심이지 일반인들의 스트레스(고민)는 절대 아닙니다. 번뇌망상이 사라져서 ‘지복상태’인 분이 어떻게 잠못이루는(불면증)에 시달리겠습니까.

        아난 존자는 붓다의 사촌형입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이후 붓다에게 귀의 했죠. 기억력 하나는 당대 제일이라서 늘 붓다곁에서 붓다의 행동과 말에 대해 상세히 기억했다가 전파하는 역할을 아난이 했습니다. 늘 붓다의 지근거리에 있었고 심지어 잘 때도 곁에 있었죠. 어느 날 밤 붓다가 먼저 잠드는 모습을 보고 나서 잠들었다가 깨어나서(소변이 마려웠거나 님 표현대로 불면증 때문에 깨어났을 수도 ) 붓다를 보니 잠들기 전 모습 그대로 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상당히 오랜기간을 지켜봐도 붓다는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여서 참다참다 질문을 한 것이죠. 아난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란게 잠들면 좀 뒤척이기도 하고 자다가 깨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붓다는 잠들면 미동도 없고 깨어나기 직전까지 그모습 그대로 라는 것이죠.

        그래서 붓다가 자신이 잠드는 매 과정마다 깨어있고 육체가 깊은 잠에 빠진 순간에도 깨어있다는 것을 말한게 님이 인용한 부분입니다. 중요한것은 붓다의 육체는 잠에 들어도 의식은 무의식 상태에 빠지지 않는다, 즉 ‘깨어있다’는 점입니다. 깨어있으면 붓다처럼 됩니다. 많은 승려들이 다 검증한 내용입니다. 선사들 일화만 봐도 지겹게 나오는 아주 초보적인 내용입니다. 붓다는 “깨어있음”에 대해 말했는데 님은 “잠못이루는 불면증”으로 해석을 한 것이죠. 붓다는 육체가 깊은 잠에 빠진 모습을 상세히 말했습니다. 그건 일반인들 기준으로 “숙면”상태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불면증이 절대 아니에요. 숙면상태입니다. 붓다는 숙면상태에서도 자신은 ‘깨어있음’이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2.제가 님은 마음의 구조에 대해 전혀 몰라서 붓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명상언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명상에 대해 좀 공부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기신론을 말했던 것이죠.

        님이 인용한 부분인데요. 여기서 ‘ ‘로 표시한 ‘나’ 중에 다른 ‘나’가 있어요.

        ‘나’는 지칭 대명사, 육체, 마음, 불성. 이렇게 4가지 의미로 쓰였어요. 육체와 마음은 깊은 잠에 빠져도 결코 무의식에 떨어지지 않는 불성(깨어있음)이 있어요. 님이 말하는 불면증이나 번뇌망상은 ‘마음’의 영역이구요, 불성은 ‘마음’의 영역 ‘밖’입니다. 즉 초월의식입니다. 유식학으로 치면 8식이라구요. 번뇌망상,불면증은 6,7식입니다. 이 기준으로 님이 인용한 부분을 고쳐서 말해 보겠습니다.

        이해되요?

        *나(육체와 마음)는 부동된다…그리고 그 부동된 나(육체와 마음)을 자각하는 또 다른 나(초월의식)이 있다. 그래서 잠못이루는 불면증과 번뇌는 육체와 마음이 하는 것이지 초월의식이 하는게 아니에요. 따라서 초월의식으로 자신의 육체와 몸을 자각하는 붓다를 향해 잠못자는(불면증)는 사람이라고 해석하면 불교(혹은 명상)를 완전히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기독교식으로 석가모니의 표현을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붓다는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걸 이해 못하고 ‘잠들지 않는다’에 표현에 꽂혀서 아, 불면증이 확실하구나, 라고 결론을 내리면 …매우…황당하고…곤란하게 되겠죠.

        성령(=나)은 잠들지 않는다, 언제나 성성히 깨어있어서 나(육체와 마음= 번뇌하는 주체)를 지켜보고 있다. 내(육체와 마음= 번뇌 망상하는 주체)가 잠을 자거나 깨거나와 무관하게. 육체와 그 속에 깃든 마음만이 ‘나’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성령을 못느끼죠. 하지만 붓다나 예수님같은 분들은 그런 작은 ‘나’, 한정된 ‘나’는 허상이고 그보다 큰 ‘나’ ,한계가 없는 ‘나’가 있다고 말해요. 불교는 여래,불성,진여 라고 말하고 기독교는 ‘성령’이라고 말해요.

        육체와 마음으로 한정된 ‘나=에고’는 잠들어도 한정되지 않은 큰 ‘나=불성=성령’는 잠들지 않는다. 너무 상식적인 말이죠. 명상을 좀 맛본 사람들에게는 말입니다. 따라서 님께서 인용한 붓다의 말은 진리를 맛 본 사람들에겐 당연한 말입니다. 나는 잠들어도 나는 깨어 있어 자각한다. 앞의 나는 육체와 마음의 나이고 뒤의 나는 성령(불성)입니다. 당신에겐 언제나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자각하시고 있나요? 님의 성령은 님이 잠들어 있을 때도 작동하나요 아니면 님의 육체와 마음이 잠들때 성령도 함께 잠에 떨어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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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6월 5 2014 9:53 오전

        역시 긴 글을 써 주심에 감사합니다. 제가 하고자 했던 말들은 님의 글 위에 있는 답글에 다 담겨 있습니다. 님께서는 신앙을 갖고서 부처에 접근하신 것이고 저는 이성을 갖고서 부처에 접근한 것이지요. 당연히 신앙으로 부처를 바라보니 님과 같은 생각의 흐름이 나오는 것이고, 저는 이성으로 바라보니 본글과 같은 생각의 흐름이 나온 것이지요.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저 역시도 불경과 부처를 연구한 사람으로써 그들의 삶을 제 시각으로 해석한 것이랍니다. 예컨데 고타마 싯타르타가 “자는 내내 깨어있다는 것”은 Fact입니다. 그 이유를 찾는 것은 Faith지요. 님께서는 불교의 믿음으로 그 이유를 해석하신 것이고 저는 부처의 일대기에서 보여지는 가르침과 행동을 통해서 해석한 것입니다.

        그리고 님께서는 저의 관점이 초래되게된 행동을 비판하셨는데 제가 읽은 님의 글에도 이런 모습이 보이네요. 제 글을 읽고 배꼽이 빠지도록 웃으셨다고 했는데, 저 역시도 그러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님께서 논증하신 “나=불성=성령”의 공식은 용납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오직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발언이라는 것이지요. 더 자세히 말하자면 불교의 교리로 기독교의 교리를 뜯어 맞추는 식의 억지입니다. 2,000년의 기독교 역사에서도 그 누구도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께서는 거침없이 논증하고 계시네요. 각주와 출처도 없이요. 저는 제가 논증한 글이 오쇼의 글로부터 나왔음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까지도 밝혔지요. 그러니 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으셨답니다. 님께서 논증하신 글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지요? 님만의 생각인가요? 여기에 하나를 더 여쭙자면 아난 존자가 부처의 사촌 형이라구요? 아닙니다. 그는 부처의 사촌 동생입니다. 그는 8세에 출가하여 부처가 세상을 떠날 때에까지 조석으로 모시고 있던 사람이었지요. 님께서 믿고 계신 불교의 기본적인 사실도 모르신채 불교를 변증하시는 모습에 저 역시도 할 말이 많습니다.

        제가 연구한 바로는 고타마 싯타르타는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구별했던 사람이에요. 단지 그 사람을 추종하던 사람들이 그를 신격화 했고 그의 사상을 불교라는 종교로 만든 것이지요. 제가 위의 댓글에도 언급했지만 그가 십사무기와 고집멸도의 도리를 외치며 다녔던 것이 이를 증거합니다. 저는 부처를 부처대로 보려했던 것이고 님께서는 부처의 추종자들이 만든 부처를 보려고 했던 것이지요. 님께서는 부처의 십사무기에 대해서 알고 계시지 않나요? 그것이 진정 해탈한 자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잖아요? 고집멸도는요? 이것들에 대해서 무비판적인 수용은 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님께서는 이름도 밝히지 않으신채 인신공격적인 발언들을 남발하셨습니다. “님은 명상에 대한, 그리고 마음구조에 대해 전혀 이해하는 바가 없어요.”라는 표현과 “님은 확신과 편견에 사로잡혀 마치 사실인양 주장하고 있으니 코미디라는 것”이라는 표현, 그리고 “님의 글을 읽고 배꼽빠지게 웃었습니다. 님은 라즈니쉬 글을 읽지도 않았습니다”와 “만일 읽은게 사실이라면 지적으로 매우 무능하신 분입니다. 진리를 말하기 이전에 언어학을 먼저 배우셔야 할 것입니다” 등의 발언은 논증을 할 때 사용할 수 없는 발언이지요. 죄송한 이야기지만 앞으로 이름과 이메일 주소를 공개하지 않으시면 댓글 공개를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부처에 대해서 논하기 원하시면 본인에 대해서 밝히시고 저와 정정 당당하게 논증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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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우연히 지나다가 / 6월 8 2014 2:46 오전

    제가 실명을 밝히고 이메일 주소를 게재하면 뭐가 달라지나요? 그리고 저는 니미 무슨일을 하시는지 이름이 뭔지 알고 싶지도 않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디에 사시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따라서 님의 인격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우연히 지나다가 님의 글을 봤고 명상수행을 수십년째 해온 입장에서 님의 글에 대해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여 ‘배꼽잡고 웃었던’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저의 첫댓글을 포함하여 지금 쓰는 이 댓글도 님이 원하신다면 다 지우세요. 블로그 주인장의 권한이니 그런 조치를 취한다 해도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님이 부처를 연구했다는 나머지 글들도 오늘 읽어 봤는데요 연구?했다고 말하기 불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코멘트할 가치가 없는 글들 이었습니다. 저의 이런 평가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해 하거나 불쾌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댓글을 단 이유 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님은 진리 탐구를 좋아하고 영적성장을 원하는 사람이라는 순간적으로 들었고(물론 지금은 당시의 제 생각이 짧았다고 판단합니다) 저 역시 같은 입장에 있는 자로서 엉뚱한 길로 접어든 님을 도와주어야겠다 생각해서 댓글 달은 것입니다. 영적성장을 추구하는 자가 가장 영적으로 뛰어난 붓다에 대해 오해하는? 그리고 폄훼하는 글을 썼다는 거 자체는 인격모독 차원보다 더 중한 죄거든요. 님이 홀로 부처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다면 상관없지만 인터넷 공간에 포스팅 하는 순간 공적인 문제가 됩니다. 자신이 쓴 글이 또 다른 진리를 찾는 이의 눈을 멀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한 비판이 제기되는 것은 필연입니다. 제가 단 댓글 수준도 비판받고 싶지 않다면 할말 없습니다. 그렇다면 포스팅을 아예 하지 말았써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절대자가 있다고 가설(왜 가설이라고 하냐면 아무도 절대자 신이 있다고 과학적으로 자타가 모두 인정하는 증거나 근거를 제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을 세우고 그 절대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신)과 그 절대자에 대해 우러러 볼(앙), 즉 신앙이 없습니다. 저는 석가모니 붓다를 신앙(믿고 우러러 보는 일련의 행위)한 적이 없어요.불교는 ‘나는 부처다(부처가 될 수 있다)는 신뢰(신)와 부처가 되기 위한 명상수(행), 신행이 있을 뿐입니다. 자기 내면에 붓다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믿고(신뢰하고) 내안의 중생의 마음을 제거하는 각종 수행을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식의 절대자에 대한 끝모를 믿음과 복종과 추앙같은 문제는 불교도에겐 없습니다. 그러니 붓다에 대한 신앙으로 님의 글에 반론을 제기했다는 부분은 틀렸습니다.

