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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3/2013 / Sanghwan A. Lee

거짓 위로와 참된 위로

“모래위의 발자국”이라는 짧은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이 이야기는 1964년 마가렛 피쉬백이라는 사람이 지은 이야기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선사하는 글입니다. 함께 볼까요?

어느날 한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해변을 주님과 거닐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가로질러 그의 인생의 지난 장면들이 번쩍이며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매 장면마다, 모래 위에 새겨진 두 사람의 발자국을 보았는데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고, 하나는 그의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지날 때, 모래위에 새겨진 발자국들을 뒤돌아보았습니다. 많은 시간에 그는 그의 인생의 뒤안길에서, 오직 한사람의 발자국만이 남은 것을 보았습니다. 더욱이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슬펐던, 시간들에 생겼던 것을 알 수 있었답니다. 너무도 의아한 그는 주님께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했을 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저와 영원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내 인생에서 가장 문제 많았던 시간에는 오직 단 한사람의 발자국만 새겨져 있군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할 때에, 주님은 저를 떠나셨었나요?”

주님은 대답 하시기를,

“나의 보배로운 자녀야, 나는 너를 사랑하고 또 단 한 번도 너를 떠난 적이 없단다. 네가 시험과 고난을 지나는 동안에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발자국은, 내가 너를 업고 갔기 때문이란다.”

참 감동적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다가 지쳐서 쓰러지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업고 걸으셨다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졎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성경이 증거하는 가르침을 무시한채 만들어진 인본주의적 이야기 입니다. 왜냐구요?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우리가 달려야하는 경주를 대신 달려주시겠다거나 우리가 져야 할 짐을 대신 들어주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대신 우리의 경주는 우리가 끝내야하고, 우리의 십자가는 우리가 져야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어찌 들으면 참 매몰찬 소리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을 사실대로 직시해야 합니다. 진정한 위로는 거짓된 야이기에서 오지 않고 참된 말씀에서 오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짐을 매고 이 경주를 하다가 힘들고 지쳐 쓰러질 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그냥 방관하고 계십니까? 그냥 지켜보고만 있습니까? 아니면 호되게 호통을 치십니까? 다 아닙니다.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쓰러져 있는 우리를 감싸안으십니다. 그리고 상한 갈때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손으로 우리를 고치시고 싸매십니다. 우리가 배고프다면 배부르도록 먹여주시고, 목이 마르다면 시원한 물을 주사 갈증을 해소해 주십니다. 그렇게 지친 우리를 회복시키신 후에는 우리로 하여금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어난 후에는 다시 선한 싸움을 싸우며 경주할 수 있도록 응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지치면 또 힘주시고, 배고프면 또 배를 채워주시고, 목마르면 또 목을 축여주시고, 다치면 또 고치시고 싸매십니다. 그리고는 다시 일어나 경주를 완주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삼일마다 넘어지면 삼일마다 위로하시고, 일곱번 넘어지면 여덟번 일으켜 세우시는 예수님… 그 분 때문에 우리는 이 길을 완주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행 20:24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세요. 우리가 가야할 길은 “달려갈 길”이지 “업혀갈 길”이 아니랍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2장 1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예수님께서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신다고 하셨지, 우리의 시험을 대신 받아 주시겠노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오른 손으로 잡아주사 굳세게 하심으로써 도와주신다고 하셨지 우리의 십자가를 대신 들어주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앞에 펼쳐진 길은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걸어 주시는 길이 아니라 나를 도와주심으로써 내가 완주하는 길인 것이랍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나 이제 죽었다!” 생각되어 풀썩 주저앉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잠시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나도 모르게 다시 일어나 걷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게 왜 그런지 아세요? 그 답을 찾고 싶으시다면 잠시 인생의 뒤안길을 돌아보세요. 내 뒤에는 언제나 두 명의 발자국이 수놓아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요.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가 넘어질 때 마다 일으켜 세우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이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나약하게 만드는 인본주의 글들로부터 헛된 위로를 받지 맙시다. 우리를 어리광쟁이로 만드는 인본주의 글들에 헛된 소망을 두지도 맙시다. 우리를 겁쟁이 만드는 인본주의 글들에 헛된 꿈을 두지도 맙시다.

