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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1/2014 / Sanghwan A. Lee

부처와 예수, 그리고 죽음

한 여자의 아들이 죽었다. 그 여인은 아들을 들쳐 업고 부처에게 찾아가 제발 살려만 달라고 애원했다. 부처는 말했다.

마을에 들어가 겨자씨를 얻어 오도록 하라. 그러면 살려주겠노라. 그러나 아무 겨자씨나 가져오면 안 된다. 아무도 가족이 죽은 적이 없는 집에서 얻어 와야 한다.

여인은 뛸 뜻이 기뻐하며 마을로 달려갔다. 그 동네는 겨자씨가 풍성한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이 흘렀고 중천에 떠 있던 해는 서쪽 하늘로 지기 시작했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가족이 죽은 적이 없는 집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부모가 죽었고, 어떤 사람은 아내가 죽었으며, 어떤 사람은 자식이 죽었다. 결국 그 녀는 마지막 집을 허탈하게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여인을 본 부처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알겠느냐?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이길 수도 없다. 인간은 누구나 죽어야 하기에…

부처는 자기 자신에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힘이 없음을 알림과 동시에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가르친 것이다. (법구경 제 114 게송 주석)

 

비슷한 시기에 한 여자의 아들이 죽었다. 그 여인은 울면서 아들을 땅으로 묻으러 가는 중이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찾아 오사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청년아 내가 네가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까? 그들의 생각을 들여다볼 겨를도 없이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죽은 아들이 즉시 일어난 것이다. 아들은 곧 일어나 앉아서 말을 했고 사랑하는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죽음을 이기실 수 있는 분이심과 동시에 그 분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눅 7:11~16)

 

그렇다.

부처를 찾아간 인간은 답을 얻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찾아 오사 답이 되어 주셨다.
부처는 죽은 자의 어미에게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부처는 스스로 죽음을 이길 수 없다고 가르쳤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도 당신을 이길 수 없음을 가르치셨다.

 

어떻게 감히 이 둘을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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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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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영 / 9월 9 2014 4:25 오전

    부처님은 인간은 영원히 살아 있을수 없으며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은 것이 진리라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 진리대로 2000년동안 죽지않거나 죽었다 살아나 영생중인 사람은 지구상에 단한명도 없다.

    예수님은 죽었던 사람은 살리셨고 영생한다고 부활한다고 하셨고 그것이 진리라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후 2000년동안 죽었다 살아나서 영생중인 사람은 이 지구상에 단 한명도 없다.

    무엇이 진정한 진리일까?

    동물이 아닌 인간이라면 그 답을 알수있다.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로 진리를 속일수는 없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이 둘을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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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9월 9 2014 4:57 오전

      네, 안녕하세요. 님께서 ” 예수님후 2000년동안 죽었다 살아나서 영생중인 사람은 이 지구상에 단 한명도 없다.”고 하신 말씀은 백번천번 옳습니다. 그 누구도 “지구상”에서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들은 “지구상”이 아닌 낙원에서 영생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천년왕국을 통해 지구상에서 주와 함께 지내다가 그 후에 천국에서 영생을 잇대는 것이랍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하시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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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 9월 9 2014 8:28 오후

        답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소 실망스럽게도 너무나 뻔히 예상했던 답변이네요.

        지구상에는 없지만 낙원에서 영생한다..결국 기독교안에서만의 진리로 돌아가시네요.
        진리란 보편적으로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념으로 받아들여질수있어야합니다.

        지동설이 그렇고 중력의 법칙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낙원에서의 영생개념은 결국에는 죽어서 그 무언가가 있다. 죽으면 알게된다는 기독교적 논리이지 보편적 진리가 될수는 없겠죠..

        그렇다면 부처님을 염불하면 해탈을 얻어 윤회를 끊고 극락에서 살게된다는 개념과 추호도 다르지가 않게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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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9월 9 2014 8:35 오후

        하하… 그렇지요? 저도 님처럼 이런 답을 들었을 때에는 참 실망스러웠답니다. 저 역시도 “진리란 보편적으로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합니다.”라는 님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예컨대 중력의 법칙은 지구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지구 밖에서는 또 다른 법칙이 존재하지요. 우주를 발견하기 전에는 중력의 법칙이 온 천하에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게다가 지동설이 발견되기 전에는 천동설을 믿었잖아요? 이러한 생각의 전환은 진리를 발견한 후에 바뀐 것이랍니다.

        저 역시 예전에는 불교에 크게 심취해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만나고 참된 진리를 깨우친 후 이 길을 걷게 된 것이에요.

        님과 믿음에 대해서 논쟁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답니다. 단지 못보던 것을 먼저 본 사람으로써 이 좋은 진리를 소개해 드리고 싶은 것 뿐이에요. 님께서 제가 찾고 발견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성심성의껏 댓글을 달아주시고 대화를 신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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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 / 9월 9 2014 8:33 오후

        답글 잘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상했던 너무 뻔한 결론으로 가버리시니 다소 실망스럽네요.