    그리고 아난이 부처의 사촌형이라는 제 부분을 바로 잡아주신것은 감사합니다. 난 제바닷다등 부처의 사촌 형제들이 부처의 제자가 됐고 그중 기억력이 가장 출중한 아난이 부처가 열반할때까지 그림자 시봉을 하였던 점, 그래서 부처가 잠든 모습을 지켜보고 오랜기간 호기심이 생겨 그와 같은 질문을 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님이 인용한 부분 그 자체는 이미 불교경전에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 역사 2700~3000년간 붓다를 잠못이루는 불면증 환자라고 분석하는 자들은 없었습니다. 물론 님같은 붓다와 불교를 전혀 모른 사람들 빼고 말입니다.

    지금부터는 님이 금강경을 모르고, 명상을 모르고 마음구조를 모른다고 한 부분에 대해 근거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유교,도교,불교,힌두교,요가등 각종 가르침들의 명상법이 있는데 원리적인 면에서 도식화 해 보면 단순합니다. 모든 가르침들은 /에고의 소멸 내지는 정화를 통해 궁극의 진리에 도달/하는 것, 입니다. 방법과 언어적 표현상에서는 이러저러한 차이가 발생하지만 말입니다. 불교라는 말 뒤에는 사실 ‘명상’이란 말이 그림자 처럼 따라 다닙니다. 불교경전들은 단지 이론적 교리가 아닌 실재적 명상수행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단지 특정종교의 교리라고 지식적 접근을 해 버리면 불교경전을 읽어도 알맹이 다 내다버리고 껍데기만 챙기는 바보가 됩니다. 이 사실외에 불교의 언어적 표현 기법에서 ‘이제’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표현이 속제의 입장에서 기술됐는지 진제의 입장에서 기술됐는지를 알아야 제대로 읽힙니다.

    [ 가 ] =======명상====> [ 나 ]

    속제 ————–> 진제
    고해 —————> 상락아정
    에고 ————– > 수퍼에고
    차안 —————-> 피안
    중생 —————> 붓다
    탐진치 —————-> 니르바다
    윤회 —————> 해탈
    언어 —————-> 비언어
    싼냐 —————–> 쑤냐
    무지,장애 —————-> 지혜,자유

    [가]는 중생의 세계, [나]는 부처의 세계입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똑같이 말하고 숨쉰다고 해도 어떤 이는 중생의 상태로 살고 어떤이는 부처의 상태로 살아갑니다. 석가모니는 [가]의 상태를 내버려 두면 고해가 증가한다고, 그러나 [나]의 상태, 부처의 세계가 있고 그 가는 방법을 상세히 일러줌으로 해서 많은 이들이 그에게 귀의 하여 부처의 세계로 갔습니다(중생이 아닌 부처의 삶을 살았습니다). 석가모니는 [나]의 상태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붓다’의 명칭으로 불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님은

    //부처는 밤마다 찾아오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숙면을 취하지 못했던 것이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번뇌하게 만든 것일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매일 낮 뜬 눈으로 진리를 찾아 헤맸던 부처는 매일 밤 감은 눈으로 진리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 때 마다 하늘 높이 솟은 벽에 부딪힌 그는 점점 굳어져만 갔다.// 라고 말해 버림으로 해서 석가모니가 [가]의 상태에 있다고 단정해 버립리다. 석가모니는 아직 무지(인지적 장애와 심리적 장애)로 인해 진리를 깨치지 못했으며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잠을 못잤던 것”이라는 것이죠.

    님의 말이 맞다면, 그는 어떻게 “붓다=지혜의 완성자”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수천명의 제자를 두게 됐고 2천 7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가르침이 지속되죠? 님의 견해에 따르면 진리를 못찾은 가련한 중생일 뿐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님의 아난 일화에 대한 해석이 엉터리 라고 제가 말하는 것입니다. 달마,용수,세착이라는 천재중의 천재들, 구마라집이나 현장같은 위대한 인물들이 붓다를 찬탄했고, 심지어 라즈니쉬까지도 붓다에게 절을 할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라즈니쉬의 금강경에서 라즈니쉬가 고백).

    우리집 책꽂이에 라즈니쉬의 금강경이 있습니다. 다 나눠준 줄 알았는데 마침 있더군요. 이제부터 님이 어떻게 “맥락”을 잘라내고 님이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부처를 모욕했는지를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금강경은 위 명상의 단순도식에서 [가]의 하위개념 싼냐를 타파해서 쑤냐(空) 도달한 이른 바 ‘아라한’들이 진제에도 집착하지 않으면서 [가]속에서 마음을 내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설한 경입니다. 이미 각자 개인적인 고해를 벗어나서 99% 부처인 아라한들에게 부처님은 다시 “보살”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가]에는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이 많이 있으므로, 그들에게 진리를 맛보게 하고 부처의 세계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너는 니르바나에 도달했지만 아직 도달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니가 자비심을 내어 다시 사바세계인 [가]로 되돌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아라한들은 ‘부처님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데 다시 사바세계로 가면 욕망이 작동하고 제가 타락하지 않겠습니까’하는 거죠. 이에 대해 부처님은 걱정마라 보살이 어떤 마음으로 [가]속에서 살 수 있는지 말해 주마, 연꽃이 진흙에 더렵혀지지 않는 것처럼 보살은 중생세계의 오염에 물들지 않는 방법이 있단다 하고 말해주는게 금강경입니다. 고차원적인 모든 집착과 무지에 물들지 않는 가르침인 것이죠.

    라즈니쉬는 금강경의 첫 부분은 부처가 탁발(밥을 구걸) 나가서 돌아와 식사하는 과정이 디테일하게 묘사됩니다. //스승은 옷을 입고 그 위에 가사를 걸치고, 밥그릇을 들고..성안의 집을 차례로 돌며 먹을 것을 얻고 돌아와 식사를 끝내고~~~발을 씻고 두 다리를 꼬와 가부좌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그리고 제자인 수보리가 법문을 청하기 위한 행동도 아주 디테일하게 묘사를 하죠. 이부분에 대해 라즈니쉬는 39p에서 서양사람들이 이런 사소한 일들을 반복해서 기술하는 까닭을 몰라 당황해 했다고 말합니다. 그냥 붓다의 말만 기술하면 되는데 왜 옷을 걸치고 밥을 먹고 어떻게 앉았는지 소소한 것들이 경전에 등장해야 하냐는 것이었죠.

    라즈니쉬는 서양사람들이 놓친부분을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부처는 큰일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작은 일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주의를 기울인다’ 붓다에겐 작은일도 큰일도 없으며 중요한 일이라거나 사소한 일이라거나 하는 구별이 없다. 모두가 하나다….밥그릇 하나를 들 때에도 부처는 마치 신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중하게 밥그릇을 대한다, 옷을 입을 때나 가사를 걸칠 때에도….매우 주의깊게..전적으로 깨어있다(하지만 보통 인간들은 옷입을 때나 밥먹을 때 습관적,기계적으로 행동하며 자신의 행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전혀 없죠, 밥먹으면서 옷입으면서 마음은 온갖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찹니다.)

    라즈니쉬는 이어 말합니다, 40P- 매순간마다 붓다는 완전한 깨어 있음 속에서, 전적인 자각성속에서 산다…어떤 몸짓을 할 때면 그는 완전히 그 몸짓 자체가 된다. 미소지을 때는 그는 완전히 미소 자체가 된다…….침묵할때는 그는 완전히 침묵자체가 된다 41P- 붓다와 같은 이를 지켜보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은총이다…붓다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커다란 기쁨이다….그래서 아난다는 이토록 붓다의 사소한 일들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42p 중단에 아난이 부처의 잠든 모습을 몰래 지켜봤던 것을 고백하면서 스승이 잠들때 도대체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질문하죠. 이에 대해 님이 인용한 부분으로 붓다는 답을 합니다.
    // 잠은 육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잠을 잘 때에는 여전히 내 육체에서 잠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이제 잠이 오고 있다. 이제 육체가 휴식하고 팔다리가 풀어지고 있다. 이제 잠이 내 육체에 뿌리를 내렸다….그러나 나는 여전히 밝게 깨어 있다// 42p 하단~ 43p 3째줄까지.

    붓다는 잠을 못자는게 아니라 ‘잠이 내 육체에 뿌리를 내린’, 즉 완전히 잠을 잤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러나 나는 여전히 밝게 깨어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님이 명상의 원리를 잘 알고 있다면 이부분을 제대로 포착했죠. [가]상태의 에고가 완전히 침묵(육체와 마음이 완전히 잠듦) 했구나 [나]상태의 진리가 깊이 잠든 상태에서도 작동해서 ‘여전히 밝게 깨어있다’라고 말했구나 라고 포착했겠죠.

    43p중단 부분에서 라즈니쉬는 이어 말합니다. 명상은 하루 한 번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24시간 내내 자신을 둘러싸고 흐르는 향기와 같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마치 석가모니 부처가 잠들었을 때도 명상이 진행되는 것처럼(깨어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라즈니쉬는 붓다의 말을 왜곡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붓다처럼 명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금강경 도입에 붓다의 사소한 일들이 결코 사소한 일들이 아니며 그의 말과 작은 행동들을 통해 그가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깨어있으며 심지어 잠든 상태에서도 깨어 있을 수 있다! 그게 붓다다 라고 아난은 그것을 후대의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난의 이런 성실함 때문에 DVD가 없는 현재의 우리가 아주 생생히 붓다가 어떻게 걷고 입고 행동하고 말했는지를 마치 영화속 화면을 보듯이 알 수 있게 됐던 것이죠.

    13p 처음부터 라즈니쉬를 붓다를 찬탄합니다. // 나는 고오타마 붓다를 사랑한다. 나는 그에게 절한다. 그는 나에게 종교의 본질, 종교의 알맹이를 보여 주었다…그는 최초로 종교 아닌 종교를 이 세상에 꽃피워 놓은 사람이다. 그는 최초로 종교라는 틀ㅇ을 갖지 않은 종교를 시작한 사람이다~ 인간의 의식의 역사에 있어서 이것은 가장 위대하고 근본적인 변화이다//

    라즈니쉬는 달라이라마, 베트남 법화경 세계 권위자 틱낫한 스님, 한국 선불교의 거장 숭산스님과 함께 세계 4대 생불로 불려졌던 사람입니다. 그가 인류가 남긴 위대한 지적 유산인 금강경에 대해 강의하면서 붓다가 어떤존재인지 왜 우리가 붓다가 되어야 하는지를 현대의 언어로 말해주었습니다. 라즈니쉬가 아난이 붓다가 잠든 모습을 본 일화를 거론하면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붓다의 깨어있음이 24시간 내내 진행된다는 점, 붓다에게 사소한 일이라거나 큰일이라거나 하는 구별이 존재하지 않고 어떤 일이든간에 붓다는 주의 깊게 깨어있다는 것, “심지어 잠들었을 때에도” 라고 말하기 위해 아난의 일화를 등장시킨 것이죠. 붓다의 깨어있음이 얼마나 대단하지를 말하기 위해, 명상은 24시간 내내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 라즈니쉬는 아난의 일화를 등장시킨 것이죠.

    그런데 님은 라즈니쉬의 의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금강경의 앞뒤맥락을 다 생략하고 순전히 붓다를 깍아내리기 위해 아난의 일화를 부분만 끊어내어 붓다를 불면증 환자 취급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를 찬탄하죠. 그런다고 예수가 찬탄되지는 않는데 말입니다. 님의 행위는 비열한 행위입니다. 글쓰기 할때 타인의 저작물을 맥락을 생략한채 가져와서 마구 왜곡하는 것이야말로 진리에 대한 모독입니다. 예수님이 님의 행위에 대해 과연 잘했다고 칭찬해 줄까요? 어떻게 영적성장을,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이렇게 무례하고 오만할 수 있습니까.

