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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2013 / Sanghwan A. Lee

예수님의 신성(神聖)에 관하여 (10) –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아있는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문제 제기: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아계시다는 이유로 그 분의 신성을 부인하려는 자들이 있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왜 하나님의 보좌에 앉지 않고 보좌의 우편에 앉아 있느냐”는 말이다.  논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합당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지 아니하시는 이유가 뭘까?  정말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일까?  지금부터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하여 성경의 증언을 들어볼 것이다.  성경의 첫 번째 증언은 하나님의 자존심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존심: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에게 많은 것을 나누신다.  얼마나 많은 것을 나누시던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엡 1:3c은 증언한다.  그러나 이처럼 나누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절대로 나누지 아니하시는 한 가지가 있다.  당신의 보좌이다.  그 보좌는 하나님만이 누릴 수 있는 신적 영광을 의미하는 것으로 피조물과 나누지 아니하신다.  피조물은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  범접할 수도 없다.  탐낼 수도 없다.  피조물이 이를 어기는 순간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그 자리는 하나님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사탄이 천국에서 추방당한 이유를 생각해보라.  하나님만이 앉을 수 있는 그 보좌에 앉으려고 했기 때문이 아닌가?  사 14장은 사탄의 탐욕을 바벨론 왕에 빚대어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사 14:13)

사탄의 탐욕을 알았던 하나님께서는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사 14:15)

는 저주와 함께 그를 내치셨다.  그는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땅에 찍혔[다] (사 14:12)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절대로 나누지 아니하시는 한 가지를 탐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보좌에 앉는다”는 표현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하면 아래에 있는 Appendix 1을 보라]

하나님의 우편:  성경은 예수님의 현 위치를 하나님의 우편이라고 말한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막 16:19)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눅 22:69)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롬 8:34)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1)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벧전 3:22)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다”고 되어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되어있다.  왜 보좌에 앉지 않으시고 우편에 앉으신 것일까?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이기에 그 자리를 침범할 수 없었던 것인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표현은 아주 중대한  두 가지 사실을 계시한다: 예수님의 신분(身分)과 직분(職分)이다.

예수님의 신분: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옆에 앉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다.  욥 1:6의 증언을 들어보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피조물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다.  감히 그 분의 옆에 앉지 못한다.  계 7:15도 증언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시 61:7도 증언한다.

그가 영원히 하나님 에서 거주하리니…

창 4:16에 있는 가인도 범죄 후 하나님의 앞을 떠났다.

가인이 여호와 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이처럼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서서 그 분을 예배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다.  그 분은 하나님 앞에 서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는다.  그대신 하나님 옆에 앉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받고 계신다.  왜?  하나님과 동급(同級)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분의 신분이다.

예수님의 직분: 이제는 직분을 보자.  성경에서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표현은 직분적 의미를 담고있다.  예컨데, 하나님의 우편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자리요(출 15:6), 원수들을 심판하는 자리이며(애 2:4, 합 2:16), 작정한 바를 이루기 위하여 사역하는 자리이고(사 41:13, 62:8), 의인을 구원하는 자리이다(시 17:7; 98:1, 사 139:10). [원어의 쓰임새를 보기 원하면 Appendix 2를 참조하라]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이루시는 직분자이시기에 아직 하나님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시고 우편에서 사역하시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역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좌에 아직 앉지 아니하신 것이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구절을 소개함과 동시에 주해하겠다.  시 110:1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이 구절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시는 기간이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라고 되어있다.  예수님께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는게 아니라 그 분의 원수가 패할때 까지라는 말이다.  헌데 중요한 것은 시 110:1을 보면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위하여 원수와 싸우시는 것처럼 묘사되어있지만, 시 110을 끝까지 읽어보면 성부가 아니라 성자께서 원수와 직접 싸우심을 알 수 있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시 110:6~7)

읽었는가?  성부께서 그들과 싸우시는게 아니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싸우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싸우신다는 말이다.  계 19:11~16도 이를 명확히 증거한다.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전쟁의 모사(사 9:6)요, 군대장관(수 5:14)이요, 승리의 주재자(유 1:4)요, 전쟁의 왕(계 19:16)으로써 천군을 이끌고 전쟁에 직접 참여하시는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시 24:8)이시다.  바로 이 싸움이 종결될 까지만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계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 110:1에 주어로 등장하는 성부 하나님께서 원수들과 싸우신다고 표현된 이유는 두 분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가 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기간이 원수들이 예수님의 “발판”이 되기까지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영원토록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계시는게 아니라 원수들이 예수님의 “발판”이 되기까지만이라는 말이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한다는 표현은 전쟁에 참여한 왕이 원수의 목을 밟음으로써 완승을 기념하는 히브리적 행위이다.  수 10:24를 보라.