        지구상에서의 영생이 아닌 죽어서의 영생….그것부터가 모순이라고 보여지네요.
        예수님이 죽어가던 자를 살린곳이 어딘가요?
        지구입니다…지구에서 살리셔서 그능력을 찬양하시면서 왜 다시 영생은 죽어서 한다고 하시는지가 궁금합니다.

        그말인즉슨, 예수님이 살리신 그분도 결국에는 ‘죽어서’ 영생을 했겠군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지구상에서 살리신것은 살리신게 진정으로 살리신게 아닌게되죠?
        그렇다면 결국 예수님이 살린 그분도 ‘죽어서’ 낙원에서 영생을 하였다면

        결국 부처님이 말한 “지구상에서 살아있는것은 모두 태어남이 있으니 반드시 죽는다”
        라고한 그 진리에 따라 모두 해당된채로 죽은겁니다.

        그후에 영생을 하였는지는 알수없죠. 또한 영생을 하는곳이 지구상이 아닌 낙원에서 한다는 말씀은 결국 아미타불을 염불하여 극락에 태어나 살게된다는 불교의 믿음과도 다를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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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9월 9 2014 8:46 오후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기독교의 부활의 교리는 죽어서의 영생을 가르치지 않아요. 살아서의 영생입니다. 그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죽음은 불교가 말하는 죽음과 다르다는 거에요. 불교에서의 죽음은 윤회에 윤회를 거처 우주와 물아일체가 되는 것이지만 기독교에서의 죽음은 다시 살아나기까지의 보류적 기간이에요. 그 사이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낙원에 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음부에 가 있게 되지요.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믿는 자들은 이 땅으로 부활하게 되고, 그 후에 불신자들의 부활이 심판 전에 따라오게 되는 겁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믿는 자들 중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는 자들도 있지만 죽지않고 바로 부활체를 입고 영원히 사는 자들도 있다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시느냐에 따라서 첫 번째 죽음을 경험하는 자들도 있고 그렇지 않는 자들도 있는 것이랍니다.

        교리가 조금 복잡하지요? 혹시 기독교의 부활에 대해서 궁금하시다면 저와 직접 연락하셔도 괜찮습니다. 🙂

        추신: 참고로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타르타는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 십사무기로 규정하여 절대 묻지 못하게 했다는 것을 아시지요? 고타마 싯타르타는 죽음이 무엇인지, 죽음 후에 무엇이 있는지 자신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던 사람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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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영 / 9월 9 2014 10:06 오후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처의 14무기를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른다는 솔직한 고백으로 받아들이셨다면 그것도 님의 주관적 판단이라 보여집니다.

    예수님이 “죄없는 자가 이자를 돌로치라”라고 한것을 마치 예수님은 창녀를 옹오한것을보니 예수님은 자신이 창녀를 흠모하고 있었음을 고백하였다.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자 말라 비틀어지라고 명령한것을 보고 “예수님은 자신이 먹을것을 안준 나무를 저주한 무자비한 인간이었다” 라고 쉽게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당연히 아니라 생각하시겠죠?

    똑같습니다. 부처는 항상 방편이라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근기에 따라 설하신걸로 알려져있습니다.
    즉 어린이고 못배운 사람이고 똑똑한사람이고 늙은이고 모두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설한것이아니라
    그사람 수준에 맡게 이야기 하였죠.

    그당시
    우주의 실체와 사후세계에 관해 물은 사람이 살던 세계가 어떤 세계였나요? 지금처럼 과학이 발전했던 시기도 아니고 문명도 발전하지 못하고 유일신, 다신교주의에 빠져 살육을 일삼고 인간을 차별하던 시기였고 마녀사냥하던 시기입니다.

    우주의 유한/무한/ 사후세계 따위의 질문을 하자
    그는 질문자에게 독화살에 맞은 자가 화살을 뺄생각은 하지 않고 이화살은 누가 쏘았는가? 이 화살은 무슨 나무로 제작되었는가? 와 같은 쓸데없는 고민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논조로 대답을 하여주죠.

    물론 사람은 다양하게 이 말씀을 이해할수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이것이 몰라서 둘러대는 답변이라 생각하시나요?

    부처는 스승의 우치고 질문자는 낮은 근기의 수행자로 보신겁니다.

    히딩크감독에게 2002월드컵을 앞두고 뽑힌선수가 대한민국이 우승할수 있습니까?
    월드컵에서 우승하려면 몇골이 필요합니까? 와 같은 질문을 했다면 히딩크는 뭐라 답했을까요?

    아마 부처와 크게 다르지 않을겁니다.매경기 최선을 다하고 경기마다 충실해야지 그런 개인의 호기심은 축구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했을겁니다.