    금강경은 다이아몬든 수트라라고 알려졌죠. 위에서 말했듯이 싼냐(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법상,비법상– 에고와 에고의 확장)를 다이아몬드같은, 벼락같은 금강의 가르침으로 박살내어 쑤냐(空=진리)에 도달하는 법, 그리고 쑤냐를 체험한 이후 어떻게 중생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보살행을 하는지를 설하는 경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쑤냐에 도달했기에 ‘붓다’로 불려진 것인데 님은 싼냐 차원에서 ‘잠을 못자는’ 환자로 말했기 때문에 님은 금강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제가 말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명상이 무엇인지도, 마음구조가 무엇인지도, 금강경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도, 라즈니쉬가 왜 [아난의 부처님 잠든 모습 일화]를 첫단락을 설명하는 맥락속에 집어 넣었는지도 님은 모른다, 라고 제가 말했던 이유입니다. 라즈니쉬의 의도와 전혀 달리 님은 붓다를 모욕하면서 출처를 라즈니쉬의 금강경으로 했죠? 마치 라즈니쉬가 붓다를 잠못자는 불면증 환자로 썼다는 듯이 말입니다. 이건 라즈니쉬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요? 님은 사실이 아닌 부분을 왜곡하면서 예수를 찬탄했으므로 결과적으로 예수또한 모욕했습니다. 영적성장을 추구하는 종교인이 이런식으로 견강부회하여 타종교를 모욕하고 명상에 대한 방법과 소개, 모두가 붓다가 되어야 한다는 라즈니쉬를 이런식으로 왜곡해도 될까요?종교인으로서의 양심을 찾길 바랍니다.

    님이 정말로 영적성장을 원하거나 진리에 대해 탐구할 의지가 있다면 아난처럼 성실해 지길 바라고 타종교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하고 글 쓰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 집안도 목사,전도사,집사,권사 다 있어요.크리스찬들과 논쟁 지겹게 해 봤구요 그렇지만 크리스찬과 논쟁하고 이기기 위해? 댓글 쓴거 아닙니다. 이기고 지는 그런 차원은 이미 어렸을 적에 다 버렸어요. 앞서 말했다시피 단지 우연히 님글 보고 강하게 지적해 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댓글 달았던 것입니다. 님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님이 저를 익명의 훼방꾼 정도로 생각하시든 말든 저 또한 님에 대해 동일하게 ‘익명’의 어떤 존재로 여기니 피차간 차이없고요, 실명이나 이메일을 밝혀야만 댓글속 논쟁이 성립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 댓글 지우려면 다 지워도 좋구요. 하지만 지운다고 해서 님의 명상,붓다,금강경,마음구조,라즈니쉬에 대한 편견과 무지까지 지워지지는 않죠. 이미 님의 마음속에는 댓글 주고 받으면서 흔적이 남겨졌기 때문입니다.

    금강이라는 검은, 금강이라는 벼락은 자신의 에고에 내려쳐야 하는 무기입니다. 자기를 제외한 타인과 타종교에 내려치는게 아니에요. 금강이라는 검으로 자신의 번뇌망상을 잘라내라고, 자신의 편견과 무지를 잘라내라고 설해진 경전입니다. 그래야 타인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죠. 금강경을 읽고 이해했다면
    //부처는 밤마다 찾아오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숙면을 취하지 못했던 것이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번뇌하게 만든 것일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매일 낮 뜬 눈으로 진리를 찾아 헤맸던 부처는 매일 밤 감은 눈으로 진리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 때 마다 하늘 높이 솟은 벽에 부딪힌 그는 점점 굳어져만 갔다//와 같은 망언은 절대! 나올 수 없습니다.

    님이 진정 영적성장을 추구하는 분이시라면 역지사지 해보세요. 명상과 불교,혹은 라즈니쉬, 금강경에 대해 매우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때 님의 견해가 심각히 진실을 왜곡했을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열려 있어야 진리가 들어오고 영적성장이 일어납니다. 저는 불교도 입장에서 말하는게 아니라 명상가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명상을 하지 않으면 명상교과서인 불교를 이해할 수 없어요. 난 제도나 문화로서의 불교에 대해 관심없어요. 그러니 크리스찬 입장에서 불교를 난도질한다고 해서 내가 상처받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난 나의 내면에 대해 탐구하길 좋아하고 예수 붓다 노자 장자 승찬 마조 임제 조주…..등 지성이 만개한 인물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붓다에 대한 님의 글들과 주고받은 댓글 모두 카피해 놨습니다. 님이 허락하신다면 명상공부 모임 도반들과 함께 볼까 해서요(물론 허락하지 않으면 바로 지웁니다!). 댓글 성실히 답변해 주셔서 고맙구요, 제 표현으로 감정상하신 점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입장에선 강하게 제동해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안봤다면 모를까 왜곡을 본 이상 바로 잡아줘야 했습니다 그게 님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님이 제말을 듣던 듣지 않던 간에 말입니다. 누군가 성경에 대해 심각히 왜곡하는 것을 님이 봤다면 님도 저와같은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왜곡 당사자가 동의하던 말던 왜곡부분이 그런게 아니라고 말해줬을테죠.

    나중에 했던 것처럼 ‘부처의 잠못이루는 밤’을 구글 검색창에 한 번 쳐 보죠. 카피본을 명상공부반 도반들과 함께 봐도 될지 말지의 판단을 여기 주인장님의 결정이 떨어져야 하니까요. 그리고 더 이상의 댓글은 쓰기 힘들 것 같네요. 당분간 컴퓨터를 떠나야 해서. 무더위 건강하세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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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6월 8 2014 6:37 오전

      역시 긴 글로 답변을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름과 이메일을 밝히시지 않았기에 이곳에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쓰신 글 속에서 진실함이 느껴졌기에 올리기로 마음 먹었답니다.

      저는 님의 솔직함이 좋습니다. 게다가 이처럼 진진하게 불교를 옹호하시면 제가 다가오는 모습도 보기 좋습니다. 일반적인 날나리 불자라는 마음보다 진지한 불자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한 편으로 즐겁습니다.

      제 생각을 짧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랍니다. 어떠한 집단이 종교가 되기 위해서라면 사후의 세계에 대한 가르침과 그것을 대비할 수 있는 방법론적 가르침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고타마 싯타르타는 그것에 대해서는 십사무기의 조항으로 금기시켰습니다. 그가 진리를 알고 싶었지만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그는 이처럼 정직하고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타마 싯타르타의 생각과 사상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를 폄하하기도 싫고 추앙하기도 싫습니다. 단지 그를 그로 보기 원하는 것이지요. 여기에서부터 저의 글이 시작된 것이랍니다. 제가 위에 썼던 것 처럼 십사무기의 조항이 있었다는 사실은 완전한 해탈을 이루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님께서도 어느정도 저와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보세요. 죽음을 목도한 후 번뇌를 시작하여 출가한 싯타르타가 그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십사무기의 조항을 만들었다… 이것은 가슴아픈 일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싯타르타의 마음을 이해해요. 저 역시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자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찾았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저는 오쇼의 글을 잘못 이해하여 싯타르타를 불면증 환자로 본게 아닙니다. 그것은 제 해석이지요. 오쇼는 그 어디에도 싯타르타를 불면증 환자로 진단하지 않습니다. 싯타르타의 깨어있는 현상적 이유를 제가 이해한 싯타르타의 일대기를 통해서 해석한 것이지요. 그의 십사무기와 고집멸도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나서요. 그러니 그 부분은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도 보살과 아라한, 유여열반과 무여열반, 유종자삼매와 무종자삼매, 삼마샤마디와 삼마사티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것도 모른체 불교에 대한 글을 쓸 수 없지요. 이러한 모든 개념들이 저로 본글을 쓰게 만든 것이랍니다. 게다가 하나를 더 하자면 저는 오쇼도 고타마 싯타르타에 대해서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금강격 주해를 보면 “고타마 싯타르타는 불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그는 종교가 아니라 종교성을 제시했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옳지 않아요. 고타마 싯타르타는 종교성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제거한 사람입니다. 그는 종교적인 내용의 가르침과 질문을 싫어했잖아요? 그의 십사무기와 고집멸도의 가르침이 이를 증거합니다. 제가 예전에 쓴 글의 일부를 발췌하겠습니다.

      “부처에게는 그에게 묻지 말아야 할 14가지의 조항들이 있었다. 이 조항들은 부처가 대답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십사무기(十四無記)”로 불렸다. 그래서 행여나 여기에 포함된 질문을 누가 하면 부처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그런 질문들은 하지 마라. 나는 신, 영혼, 천국, 지옥 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의 답을 추구하는 존재가 사람인 법. 아무리 부처라 해도 사람들로부터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이러한 질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새로운 마을에 들어가 포교활동을 할 때마다 십사무기(十四無記)로 간주되는 질문은 아예 꺼내지도 말 것을 먼저 당부해야만 했다.

      제발 여기에 속한 질문들에 대해서는 스승님께 묻지 마싶시오. 스승님께서는 실제적인 질문에만 답하실 수 있습니다. 탐욕이나 분노 등을 이길 수 있는 방법 등에 대해서만 물어 보싶시오. 다른 질문들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처가 이 질문들의 답을 찾는데 무관했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찾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에게 답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의 고타마 싯타르타에 대한 해석은 오쇼로 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불교를 사랑하는 님! 제가 하나면 여쭙고 싶습니다. 고타마 싯타르타와 십사무기에 대한 제 글을 읽으시고 반증해 주실 수 있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고집멸도에 대한 글도 읽으신 후 반증해 주시면 감사하겠구요. 진비와 비진리가 만나면 비진리가 깨어지잖아요? 제가 잘못 되었으면 깨어주십시오. 그리고 행여나 님께서 잘못되었다고 판단이 되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구요.

      한국도 많이 무더울 텐데 더위 조심하시구요… 제가 내년에 잠시 한국에 방문하게 됩니다. 님처럼 진지하게 불교를 생각하시는 분과 함께 만나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네요. 불교에서는 이것도 인연이라고 말하지요? 기독교에서는 섭리 혹은 예정이라고 말한답니다. 저와 님의 만남이 좀 더 길게 닿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님께서도 좋은 하루 되세요.

      추신: 명상반에 “부처의 잠못 이루는 밤”을 가져다가 쓰셔도 괜찮습니다. 헌데 그렇게 하시기 전에 제가 쓴 모든 불교의 글을 다 사용해 주실 수 있나요? 가장 먼저 쓴 글부터요? 그래야지만 왜 본 글이 쓰여졌는지에 대한 이유가 제공될 테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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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종흔 / 10월 8 2014 3:44 오후

    본문만 읽고 댓글올립니다.예수님이 말씀하셨죠.항상 깨어 있으라고.
    님은 그말씀을 잠잘때외의 일상에서만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계십니다.예수님도 깨달은 자며 부처님또한 대각 하신자로서 진리와 하나된
    성인에겐 더이상 잠은 없습니다.그이유는 잠은 의식을 콘트롤 하지못하는 상태,
    즉 의식을 잃은 혼돈에 떨어졌다는 말인데 어찌 성자요 신의 아들이 잠을 잘수
    있을까요?
    글쓴이는 잠에대해 많은 사색을 해야될것같고 님이 예를 든 베드로의 숙면은
    큰스님의 삼매와 한가지입니다.삼매중에는 옆에서 천둥 번개가 떨어져도 모릅니다.
    베드로는 깊은 삼매에 빠진거고 아라한(깨친 자)들에게는 흔한일인것을 왠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네요.하기사 신만 외치니 정작 자기안에있는 하나님을
    알수있겠나? 예수도 분명 말하였거늘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이 계신다고..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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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0월 8 2014 4:30 오후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 부족한 자 종흔님의 글을 통하여 많이 배웠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우리의 논증을 위하여 몇 가지 통일해야 할 표현이 있는듯 합니다.

      첫 째,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의 잠은 인간의 잠과 동일합니다 (막 4:38). 그 분께서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완전하신 인간이었음을 잊지 않으시면 좋을듯 합니다.

      둘 째, 예수님께서 항상 깨어있으라(마 25:13)고 하신 말씀은 본글에 있는 육체적 잠과 깨어있음의 개념을 달리 한답니다. 문맥을 잘 살펴주시고 “깨어있음”을 재정의 하셔야 할 듯 합니다.

      셋 째, 고타마 싯타르타가 “대각 하신자로서 진리와 하나된 성인”이라는 문서가 있나요? 제가 말씀드리는 문서는 후기 불교가 아니라 초기 불교의 문서를 말한답니다.

