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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4/2013 / Sanghwan A. Lee

ΠΡΟΣ ΔΙΟΓΝΗΤΟΝ (디오그네투스께)

예전에 잠시 묵었던 엘파소의 호텔에 편의점이 하나 있었다. 배가 출출하여 스낵을 하나 고른 후 값을 지불할 점원을 기다렸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몇 분 서성이며 주위를 살피다가 다음과 같은 노트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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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는 종이에 몇 번 방에 계시고 어떤 과자를 사가셨는지를 적은신 후 아래에 있는 구멍에 넣어주세요. 돈을 직접 넣어주셔도 됩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The Honor System”이라고 적혀 있었다. 구매자의 양심에 맡기는 방식이라는 말이다. 혹시나 하여 구멍 사이를 들여다보니 지폐가 보였다. 1불 짜리, 5불 짜리, 10불 짜리… 가슴이 뭉클했다. 가끔씩 미국의 도덕성은 나를 놀라게 한다. 시험지만 나누어주고 자리를 떠나는 신학교 교수님으로부터 The Honor System을 운영하는 호텔의 사장님. 만약 한국에 이런 제도가 도입된다면 어떨까? 신학생들의 성적이 한꺼번에 오르지는 않을까? 호텔의 주인은 막대한 손실을 입지 않을까? 한 번 진중하게 생각해 봐야 할 일임이 틀림 없다.

대다수의 한국 교회가 갖고 있는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영성과 도덕성을 별개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언제부터인가 영성과 도덕성을 분리시켰고, 도덕성이 빠진 영성에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성도들은 이 둘 사이에 시나브로 담을 쌓기 시작했고, 도덕성에 무감각한 양심없는 자들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소위 “영적이기만한 성도”가 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주변을 보라.  비 도덕적인 삶으로 인해 예수님의 영광을 가리는 성도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교회당 안에서 설교를 잘 하는 목사들과 기도를 잘 하는 성도들이 교회당 밖에서는 신호위반, 오물방치, 노상방뇨를 시작으로 공금횡령, 세금탈세, 불륜등을 죄책감 없이 행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새벽예배에 참여하여 열심히 기도하는 성도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교통 신호를 무시한다.  수요예배에 참여하여 열심히 말씀듣는 성도가 세금을 탈세한다.  철야예배에 참여하여 열심히 찬양하는 성도가 공금을 횡령한다.  강대상에서 열심히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성도와 불륜 관계를 갖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도덕성이 빠진 영성을 배운 “영적이기만 한 성도”이기 때문이다.  벧후 1:5는 이러한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더하라

믿음에 덕을 더하라고 되어있다.  “덕”이라고 번역된 헬라어(ἀρετή)는 아레테이다.  아레테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의 그리스인들이 “뛰어난 도덕성”을 의미하기위해 사용한 단어로써 그들이 추구했던 인간 최고의 가치였다.[1]  그들은 청렴하고, 고결하며, 정직하고, 성실한 자의 특성을 아레테라고 불렀고, 학교에서는 가장 중요한 주제로 아레테를 다루었다.  이러한 아레테가 믿음과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라.  성도의 영성과 도덕성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2]  그렇다면 이 둘은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는가?  믿음에 덕, 즉 영성에 도덕성을 더하는 관계이다.  “더하다”고 번역된 헬라어(ἐπιχορηγέω)는 ‘부유한 사람이 합창 단원들의 연습과 유지에 필요한 물질을 필수적으로 공급하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3]  즉 부유한 자가 자신의 부유함을 근거로 합창 단원의 필요를 필수적으로 공급하듯이, 예수님을 믿는 부유한 영성이 있는 자는 그 영성을 근거로 삶에 도덕성을 필수적으로 공급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성경은 영성과 도덕성을 별개의 것으로 나누지 않는다.  영성은 도덕성을 수반하고 도덕성은 영성을 따라간다.  영성이 신앙의 시작이라면 도덕성은 신앙의 끝이다.  영성은 도덕성을 발출하고 도덕성은 영성을 증거한다.

이러한 진실을 마음에 품고 살았던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담겨있는 초대 교회의 문서가 있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이 편지는 AD 117에서 180년 사이에 살던 높은 지위의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진 편지로써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캅에 의해 쓰여졌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4]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편지에 서술되어있는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삶으로 살아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편지에서 이런 부분이 묘사되어 있는 부분을 발췌하여 번역하도록 하겠다.[5]

ΠΡΟΣ ΔΙΟΓΝΗΤΟΝ
디오그네투스께

Χριστιανοὶ γὰρ οὔτε γῇ οὔτε φωνῇ οὔτε ἔθεσι διακεκριμένοι τῶν λοιπῶν εἰσιν ἀνθρώπων.
그리스도인은 나라나, 언어나, 전통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게 아닙니다.

οὔτε γάρ που πόλεις ἰδίας κατοικοῦσι
그들은 그들만의 도시에 사는 것도 아니고,

οὔτε διαλέκτῳ τινὶ παρηλλαγμένῃ χρῶνται
이상한 언어를 쓰는 것도 아니며,

οὔτε βίον παράσημον ἀκοῦσιν.
특유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κατοικοῦντες δὲ πόλεις ἑλληνίδας τε καὶ βαρβάρους, ὡς ἕκαστος ἐκληρώθη,
그들은 각자 주어진 삶에 따라 그리스나 다른 이방 도시들에 흩어져 살고,

καὶ τοῖς ἐγχωρίοις ἔθεσιν ἀκολουθοῦντες ἔν τε ἐσθῆτι καὶ διαίτῃ καὶ τῷ λοιπῳ βίῳ θαυμαστὴν.
도시의 관습에 따라 옷을 입고, 음식을 먹으며, 삶을 영위합니다.