명심합시다.

참된 말씀인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 믿는 자들은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라,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어도 끄떡없는 가시밭의 백합화라는 것을…

거짓 위로 참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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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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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익명 / 12월 21 2013 4:50 오후

    새로운 깨우침!!감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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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부족한 질문 한가지만.. / 7월 9 2014 8:59 오후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는것과 달려갈 길을 마치는 것과의 관계는 무엇인가요? 믿음으로 구원받고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경주를 마쳐야한다 하는 말씀을 들으면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인지, 아니면 행위가 필요한지 조금 혼동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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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7월 9 2014 9:16 오후

      네, 안녕하세요. 헬라어로 구원의 동사형을 찾아 보면 여러가지의 시제가 사용됩니다: (1) 일반 과거, (2) 현재형, (3) 완료형, (4) 미래형.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구원은 받았고, 받고 있으며, 받아오고 있고, 앞으로 받을 것이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신학자들은 구원을 중생, 성화, 칭의, 영화등의 논리적 순서로 분류하는 것이랍니다.

      이제 물어보신 질문을 되짚어 볼까요?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믿음”이 “중생”과 “칭의”의 유일한 조건임을 강조하는 것이고 “달려갈 길을 마친다”에서 “달려갈 길”은 “성화”를 뜻하며 “마친다”는 구원의 완성인 “영화”를 뜻하지요.

      그리고 “행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확실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구원을 받기 위해 행하는 선한 일 등을 행위로 보시는 것인지 아니면 성령님의 단독적인 역사하심에 의해 신적 수동태적으로 일어나는 회개등을 행위로 보시는지요?

      거두절미하고 성경으로 돌아가자면 (1)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시작되고, (2) 그 믿음은 회개를 동반하며, (3) 회개는 죽는 그 순간까지 죄와 싸우도록 하는 인성과 지성과 영성의 변화를 가져오고, (4) 그 결과 십자가 지고 죽도록 예수님을 따르게 되어지는 것이랍니다. 🙂

      추신 1: 제가 얼마 전에 회개에 대해서 썼던 글을 이곳에 복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새벽
      교회를 다니신지
      몇 십년 되신 분께서
      예배 후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온 제게
      아주 진진하게 물어보시더군요.

      “목사님, 회개는 어떻게 하는 거에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머리로 내가 지은 것이 죄임을 깨닫고(συνίημι),
      마음으로 그 사실에 아파하며(μετανοέω),
      육신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ἐπιστρέφω).”

      그 분께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가셨습니다.

      참 감사하고
      뜻 깊은 새벽입니다.

      부연설명: 성경에 회개의 의미로 쓰이는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메타노이아 & 에피스트레포. 메타노이아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후회의 개념이고 에피스트레포는 가던 방향으로부터 돌아서는 행동의 개념이지요. 이 둘이 함께 만나는 것이 회개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즉, 죄의 길로 걸어다가다 그것이 죄임을 머리로 깨닫고(συνίημι), 마음으로 후회하며(μετανοέω), 육신으로 그 길의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ἐπιστρέφω)이 참된 회개의 구성요소랍니다.