      이 세 가지에 공통 분모를 찾아야지 우리의 논쟁이 발전될 듯 합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시고 교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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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종흔 / 10월 8 2014 8:10 오후

    답글을 기대치못했는데 저으기 놀랐습니다.각설하고 답글중 첫째 예수님의 잠은 인간의잠과 동일하다.
    그러면 잠잘때는 인간이고 깨어있을때는 신이란 말입니까? 여기서 기독교인들의 이분법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신이 어찌 밥을 묵고 똥을 싸며 잠을자고 등등등.신은 인간과 틀리다.그렇지만 예수님은 인간과
    신의 양면을 가지고 계시다.이럴 논리를 만들 이유가없습니다.인간자체가 신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리와 하나되면
    그자가 인간의 육신을 가진 신인 것입니다.그런분이 예수요 부처인 것입니다.우리같은 미혹한 중생들은 깨치지
    못하여 살아생전 인간이요 죽으면 업에따라 윤회하는 것이지요.
    둘째 예수님의 깨어있어라는 말이 육체적잠에서 깬다는 의미와 다르다 하셨는데 저또한 그말이
    wake up이 아니라 영적각성임을 당연히 아는바 단지 동음을 빌어 심플하게 얘기했습니다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기에,말하자면 영적각성 상태에 있는자에게 잠이올까요?영적 각성상태 달리말하면
    깨친 자에게 분노와 욕심이있을까요? 위 금강경에서 붓다의 행동이 깨달은 자의 일상을 완전히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깨어있어라 영적각성상태에있으라 하십니다.예수께서 깨어있어라 해서 단지 잠을 자지말라는 소리가 아니고 깨쳐라 영적각성을 하라 라는
    뜻이었을때 깨치고 영적각성 상태에 머무는자에게는 더이상 잠이나 욕망이 있을수 없는것입니다.이해하시겠습니까?님의 말되로 예수님의 깨어 있으라는 말이 잠을 자지말라는 말이아니고 영적으로 깨어있어라는 말이기에 영적으로 깨어있는 자에겐 더이상
    잠이나 인간적 욕구가 없어진다는 말입니다.님은 아마 예수님의 깨어있어라는 말씀을 단순히 열심히 믿고 기도도하라 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듯합니다.
    세째 대각을 이루어 진리와 하나된 자 라는 경은 없고 불제자들이 깨달은 분을 일컬을때
    흔히하는 말인줄알고 있고 적절하다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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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0월 8 2014 8:25 오후

      귀한 시간을 할애하셔서 친히 댓글을 달아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첫 째, 아시다시피 기독교와 불교의 꼬랑지에는 “교”자라는 녀석이 붙어 있어서 믿음이 들어가야 하는 것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기독교에도 믿음이 필요하고 불교에도 믿음이 필요한 게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두 믿음이 같은 비중으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논리학에서 말하듯이 가능성 뒤에는 타당성이 있어야 하니까요.

      우리 기독교에서는 예수님께서 신인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지요. 즉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 때문에 그리고 그럴 만한 타당성이 있기 때문에 그리 믿는 것이랍니다.

      종흔님의 불교에서도 싯타르타를 인간 이상의 존재로 믿지요? (적어도 제가 읽은 종흔님의 글은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신성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대승 종파의 가르침을 받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불자로써 공으로써의 사후세계를 믿는 것으로 보아 선승 종파의 가르침을 받으신것 같구요. 그렇다면 우리의 논쟁은 생각보다 쉽게 끝날 수 있을듯 합니다.) 저는 이 믿음을 존중합니다. 결코 폄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믿음을 소유할 수 없는 이유는 그렇게 믿어야만 하는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싯타르타는 자신을 결코 인간 이상의 존재로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치와 한계를 알았던 정직하고 훌륭한 성인이셨습니다. 나중에 후기 불교에서 사후 세계를 첨가한 것이지 싯타르타께서 그런 가르침을 설법하지 않으셨지요. 그는 십사무기의 조항을 만들어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씀하셨답니다. 제가 볼 때 싯타르타는 불가지론자였답니다.

      둘째, 윤회를 믿고 계시지요? 윤회를 믿는 이유가 뭐지요? 싯타르타는 현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를 가르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종흔님께서는 윤회를 어떤 근거로 믿고 계신지 알기 원합니다. 그 근거가 불경이 아니라면 뭘까요?

      셋째, “영적으로 깨어있는 자에겐 더이상 잠이나 인간적 욕구가 없어진다는 말입니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왜 싯타르타께서는 주무셨지요? 아난존자는요? 성철스님은요?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도 알기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불경에 없는 가르침을 불제자들이 깨달았다는 이유로 받아드릴 수 있나요? 기독교에서는 영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만 아난존자는 영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부인했지요. 그러므로 불경도, 불법도 영감이 없는 인간의 가르침임을 역설한 것으로 보입니다.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추신: 종흔님, 이렇게 귀한 시간을 할애해 주시고 댓글까지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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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흔 / 10월 8 2014 10:52 오후

        ㅐ답글이 또올라왔네여,계속 상대해주셔서 감사.
        소생은 불경을 많이 읽지않았습니다.크리스찬도 마태복음 하나만
        읽어도 족한 경우가 있듯이 나또한 그러하다 여겨 조사와 부처의 일대기 정도만 읽고 설을 푸는것이니 양해 바랍니다.
        첫째번은 붓다가 신이냐 사후세계를 믿느냐등인데 사후세계는 이미말씀드렸는데,그러면 제가 윤회에 대해서 말할께요.불교에서는 윤회는 너무 당연합니다 너무 당연한것을 새삼 뭐 언급합니까.붓다의 깨달음의 과정을 살피면 초기에는 힌두의 전통으로 수행하다 그기에 더한 지혜로서 대각을 이루었습니다.윤회는 붓다이전 힌두에 있었고 붓다가 있던없던
        끝없이 이어지는것입니다.붓다가 만든것이아니라 원래 부터 이어지는 윤회의
        흐름을 당연히 언급하셨습니다.붓다의 전생에대한 기록인 자타카(?자카타)경을 찾아보시면 아실꺼고,붓다의 깨달은 그날의 과정중 4선을 증득한후 중생의 전생을 확연히 볼수있는 능력을 얻었다 밝히셨는데 붓다가 윤회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습니다.예수는 불교아니 힌두에서 얘기한는 육도윤회중에 두가지 즉 천당과 지옥만 빼서 사용하시는것을 잘아시지요? 더들어가면 왜 어떤자는 부자집에서 태어나 호의호식하고 어떤아이는 죄도 지을 시간도 없었는데 죄의끝은 사망이라하신분의 말이 무색하게 나자말자 죽는지요?전생의 과보가 아니면 현생의
        불평등을 이해할수없습니다.부모가 어쩌고 할수없는것이 부모가 정녕 나는 아님을 아시쟎습니까.
        그리고 십사무기는 위댓글에서 간략하게 설명했으니 구글에서 찾으면 훨씬많이 아실수있을꺼고,제가 한번 물어 볼께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데 하나님은 누가 창조 했나요? 독실한 기독교도가 하나님은 처음과 끝이라서 창조자가 없다는데,그말은 세상 모든 종교에 시조에게 통용되는 말입니다.그말이 너히들은 알수없으니 묻지마라란 말과 동일합니다.불성은 영원하며 태초부터 있어왔고 영원히 이어진다는 말과 뭐가 틀립니까?
        둘째번이 윤회인데 부연하자면 진화론에서 인간이 미생물에서 많은 과정을거쳐 인간의 몸을 받는다했는데 불교또한 인간의 몸을 받기가 억급의 인연을 쌓고 선한일을 해야 된다했으니 과학이 오히려 신과 인간과 동물을 절대적으로 분리한 기독교의 꽉막힌 세계관보다 수천년전 인도의 명상의 열매를 더잘 이해하고 있지요.
        세째 영적으로 깨어있는자의 잠에대해 얘기하셨는데 부처(싯다르타는 붓다가 되기전의 세속의 이름이었습니다.깨친후는 붓다즉 깨달은자로 불러야됩니다),성철스님 깨친후의 아난존자.등은 잤다고 하시는데
        근세의 고승인 수월스님께서는 일생을 잠을 자지 않으셨다는 명확한 증언들이많고 성철은 깨친자인지 모르겠고 붓다는 금강경에서 자지않는다고 말하시는데,여튼 깨치면 왜 잠이없는지 내 소견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잠에대해 말해보자면 잠은 육체적으로는 쉬는 상태이고 정신적으로는 혼미한상태, 꿈을 꾸면 분명 나라는 의식은 있는데
        사물에대한 인식이 결핍된상태 만일 잠이 꼭 자야되고 법칙이라면 의식도 푹쉬어야 겠지요.허나 열심히 꿈을 꾸고있지않아요?그말은 의식은 잠들지않고 혼미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어째서 혼미한 상태로 있냐.업에따라 미혹하고 번뇌 망상에 물들어 있기에 그러합니다.우리가 흔히 공상을 심하게 하면 현실과 잘 구분이 않되고 문득 여기가 어딘가 어리둥절 할때가 있습니다.별반 잠의상태에서의 의식과 다르지않습니다.여기서 님께서 잘이해 하셔야 되는것이 나나 님이나 잠자던 깨어있던 그의식 상태가 우매하고 미혹하다는걸 아셔야합니다.깨치기 전에는 님의 깨어있음이 한낳 중생의 미혹한 상태에 있다는것을 아셔야되고 님이 자지않고 깨어있어도 그건 한낳 자지않는 상태의 의식일뿐이지 성자의 깨어 있는 상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지금 나와 님의 대화를 가능케하는 이의식 상태가 깨어있다고 생각지마십시오.이의식에 대한 착각이 우리에게 업을 쌓케하는바 이상태를 깨부셔서 진정한 본성인 불성을 깨칠때 우리는 깨달은 상태라고이릅니다.예수도 자기를 죽이라 말하지않았던가요?님께서 자기를 죽인 상태에서 어떤일이 멀어질까요?고작 남을위해 하기 죽기보다 싫은 일을 했다하여 자기를 죽이는게 아닙니다.자기를죽이고 거듭난다는데(이것을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 함) 그러한 적이 없으니 깨친후에 상태를 알길이 없지요.묶어보자면 깨달음 후에는 탐진치가 소멸하였기에
        탐 즉 욕망이 없어졌기에 잠또한 미혹한 욕망에 불과 함으로 없어진다고 확신합니다.성욕도 없어집니다.식욕도 마찬가지.그런데 왜 먹느냐?육체의 작동 원리를 알기에 않먹으면
        육신이 멈춘다는것을 알기에 먹을뿐이지 맛에 탐닉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생사를 초월 한다는 말은 깨친자에게 별대수롭지않은 것인데 하물며 잠이겠습니까?다시한번 제말을 염두하고 금강경에서 부처님의 행동거지를 숙고하십시요.그에게서 조금의 인간적인면이라도 발견하시겠습니까? 저또한 중생으로서 깨달은자의 심리상태를 알지 못하나 이까지가 저의 소견입니다.
        마지막으로 불경에 없어도 뒤에 깨친자의 가르침도 얼마든지 받아들일수있다고 여깁니다.부처님도 말씀하십니다.항하의 모래수만큼 많은 부처님이 계시다고.사도바울은 예수도 아닌데 신약성경에 대부분을 차지하쟎습니까? 지금도 누가 깨쳐 부처가 되었다면 그분의 말씀도 불경이고 선지자가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성경아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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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종흔 / 10월 9 2014 4:22 오전