    히딩크도 제자고 축구선수도 연습하고 노력해야하는 제자의 위치로 대입가능 하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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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9월 9 2014 10:56 오후

      “부처의 14무기를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른다는 솔직한 고백으로 받아들이셨다면 그것도 님의 주관적 판단이라 보여집니다… 하지만 정말 이것이 몰라서 둘러대는 답변이라 생각하시나요?”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공부한 불법책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라즈니쉬 오쇼도 님처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른다고 말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부분은 그가 알 수 없다는 뉘앙스로 말하지요. 이러한 사실은 아래와 같은 책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잡아함경
      2. 중아함경
      3. The Princeton Dictionary of Buddhism
      4. Epitome of the Pali Canon
      5. Buddhist Union Newsletter, Volumes 32-35

      심지어는 동국대의 황순일 교수님께서도 “Metaphor and Literalism in Buddhism: The Doctrinal History of Nirvana”에서 이 부분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다루시면서 쉽게 판단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님께서 하시는 주장이 오히려 자의적 해석이라고 판단이 되네요. 님께서는 어떤 근거로 싯타르타가 십사무기의 내용들의 답을 다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시는지요? 주장의 근거가 담겨있는 책의 출처를 답글에 달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님께서 사용하신 음란중에 잡힌 여인과 무화가 나무의 비유는 우리의 논쟁에 맞지 않는 예입니다. 님께서는 두 이야기를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해석하신 후 스스로 만드신 자의적 해석을 비판하시면서 제 해석을 공격하셨습니다. 이것은 논리학에서 허수아비 공격이라고 부르는 오류입니다. 님께서 아셔야 하는 것은 제 해석은 님께서 억지로 만드신 해석과 같은 종류의 해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 해석은 제가 자의적으로 만든 해석이 아니라 위에 언급한대로 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해석이랍니다.

      그리고 시타르타가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 가르쳤기 때문에 십사무기에 침묵했다는 말씀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타르타는 설법하러 들어가는 마을 마다 십사무기를 질문 금기 조항으로 내세웠고, 심지어는 그의 설법을 가장 잘 이해하는 아난 존자에게도 십사무기를 질문 금기 조항으로 제시했습니다. 님께서는 어떤 근거로 위와 같은 주장을 하시는지요? 주장을 지지할 수 있는 출처를 밝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자면 “그당시 우주의 실체와 사후세계에 관해 물은 사람이 살던 세계가 어떤 세계였나요? 지금처럼 과학이 발전했던 시기도 아니고 문명도 발전하지 못하고 유일신, 다신교주의에 빠져 살육을 일삼고 인간을 차별하던 시기였고 마녀사냥하던 시기입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러한 것들은 죽음에 대한 질문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 때도 사람은 죽었고, 지금도 사람은 죽기 때문이지요.

      추신: 진심으로 알고 싶은 것이니 제가 위에 드린 질문에 확실한 출처를 밝혀 주심으로써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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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 / 9월 9 2014 11:17 오후

        목사님셨군요.

        일단 언급하신 책들을 전부 보지는 못한상태입니다.
        이상태에서는 어떤 반박도 논거가 부족해질것같아 일단, 언급하신 책과
        오쇼에대해 공부한뒤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목사님도 건강히지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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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9월 9 2014 11:20 오후

        엉터리 목사랍니다… 감사합니다.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추신: 참고로 제가 쓴 두 개의 글을 링크에 걸고 싶네요. 물론 글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으실 줄 압니다. 그러나 제 생각을 아시는데 조금 도움이 되실것 같아 링크를 거니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링크 1: 십사무기, 링크 2: 고집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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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익명 / 9월 16 2014 8:34 오전

    신은,존재하지않는다,신은인간이만든,허울이며끝업는있간의욕씸과의존심에셔만들어진가상인물일쁀,굿이신이있다면,세상만물자체가신이다,각자가모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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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9월 16 2014 10:53 오전

      네, 안녕하세요. 이곳에 의견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은 인간이 만든 허울이며 끝없는 인간의 욕심과 자존심에서 만들어진 가장의 인물이다”라고 주장하신 근거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게다가 신이 있다면 세상 만물 자체가 신이라고 주장하시는 이유도 듣기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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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종흔 / 1월 18 2015 12:29 오후