      머리로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고
      마음으로 아파하기 위해서는 회개의 영이 필요하며
      육신으로 돌아서기 위해서는 육신을 쳐 복종시키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추신 2: https://sanghwanlee.com/2014/07/03/%EC%A7%84%ED%99%94%ED%95%98%EB%8A%94-%EC%A3%84/

      링크: https://sanghwanlee.com/2013/10/24/%EA%B5%AC%EC%9B%90%E6%95%91%E6%8F%B4%EC%9D%B4%EB%9E%80-%EB%8B%A8%EC%96%B4%EC%9D%98-%EC%84%B1%EC%84%9C%EC%A0%81-%EC%93%B0%EC%9E%84%EC%8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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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족한 질문 한가지만.. / 7월 9 2014 9:47 오후

        와 감사합니다. 이렇게 바로 답변해주시고 자세히 설명해주심에, 친절하심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구원에 시제가 네개나 있다는 점에서 놀랐습니다.. 귀찮게 해드림에 죄송하지만 하나만 더 질문드릴게요…

        예전에 본 내용중에 성화라는것에 신자마다 정도가 다 다르다고 하는데, 이미 믿음으로 중생과 칭의를 받은 성도는 성화의 어느 지점에 있던 하나님의 자녀이고 백성이고 구원 받을(영화) 자인가요? 아무리 연약하고 자주 넘어지고 회개를 밥먹듯이 해도요?

        만약 믿음으로 중생과 칭의로 구원받았어도 많이 성화된 자만을 구원하신다면 전 거기에 해당되지 않을것 같아서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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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7월 9 2014 9:55 오후

        하하… 저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그러나 성경을 보면 볼 수록 깨닫는 것은 제가 틀렸다는 것이지요. 구원은 성화의 정도가 아니라 성화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로 분별한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마다 성화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어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깊은 성화를 갈망하고,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자는 더 깊은 성화를 갈망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 사랑은 상급으로 연결된다고 신학자들은 해석한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죄와 싸우게 됩니다. 그러나 육신이 연약하여 넘어질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럴 때 마다 다시 일어나 먼지를 털고 앞을 보고 가지요. 🙂 자세한 내용은 제가 방금 올린 글을 보세요. 보다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답니다.

        글 링크: (https://sanghwanlee.com/2014/07/09/%EC%B9%A0%EC%A0%84%ED%8C%94%EA%B8%B0%E4%B8%83%E9%A1%9A%E5%85%AB%E8%B5%B7%EC%9D%98-%EC%9D%98%EC%9D%B8%E7%BE%A9%E4%BA%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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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부족한 질문 한가지만.. / 7월 12 2014 2:36 오전

    친절하고 자세한 답변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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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익명 / 10월 19 2015 2:41 오전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해야할 역할을 강조하신 부분은 이해가 되지만 구원은 결국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길을 걸어갈 때는 때로 우리를 안고 업어서 이끌어가실 때도 적지 않습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신 1:31)”
    물론 우리가 달려가야할 모든 길을 하나님께서 업어주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를 안아주시고 업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완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루어야할 구원은 단순히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품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된 우리들은 구원을 받은 자이지만 아직 하나님의 성품을 닮지 못한 부분들이 너무나 많이 있기에 또한 구원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성령의 도우심과 은혜를 따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구원을 이루어갈 때 비로소 마지막 주님께서 오실 그 때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함으로 인해 홀연히 우리의 전인격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품을 온전히 닮게되는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구원의 여정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면 그래서 수십년을 신앙생활했어도 인격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내 마음과 내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아무리 교회생활을 열심히했다할지라도 마지막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이루어가는 것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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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0월 19 2015 5:00 오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몇 가지 생각을 나누도록 할게요.

      1. 위에 말씀하신 부분에 거의 동의합니다. 저 역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에 구원의 시종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지요. 그리고 구원의 궁극적 목적도 단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점진적으로 더 큰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임도 믿습니다.

      2. 그러나 제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모래위의 발자국”의 글을 신명기 1:31의 구절로 지지하시면서 “따라서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길을 걸어갈 때는 때로 우리를 안고 업어서 이끌어가실 때도 적지 않습니다” 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신명기 1:31은 형제님/자매님의 주장이나 “모래위의 발자국”의 내용을 지지하는 구절이 될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문맥 속에서 아모리 족속을 보고 두려워하는 히브리 민족들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상기시켜 주면서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되새김질 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주석가들이 동의하듯 “아버지가 아들을 안고 온 길”은 (1)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위험으로 부터의 보호를 의미함과 동시에 (2)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전적인 신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여정, 즉 성화의 과정을 겪다가 쓰러졌을 때 하나님께서 대신 업고 걸어주신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지요.