    잠에대해 설명이 미흡해서 추가합니다.그러니까 잠에대해 지금 중생으로 살아가는 지금의 관점으로 성자에게 그대로 적용하지 마시길 먼저 짚어야겠습니다.깨친자는 왜 깨쳤다 불리냐면 여러가지로 범부와 다른점이 있지만 그중하나는
    존재의 실상을 꿰뚫기에 깨쳤다는 것입니다.깨친자의 눈으로 세상을 볼때는 존재가 다 허망하고 괴로움이고 실체가없고 등,지금 중생의 눈과는 비할바가 아닙니다.님은 지금 님의 의식으로서 성자도 사람인데 당연히 잠을 잘것이다 여깁니다.
    예를 들어 현미경으로 애인의 피부를 관찰하면 각종 세균이 득실거리고 죽은 각질이보이고 만정 떨어져 키스를 하겠습니까? 성자는 현미경보다더 존재의 실상을 알고 그에더해 성욕자체가 허망함을 알기에 관심조차 없습니다. 같은 통찰로 잠을 봤을때 허망을 너머 의식을 잃은 혼침의 상태로 머문다는게 될법이나합니까.깨어있는 성자에게는 잠이라는 혼침상태가 붙을 여지가없습니다.육신은 당연히 근육의 피로와 중력의 압박에 의해 쓰러지려
    하겠지요 하지만 의식은 깨어있을 따름이지 잠에취하지
    않습니다. 범부도 설레는 일이 있으면 잠들지못하는데,간단하게
    기독교인이 구원을 얻고 거듭나서 성령속에서 살며 날마다 하나님을 영접하는데 그에게 혼침의 상태가 있을수있다 보십니까? 부처님도 잠을 수마에 비유하십니다.깨친자에게 잠이(의식의 잃음이) 있을수없습니다.님이 성자의 깊은잠 숙면이라는 것은 삼매를 의미합니다.기독교에서는 삼매에대한 단어가 마땅하게없으니 숙면과 분간지을수도 없겠지요.
    의식을 하나에 집중하면 시간도 공간도 다잊고 그대상과 하나된 상태에 이릅니다.이것은 분명의식을 잃고 자는 상태와는 틀리지요 그리고 삼매에 이른 밝은 눈으로 사물을 관조할때 무심으로 존재의 실상을 보는 지혜가 따르는 것이지요.보다 깊은
    불교적 입장으로 설명하자면,
    불교에서 무아라하고 공이라고도 하는 얘기를 아실것입니다.공은 대승때 나왔다하나 무아이니 공이지요.나도 없다는데 어찌 우주가 있겠습니까. 내가 없으니 내가느끼는 모든것이 없게되고 일체가 없는것이지요 반론이있겠으나 현대물리학에서 원자의 구조를 보면 수긍하실것입니다.그러면 무아이니 내가 느끼는 고통도 기쁨도 없고 또한 잠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그러면 밥을 먹고 설법하는 성자는 누구냐?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나의뜻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으로 하시옵소서.죽음앞에서 뿐만아니라 성자의 삶은 어떤 사소한 일에도 그의뜻이 아니라 법과 진리에 내맡길진데 하물며 먹고 얘기 하는것 뿐이겠습니까?
    사람에게 식욕 성욕 수면욕이란 원초적 본능이 있습니다.성욕은 참아도 죽지않습니다.그러나 식욕은 참으면 죽고 수면욕은 참으면 죽겠지 라는 의견이 지배합니다.깨친자에겐 성욕은 일으나지 않으니 자연히 참겠고 식욕은 채우지않으면 죽을것이고 수면욕도. 채우지 않으면 당연히 죽을것이니 잘수밖에 없다라 여기는것이 범부의 사고입니다.허나 범부도 자지않으면 죽지않습니다.죽는다니 자야되고 자는데 너무 길들여진 업으로 인하여 마음의 병으로 죽는 것입니다.성욕도 어떤이에게는 너무풀지 못한 스트레스로 죽을때가있으니 제말이 일리가 있을것입니다.
    식욕은? 먹지않으면 육신은 죽습니다.그러나 성인에게는 죽고사는게 하등의 차별이없습니다.있다면 오히려죽음을 택하겠지요.구원을 얻은 그리스도는 천국이 보장 되었는데 살려할까요?깨달은 자는 천국보다 더좋은 완전한 열반에 드는데
    살아있어 행복을 느끼겠습니까?그렇다면 죽지않으려 먹는게
    아니고 죽으려 않먹지 않는것이 되는것입니다.생과 사를 넘어선
    자에게는 님의 생각처럼 살기위해 먹고 잘수밖에 없다가 아니라
    애써 살이유도 애써 죽을이유도 없기에 육신의 하는되로 먹고 쉴따름이지요.깨친 자들의 죽음에 임하는 태도에서 증명할수있을것입니다.허나
    잠은 잡념과 번뇌 망상에 찌들은 의식의 포기요 의식의 뒤섞임이니 깨쳐 무심함으로 사는자 즉 잠을 자는 원인을 제공치않은 성자(아라한)에게
    어찌 붙어있을수 있겠습니까?다시말하지만 육체는 쉬지만 아라한은 성성한 상태로 머물러
    있을 따름입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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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0월 9 2014 5:22 오전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두 시(여기는 미국이랍니다. 제 컴퓨터가 가리키는 현시간은 오전 6:20) 까지는 답글을 달 시간이 없을 듯 합니다. 논문을 마감할 일이 있어서요. 일을 마친 후 종흔님께서 쓰신 두 편의 글을 꼼꼼히 읽어보고 제 생각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지요? 기독교에서는 필연이라고 한답니다. 종흔님과의 교제를 통해 서로 좋은 부분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한 8시간~10시간 후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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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0월 9 2014 1:24 오후

      종흔님의 논증: 힌두교에 근거한 불교가 윤회를 믿는 이유는 본래부터 있는 우주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반증: 윤회는 본래부터 있던 자연의 법칙인데 불교에서 그것을 발견하여 교리화 했다는 말씀이시군요. 잘 이해가 됐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주장을 받아 들일 수 없는 이유는 설령 윤회가 참이라고 가정한다 할지라도 윤회의 싸이클이 시작된 최초의 시점까지 무한소급 될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윤회는 시작점이 필요합니다. 만약 무작정 시간의 어딘가에 무한소급점이 있다고 말씀하신다면 동의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무한소급 될 수 있다면 오늘은 결코 올 수 없었을 테니까요. 이 부분은 독일 수학자 데이빗 힐버트가 증명했기 때문에 제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몇몇의 우주론자들은 이러한 사유를 무시하고 진동우주론(oscillating model)을 제시했습니다. 진동우주론은 윤회사상과 맞물려 설명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불교의 윤회는 업을 쌓으면 더 좋은 종으로 환생한다고 가르치지요? 진동우주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만들어지는 우주는 예전 우주보다 더 큰 우주로 환생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무한으로 죽었다가 환생함을 반복하면서 오늘 날의 우주가 발생되었고, 앞으로 죽은 후에는 더 좋은 우주로 환생할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런 진동우주론의 문제는 시간이 과거로 무한소급 될 수 없다는 사유를 무시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 학계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요. 그러자 이들은 기존에 있던 시간의 A 이론을 버리고 시간의 B 이론을 만들어 그들의 주장을 피력하려 합니다. 사실 하나의 가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가정을 만든다는 것은 오캄의 면도날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논증은 가정이 적으면 적을 수록 타당성을 확보하거든요. 그래서 결국 그들의 주장은 가정위에 세워진 가정위에 세워진 또 하나의 가정이 될 뿐이지요. 재미있는 사실은 시간의 B이론으로는 불교의 윤회를 설명할 수 없기에 불자들도 시간의 B 이론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지요. 결국 윤회의 시작은 설명 불가능성의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윤회의 끝도 역시 설명하기 곤란합니다. 불교 종파마다 윤회의 끝을 설명하는 게 다르지만 가장 보편화 되어있는 윤회설을 따르자면 끝없이 진행되는 실체적 무한반복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후에 르메르트와 프리드만의 우주 팽창 방정식, 그리고 허블이 적색편이를 발견한 후로 타당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극소수의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우주가 영원하다는 주장은 하지 않지요. 그러므로 제 견해로 보건대 윤회를 영원한 반복이 아니라 시타르타의 입적 후로부터 2,500년 동안만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 대방등대집경의 오종오백년이 그래도 가장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그 밖의 모든 불교 종파들은 과학적으로 틀렸다고 보여지고요. 만약 오종오백년이 옳다고 쳐보지요. 그렇다면 첫 번째 시기인 해탈견고 시기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요? 가장 마지막 시기인 투쟁견고 시기에서 윤회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대방등대집경은 윤회의 무한 반복을 인정하지 않거든요. 그러므로 해탈견고 시기의 시작점을 투쟁견고와 별개로 설명하셔야만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불교는 답을 잃어버립니다. 결국 철학적 사유로 무한소급될 수 있는 어떤 그 먼 옛날에 설명할 수 없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으로 귀결지요. 막다른 골목이라고 할까요?

      다음으로 종흔님의 주장처럼 불교가 영향을 받은 흰두교에 그 답이 있다고 쳐봅시다. 그러나 그래도 윤회의 논리는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인도의 흰두교에서는 시간을 유가로 분리하여 사트야 유가, 트레타 유가, 드바파라 유가, 칼리 유가로 현 시대를 조명합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칼리 유가 후에는 사트야 유가로 다시 돌아가 윤회의 윤회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윤회가 설명된 것이 아닙니다. 위에 언급했듯이 과학적 (적색편이 발견), 철학적 (무한소급의 불가능성 인정), 그리고 종교적 (진리의 불일치성)에 의해 타당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윤회의 논리는 (1) 대방등대집경의 오종오백년의 이론을 제외하고는 타당하지 않게 여겨지고, (2) 그나마 타당성을 갖고 있는 대방등대집경의 오종오백년도 윤회의 시기를 무한반복으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3) 불교는 윤회에 대한 답이 없다고 보여집니다.

      그 밖에 다른 논증에도 답하고 싶지만 우선 이 부분부터 해결해야 그 다음 논증들이 열릴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고 종흔님의 생각을 나누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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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흔 / 10월 9 2014 7:14 오후

        윤회에 대해서라면 십이연기와 같이 공부하세요.무명에서 시작하여 늙고 죽음으로 끝나는 십이연기에서 법과 윤회의 실마리를 찿을수있을것입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나의 주관이니 가려들어셔야 될것같네요.흔히들 십이연기를 사람의 일생을 나타낸거라 풀이하지만 저는 연기의 이치는 존재하는 모든 생물에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붓다께서 십이연기를 이해하면 법을 이해한다라고 설하셨기때문입니다.여튼
        무명이란 밝지않음으로 어둠과 미혹을 뜻합니다.무명즉 미혹함으로 말미암아 행이되고(행이란 행위,뭉침) 행으로 말미암아 식이 나고(식은의식)….
        태초에 무명으로 말미암아 행이되었다는 의미는 단세포 생물의 출현을 의미하며 식은 좀더 진화된 존재 ,명색은 더발전한 존재, 육입…그리하여 모든존재가 나고 그속에는 축생도 인간도 천상의 신도 포함하며,존재한 그들이 윤회의 틀에서 돌고도는 것입니다. 지금이순간도 끝임없이 십이연기로 진화하며 각 개채든 한생각 속에서든 전존재개 어디든 작용한답니다.마치 하나님의 영이 온우주에 내재해있듯이.
        얼핏 창세기와 비슷하지않으세요?붓다는 무명(미혹)으로 말미암고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의 죄에서 말미암고.붓다는 무명에서 고의근원을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서 죄의 근원을..
        저는 이렇게 이해 하고 있습니다.
        깨달은자 붓다의 진리의말씀은 내가 깨달았을 때라야만이 명확하게 알수있는법.범부의 한계지요.사과맛은 씹어보면알지 온갖 이론으로 아는게 아니겠지요.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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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0월 9 2014 7:31 오후

        아, 종흔님께서는 진화론도 윤회의 한 가닦으로 보시는군요. 새로운 관점이 참 신선하네요. 처음 들어보는 해석이랍니다. 🙂 그렇다면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사실 제가 위에 드린 질문과 연관되지만요.