    불교에 관계된 일이라 또 나서게되는군요.위 본문에서 보면 한분은 세상의 이치를 설하고,한분은 세상의 이치에 역행하는 신통력을 보이신것으로 두분의 능력을 가늠하시기에 몇자적습니다.먼저 두성인의 초능력이 비교 되기 위해서는 제가 언급하는자료의 출처를 서로에게 인정되어야 할것같습니다. 성경을 계시에 의한 것이니 일점도 어긋남없다는 주장이 마치 다른 종교의 경은 계시가 아니니 믿을수없다 라고 강변 하시는것같아 부득불 이점 부터 먼저 짚고 가자는것입니다. 마태나 마가등의 예수 제자의 기록은 예수와 동거하면서 직접 본바에 대한 기록이니 계시를 받든말든 그들이 거짓말장이가 아니라면 위 기적을 실제했다 믿는것이 그들의 권위로보나 여러모로 옳다생각습니다.마찬가지이유로 지금 제가 적는 부처의 기록 또한 부처를 지켰든 제자들의 기록이니 님이 불교에 하나님의 계시가 있던 없든 결집에 참여했던 아라한 제자들이 사기꾼이 아니라면 믿어도 하자없다고 봅니다만,기록에 의하면 부처님의 신통력은 대표적 여섯가지고 그속에는 갖가지 오묘한 능력을 가지신다 기록하십니다.( http://bodhipia.net/bbs/skin/ggambo6210_news/print.php?id=sj_db_14&no=38) 제자 목건련의 신통력에 비춰봐도 스승이신 부처님의 신통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http://www.buruna.org/amun/agama/agama8.html).여기서 죽은자를 살리지는 않았쟎냐 반론 하신다면 어린얘들의 자랑싸움에 지나지않는다 말씀드리고 싶고, 요는 부처님 또한 세상을 자유자재로 다스리는 신통력을 구비하셨으나 그마음이 여느 종교의 교주나 잔재주를 부리는 수행자들과 다르다 하는데 있습니다.세상의 이치또한 법,도,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지거늘 굳이 그이치를 역행하여 기적을 보임이 합당하며? 그런연유로 가능한 신통력까지도 자제했어며 제자들에게도 충고하셨다는것을 아셔야할것입니다.그러한데도 부득불 저위의 죽음에 관한 대응으로 평가하고자 한다면,마치 다른 신통력 아무리 부려도 죽음자를 살리신 기적에 비하겠냐고 따지실것같아 그점도 거론차면,저는 기적이라면 죽은자를 살리던 천안으로 세상을보던 같은 레벨이라고 보는데, 기적에도 등급이 있다면 그것은 기적이기보단 아직 밝혀지지않은 원리에 불과하겠죠.그래서 부처님이 원하는곳 어디로 간거나 예수님이 죽은자를 살리신거나 같은 기적으로 차등이없고 또한 예수님이 전생을 보는 눈이라든지 불경에 실린 부처님의 기적이 없던걸로 봐서 두성인의 기적의 비교는 동점으로 보는데요.그래도 굳이 죽은자를 살린것은 비중이 틀리다 따진다면 불교의 죽음에 관한 관점과 연기법에 대한 이해를 주지시킵니다.불교에서 죽음은 네가지 괴로움 중하나며 모든 중생의 필연입니다.그리고 죽음후는 이생의 업보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던지 여튼 깨치지 못하면 윤회의 수레바퀴에 들게 됩니다.이말은 죽은자는 살려도 결국은 죽을뿐더러 그러면 유족들은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을 두번보는 꼴이며,또한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영혼은 여전히 죽지않고 법칙에 의해 돌고있는 자를 왜 좁은 지구적 관점으로 슬퍼하며 그를 다시 불러 육신의 빈껍데기에 쑤셔 넣겠습니까? 만일 지금 범인의 관점같이 이생에서의 죽고 사는것이야말로 인생의 전부고, 죽으면 끝이고 끝이니 조금더 살려고 발버둥친다면 어리석은 중생이 그럴수도 있겠구나 여기지만,기독교의 세계관은 죽어면 지옥이나 천국가면 끝이아닌데 왜 더살려 안달하는지,그이유는 천국에 대한 보장이 없기때문이겠네요.그렇다면 지옥갈자들 모두 살려내어 죽어 천국 갈때까지 살게해야 되지않을까요.보세요.얼마나 번거러운지.세상의 이치가 진리인데 그것을 거스리니 얼마나 거추장스럽습니까? 죽은자가 다시사는것이 크나큰 축복인듯하나 그저변에는 죽으면 끝이다,지옥 천당가면 끝이다 등의 단멸론이라는 부처가 피하라고했던 어리석은 이론이 배경이 되었다는것을 깨달으시면 좋겠습니다만, 이에비하면 불교의 세계관은 넓고도 큽니다. 영원한게 없으니 뿌린데로 거두고 그리고 죄값치루면 다음 생에 선하게 살면 된다는 지극히 전우주에 통용되는 법칙에 바탕두니 걸림없이 순리되로 흐르는것이지요.만일 제의견이 그르고 죽은자를 살리는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생판 본적없는 나사로만 살렸으며,한번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 많은 제자를 두길원하셨데도 한번뿐이라면 홍보적 측면에서 너무 짠게 아니겠습니까.그래서 제나름의 결론을 내리자면 예수님이 신이든 깨친자던 그러한 기적은 행할수있는 분임은 의심없으나 그러한 기적을 부처나 다른 깨친자에게도 특별한일 아니니 굳이 저일로 해서 성인들을 비교평가하는것이 부질없다는것입니다.
    참고로 얼마전 읽은 암마 라는 깨친 여인의 전기에도 죽은자를 살린 얘기가 나옵니다. (http://www.meditation.co.kr/zen/bbs.php?table=maAmma&query=view&uid=54&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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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월 18 2015 6:14 오후

      안녕하세요. 다시 뵙게 되니 즐겁습니다.