πατρίδας οἰκοῦσιν ἰδίας, ἀλλ’ ὡς οἰκοῦσιν ἰδίας, ἀλλ’ ὡς πάροικοι·
그들은 자기 조국에 살면서도 마치 나그네와 같습니다.

μετέχουσι πάντων ὡς πολῖται, καὶ πάνθ’ ὑπομένουσιν ὡς ξένοι·
시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수행하지만 외국인과 같이 모든 것을 참습니다.

γαμοῦσιν ὡς πάντες, τεκνογονοῦσιν· ἀλλ’ οὐ ῥίπτουσι τὰ γεννώμενα.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지만, 아이를 버리지 않습니다.

τράπεζαν κοινὴν παρατίθενται, ἀλλ’ οὐ κοίτην.
다른 사람들과 식탁은 공유하지만, 아내를 공유하지 않습니다.

ἐν σαρκὶ τυγχάνουσιν, ἀλλ’ οὐ κατὰ σάρκα ζῶσιν.
육신을 입고 있지만, 육신을 따라 살지는 않습니다.

ἐπὶ γῆς διατρίβουσιν, ἀλλ’ ἐν οὐρανῷ πολιτεύονται.
지상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πείθονται τοῖς ὡρισμένοις νόμοις, καὶ τοῖς ἰδίοις βίοις νικῶσι τοὺς νόμους.
그들은 주어진 법에 순종하지만, 그들의 삶은 그 법을 초월합니다.

ἀγαπῶσι πάντας, καὶ ὑπὸ πάντων διώκονται.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만, 사람들에 의해 박해를 받습니다.

πτωχεύουσι , καὶ πλουτίζουσι πολλούς·
그들은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들을 부유하게 합니다.

λοιδοροῦνται, καὶ εὐλογοῦσιν·
그들은 능욕을 받을 때 능욕하는 자를 축복하고,

ὑβρίζονται, καὶ τιμῶσιν.
멸시을 당할 때 멸시하는 자를 존중합니다.

ἀγαθοποιοῦντες ὡς κακοὶ κολάζονται·
그들은 착한 일을 하는데도 죄인들처럼 벌을 받고,

κολαζόμενοι χαίρουσιν ὡς ζωοποιούμενοι.
벌을 받을 때는 생명을 얻는 것 같이 기뻐합니다.

ὑπὸ Ἰουδαίων ὡς ἀλλόφυλοι πολεμοῦνται καὶ ὑπὸ Ἑλλήνων διώκονται·
그들은 유대인에 의해 공격받고, 헬라인들에 의해 핍박받지만

καὶ τὴν αἰτίαν τῆς ἔχθρας εἰπεῖν οἱ μισοῦντες οὐκ ἔχουσιν.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은 왜 그들을 미워하는지 모른답니다.

이 편지에 의하면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었던 이유는 겉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영성에 기초한 도덕성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아내를 공유했지만 성도들은 공유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자녀를 버렸지만 성도들은 버리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육신이 원하는대로 살았지만 성도는 육신을 따라 살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사회의 악습까지 답습했지만 성도는 착한 일만 선택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이 모든 것들 보다 더 가치있게 여겼기 때문이다.

잠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자. 나라의 세금을 횡령하는 모습, 단체의 공금을 탈취하는 모습, 결혼이라는 테두리 넘어에 있는 이성과 불륜을 저지르는 모습, 시험 시간이면 컨닝 페이퍼를 보기 위하여 제일 뒷자리로 옮겨가는 신학생의 모습, 식당에서 음료수 한 잔 값만 내고 여러 명이 리필하며 돌려먹는 청년부의 모습들은 디오그네투스가 알게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기독교가 정말 불변하는 진리위에 세워진 종교라면 초대 교회의 기독교와 21세기의 기독교에는 본질적 차이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 둘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간격이 벌어져있다.  기독교가 개독교로 불리고, 목사가 먹사로 불리며, 성도가 썅도로 불리는 오늘…  한 번쯤 고민해 봐야 할 일이 아닐까?


[1] Charles H. Kahn, Plato and the Socratic Dialogue: The Philosophical Use of a Literary For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7.  “아레테”는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는 힘’이라는 소극적 의미에서부터 ‘타인에게 칭송을 받을 만한 특별히 뛰어난 기량’이라는 적극적 의미로 폭넓게 쓰인다.  예컨데 스파르타의 시인 티르타이루스는 “전투에서의 용기”를 아레테로 봤고, 호머는 “힘과 용기에서 오는 기민함,” 크세노폰은 “지적인 것,” 메가라의 테오그니스는 “정의와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봤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이 주장한 의미로 아레테를 사용하지 않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주장한 의미와 유사하게 사용한다.  유사하다고 말한 이유는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인데, 성경이 의미하는 인간의 아레테는 철학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소유하신 도덕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2] Robert Jamieson, A. R. Fausset, and David Brown, Commentary Critical and Explanatory on the Whole Bible, 2 Pe 1:5; Jerome H. Neyrey, 2 Peter, Jude: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vol. 37C, Anchor Yale Bible, 153.; David Walls and Max Anders, I & II Peter, I, II & III John, Jude, vol. 11, Holman New Testament Commentary, 110; Daniel C. Arichea and Howard Hatton, A Handbook on the Letter from Jude and the Second Letter from Peter, UBS Handbook Series, 79.

[3] Marvin Richardson Vincent, Word Studies in the New Testament, vol. 1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887), 679.

[4] 리옹의 이레니우스, 로마의 히폴리투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저작설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5] 보다 더 매끄러운 해석을 위해 의역한 부분이 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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