        “태초에 무명으로 말미암아 행이되었다는 의미는 단세포 생물의 출현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단세포 생물은 어디에서 왔나요?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종흔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추신: 다시 또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렇게 저와 교류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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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종흔 / 10월 9 2014 10:41 오후

    극미립자?물질을 끝없이 분해한 궁극의 자리,그러한 자리가 존재한다면,태초가 존재한다면 그세계는 물질보다는 정신 혹은 기운 혹은 영이라 불리는 어떠한 마음적 요소로 차있을것이다.그상태가 무명으로 말미암아 행이라는 단세포적인 정신?혹은 물질?을 만든다.별반 틀린 표현이 아니라 봅니다.궁극의 세계는 물질과 정신을 구분 할수없기에.그런점에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 하셨다는 모세의 묘사는
    태초의 비밀을 어렴풋하게 짐작 하는 자라 여길수있겠네요.
    각 종족 마다 창조신이 다있고 어떤 창조의 신도 허무맹랑한듯 하지만 태초의 비밀을 암시하는 요소를 살짝 내비추고 있습니다.인간 자체가 그럴만하게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으니깐 말이죠.
    님께서는 지식으로 신의 영역을 접근하시려는듯한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실체부터 명확하게 밝히신다음 다른 주제로 넘어 가야될것 같습니다.왜냐면 지식적, 이성적으로 유대의 하나님, 예수의 하나님은 너무많은 모순을 안고 있기에,님처럼
    맹목적으로 믿지않는한 받아 들이기
    힘든존재기에 하는 말입니다.예로서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나요?할말없지요? 모세의 마음이 창조했습니다.농담인듯하지만 법구경의 첫구절에 마음이 세상을
    만들고 마음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구절을 볼때 그또한 사실일수 있겠구나 여겨도 무난 하지요…
    님이 믿는 하나님을 알려해도 현재님의 상태로는 이해할수없습니다.왜냐면 신의 영역이기때문에 님은 오로지 복종만해야하는 인간이기에,그런데 어찌 태초의 영역을 지식으로 명확히 드러내려하나요.단한가지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밖에서 찾지말고 당신안에 거하는 하나님을 갈구하세요.모든 아집과 자만을 버리고 필요하다면 목숨까지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을 구하세요.그러면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필요없이 가장 빠른길로 진리를 찾을수있을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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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0월 10 2014 10:21 오전

      맞아요.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찾을 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계시라는 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통로만이 신을 알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하지요. 이런 면에서 종흔님의 의견과 제 의견은 얼추 일치한답니다.

      그러나 제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위에도 언급 드렸다시피, “물질을 끝없이 분해한 궁극의 자리,그러한 자리가 존재한다면,태초가 존재한다면 그세계는 물질보다는 정신 혹은 기운 혹은 영이라 불리는 어떠한 마음적 요소로 차있을것이다.그상태가 무명으로 말미암아 행이라는 단세포적인 정신?혹은 물질?을 만든다.”는 부분이에요. 어떻게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있을까요? 이 시대에서도 무에서 유는 나오지 않지요? 감사하게도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원자를 쪼갤 수 있는 힘을 소유하게된 우리들은 원자의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틀렸지요. 그 안에는 원자들을 이루고 있는 에너지 (종흔님께서 말씀하신 정신적 에너지가 아닌 실체적 에너지)가 있음을 발견했답니다. 그러므로 기운, 영, 정신에서 원자가 만들어진게 아니라고 보는게 더 옳다고 생각됩니다. 요즘 세상에서도 기운, 영, 정신이 물질로 둔갑하지는 않지요? 그래서 과거에도 그럴 수 없다라고 저는 생각한답니다

      게다가 진화론도 들여다보면 (1) 화학진화 – (2) 생명진화 – (3) 종의진화라는 고리로 연결됩니다. 각 진화마다 설명할 수 없는 연결 고리들의 구멍이 생긴답니다. 어떻게 무에서 아미노산이 형성될 수 있을까? 어떻게 무생물이 생명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종 A가 종 B로 바뀔 수 있을까? 답이 없지요. 결국 제가 보건데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구절이 가장 합당한 듯 보인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에 대한 질문의 답은 위의 질문의 답을 먼저 찾은 후 함께 나누어도 좋을 듯 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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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흔 / 10월 10 2014 2:48 오후

        님은 일반인이 가장 기초적으로 기독교에 묻는 질문을 제게 하고 계십니다.하나님이 출현한 자체가 바로 무에서 유로 만들어진 제일원인인데 그물음을 불교에서 찾으니 넌센스군요.글쓴이는 하나님을 언제나 외고 읽고 말하고 생각하니 당연히 실재하는 존재로 알고있지만,마치 얘기들이 인형을 살아있는 생명채로 여기듯이 말입니다.허나 일반인은 하나님 자체가 의혹의 시작인데 그 가상의 존재가 천지를 창조했다하여 누가 아 그렇구나! 하겠습니까. 무명에서 행이 나왔다면 무명의 전에는 무엇이 있었나의 의문이 따르나 이것은 부처님께서 우주의끝은 어떻습니까의 질문과 마찬가지로 침묵하셨을것같군요.우리들이 알수없고 이해할수없는,세상의 고를 종식 시킨는데 하등 쓰잘데기 없는 질문이라는거죠.그런데 유대교는 감히 하나님이 창조했다고,님이 말하는 과학과 상식 어디에도 적용되지 않는 무조건건적 믿음에라야 가능한 이야기로 태초의 신의 일을 얼버무립니다.만일 부처님께서 “나의영적 아버지 원조 부처님께서 만드셨다” 말씀하시고 불자 들이 그말씀을 님이 창세기를 믿듯 신주단지 받들듯 한다면 님께서는 나와 똑같은 논리로 불교를 공격할것입니다.태초의 사건에 대한 차이는 부처님은 침묵하셨고 모세는 지어내고 아 예수님도 일절언급않으셨죠.그걸로 족합니다.
        그리고 무명에서 행이 어떤방식으로 나올수있으며 무에서 유가 불가능한 과학증거를 대시는데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저의주관이고 느낌이라했습니다.그런데 님의 하나님 또한 무에서 유로 탄생하신 전형적 모델인데 ..? 여튼 님의 반론중에 받아들일수없는게 정신과 물질을 완전 분리하고 정신에너지와 실체적 에너지를 완전 구분하시는데 그럴만큼 우리과학이 발전했습니까? 예를 들어 정자와 난자는 물질일뿐인데 어찌 합해져서 육체와 정신을 가진 나를 만듭니까?
        원자 속에 핵 핵속에 양자 중성자 예측건데 그속에 다시 우주의 우주만한 수의입자와 공간이 들어있을 것입니다.물론 상대성의 이론으로 말이죠.그리고 실체적에너지가 아닌 에너지가 있나요?단지 쓰임을 모르고 지금 사용하지않을뿐이지.과학은 필요하지않으면 없는걸로 간주합니다.그러고 보니 님이나 나나 비슷한 견해인데,아마 님이 나를 진화론자로 오인하여 추궁하는 형국인데,상기시키자면 나의 십이연기에 대한 해석에 과학이 발견한것을 어느정도 접목 시켰을따름이지 그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덤으로 근현대 과학이 밝히는 바를 2500년전 이미 붓다가 설했다는 정도로 만족 하는것.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가 가장 합당하다 여기신다면
        “나는 태초의 사건을 전혀알지 못한다”라 이해 하고싶군요.
        추가로 님께서는 생각과 이성으로 충분히 신을 파악할수있다 보시는듯한데 님이나 나의 사고와 인식등은 거짓임을 부처 조사를 빌어 다시한번 상기시켜드립니다.이것은 제가 님에게 나쁜 감정으로 하는 말이 아님니다.우리가 나누는 대화도 어째보면 헛소리고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든것도 거짓으로 드러나는게
        다반사지 않습니까? 님은 세상사를 보고 계십니다.인간이 고층 빌딩을 올리고 하늘을 나르고 달나라 화성에가고 이모든게 인간정신의 승리고 이 위대한 정신으로 예수를 영접하고 신을 이해하고.이런 사고가 깔려있어 태초의 일을 그렇게 캐고 싶은것 같습니다.과학자들이 우주의 기원을 밝히려들듯이.바벨탑을 쌓듯이.모든것은 알수없습니다. 나는 모른다가 진리의 첫걸음인데,
        많은 선사들께서 평생을 공부하고 연구하신것을 단번에 불태우시고 토굴에 들어앉는 뜻을 님께서 아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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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0월 10 2014 4:06 오후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피조된 모든 것들의 제 일의 원인으로 믿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무엇 혹은 누군가에 의해서 피조된 것이라면 하나님이 될 수 없지요. 하나님을 피조한 어떤 존재가 궁극적 하나님일 겝니다. 제가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무한소급될 수 없습니다. 결국 소급에 소급을 거치다 보면 소급의 시작점에 도달하게 되지요. 그 점에서 우리는 소급되어진 것들을 무에서 유로 창조한 신을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위에도 언급하셨다시피 난자와 정자가 만나는데 어찌 정신을 소유한 인간이 탄생할까요? 누군가가 생명을 넣으셨기 때문이라는 논증이 가장 타당한 듯 합니다. 정신이라는 것이 그냥 발생할 수 없지요. 종흔님의 심장이 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군가가 그것을 뛰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역학 법칙에 의해 그냥 뛸 수 없지요. 저는 뛰게하시는 분을 신으로 보는 게지요.

        한 가지 더 말씀드리지자면 제가 신을 믿는 믿음은 “무조건 믿음”이 아닙니다. 가능성 뒤에는 타당성이 와야 한다고 말씀 드렸다시피 성경이 그것을 상당히 타당하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순환논증의 오류로 보일 수도 있을 겝니다. 그러나 순환논증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제 주장은 (1) 성경이 신을 말한다, (2) 고로 믿는다가 아니라 (1) 성경이 신에 대해서 말한다, (2) 성경은 그 주장을 신뢰할 수 있는 타당성들을 많이 제공한다, (3)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신은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입니다. 그리고 이런 타당성 위에 종흔님이 말씀하신 믿음이 역사한 것이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언제라도 좋답니다.

        이제 제가 정말 드리고 싶은 말씀으로 넘어가야 할 듯 합니다. 종흔님께서도 해탈을 위해서 노력하셨지요?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담마의 수레바퀴 속에서 저는 조금도 해탈에 근접하지 못했습니다.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죄만 짓고, 더 악해지는 것이 인간임을 깨달았지요. 겉모습은 부처인데 속은 시컴한 108 요괴가 저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랍니다. 겉만 부처이면 뭐하나요? 속은 요괴인데? 날이 가면 갈수록 해탈의 염원만 커져만 갈 뿐 불가능이라는 사실이 점점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던 날 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께서는 제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저를 대신하여 돌아가셨답니다. 어처구니 없었습니다. 유대인이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데? 아담이란 녀석이 선악과를 먹은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생각했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해탈이 이렇게 쉽다는 사실에 화가나기도 했었답니다.

        그러나 제 속에 있는 그 무엇인가가 그 소식에 반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어지게 되었답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담마의 수레바퀴에서 나와 무거운 짐을 벗게 된 것이지요. 우습지요? 논리적이지도 않구요?

        사실 저는 논쟁으로 종흔님을 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위에 드린 제 인생 이야기로 논증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둘 다 공통적으로 서 있는 곳은 둘 다 죄인이고 해탈을 염원한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그것을 인간의 노력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이 할 수 없어서 예수님께서 대신 하셨기에 그 분을 믿으라고 합니다. 저는 그 분을 믿은 순간 자유하게 되었고, 이 자유함을 종흔님께도 드리고 싶어 예수님을 이야기한 것이랍니다.

        솔직히 여쭙건데, 종흔님께서는 스스로 해탈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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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종흔 / 10월 10 2014 9:55 오후

    하나의 진리를 각각의 이름으로 부를 뿐. 불성 하나님 진리 도 태극 법…

    명칭과 장소와 전설이 틀리다 하여 전혀 다르다 할 이유가없습니다.

