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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1/2014 / Sanghwan A. Lee

강남 언니

얼마 전 한 지인으로부터 “강남 언니”라는 표현을 듣게 되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 물었더니 “성형으로 얼굴이 비슷하게 된 사람들을 일컫는 표현”이란다. 아니나 다를까 모처럼 한국을 방문한 후 강남 일대에서 볼일을 보다가 비슷한 사람들이 하도 많아 어리둥절 했던 작년 여름이 떠올랐다. 똑같은 눈매, 똑같은 코, 똑같은 입술, 똑같은 턱 선을 갖고 있던 “강남 언니”들 때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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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자 라캉은 “당신의 모든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다”는 말을 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이다. 어리둥절한 표현이지만 사람들이 “강남 언니”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에 복제한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이라 생각된다. 영희라는 가상 인물에 빗대어 예를 들어 보자. 대중 매체(大衆媒體)는 “강남 언니”의 얼굴이 미(美)의 기준이라고 집요하게 강요하고, “강남 언니”의 얼굴을 강요 받은 대중 매체의 노예들은 알게 모르게 그 얼굴을 욕망하기 시작한다. 어느날 대중 매체의 영향력 밖에 있던 영희가 도시로 이사온 후 “강남 언니”의 얼굴과 그것을 욕망하는 집단적 타인들을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그 얼굴이 예쁘다고 생각되지 않았지만 그 얼굴을 욕망하는 타인들로부터 새로운 미의 기준을 강요 받자 영희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다. 그녀도 시나브로 “강남 언니”의 얼굴을 욕망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영희는 그 얼굴을 자신의 얼굴에 복제함으로 새로운 “강남 언니”가 된다. 이렇게 또 한 명의 “강남 언니”가 탄생하는 것이다. 라캉이 잘 지적했다. 영희에게 있어 “강남 언니”의 얼굴에 대한 욕망은 타인에게 강요 받아 만들어진 타인의 욕망이었던 게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삶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때때로 우리는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집의 개념을 타인의 욕망수치로 정의하려 한다. 내가 그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중요치 않다. 남이 좋아하면 그게 좋은 거다. 내게 불필요 해도 남이 필요한 것이면 좋은 것이요, 내게 밉상인 것들도 남이 곱게 보면 좋은 것이며, 내게 소중하지 않아도 남이 소중히 여기면 좋은 것이다. 그래서 내 삶은 타인의 욕망이 들어서는 복제, 복제, 복제, 복제, 복제의 전당이 된다. 카렌 암스트롱은 이러한 시대를 보며 이렇게 한탄했다.

사람들은 노예처럼 유행의 명령을 따르고 심지어 현재의 미의 기준을 복제하느라 자기 얼굴과 몸에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가끔 자신의 우상을 구경하려고 큰 노력을 기울이며, 그들과 한자리에 있으면 고양되어 환희에 젖는다. 또 우상의 옷차림과 행동을 모방한다.

사실 이것이 우리가 정말 우려해야 할 인간 복제가 아닐까? 몇 해 전 한 아이가 참 못생긴 가방을 들고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속 생각을 터 놓을 정도로 가까웠던 사이었던 지라 내가 물었다. “그 가방 참 못생겼다. 왜 그런걸 매고 다니니?”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무슨 말이에요? 이 가방이 얼마나 유명한 건데? 이거 매고 다니면 사람들이 다 부러운 눈으로 쳐다 봐요.” 내가 되물었다. “그게 뭐가 중요하니? 네가 볼 때 그 가방이 정말 예쁘니?” 아이는 내가 지루하다고 말하고 방을 나갔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사는 인생인지, 어리둥절하다.

이런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로마서 12:2은 중요한 나침반이 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본받다”고 번역된 헬라어(συνσχηματίζεσθε)는 요즘 말로 ‘복제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세대”라고 번역된 헬라어(αἰών)는 ‘세상의 유행’ 따위를 포함하는 포괄적 단어이다. 이 구절을 본 글에 맞추어 재해석 하자면 “이 세상의 유행 따위를 복제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게다가 “본받다”는 동사가 수동태로 되어있어 세상이 얼마나 강하고 집요하게 복제를 강요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가 깜빡 정신줄을 놓았다가는 세상이 강요하는 복제 요구에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대중매체를 통하여 강요되어지는 복제의 대상들 앞에서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복제해야 할 대상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는 그 분을 복제해야 한다. 그 분의 삶을 복제해야 한다. 그 분의 사랑을 복제해야 하고, 그분의 은혜를 복제해야 하며, 그분의 겸손, 자비, 향기를 복제해야 한다. 우리의 말과 행동, 눈빛을 통해서 그 분이 보여질 때 까지 복제해야 한다. 왜? 죄로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내 영혼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님을 복제코자 함은 타인에 의해 강요되는 타인의 욕망이 아니라 내 영혼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바래왔던 내 본연의 열망이다. 그래서 그 분을 복제할 때 내 영혼은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만족함을 누리는 게다.

오늘 아침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얼굴과 몸에 칼을 대는 고통을 참으며 “강남 언니”가 되려는 노력으로 예수님을 닮기 노력한다면 어떨까? 로마서 9장에 있는 사도 바울이 그랬다. 그는 예수님을 복제코자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켰단다. 여기에 “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ὑπωπιάζω)는 ‘멍들 정도로 치다’는 뜻이다. “강남 언니”는 타인의 욕망을 복제하기 위해 자신을 멍들게 했지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복제하기 위해 자신을 멍들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늘 아래에서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된 것이다.

오늘도 세상은 만들어진 우상들을 우리에게 쉴새없이 들이대며 그것들을 복제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복제해야 할 대상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가 복제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 그 분을 복제함은 우리의 몸에 멍이 들더라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

우리를 위해 멍드신 예수님… 내 몸이 멍든다 해도 그 분을 안팍으로 복제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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