      불교에서 예수님의 육신통에 대해서 논하기 시작한 것은 후대에 와서입니다. 불대의 초기 분서들에는 그런 내용이 없지요. 그래서 학자들은 시타르타의 기적에 대한 육신통에 대해서는 후대의 소산물로 여긴답니다. 예컨대 아난 존자가 기록한 시타르타의 입적 전의 이야기들에는 육신통에 대해서 전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시타르타에게는 아무리 먼 곳이라도 시공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신통력이라든지, 시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고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능력 등이 없었지요. 시타르타는 겸허하고 위대한 철학가였고 명상가였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불교를 종교로 만들려고 했던 자들로부터 위와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리고 위에 사문과경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사문과경은 육사외도의 설을 모아 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민담을 기록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난 존자가 기술한 시타르타의 설법 내용과 많이 다르답니다.

      사실 법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에 하나가 목격자 아닙니까? 소크라테스를 알기 위해서는 플라톤의 글을 봐야만 하는 것처럼, 시타르타를 알기 위해서는 아난 존자의 글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목격자들이 쓴 글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위대한 철학자로 기술하고, 아난 존자는 시타르타를 위대한 철학자로 기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역시도 소크라테스와 시타르타를 위대한 철학자로 볼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과 맞물린 역사적 내용들이 역사가들의 기술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답니다.

      그리고 제가 처음에도 말씀 드렸다시피 제가 연구한 고타마 시타르타는 죽음을 극복하기 원했으나 극복하지 못했기에 죽음을 자연의 한 이치로 맞이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음을 극복했다고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목격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습니다. 물론 제가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신의 역사관 속에서 기독교가 수많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예수님의 승천 시점에 불처럼 번진 것으로 봐서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승선 시기에 목숨까지 내놓고 기독교를 전하는 자들이 생긴 것을 보면 말이지요.

      그리고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셨던 계획을 이루는 시작일 뿐이랍니다. 그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부활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부활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태초의 계획을 이 땅에서 실현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본래 인간들을 짐승 위에 뒤시고 이 땅을 당신의 형상으로써 다스릴 것을 명령하셨으나 인간이 범죄함으로써 짐승이 인간을 다스리는 꼴이 되어 버렸지요.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자들을 다 쓸어버리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길을 열어두신 후, 그 길을 통해 구원을 받은 자들을 훗날에 부활시키사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본래적 계획을 실현하시는 것이랍니다. 그 시작이 부활이고, 그 다음이 천년 왕국이며, 그 다음이 천국이지요. (갑자기 기독교의 종말론을 이야기 해서 죄송합니다. 이 부분까지 나눠야 할 듯 해서 짧게 적었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만 살린 것은 아니랍니다. 몇 명을 더 살렸지요. 게다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무덤이 열리고 많은 자들이 살아났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현상을 가리켜 Type이라고 합니다. 장차 일어날 일들의 맛보기라는 것이지요. 마치 노아의 홍수가 종말에 임할 불의 심판의 Type인 것처럼요.

      추신: 그리고 제가 불교의 윤회를 믿지 않는 이유는 지난 번에 나누었으니 이번에는 나누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긴 글로 화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고, 천천히 답글 납겨 주세요. 감사합니다, 종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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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흔 / 1월 18 2015 9:55 오후