    그문제에 대해선 여기까지하고 자유와 해탈에 대해 저의 느낌을 말하자면 먼저 그리스도가 느끼는 자유와 평안이 깨달음과 같다하면 뭐 할말이 없습니다만,나도 옛적에 교회를 열심히 다녔던 사람으로 그때 내가 느낀 평안은 예수님을 믿고( 물론 성경에 감동해서 믿었습니다)그분의 말씀을 따른다 생각하니 든든하고 그렇게 세상일에 관심을 덜가지니 양보하게되고 양보하니 다툴일이없어 평안했습니다.그리고 자유 스러웠습니다.예수가 목적이니 속세에 바라는 바가 별로없고 그러니 세상사에서 자유 로 웠다고 할까요. 지금 붓다와 깨달음을 알고난후에 생각하니 그때 그랬었구나 느끼는 겁니다.자유롭고 평안 했지만 당연히 깨침은 아니었지요. 아마 구원을 얻고 거듭 난다는게 불교에서 말하는 깨침과 같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데.그때는 구원이 내가 예수를 알고 믿어니 구원 받았고 내가 주님의 말씀으로 사니 거듭났다고 그렇게 대수롭지않게 여겼던것 같습니다.이또한 깨침을 알고나서 느낀점입니다.
    지금 내가 기독교인에게 받는 느낌이 그때 내가 느꼈던 구원과 거듭남에 대한 오해를 그대로 하고있지않나 생각합니다.내가
    부처를 알고 부처님 말씀을 따른면서도 언감생심 깨침은 아득하다
    여기기에 그때의 착각을 깨우칠수있어 얘기하는것입니다.
    혹 결례지만 님의 자유와 평안이 내가 느꼈던 것과 확연히 다른가요?님은 구원과 거듭남을 얻었나요 다시말해 깨치셨나요?
    나 대로의 해석이었습니다.저에게 해탈 할수있냐고 물어시는 데
    부처도 사람이고 예수도 사람이고(깊이 들어가지맙시고)나도 사람인데 못깨칠이유 전혀없다고 생각합니다.물론 내 기분이지만
    여기서 전생이 나와야되는데 양해하세요.해탈과같은 일대사건은
    당대만이 아니라 전생에 인연도 관계하지요. 내전생은 볼눈이없어 모르지만 현생에 내가 저지른 짓을 봐서는 해탈과 거리과 아주 먼놈입니다만 목숨걸고 하는 거지요.님의 말대로 예수가 깨달음을 주면은 예수를 믿지만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진정한 믿음은 불교의 깨침과 같다는 고백처럼 저역시 그러하리라 여기고 있는바 새삼 다른 스승을 찾을 이유가없지요.그리고 부처께서 단언 하시는바 내가 너희들에게 길을 가르쳐 줄수는 있어나 그길은 네가 가야한다는 말씀이 옳다 여기기에 예수만 믿어면 구원 얻는다는 말이 영 찜찜하고.또한 진정한 믿음은 깨침처럼 어렵다 라는 뜻을 이해한다면 예수가 나를 구원 하다는게 내가 도를 닦는 것과 같은 정진이 전제 되었을때 이루어 지는 은혜일진데 굳이 똑같은 도를 한다리 더 건너서 어렵게 갈 이유가 없다고 결론 내리는거죠.어느 유명한 선사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했거늘 새삼 예수를 지고 힘들게 갈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제 생각은 부처는 있는그대로 도와 도에 이르는 길을 제시 하셨고 예수는 우매한 인간들에게는 도 닦음이 힘들어 포기 할수밖에 없으니 부득불 깨치긴 힘들지만 천국은 보이는 신앙의 힘을 빌린것아닌가 추측합니다.글자 그대로 “불교”를 만든 붓다의 제자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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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0월 11 2014 10:55 오전

      네, 마음으로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종흔님께서 자라오신 배경도 듣게되니 쓰신 글들이 더 잘 이해가 되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마음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차피 믿음과 믿음은 논쟁이 되지 않습니다. 종흔님의 믿음과 제 믿음도 피차 증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과학으로 증명이 아닌 검증할 수 있는 부분만을 다룸으로써 서로의 믿음을 지탱하고 있는 타당성을 검증코자 했던 것이고, 그러한 사유로 볼 때에 불교에서 믿고 있는 윤회는 타당성을 잃게 된다고 논증했던 것이지요. 종흔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신은 과학 너머에 있기에 인간은 그 신을 찾을 수 없다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적 계시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리고 저도 종흔님처럼 신은 하나고 그 신을 부르는 이름이 다양한 것 뿐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들을 연구해 보면서 곧 접게 되었지요. 왜냐하면 각 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그 분의 역사하심이 다 다르게 나와있거든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순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신이 모순을 일으키고 거짓말을 한다면 철학적으로 신존재로써의 타당성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다 같은 신으로 부터 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 되지요.

      예컨대 코란은 지구가 네모나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지구를 만들었다면 그것의 생김새를 모를리 없잖습니까? 코란이 만들어진 당시에는 지구의 모양이 네모나다고 여겨졌던지라 사람이 그 사상으로 코란을 만들은 게지요.

      흰두교의 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가 네모나다고 합니다. 게다가 다른 경전에는 지구 아래에는 코끼리가 있고 그 아래에는 바다 거북이가 바다를 헤험친답니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지요.

      몰몬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인의 DNA가 유대인이랍니다. 결국 과학의 발전으로 이 모든 내용들이 허구임이 밝혀졌지요.

      그러나 성경은 지금까지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아람으로 해석하자면 틀린 부분을 찾을 수가 없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에 쓰인 창세기와 욥기가 어찌 지구가 둥들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또한 별의 수가 셀 수 없다는 것과 물의 순환, 그리고 피의 가치등인 너무 정확하게 나와 있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시작과 끝, 그리고 인간의 상태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요. 결국 이 성경만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각으로 귀결된 게지요.

      아울러 제가 시타르타를 좋아하는 이유는 (참고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시타르타를 싫어하지요? 저는 그 분을 존경합니다.) 그 분은 불교를 종교화 하지 않았고 철학화 했기 때문이에요. 적어도 그 분은 정직했던 분이었답니다. 아난존자의 말을 들어보면 시타르타는 진리를 찾기 위해서 발버둥쳤고 결국 진리의 궁극은 인간의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만약 그가 예수님의 복음을 들었다면 그 복음을 받아 드렸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역시 저의 주관적인 해석이니 노여워하지 말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실 기독교 뿐 아니라 법정에서도 일차 증인의 주장이 가장 가치있게 여겨진답니다. 그래서 사본학에서도 예수님의 증인들의 주장이 가장 가치있게 여겨지지요. 저는 성철 스님이나 오쇼의 시타르타 이야기보다 아난존자의 이야기를 가장 가치있게 두고 그분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답니다.)

      아시다시피 시타르타는 어렸을 적에 왕궁에서 살다가 죽음을 목격하고 출가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고심하다가 결국 깨닫지 못하지요. 그래서 그 부분을 십사무기로 규정한 것이랍니다. 저는 시타르타가 그 질문은 죽는 그 순간까지 찾고자 염원했으리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정말 진리를 찾고 싶어했던 분이었으니까요.

      제가 일면식도 없는 종흔님과 이렇게 시간을 보내며 대화를 나누는 이유는 저는 시타르타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그 진리를 찾았기 때문에 나누어 드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랍니다. 저는 기독교의 교리를 자랑하거나, 타인의 믿음을 폄하하기 위하여 이 블로그를 시작한 것도 아닙니다. 종흔님께서도 목마르셨다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을 찾으셨다면 주변의 목마른 사람들에게 알려주시겠지요? 저도 그런 마음에 종흔님과 대화를 시작한 것이랍니다.

      만약 종흔님께서 각자의 믿음은 각자의 것이니 상관말자고 하시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과학으로 신을 찾을 수 없으니 과학적인 담론을 하지 말자 하시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맹목적이 아니라 어느정도의 타당성을 확보하고 있어야 하고
      과학은 신앙을 대변할 수 없지만 신앙은 과학적으로 모순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게 제 생각이기에 위의 방식으로 논증한 것임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왜람된 질문이오나 한 가지만더 여쭙자면 종흔님께서는 사후세계를 믿으시나요? 그렇다면 어떻게 그곳에 가실 수 있는지 아시나요? 질문이 많아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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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흔 / 10월 11 2014 12:00 오후

        언어로는 진리를 표현할수없지요.하물며 언어의 조합으로 설명한 과학을 근거해 절대영역을 단정 지음이 타당할까요.
        님이 어떠한 이론으로 하나님의 전능을 묘사하더라도 님이 수긍했듯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은 인간으로서 알지못한다 했으니 님이 이해했다면 이미 하나님의
        일이 아닌것입니다.또한번 말하지만 님의 이성을 믿지마세요.님은 가장가까운 사람의 마음도 모를것입니다.그런데 어찌 하나님의일을 알려하나요.중세에 기독교가 과학자에게 저지른 만행을 잊어셨나요.그런데 생뚱맞게 과학을 빌어 하나님의 우수성을 입증 한다는게, 갈릴레이가 웃겠네요.
        그리고 사후세계는 죽어보지않아서 잘모르겠지만,도대체 살아있어면서 죽음후가 그렇게 궁금한게 뭣때문입니까? 점쟁이가 되려하지않는다면 그런데 눈을 돌릴이유가 없습니다.그리고 사후는 골몰이 생각할 필요도없이 아침에는 해가 뜨는것처럼 죽어면 윤회한다 이야기 드렸는데,더알고 싶어면 티벳사자의 서를 보시라고 위에서 얘기했는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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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0월 13 2014 6:06 오전

        답글이 늦었습니다. 주말은 저 같은 목사에게는 가장 바쁜 시간이거든요.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기독교에는 계시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계시라 함은 신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알려 주신다는 의미 정도로 해석하면 됩니다. 종흔님께서 말씀하셨드시 인간의 이성, 경험 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 주셨다는 의미이지요.

        이 계시에는 두 종류가 있답니다. 첫 째는 일반 계시이고, 둘 째는 특별 계시입니다. 일반 계시란 삼라만상에 깃들어 있는 신성을 의미하고, 특별 계시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보여지는 구체적인 하나님 (그 분의 이름, 하신 일, 사후 세계 등등)입니다.

        종흔님께서도 신성을 인정하지않습니까? 그 이해를 기독교는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자연에 깃들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일반 계시적 이해로는 천국 (종흔님의 언어로 쓰자면 극락이겠네요)에 갈 수 없다고 기독교는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극락에 가려면 정말 점도 티도 없이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런 삶은 살 수 없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노력해도 해탈에 가까워 지기는 커녕 점점 멀어지니 어찌합니까? 그래서 일반 계시를 통하여 막연한 하나님의 개념을 안다고 해서 해탈을 이룰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특별 계시라고 기독교는 말합니다. 특별 계시란 우리가 스스로 해탈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사 우리의 죄를 짊어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사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을 맞이했다고 증거하지요. 그래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을 상속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랍니다. 종흔님께서도 부인하시지 않듯이 개인의 노력으로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은 너무 막연하지 않습니까? 그동안 해 보셨다면 이 주장이 얼마나 불가능한 주장인지 아실 겝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리고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그렇답니다.

        그리고 종흔님께서는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는데, 저에게 있어서 죽음은 시타르타가 느꼈던 것 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로 하여금 왕궁을 떠나도록 만들었듯이 그렇게 무섭고 시급하게 다가왔지요. 만약, 정말 만약 기독교의 주장이 옳다면 어떻게 될까요? 한 번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요?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파스칼의 Wager 이론을 살펴 보세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한답니다.

