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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3/2014 / Sanghwan A. Lee

무공덕 (無功德)

양 무제: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달마 대사(達磨大師)가 광주 자사의 소개로 양 나라 무제(武帝)를 만났다. 평소에 중국을 위해 열심히 일했던 무제는 그 동안 쌓아온 공적(功績)들을 늘어놓으며 어떤 대가를 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달마 대사는 한 마디로 대답했다.

무공덕 (無功德).

공덕이 없다는 뜻이다. 대가를 바라고 쌓은 공적이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 마태복음 6장에도 공덕을 바라고 공적을 쌓은 자들이 나온다. 바리새인이다. 그들은 사람에게 칭송을 받고자 다음과 같은 일을 했다. 구제를 한 후 그 일에 대해서 사방팔방 나팔을 불고 다녔고, 기도할 때에도 사람이 많이 다니는 회당과 큰 거리의 어귀에서 서서 했으며, 금식할 때에도 일부러 얼굴을 찡그리며 슬픈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이들을 바라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무공덕!

인간은 대가를 위해서 일하고 싶어하는 동물이다. 대가 없는 일은 재미없다. 지극히 작은 일도 대가가 있어야지만 할 맛이 난다. 어디 양 무제와 바리새인만 그런가? 성도(聖徒)라 자칭하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누가 보고, 칭찬하고, 대가를 지불해야지만 보람을 느낀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재미없다.

교회당의 주방에서 설거지를 할 때에도 티를 내면서 한다.
교회당의 화장실을 청소할 때에도 티를 내면서 한다.
교회당 주변의 터에서 휴지를 주을 때에도 티를 내면서 한다.
교회당에서 기도를 할 때에도 티를 내면서 한다.
교회당에서 꽃꽃이를 할 때에도 요란을 떤다.

그러다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토라져버린다. 누구를 위한 봉사요, 누구를 위한 헌신인가? 하나님을 위함도 아니요, 사람들을 위함도 아니다. 오직 나를 위한 일일 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적(功績)으로 인해 성도된 우리건만 주께서 이루신 십자가 공적을 내 추한 공적으로 덮으려 하니 족반거상(足反居上)이 따로 없다.

종: 누가복음 17장에는 또 한 명의 무공덕 자가 등장한다. 종이다. 그러나 그는 양 무제와 바리새인과는 사뭇 다르다. 하루 종일 밭을 갈고 양을 친다.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와서는 숨도 돌릴 틈 없이 주인의 밥상을 차린다. 식사중인 주인 옆에 붙어 수발을 한 후에는 설거지와 청소 등의 허드레 일을 한다. 그러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쌀 한 톨도! 그의 고백을 들어보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종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어찌 공덕을 바랄 수 있겠냐고 말하며 그의 공적을 부인한다. 양 무제와 바리새인이 대가를 바랬기에 무공덕이라면 종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기에 무공덕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종의 자세다.

오직 예수님 자랑: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를 가리켜 종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하여 하는 모든 일들은 우리의 의를 나타내는 공적이 될 수 없다. 마땅히 해야할 일일 뿐이다. 이런 종의 모습을 잘 보여준 사람이 있으니 바울이다. 그는 예수님을 위하여 온갖 환난을 겪었다.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며,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분 죽을 뻔 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했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받았다. 수고했고, 애썼으며,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다. 그러나 이처럼 수많은 공적들을 무공적이라 말하며 고백했다.

내가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어떻게 공적으로 삼을 수 있냐는 말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주(主)라고 고백하는 종들의 참된 고백일 것이다. 그렇다고 바울에게 자랑거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자랑이 하나 있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이러한 바울의 고백이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신앙이 판치는 오늘의 교회 안에 경종(警鐘)의 소리로 울 퍼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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