그 왕들을 여호수아에게로 끌어내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부르고 자기와 함께 갔던 지휘관들에게 이르되 가까이 와서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 하매 그들이 가까이 가서 그들의 목을 밟으매…

전쟁에 직접 참여한 왕은 원수들을 멸절될때까지 보좌에 앉지 않는다.  마지막 원수의 목이 그의 밟에 밟힐 때 까지 이기고 또 이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하나님의 보좌에 앉지 않으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직분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하나님의 보좌에 앉지 아니하셨다.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써 하실 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분께서는 두루마리를 취하셔야 하고(계 5:7), 일곱 인을 떼셔야 하며(계 6:1), 재림하셔야 하고(살전 4:16), 양과 염소를 나누셔야 하며(마 25:32),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셔야 하고(계 19:11~16), 심판을 하셔야 하며(계 20:11),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치르셔야 한다(계 21:2).  그 때까지만 하나님의 보좌에 앉지 아니하신채 사역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이 마쳐진 후에는 어디에 앉으시나?  하나님의 보좌이다.  그 증거가 있는가?  그렇다.  지금부터는 전쟁을 다 끝내신 예수님께서 어디에 앉으시는지를 보여주는 계시록 22장으로 가보자.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 계 22:1과 계 22:3은 이렇게 증거한다.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τοῦ θρόνου τοῦ θεοῦ καὶ τοῦ ἀρνίου)로부터 나와서… (계 22:1)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ὁ θρόνος τοῦ θεοῦ καὶ τοῦ ἀρνίου)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계 22:3)

이 구 개의 구절에 동시에 들어있는 문장이 있다.  “하나님과 및/그 어린 양의 보좌”이다.  얼핏 보기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우편에 있는 예수님의 보좌를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성부 하나님의 보좌는 천국의 한 가운데 있고, 그 오른편에 성자의 보좌가 있는 것 처럼 말이다.  그러나 헬라어 문법은 이러한 해석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왜?  지금 부터 문법을 분석해 보겠다.

두 구절 속에 보좌라고 번역된 헬라어(θρόνου/θρόνος)는 단수로 되어있다.  게다가 보좌를 받는 관사도 단수(τοῦ/ὁ)로 되어있다.  이는 보좌가 하나라는 뜻이다.  보좌가 둘이 있었다면 문법은 τοῦ θρόνων/οἱ θρόνοι로 되어 있어야만 한다. 성부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가 각각 하나씩 있는게 아니라 오직 하나의 보좌만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보좌는 누구 것인가?  성부의 것이고 성자는 그 보좌의 우편 바닦에 앉아있나?  아니다.  보좌를 수식하는 “하나님과 어린양의”라는 문구를 보라.  이 구절을 헬라어로 보면 둘 다 소유격(τοῦ θεοῦ καὶ τοῦ ἀρνίου)으로 되어있다.  보좌와 그를 꾸미는 관사는 단수인데 그 보좌를 소유하신 자는 둘이다.  보좌의 주인이 둘, 곧 성부와 성자라는 말이다.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님 보좌의 주인으로써 함께 앉는다는 말이다!  생각해 보라.  그 어디에도 둘이 한 보좌에 앉는 경우는 없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는 둘이 한 보좌에 앉는다.  왜?  성부와 성자는 위()로는 둘이지만 체(體)로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계 22:3c~4은 더욱더 충격적인 계시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이 구절에 아주 특이한 문법 형태가 들어있다.  “그의 종들(οἱ δοῦλοι αὐτοῦ)”에 있는 “그(αὐτοῦ)”와 “그를 섬기며(λατρεύσουσιν αὐτῷ)”에 있는 “그(αὐτῷ),” 그리고 “그의 얼굴(τὸ πρόσωπον αὐτοῦ)”에 있는 “그(αὐτοῦ)”와 “그의 이름(τὸ ὄνομα αὐτοῦ)”에 있는 “그(αὐτοῦ)”라는 인칭대명사가 다 단수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한 보좌에 앉아계신 분은 성부와 성자 둘이지만 그들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는 단수라는 것이다.  왜?  성부와 성자는 보좌에 앉으사 피조물의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그 어떤 왕국에도 왕과 신하가 보좌를 함께 나눠 앉는 경우는 없다.  더군다나 당신의 영광이 도적질 당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보좌를 피조물에게 나누실리는 절대 없다.  사탄이 타락한 이유도 그 보좌를 도적질하려고 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나 계 22:1, 3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한 보좌에 예수님과 함께 앉으신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니심에도 불구하고 보좌에 무사히 앉으신 것이라면 성경 속의 하나님은 일관적이지도 않고, 무질서 하며, 변덕이 심한 독재자다.  그러나 일관적이시며, 질서정연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보좌에 앉으신 이유는 성부와 성자는 다른 위()이시지만 삼위일체의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부의 품 속에서 나오신 성자께서 다시 성부의 품 속으로 들어가사 삼위일체의 완벽한 연합 속에서 피조물들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다.

