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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1/2014 / Sanghwan A. Lee

고집멸도(苦集滅道) 그리스도

시타르타의 고집멸도: 득도(得道)했다는 시타르타가 처음으로 설법한 내용을 “사성제(四聖諦)”라 한다.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라는 뜻의 사성제는 우리에게 “고집멸도(苦集滅道)”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괴로울 “고(苦),” 모을 “집(集),” 없앨 “멸(滅),’ 길 “도(道)”의 축으로 이루어진 그의 가르침은 ‘인간에게 일어나고 있는 괴로움을 없애는 길’을 의미하는데, 다음과 같은 순차적 흐름을 보인다.

(1) 괴로울 고(苦): “고”에 해당하는 범어(梵語)어는 ‘기름이 쳐져서 부드럽게 돌아가야 할 수레바퀴 축에 먼지 따위가 끼어 들어가 나가야 할 방향으로는 가지 못하고 삐걱대기만 한다’는 뜻이다. 시타르타는 수레바퀴와 같이 잘 굴러가던 인간의 삶에 무엇이 끼어들었기 때문에 원치 않는 방향으로 삐걱대며 굴러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인간의 삶은 고통과 고통의 연속이다. 특히나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일은 가장 큰 괴로움을 준다. 인생에 끼지 말아야 할 것이 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끼어있는 것만 찾아 제거하면 고통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2) 모을 집(集): 시타르타는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인생의 수레바퀴에 모인 먼지가 무엇일까? 그것만 닦으면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하여 출가한 시타르타는 수정주의자들을 찾아가 명상의 도를 배웠고, 고행주의자들을 만나 수행하였으며, 중도주의자가 되어 삶의 균형을 맞춰보려 하였으나 다 헛수고였다. 그의 고통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3) 없앨 멸(滅): 결국 문제의 원인을 없애기는커녕 찾을 수도 없음을 깨달은 시타르타는 다음과 같은 대안을 세웠다.

소유의 집착만 버리면 된다.

여기에서 “소유”란 젊음, 건강, 영생 등을 향한 갈망을 말한다. 이 갈망만 버리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젊음”의 집착만 없다면 “늙는 것”을 고통스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건강”에 대한 집착이 없다면 “병드는 것”을 괴로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영생”에 대한 집착만 없다면 “죽은 것”을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시타르타의 한계를 본다. 그가 정말 원했던 것은 생로병사의 원인을 찾아 없애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그것의 원인조차 규명할 수 없는 미물임을 깨달은 그는 마음을 바꾸어 그것을 잘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인생들의 한계가 아니고 무엇이더냐?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원초적 의미이다. 열반이란 ‘바람을 불어 불 따위를 끄다’는 뜻인데, 소유의 집착만 버리면 불처럼 타오르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불어서 끌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불교의 무소유(無所有) 주의가 나오기도 했다.

(4) 길 도(道): 그렇다면 시타르타가 답으로 제시했던 소유의 집착을 버리는 길은 무엇인가? 시타르타는 그 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할 수 없다.

몰랐기 때문이다. 혹자는 시타르타가 팔정도(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직업, 바른 정진, 바른 마음 다함, 바른 집중)를 그 답으로 제시했다고 하나 그의 삶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시타르타는 그 어디에도 팔정도를 통하여 소유의 집착을 버릴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단지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만 말했을 뿐 그것이 궁극적인 대안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죽기 전에 남겼던 유언이 무엇인가? “네 스스로의 등불이 되라”였다. 유언의 의미는 ‘나도 답을 알지 못하니 네 스스로 찾아보도록 하여라’는 뜻으로 본다. 시타르타는 고집(苦集)의 원인도 못 찾고 멸도(滅道)의 방법도 못 찾은채 목마른 구도자(求道者)의 모습으로 80세에 별세(別世)했다.

 

예수의 고집멸도: 유대 땅에서 한 사람의 카랑, 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선포였다. 특이한 사실은 그 분의 외침 속에도 고집멸도의 가르침이 담겨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타르타의 것과는 사뭇 달랐으니 답이 제시된 고집멸도였다.

(1) 괴로울 고(苦):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삶에 생로병사의 고통이 들어온 이유가 수레바퀴 축에 먼지 따위가 끼어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가르치셨다. 시타르타는 이 먼지가 무엇인지 찾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밝혀 주셨다. 그 먼지는 “죄(罪)”였다. 기름칠된 수레바퀴처럼 잘 돌아가던 인간사에 죄라는 먼지가 낀 이후로 생로병사의 고통이 찾아온 것이다. 해산의 고통, 늙는 고통, 병드는 고통, 죽는 고통… 죄가 모든 고통의 원초적 원인이었다.

(2) 일어날 집(集): 그렇다면 죄가 어떻게 인생사에 끼어든 것일까? 예수님께서 답해 주셨다.