        참고로 제가 살고 있는 곳이 한국이 아니라서 티벳사자의 서는 아직 구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나 가능할 듯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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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종흔 / 10월 14 2014 8:17 오전

    계시에 일반 계시가 있고 특별 계시가 있다는것은 금시초문이네요.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바다가 오직 소금맛 한가지를 가지듯 법에는 오직 자유의 맛을 가질뿐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중 여러단계가 있습니다.물론 이러한 단계도 부처님의 가르침데로 열심히 정진했을때 성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깨치고 열반에 이르러 부처가 되면 더이상 차별이없습니다.
    아마 님이 말하는 분별이 있는 계시라는게 불교에서 깨치기전
    단계 즉 아라한의 전단계인 예류과,불환과 등을 얘기하는듯 합니다.
    아시겠지만 부처님은 천당만을 오직 성취해야할 이상으로 추천 하지않습니다.천당또한 언젠가는 인연을 다하면 떠나야 하는법. 무량겁의 인연으로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생에 해탈을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잠시 제가 해탈의 개념을 얘기하려합니다.님께서 해탈을 마치 얻으야되고,이루어서 병자들을 고치고, 축원을 내리며,인간들의 우러름을 받으며,그들을 모두 하나님께인도하여 천국 가게하는 능력으로 여기시는듯한데, 큰 오해를 하고 계시는것입니다.해탈은 영광도 아니고 열심히 공부해서 성취해야할 벼슬도 아닙니다.열반즉 니르바나란 해탈의 다른 이름인데 그뜻은 소멸입니다.촛불이 꺼지듯 자기의 존재가 없어지는것,그것을 이름하여 열반이라는 거지요.흔히들 욕망의 소멸 분노의 소멸 어리석음의소멸이라지만 인간 자체가 탐진치 삼독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삼독이 소멸한다는 말은 바로 내가 없어진다는 말입니다.좀더 님의 문자로 이해하기쉽게 말하자면 정신 곧,마음이 죽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그러면 님은,아니,죽어 없어진다고? 고작 죽어 없어질것을 위해 일평생을 바치는가? 그 고작 죽어 없어진다는게 그것이 바로 깨침인데 그것을 노력해서 얻어야할 실체로 여기니 점점깨침에서 멀어지는것입니다.예를 들어 시험에서 백점 맞기가 어려울까요? 빵점이 어렵겠습니까?빵점이 더 어렵답니다.백점은 노력하면 되지만 빵점은 노력으로 않된답니다.도 즉 법도 마찬가지입니다.온갖 인습과 업에 얽매여 가진것을 움켜쥐고 놓지못하며 악착같이 깨침을 잡으려 드는데 어찌 일체 마음이 죽음과 같이 사라진 맛을 볼수있겠습니까.예수님도 말씀하시죠.”낮은곳으로 임하라.자기를 죽여라.”두성인의 말이 어찌이리 닮은지요.노파심에서 하는말인데 부처가 예수를 따라했다고 우기지는 않으시겠죠.
    여튼 왜 부처님이고 하나님이고 “니속에 있다”하셨고 너라고 생각하는 그 헛것을 버리고(죽이고) 본래 아무것도 없는 그자리에 머무르면 깨쳤다하고 구원받았다 하는 것이지 누구를 믿어서
    어쩌고 할게 아니라 그말입니다.불교도 한때는 아니 지금도 많은 분들이 부처님의 능력으로
    극락왕생하게 해주옵소서하고 열심히 빌고있습니다.이분들도 깨침은 어렵다 생각하고 포기하신 경우죠.위에서 얘기 했다시피 인식의 전환만 있으면 이렇게 쉬운것을, 자기가 쌓았던금을 똥으로 깨닫고 순간 순간 버리면 되는것을( 이것을 올바른 정진 이라합니다) 부처님탄생전에도 무수히 많은 부처님이 계셨고 부처님 생전은 물론이고 불멸후 지금까지도 각나라에서 깨치는자가 나오는것이 제말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사후세계는 열반 해탈에대한 저의 설명을 이해하셨다면 더이상 집착않으실것입니다.뭔얘기냐하면
    니르바나(소멸)가 정신(마음)이 죽어 없어지는거라 말씀드렸고 그렇다면 니르바나를 이룬 성자에겐 사후세계란 남아있는 육신이란 껍데기가 기능을 다하고 없어지는것일뿐 죽었다하나 어디에고 흔적이없습니다.
    예수는 사역기간중 그 백성들에게 지금 그자리에서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했지 죽은후에 어찌하라 가르치지 않았지요.부처는 중생이 살아생전 해탈을 해야하고 그에대해서 불철주야 중생을 제도 했지 못깨치고 영혼(마음)이 저승가서 어찌어찌해라라고 하지않았지요.
    부득불 전생의업으로 현생의 게으름으로 못깨치면 살아서 행한데로 육도윤회의 한자리에 다시태어난다 일렀습니다.아니,이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인데 열심히 믿어면 천당가고
    죄에빠지면 지옥간다고 그당연 한거쟎아요.어찌 기독교에서만 사후에 천국 지옥이 있다하고 불교는 육도윤회라고 그보다 세밀하게 설명을
    했었는데 왜 못믿어시는겁니까?
    거듭 확인시켜드리지만 살아있을때 구원 받아야하고 깨쳐야되는 것(소멸, 정신적죽음)이지 살아생전에 마음이 죽어 열반에 들지못한채 방황하며 저승가면 다시 어느생에 태어날려나 심히 걱정하고있다면 나는 잘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말하자면 고3수험생이 명문대 가기위해 훌륭한 선생님 밑에서 열심히 공부에만 집중해야지 벌써부터 어느 재수학원이 좋은지 학원가를 두리번거린다면 그큰일 아닌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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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0월 15 2014 9:33 오후

      소크라테스는 논쟁을 하기에 앞서 단어부터 정리하라고 말했지요. 종흔님과 이야기 하면서 제가 의아한 부분은 종흔님께서 몸담고 계신 불교의 뿌리입니다. 지난 번에 제게 해 주셨던 말씀과 이번에 해 주신 말씀을 빌어 몇 자 적도록 하겠습니다.

      종흔님께서는 열반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님께서 해탈을 마치 얻으야되고,이루어서 병자들을 고치고, 축원을 내리며,인간들의 우러름을 받으며,그들을 모두 하나님께인도하여 천국 가게하는 능력으로 여기시는듯한데, 큰 오해를 하고 계시는것입니다.해탈은 영광도 아니고 열심히 공부해서 성취해야할 벼슬도 아닙니다. 열반즉 니르바나란 해탈의 다른 이름인데 그뜻은 소멸입니다.촛불이 꺼지듯 자기의 존재가 없어지는것,그것을 이름하여 열반이라는 거지요.흔히들 욕망의 소멸 분노의 소멸 어리석음의소멸이라지만 인간 자체가 탐진치 삼독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삼독이 소멸한다는 말은 바로 내가 없어진다는 말입니다.좀더 님의 문자로 이해하기쉽게 말하자면 정신 곧,마음이 죽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불교에서 사용하는 열반의 의미는 위의 주장하신 의미만 있지 않습니다. 종흔님의 주장은 선승(禪僧)과 소승(小乘) 불교과 맥락을 같이할 뿐이지 대승(大乘)불교의 개념과는 틀리답니다. 대승불교는 열반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극락왕생하며 부처와 함께 영생을 즐기는 것이지요.

      게다가 “불교도 한때는 아니 지금도 많은 분들이 부처님의 능력으로 극락왕생하게 해주옵소서하고 열심히 빌고있습니다.이분들도 깨침은 어렵다 생각하고 포기하신 경우죠.”라고 말씀하셨는데, 불교인 중에도 해탈의 방법에 차이가 있습니다. 선불교인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해탈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고 티벳 불자와 대승 불자들은 부처와 보디샤트바에게 도움을 구해야지만 해탈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보살의 정신이 나온 것이지요. 마치 기독교에도 율법주의와 은혜주의로 나눠지는 것처럼요.

      “노파심에서 하는말인데 부처가 예수를 따라했다고 우기지는 않으시겠죠.”라고도 말씀하셨는데, ㅎㅎ 그럼요, 제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시타르타는 예수님의 탄생보다 몇 백년이 앞서니까요.이렇게 서로 통하는 부분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일반계시적 부분에 속하는 것이랍니다. 단지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절대 다른 것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성과 유일성입니다. 이것이 특별계시이지요. (종흔님께서 위에 이해하는 특별계시는 제가 주장하는 특별 계시와 다르답니다.)

      “거듭 확인시켜드리지만 살아있을때 구원 받아야하고 깨쳐야되는 것(소멸, 정신적죽음)이지 살아생전에 마음이 죽어 열반에 들지못한채 방황하며 저승가면 다시 어느생에 태어날려나 심히 걱정하고있다면 나는 잘 이해를 못하겠습니다.”는 말씀에는 공감합니다. 기독교에도 살아서 영생하는 자가 죽어서도 영생한다고 말한답니다. 이승에서 믿어 깨닫지 못한 자는 죽어서 지옥에서 영생을 보내야 한다고 말하지요. 그리고 그 깨달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만 이루어 진다고 주장한답니다.

      중요한 것은 만약 종흔님께서 제가 생각하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으신다면 신앙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필요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만약 기독교의 주장대로 천국과 지옥이 있고, 천국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만이 가는 것이 사실이라면 (물론 제가 제 믿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은 아시지요?) 어떨까요? 즉 대승불교의 열반 개념이 옳고, 열반의 길은 티벳 불교와 대승 불교가 옳으며, 하나님은 기독교의 예수님이시라면 어떨까요? 생각이 바뀔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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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흔 / 10월 16 2014 9:40 오전

        언어로 진리를 표현할수없다는것은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자들의 일반적 상식입니다.그래서 한단어를 괄호 쳐서 추가하고 때론 “님이 이해하기쉬운 말로서 표현한다면” 이란 단서를 종종 달았던것입니다.논쟁을 할려면 단어를 정립시키는게 먼저가 아니라 논쟁대상에대한 일정한 수준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데 기독교인들의 막힌종교관을 익히알고있어나 이렇듯 한말 또하게
        만드는 데는 손을 들었습니다.

        님은 단어에만 집착하는게아니라 권위에대한 집착 또한 대단하십니다.어떤자는 소승으로 어떤자는 대승으로 어떤자는 소승과 대승의 조합으로 또는 밀교로 결국 깨달음이 중요하지 수단은 수단으로 족할뿐입니다.님이 카톨릭이든 장로교던 침례교던 여호수의증인이던 상관없듯이 말입니다.
        근본과 뿌리를 찾는 자의 입에서 수백억 중생의 붓다로 불리신 분을 굳이 싯타르타로 부러는 독선이 나오는것은 아이러니이네요.

        그리고 도대체 몇번을 말하게 만듭니까.사후세계는 육도 윤회로서 설명을 드렸는데 뭔 그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격상시키세요.나나 님이나 죽어봐야 육도윤회의 어디에 떨어질지 안다는 얘기를 님은 사후세계를 모른다고 해석하시는데 할말없네요.후세에 겨우 천국 지옥밖에 모르는 자들이 육도윤회의 구체적 도식까지 상식으로 알고있는 불자들에게 사후세계를 모른다하니 도대체 그동안 어떻게 제말을 이해했는지.그리고 거듭 강조하지만 살아서 구원 얻는데 힘쓰지 죽은후는 님이 어찌할수있는게 아닙니다.혹 님이 원하는것이 불신자들에게 사후세계의 협박으로 믿음을 강요하실 요량이 아니 신지 심히 걱정이네요.죽은후를 기대하지말고 살아생전 해탈하는데 힘써셔요. 예수님도 그러시길 바랄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으른자들이 가는 저승을 꼭가시길 원한다면 티벳사자의서를 꼭보세요.깨치지못한자들의 사후세계가 자세히 기록 되어 있을것이니 님이정말 찾는 성경 이상의 경이 될것같네요.

        그동안 긴시간을 나눴데 각자가 느낀바가 있을꺼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또언제 인연이닿으면 만날수도 있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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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0월 19 2014 11:51 오전

        네, 종흔님의 의도를 잘 알겠습니다. 이렇게 논쟁을 마무리 하신다니 조금 아쉽습니다. 종흔님과 계속 생각을 나누며 교제하기 원했거든요. 혹시라도 길 가시다가 제가 생각나시면 다시 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쁘게 맞이하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내년 여름에 두 달 정도 한국에 방문하게 됩니다. 한국에 계시다면 한 번 뵙고 밥상을 마주하고 교재하기 원합니다. 불자로써 목사와 함께 교재하는게 불편하시다면 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 번 뵙기 원합니다. 종흔님의 말씀처럼 이렇게 만나 긴 시간동안 생각을 나눈 것도 “인연 (제게는 필연입니다)”이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으로 종흔님을 보내 드리면서 드리고 싶은 두 개의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며 인사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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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익명 / 1월 9 2015 5:04 오후

    우연히 지나다가 방문한 블러그인데 두분의 대화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기독교의 입장과 불교의 입장에 대해서 좋은 의견을 보여주셨습니다. 서로의 논쟁들이 좋은 방향으로 다시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종교학 강의보다 더 흥미로웠으며 어쩌면 이론의 나열보다, 집약된 핵심적 의견으로 서로의 견해의 차이를 잘 느낄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와 불교에 대한 이해를 두텁게 하였습니다. 두분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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