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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2/2014 / Sanghwan A. Lee

클리나멘 (clīnāmen)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관성(慣性)에 이끌려 궤도(軌道)를 질주하던 원자가 가끔씩 전혀 예기(豫期)치 않은 방향으로 일탈(逸脫)하는 현상”을 가리켜 “클리나멘”이라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전에 사용됐던 용어라서 그런지 이제는 그의 장황한 설명과 철학적 사유는 거두절미되고 “관성으로 부터의 일탈”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나 역시도 이런 의미로 클리나멘을 사용함을 먼저 밝혀둔다.

성경에는 세 개의 클리나멘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파랍토마(παράπτωμα)요, 두 번째는 케노시스(κένωσις)며, 세 번째는 에피스트레포(ἐπιστρέφω)다.

파랍토마 (παράπτωμα): 파랍토마는 ‘진리로부터 일탈하다’는 뜻으로 “죄”라고 번역됐다. 파랍토마적 클리나멘은 에덴 동산에서 일어났다. 인간은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진리의 궤도를 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궤도로부터 일탈하는 일이 일어났다. 사랑해서는 안될 것을 사랑한 불순종 때문이었다. 진리의 궤도에서 일탈한 인간은 즉시 사망이라는 종착역으로 굽이쳐 들어가는 죄의 궤도에 진입하게 된다. 뒤늦게 후회해 보지만 너무 늦었다.  죄의 궤도 속에 흐르는 관성(慣性)의 힘은 탈출을 시도하는 죄인의 힘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케노시스 (κένωσις):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일탈이 일어난다. 케노시스다. 케노시스란 ‘비움’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일탈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과의 동등됨을 비우사 신인(神人)으로 일탈하셨다. 이 일탈은 마구간을 향한 영광의 보좌로부터의 일탈이요, 가장 낮은 곳을 향한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의 일탈이며, 일탈된 양들을 향한 목자의 일탈이었다. 이러한 충격적인 일탈의 원인은 사랑 받을 자격 없는 인간을 향한 사랑… 일탈하신 하나님께서는 일탈한 죄인들과 부딪히셨고, 곧 두 줄기의 선을 긋고 본래의 자리로 회귀(回歸)하셨다. 이것은 죄의 관성에 사로잡힌 인간에게 큰 소망이 되었다. 일탈하신 하나님과 부딪힌 죄인들은 죄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고, 그 분께서 그으신 두 줄기의 선, 십자가를 통해 진리의 궤도로 회귀(回歸)할 길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에피스트레포(ἐπιστρέφω): 그 다음에 또 하나의 대대적 일탈이 일어난다. 에피스트레포다. 에피스트레포는 ‘돌아가다’는 뜻으로 “회개(回改)”를 뜻한다. 일탈하신 하나님과 부딪힌 자들은 죄의 궤도로부터 일탈된다. 그리고 두 줄기로 난 십자가의 길을 따라 진리의 궤도로 회개(回改)하며 회귀(回歸)된다. 이 일탈은 생명을 향한 죽음으로부터의 일탈이고,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마귀의 자식으로부터의 일탈이며, 영원한 본향을 향한 타향으로부터의 일탈이다. 이러한 일탈의 원인은 예수님의 은혜요, 일탈의 관성은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된 일탈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다.

첫 번째 일탈은 사랑하면 안될 것을 향한 인간의 불순종에 의거하고
두 번째 일탈은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에 의거하며
세 번째 일탈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일탈자, 예수님의 은혜에 의거한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클리나멘이 점점 잊혀지는 오늘, 성경이 증거하는 클리나멘은 반드시 기억되어야만 할 것이다.

예수님,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예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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