      3. 문맥을 계속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모리 족속과의 전쟁은 히브리 민족들이 직접 치렀습니다. 하나님의 등에 업혀 전쟁을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나가서 싸웠지요. 결국 불순종으로 인해 이기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다시 아모리 사람들과 싸울 기회를 그들에게 주십니다. 역시 그 때도 그들이 하나님의 주관하심 속에서 직접 그들과 전쟁을 치렀지요. 이를 봐서도 신명기 1:31의 구절로 형제님/자매님의 주장과 “모래위의 발자국”과 같은 이야기는 만들어 질 수 없습니다.

      4. 제가 위에 언급해 드렸다시피 신명기 1:31에는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는 표현과 “너희가 걸어온 길”과 동격구조를 띄고 있어 히브리 민족들이 걸어온 광야 길에서 만난 일들을 상기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주석가들은 동의합니다. 이를 근거로 Clapham은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물과 맛나, 그리고 야생 동물과 원수들로 부터의 보호등을 의미한다고 주장했습니다. Jerome도 상처와 더위와 추위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한다고 주장했지요. 이것을 문학적으로 의미하기 위해 “아버지가 아들을 안는 비유”를 사용한 것입니다. “모래위의 발자국”처럼 비유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삶에 실체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의미지요.

      5.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명기 1:31에 “안는다”로 번역된 히브리어(נשׂא)에는 ‘업히다’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 단어에는 많은 의미가 들어 있는데, (1) 안다, (2) 도와주다, (3) 부축하다, (4) 공급하다 등의 용례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5)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의미적 용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문맥이 그 의미를 결정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정황들을 통해서 볼 때, 신명기 1:31로 “모래위의 발자국”을 지지할 수 없다고 사료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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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 10월 20 2015 7:56 오전

        모래위의 발자국이라는 이야기도 사실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담겨져 있는 교훈은 우리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 떠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하게 보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만약 문자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는 사도바울의 고백도 문제가 되겠지요.
        모래위의 발자국에 담긴 핵심적인 교훈은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어려울 때 가장 강한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은혜를 생각하면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즉, 모래위에 주님의 발자국밖에 없다고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래위의 발자국이 만약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신다는 것이 핵심이라면 당연히 글쓴 분의 이야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예화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라 가장 힘들 때 그것을 이길 수 있도록 더욱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때문에 힘든 고난의 길을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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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0월 20 2015 8:32 오전

        예화를 통해 작가가 전달하려는 의도는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해석해 주신 형제님/자매님의 두 번째 댓글에도 공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의도로 예화를 만들었다 할지라도, 그리고 설령 만들어진 예화가 받는 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다 할지라도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은 요소들이 사용 됐다면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요소들은 예화를 듣는 자들로 하여금 작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잘못된 생각을 갖도록 할 요소가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작자의 의도는 우리가 알 수 없으니 작품이 풍기는 프레이그먼트에만 우리의 초점을 맞춰야 하겠지요)

        제 판단에 따르면 우리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업고 간다”는 언어학적 장치를 사용했다는 것은 과도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제가 본글에 사용한 그림처럼 예수님께서 부축해서 간다는 것이 더 성서적으로 여겨지네요.

        서로의 의견을 충분히 나눈 듯하니 지금 부터의 논쟁은 무의미 할 듯 합니다. 좋은 댓글에 다시 한 번 깊게 감사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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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익명 / 11월 28 2016 10:16 오후

    예화에서 주장하려고 하는 의미만을 본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거 같은데, 너무 많은 의미를 투과해서 해석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네요. ‘엎다’라는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안다’만으로 충분히 예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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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11월 29 2016 7:38 오전

      물론 그럴 수 도 있겠지요. 좋은 조언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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