맺으며: 그렇다.  예수님께서 요 10:30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신 말씀이 가시적으로도 이루시는 것이다.  성경의 이러한 계시가 주는 가르침은 자명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Appendix 1] 몇몇의 성경 해석자들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는 계 3:21의 증언을 근거로 “피조물도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이 구절을 헬라어로 보면 이러한 해석이 왜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다.  계 3:21의 헬라어 구절은 다음과 같다.

ὁ νικῶν δώσω αὐτῷ καθίσαι μετʼ ἐμοῦ ἐν τῷ θρόνῳ μου, ὡς κἀγὼ ἐνίκησα καὶ ἐκάθισα μετὰ τοῦ πατρός μου ἐν τῷ θρόνῳ αὐτοῦ.

보시다시피 “보좌”라는 단어앞에 정관사 “엔(ἐν)”이 있어 “보좌 안”이라는 뜻이 된다.  이기는 자들이 앉는 곳은 보좌 “위(ἐπὶ)”가 아니라 “안(ἐν)”이라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나?  보좌 안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보좌는 위에 앉는 것이다.  성경 그 어디를 봐도 보좌 “안”에 앉는 다는 구절은 없다.  이 곳 외에는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보라.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 위에(ἐπὶ) 앉을 때에… (마 19:28)

자기 영광의 보좌 위에(ἐπὶ) 앉으리니… (마 25:31)

보좌 위에(ἐπὶ)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눅 22:30)

그 보좌 위에(ἐπὶ) 앉으신 이가 있는데… (계 4:2)

보좌 위에(ἐπὶ)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계 4:9)

보좌 위에(ἐπὶ)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계 4:10)

보좌 위에(ἐπὶ)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계 5:1)

보좌 위에(ἐπὶ)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계 5:7)

보좌 위에(ἐπὶ)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계 5:13)

보좌 위에(ἐπὶ)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계 6:16)

구원하심이 보좌 위에(ἐπὶ)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계 7:10)

보좌 위에(ἐπὶ)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계 7:15)

자기 보좌 위에(ἐπὶ)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계 11:16)

보좌 위에(ἐπὶ)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계 19:4)

보좌 위에(ἐπὶ)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계 21:5)

이처럼 인격체가 보좌에 앉는 위치는 “~ 위(ἐπὶ)”이지 “~안(ἐν)”이 아니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위”를 위미하는 전치사 에피(ἐπὶ)와 쓰이는 것이다.  그러나 계 3:21을 보면 특이하게도 “~ 안”이라는 뜻의 전치사 엔(ἐν)이 쓰이고 있다.  이 곳에만 그렇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계 3:21의 표현은 다른 구절들이 의미하는 것과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이 구절은 이기는 피조물이 보좌 “위”에 앉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보좌 “안”에 앉는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이것은 계 3:20과 3:21을 함께 볼 때 알 수 있다.  계 3:20을 보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문을 여는 자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신다는 연합의 모습이 나와있다.  중요하게 봐야할 것은 “들어가”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이세르코마이(εἰσέρχομαι)이다.  이 단어는 ‘안을 향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에이스(εἰς)와 ‘가다’는 뜻의 동사 에르코마이(ἔρχομαι)의 합성어로써 ‘안을 향하여 들어가다’는 뜻의 방향성 동작 동사이다.  20절에는 예수님께서 안을 향하여 들어가시는 동작이 나와있음을 기억하고 21절을 보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갑자기 “이기는 그”가 등장한다.  그는 누구인가?  문맥에 따라 예수님께서 안으로(εἰς) 들어오신(ἔρχομαι) 사람이다.  바로 그가 이긴 자로써 예수님의 보좌 “안(ἐν)”에 함께 앉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εἰς가 방향전치사라면 ἐν은 장소 전치사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하고 헬라어의 쓰임새를 잘 보라.

20절의 예수님께서 ‘안을 향하여(εἰς)’ ‘들어오셨다(ἔρχομαι)’ 면 21절의 예수님의 위치는 어디인가?  들어오신 자의 ‘안(ἐν)’이다.  20절의 예수님께서 안을 향해 들어오셨다면 21절의 예수님께서는 들어오신 자의 안에 계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오신 자는 예수님의 안에 거하게 된다(요 15:5).  예수님께 온전히 포함된 연합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연합의 사실을 강조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보좌 “안(ἐν)”에 함께 앉는다는 표현을 하신 것이지 그를 하나님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의미로 보좌 “위(ἐπὶ)”에 앉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계 3:21을 가지고 “인간이 하나님의 보좌 위에 함께 앉는다”는 해석은 만들어 질 수 없다.

[Appendix 2] 히브리어 יָמִין와 헬라어 δεξιός는 “오른손”이라는 뜻임과 동시에 “우편”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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