        여전히 나의 종교만 최고다라는 아집에 차있네요.상환님은 글의 본질에 접근하셨으면합니다.죽은자를 살리는 기적 또한 별볼일 없을 뿐더러 기적을 행하여 본들 모세가 홍해를 갈라 유대민족을 살리는 력사도 아닌것을 기껏 예수 개인의 스펙쌓는 재주에 불과한것을 자기 아버지 하나님이 만드신 성스러운 법칙을 깨고 요란 떨이유가 있던가요? 그리고 요즘 의사들도 예수보다 더많이 살리는데 왜 병원에 대고는 주여 라고 부르짖지않나요.님이 기적이라 감동하는 그일이 불교관점 아니 우주의 관점에서 별것아니다 나름되로 설명했더니 엉뚱하게 교황청이 입맛에맛게 엮어 선전한 내용만 나열하시네요.님이 말씀하시는 부활이니 천년왕국이니 이미 불교의 미륵신앙에 다 나와있는것은아시죠.님의 글을 보면 가끔 예수가 부처이전 사람이란 착각을해요 하도 불교가 했던일을 예수교가 먼저 한것처럼 우기시기에.그건그렇고 type를 내세우는데 좀 간지럽지않나요? 나사로 외에 몇더있다는데 그동안 죽은자들에 비한다면 말하기 쑥스러운 수준이고 무슨 type이 이천년이 지나도 일말의 기미도 않보이나요.님처럼 그렇게 현실과 과학을 내세우시는 분이 그처럼 비판없이 받아들이니 믿음이 과연 주관적이라 아니할수있겠습니까? 이제 육신통에 대해 말해보자면 우려했던 사고를 그대로 내보이시네요.상환님의 습관중의 하나가 남이 말하지않으면 못한다 결론짓는 태도입니다.육도윤회가 너무당연하여 강조않으면 죽은 후를 모른다하고 육신통이 너무 당연하여 새삼 강조치 않으면 못한다하고 지으내었다하고 불자들은 다바보라서 지으낸 이야기에 맞장구 친다고 보세요?
        근대 선승들만 보더라도 몸에서 화광이 치솟고 병자를 고치는 이적의 증언이 빈번한데 부처님 능력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상환님의 사고방식이라면 은둔하는 선승이 세상에 없다할것입니다.왜냐면 그런 능력있으면 세상에 나와 능력을 펼쳐야 당연함으로 알고있으니. 육신통은 육도윤회의 당연함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의 과정에서 차례로 얻으지는 신통력이고 마지막 누진통을 얻으서 부처라 불리는 것입니다.이또한 대대로 내려오는 검증된 증거인데 어찌 몇가지 책자만 읽고서 함부로 말하나요.그리고 신통력을 부처가 어떻게 보고 그능력을 나타내는데 쇼하듯 내세우지않는 태도이심이 경에도 나와 있는데 도대체 어떤 글만 읽어신건가요? 종교를 떠나서 성경아니면 같은 인간의 말도 믿지않으니 난감하군요.님께서 팔만사천경을 다읽고서나 하는 얘긴지요.나야 부처님 말씀이 진리고 기적이라 자질구레한 기적에 별관심없어 일일이 기억지 못허지만 간혹 불경에 보면 천안으로 보신다는 구절을 더러 보았읍니다.정궁금하면 차근차근 찿아보세요.예수보단 몇십갑절 많을테니.그리고 예수가 그만한 기적의 능력이 있으면서 유대땅 백성하나 로마로 부터 구하지 못한건 명백한 직무유기 아닌가요? 물론 아니겠죠.님의 믿음처럼 기적을 행할 능력은 충분한데 쓸데없는곳에선 하고 정작 필요한곳에서는 아니했습니다.이점에서 보자면 예수도 기적에대해 썩탐탁케 생각지 않았기에 적재적소에 사용하기보단 심심풀이로 나타낸게 아닌가 합니다만.여기까지하고 시간 나면 법구경도 읽어 보시고 그러면 왜 인도로 간 예수라는 책이 나올수밖에 없었는지도 이해하실것입니다.육도윤회가 없었다면 예수교의 천국 지옥도 없었을듯한데 육도윤회를 꼭 부정해야 겠습니까. 그리고 부처가 해탈을 한것은 제자들 모두가 인정한것을 이천오백년후의 기독교인 혼자 아니라 우기시네요.그리고 부활이니 천년왕국이니 재림이니 모두 불교의 미륵신앙과 구조가같다는것을 다시한번 주지시키며 어쨌거나 미륵신앙은 깨침을 추구하는 불자에겐 있으나 마나인데 저멀리 기독교에서는 오로지 그하나 잡고있는게 가엽습니다.또한 저우주에서 보면 지구가 한갖 먼지보다 못한 존재인데 몇천년전 죽은 자들까지 부활시켜 왕국을 건설하니 어쩌니,이것은 개인적으로 우주의 크기를 알은후 상식에 기초해 하는 소리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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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월 18 2015 10:23 오후

        저에게 있어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별볼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최고의 가치를 지닌 능력이지요. 물론 종흔님의 말씀처럼 의사들도 죽어가는 자를 살립니다. 그러나 죽은 자를 살리지는 못하지요. 예수님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써 당신께 영생이 있으심을 논증했다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처음으로 부활하사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그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랍니다. 살아난 후에는 다시 죽지 않는 것이 부활이지요. 그래서 나사로가 부활했다라고 말하지 않죠.)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됐다고 하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불교에도 여러 종료가 있습니다. 미륵신앙이 나온 것은 후대의 일로 고타마 시타르타의 사유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중에 불교를 종교화 하면서 만들어진 것이지요. 불자들이 다 미륵신앙을 믿는 것이 아닌 것을 아실 것입니다. 종흔님께서는 대승과 선승의 영향을 받으셔서 그렇지, 제 주변에는 미륵신앙을 믿지 않는 불자들도 많이 있지요. 저는 이들이 고타마 시타르타의 사유를 계승한 자들이라고 봅니다. 하물며 종흔님과 다른 대승과 선승들이 육신통을 믿는 이유는 바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믿음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믿음을 사실에 근거해서 검증해야 한다고 누차 말씀 드린 것이고요.

        제가 불경을 다 읽은 것은 아닙니다. 불경을 읽은 지는 십 년이 넘었지만 아직 끝내려면 수 십 년이 더 남은 듯합니다. 그러나 다 읽지 않아도 모순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지는 않지요. 단지 유용한 철학잭 정도라고 생각한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작년의 댓글이 충분히 설명을 했으니까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불교에서도 기적을 일으킬 만한 용한 스님들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불교 뿐 아니라 이슬람, 무속신앙 등에서도 기적이 나타나지요. 종흔님께서도 기독교에 계셨었으니까 기독교가 이를 악령의 역사라고 표현한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저의 신앙이니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초림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신 일은 기독교를 세우시고, 재림을 준비하기 위함이랍니다. 이 부분은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에 제가 오늘 할 수 없음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서점에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차이에 대해서 기술된 책을 보시면 이해가 되실 듯 합니다.