“너희가 생명이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야.”

죄가 좋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에 빈 공간이 생겼고, 그 공간에 죄의 삯인 사망이 들어 섰다. 사망은 생명 위에 왕 노릇 하며 해산고(解散苦), 노고(老苦), 병고(病苦), 사고(死苦)의 열매를 맺기 시작하며 인간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고간 것이다. 시타르타가 알 수 없었던 집(集)의 원인을 예수님께서 설명해 주신 것이다.

(3) 없앨 멸(滅):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고통과 원인을 없앨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다. 영생이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자고로 물 밖으로 나온 고기는 물 안으로 돌아가야 사는 법. 하나님 밖으로 나온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

(4) 길 도(道):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길이라… 그 길이 어디에 있는가? 이 넓고 광할한 세상에 하나님께로 뻗어있는 단 하나의 길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니…”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영생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길임과 동시에 영생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럴 수가! 집 나간 양을 목자가 찾아 나서듯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하나님께서 직접 찾으러 오신 것이다. 그런 후 친히 그들의 길이 되사 생명이신 당신께로 인도하신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영생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 분께서 곧 영생이시다. 오직 그 분을 통하여 인생사의 고집(苦集)이 멸도(滅道)된다.

 

천지일도(天地一道): 그렇다. 먼지 껴 삐걱대는 수레바퀴처럼 시끌벅적 삐뚤빼뚤 굴러가는 인생들이여! 여기에 구도자 시타르타가 찾아 헤매던 참된 고집멸도(苦集滅道)가 있다. 천지일도(天地一道)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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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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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종흔 / 2월 25 2015 2:54 오후

    상환님 이글은 거의 정신병자 수준입니다.참나원 한국사람 맞으세요? 님의 몸속엔 수천년 부처를 신봉하는 조상들의 피가 흐르는데 최소한 님의 본성에만 맡겨도 이런 망발은 나오지 않을텐데.제발 글 내리세요.수많은 동포들이 비웃고 욕합니다.같은 사람의 욕을 많이 들어도 님에게 큰 해를 끼칩니다.명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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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2월 25 2015 4:34 오후

      종흔님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제가 권면해 드린 책들 꼭 읽어보시고 진리를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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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익명 / 4월 24 2016 1:47 오전

    소신있는 멋쟁이 그리스도인이시네요!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며 남은 생을 잘 살 수 있다면 그 분께는 그게 진리인거죠. 저는 시타르타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불자에요. 아직 초보고요. ㅎㅎ 시타르타는 고집의 원인과 멸도의 방법을 못 찾으신건 아니고요. 나도 답을 알지 못하니 네 스스로 찾아보도록 하여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요. 오역된 부분들이에요. 그 분은 “자등명 법등명”을 설하셨다고 해요. 어떤 상황에서 정답은 한 가지가 아니라는거죠. 그 상황에 따라 답을 스스로 내려서 대처하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후회하지 말라고요. 잘 못된 것도 잘 된 것도 모두 필요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인연의 결과로 받아들이라고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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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4월 24 2016 5:01 오전

      안녕하세요, 불자님.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과거에 오랜기간을 통해 형성된 완성물을 정면에서 바라본다면 하나의 평면위에 놓인 물질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측면에서 본다면 여러 개의 지층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그 지층들은 시간의 격차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며 정면에서 바라보는 완성물은 곧 시대를 지나며 퇴적되고 침전된 여러개의 사건들로 구성된 후대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고타마 시타르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불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불경이라고 불리는 수 많은 책들을 정면에서 본다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떤 변화를 거쳐나가며 쓰여졌는지, 철학 사조의 이동은 없었는지 등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불경이 하루 아침에 뚝 하고 하늘에서 떨어진게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쳐 기록되고, 수정되며, 심지어는 모습을 바꿔 다른 형태의 이야기로 전승된 후대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방법론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학문이 있는데 사본학이라고 합니다. 불교에는 사본학이 없기 때문에 생소하실지 모르오나 저는 사본학적 방법론을 통해 불경을 바라본 결과 아래의 결과를 갖게 됐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시타르타는 고집의 원인과 멸도의 방법을 못 찾으신건 아니고요. 나도 답을 알지 못하니 네 스스로 찾아보도록 하여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요.”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후대에 쓰인 불교의 주해로 보입니다. 고대 불교, 즉 시타르타의 제자들이 남겼다고 추정되는 불경에는 시타르타가 정직하고 위대한 인간으로만 등장한답니다. 그도 정직한 인간으로써 진리를 추구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철학이었던 불교가 종교가 되면서 여러가지 종교적 사상들이 새로운 시타르타를 만든 것이랍니다.

      이것이 불교에 대한 제 관점이랍니다. 이렇게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 정말 있다면, 언젠가 어디에서나 또 뵐 수 있겠지요? 살펴가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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