        또한 Type, 천년왕국, 부활 등이 간지럽다고 느끼시는 이유는 충분히 공감합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제 신앙은 성경을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믿음에서 나오니까요. 성경이 Type, 천년왕국, 부활등을 이야기 하기 때문에 저는 믿는 것이랍니다.

        글을 맺으며 부탁을 하나 드립니다. 제가 예전에 댓글로 드린 윤회의 비타당성, 불경의 비일관성, 성경의 타당성, 성경의 일관성 등을 다시 한 번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문제를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논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논쟁은 별 이득이 없을 듯 합니다. 신앙과 신앙은 대립할 수 없습니다. 신앙을 지탱하고 있는 어느 정도의 이성이 대립할 수 있지요. 저는 이 싸움에서 기독교의 위대함을 본 것 뿐이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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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종흔 / 1월 19 2015 12:16 오전

    본론을 주목해주십시오.기적으로 인해 두성인을 평가 하였기에 기적의 당위성과 가치등을 언급하여 본문의 결론이 타당한것인가를 논하는 자리에서
    기적의 가치를 당연한양 전제하고 기적의 당위성도 무시하고 오직 예수교의 입장만 되풀이 하시는군요.글서두에 저에게는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것은 최고의 가치라했는데” 말그대로 상환님 개인적 가치라는것이고 불교의 입장은 다르다는것을 위댓글에서 설명드렸는데 그에대한 딱히 반론도없이 여전히 부처는 기적을 행할수없었다에만 꽂혀있군요.기적 자체도 범인에게야 대단하지만 성인들을 평가할만큼 대단한게 아니다 말씀드리는데 전혀 이해를 않하시려드네요.상환님의 관점이라면 발명가 에디선을 예수보더 높게 쳐야 할것입니다.그리고 죽었던자가 살아 나는 경우를 현대에도 심심쟎게 들리는데 그때도 성경만 잡고있었나보네요.상환님 개인이야 어떤 관점이든 상관없지만 왜 성인들 특히 관점에서 비교할수없고 기독교안의 세속적 사고와 비할바않되는 부처까지 상환님의 눈에 맞춰 위 본론같은 말도되지않는 설을 푸느냐 이말입니다.심플하게,현실에서 죽음을 각오하여 매사에 당당하게 사는 자와 죽음만이 인생의 관심사라 매사 노심초사 사는 사람중 누가 더 뛰어난가요? 세상사에서도 이처럼 차이가 날진데 죽지않으려 발버둥친다는게 참종교인이 할바인가요? 왜이런 무례한 소리를 하냐면 죽음에 초탈하면 죽은자를 살리는 기적이 대수롭지 않다는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틀리다 얘기하며 고로 기적을 행할이유가 없다는 설명드렸거늘 굳이 범부의 눈으로 능력이 없으니 안했겠지 여기니 어린얘의 사고라 아니할수없습니다.또한 남의 종교의 기적은 악령이라하고 도대체 왜그러는 것이에요.님의 성경이 유일무이한 어쩌고하는 사상 때문이라면 제가 볼때는 이전까지의 대화속에서 한번도 제게 납득시킨적없는 님만의 논리였음을 강조드립니다.님의 논리가 기본적으로 순환논리의 오류라는 것은아시죠.나는 성경을 믿는다.고로 성경에 나오는 말을 다 믿는다.성경은 왜믿나.성경에 나왔으니 믿는다.이런식입니다.님이야 과학이다 들이되지만 이미 역사가 증거했쟎아요.과학자들이 누구와 싸워왔는데 과학으로 걸핏하면 성경의 권위를 내세우니 이건 뭔가 꺼꾸로된것같아요.가장 기초적으로 창세기만하더라도 기독국가 전체에서도 쫒겨났는데
    님께서는 세상과 문을 닫고 사시려나요.내가 님을 보니 성경에서는 백가지 잘못에서도 하나의 옳았던것만를 보려하며 타종교에사는 백가지 옳은것에서도 하나의 실수만을 보려합니다.그리고 제가 미륵신앙을 믿는게 아니라 깨침을 어렵다 생각는 기독교인들과 불자들이 미륵신앙을 믿는다는 말이었고요,님이 말하는 윤회의 비타당성…..성경의 타당성을 읽어라는데 윗문장을 책임질만한 논리를 한번도 주장하지 못했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아마 이렇게 고쳐야 할것같습니다. 육도윤회에서 나서 육도윤회를 부정하는 파렴치.불경을 반복하면서 성경을 우월하다 주장하는 몰염치.
    이것이 기독교의 현 주소인것같네요.
    그나저나 님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이렇게 대화 나누다보니 옛날 알고있었다 생각든 개념들이 많이 보충되고 때론 깜짝 놀랄만한 새로운 이론도 떠오르니 그동안의 시간이 헛되지 않은거같아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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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월 19 2015 12:53 오전

      아무래도 서로의 논증을 끝내야 할 때가 온 듯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몇 가지 짚어드리겠습니다.

      제 주장은 처음부터 순환논증이 아니었습니다. 믿음과 믿음은 서로 논증의 대상이 될 수 없기에 믿음을 이루고 있는 근간인 경을 과학과 이성적으로 점검해 보자는 것이었지요. 성경도 불경도 이러한 사유의 틀 속에서 본 결과 기독교의 신앙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순환논증이 될 수 없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건데 제가 볼 때에는 종흔님께서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계십니다. 계속 불교를 신앙으로 접근하신 후 그 관점으로 기독교의 관점을 비판하시니까요. 저는 솔직히 고타마 시타르타에게 여섯 가지 신통력이 있다고 주장하신 부분에 조금 놀랐습니다. 그것도 후대에 만들어진 문서에 나와있다고 말씀하시면서요. 얼마 전에는 저에게 경을 지나치게 믿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셨던가요? 허나 종흔님의 불교 신앙은 다분히 경전 중심의 신앙인 듯 보입니다. 그것도 믿을 수 없는 source에 근거한 신앙이지요. 결국 그 신앙으로 제 신앙을 판단하심으로 저를 “몰염치”하고 “파렴치”한 사람으로 보신 게지요.

      제가 논증이 이렇게 흐를 것을 우려하여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질문을 드렸는데 과학과 이성으로 경을 판단하려고 하는 자체를 비판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신앙을 과학과 이성을 잣대로 검증하자는게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지탱하고 있는 몇 가지의 근거들을 보자고 했던 것이지요. 이것이 이뤄지지 않은 신앙의 논쟁은 답이 없이 흐를 뿐이랍니다. 결국 우리의 논쟁은 순환되고 있지요.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최고의 가치라고 말씀 드린 이유는 저만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본 글이 “부처와 예수, 그리고 죽음”이라는 점, 게다가 고타마 시타르타가 죽음을 목격하고 집을 나갔다는 점, 결국 죽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십사무기를 만들었다는 점에 근거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게다가 자꾸 “불교의 입장은 다르다”고 말씀하시는데, 종흔님께서 말씀하시는 불교는 어떤 불교인지요? 제가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불교에서 사용하는 열반의 의미는 종흔님께서 주장하신 의미만 있지 않습니다. 종흔님의 주장은 선승(禪僧)과 소승(小乘) 불교과 약간의 맥락을 같이할 뿐이지 대승(大乘)불교의 개념과는 틀립니다. 지난 번에도 종흔님의 종파에 대해서 여쭈었더니 대답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불교는 하나의 뿌리가 있지 않습니다. 너무 다양해서 불교의 교리들도 가지각색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비판한 불교의 교리가 종흔님이 몸담고 계신 종파에는 통하지 않을 수 있고, 제가 인정하는 불교의 교리가 종흔님이 몸담고 계신 종파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지요.

      또한 제가 위에서 말씀드렸지만 기독교인이 말하는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후 또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 살아난 후 다시는 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의학이 죽은 자를 살렸다 손 치더라도 그것은 부활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부활과는 다른 것으로 이해하셔야만 합니다.

      저 역시도 “악령”이라고 말씀을 드린 것이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종흔님께서도 기독교에 계셨기 때문에 제가 왜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지 아실 줄 알았습니다. 저는 성경을 믿습니다. 성경만을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그만한 과학적, 이성적 근거다 타당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성경의 관점으로 불교를 해석하여 드린 말씀이니 오해는 하지 말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종흔님께서도 불교의 관점으로 기독교를 보시는 것이고, 저도 기독교의 관점으로 불교를 보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으로는 답을 낼 수 없습니다. 서로의 믿음이 근간한 경을 과학과 이성으로 검증해 볼 때 까지는 신앙의 싸움만이 될 뿐이지요.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저 역시도 많이 배울 수 있었고, 그 어떤 불자와의 대화에서 받지 못했던 유익함을 얻었습니다. 가시기 전에 그 동안 저와 함께 나눴던 긴 댓글들을 보시면서 제가 드렸던 질문들을 곱씹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도 종흔님께서 주신 질문들을 곱씹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종흔님을 찾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 동안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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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익명 / 6월 4 2015 7:04 오후

    진리는 논쟁으로 밝혀지지 않는것을
    남이 써 놓은글에 자신의 생각을 더하여 서로 이겨보겠다고 하니 ,
    가엾은 마음이 듭니다.
    마음이 없는 마음 그것을 찾아야 그런 허망한 논쟁을 안하겠지요..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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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6월 5 2015 7:13 오후

      “마음이 없는 마음”이라… 그런 것이 정녕 존재할 수 있던가요? 한때 그렇다고 믿었답니다. 이제는 그렇게 믿지 않지요. 저는 메를로 퐁티의 사유에 즉자체를 인정하며 바른 정황을 고려하며 진리를 찾는 태도가 구도자의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꼭 바른 길을 찾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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