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s
컨텐츠로 건너뛰기
10/13/2013 / Sanghwan A. Lee

한 신학자(神學者)의 바램

진리의 펜 (글)시대 검증: 잠언 1장 7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여기에 “경외”라고 번역된 히브리어(יִרְאָה)는 ‘무서워 하다,’ ‘두려워 하다,’ ‘공포스러워 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며, 공포스러워 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지식도 진노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출발함과 동시에 진노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사랑의 하나님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진노의 하나님은 등안시 한채 그 분의 사랑에 대해서만 운운하고 있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심지여는 교회들까지도 하나님의 진노의 결정체인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대속적 죽음, 지옥은 설교하지 않기 시작했고, 세상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영생, 천국, 축복등 만을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기독교의 본질인 “죄인은 죽어야만 한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돌아셨다”는 지식을 잊어버렸고 한쪽으로만 치우친 기형적 신앙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로인한 결과는 가히 말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예수님은 사랑이시라’는 한 가지의 신관에만 사로잡히게 되어 예수님을 “긍적적인 생각을 주시는 분,” “내 사업의 동업자,” 그리고 “램프속의 요정”따위로 강등시켜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지극히 높으심은 망각되어 버렸고,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예배할 수 있는 능력은 사라지게 된 것이지요.  이것이 21세기의 현실입니다.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 보지요.

 

신학의 종류:  기독교가 창시된 이래로 지금까지 신학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져 흘러 왔습니다: (1) 철학신학, (2) 대중신학, (3) 조직신학, (4) 성서신학.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네 가지의 신학들은 발전, 진보, 퇴보를 겪으며 그 틀을 잡게 되었고, 그 때마다 가장 발전이 되고 있는 신학의 사조에 의해 시대는 큰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지식으로 21세기를 진단해 본다면 대중신학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중신학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심판의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복주시고 잘되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만을 강조하는 신학사조입니다.  대중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성경이 증거하는 ‘사랑의 하나님’과 ‘심판의 하나님’은 절대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여 ‘심판의 하나님’을 휴지통에 버리고 ‘사랑의 하나님’만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래서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인 죄, 지옥, 하나님의 진노, 영벌등은 점점 교회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복, 긍정적인 사고방식, 천국, 영생만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성경의 한 가르침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기에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뒤틀어 놓기 시작했고, 초대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기형적인 신앙인들을 배출시키게 됩니다.  당연히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대중신학에 시나브로 젖게된 것이지요.

혹시 부신관(父神觀)이라는 용어를 들어보셨나요?  부신관(父神觀)이란 하나님을 육적인 아버지와 동일하게 보는 신학사조로써, ‘하나님은 아버지고 우리는 아들이니까, 우리가 아무리 잘못해도 눈감아 주실거야’라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부신관(父神觀)은 20세기의 유명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나 위르겐 몰트만에 의해서 조용히 체계화되었으며, 21세기에는 조엘 오스틴, 폴라 화이트, 토니 에반스등과 같은 목회자들에 의해서 설교되어지고 있습니다.  칼 바르트는 부신관(父神觀)을 말없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만민화해론’ 혹은 ‘만민구원론’을 주장하여,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심지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아니한 불신자들 까지도] 결국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말했고, 위르겐 몰트만은 ‘만유구원론’을 주장하여,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물론, 마귀들 까지도 다 구원을 받게 될것이다

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사조를 받아들인 21세기의 목회자 토니 에반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일부러 죄를 질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천국으로 가는 길에서 불신자들보다 더욱더 심한 죄를 질 수도 있다!  [아버지되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그들을 결국 용서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 주변에 소위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불법을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스스로를 이렇게 위로하는 사람은 없는지요?  “하나님께서 내 사정 아시니까, 이해해 주실꺼야…  하나님은 사랑이잖아?  그치요 아버지?”  이런 사람들이 부신관(父神觀)에 영향을 받은 대중신학의 잔재들입니다.  한국이 배출한 보수신학자 박형룡 박사는 이러한 대중신학적 부신관(父神觀)을 철저하게 경계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생활의 최고의 동기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계명을 지키며 봉사와 의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라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응보(應報)를 행하시며 그는 거룩하시고 죄를 증오하시므로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며 영광이 지극하셔서 더러운 죄인은 가까이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버지요 따라서 사랑 뿐이라고 하는 부신관(父神觀)을 말하는 이는 달려들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역설하기 쉬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은 모든 성도가 다 긍정하고 그의 극진한 사랑에 신뢰를 두며 감사함도 사실이나 부친이란 사랑만을 가지는 분이 아니라 엄격하게 교훈하는 다른 일면도 겸하는 존재인지라 그가 발노하여 책하며 징계할 때에는 두려워할 만한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부친만이 아니라 또한 상선벌악(賞善罰惡)의 대권을 행사하시는 심판주이시니 죄인이 어찌 그를 경외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부터의 우리의 현 주소를 진단해 보겠습니다.  찬송부터 시작합니다.

 

복음성가:  요즘 유행하고 있는 복음송가를 한 번 봅시다.  거의 다 하나님의 사랑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세상의 가요와도 흡사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치 연인의 사랑처럼 부르고 있지요.  저는 이러한 종류의 복음송가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할 때가 참 많습니다.  “저 노래를 지은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은 것인가?  내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을 믿나?”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이라는 관념과 동일화 시켜, 하나님은 사랑이고 사랑은 곧 하나님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마치 하나님처럼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는 건전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은 동격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사랑을 포함하시지만, 사랑은 하나님을 포함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불릴 수 있지만 “사랑은 하나님”이라고 불릴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한다면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한 목사님께서 논문을 통하여 이러한 글을 발표하셨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우상숭배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 지고있는 날은 주일이고, 시간은 11시 부터 12시 30분 사이이며, 장소는 교회다.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사랑이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예배하고 있기 때문에 주일날 11시 부터 12시 30분까지 교회에서 우상숭배가 가장 극심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발표입니다.

우리가 기독교가 가장 크게 왕성했던 16세기부터 19세기의 찬송시를 본다면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사랑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진노의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했습니다.  대중신학이 이 땅을 휩쓸기 이 전, 19세기 초에 불렸던 찬송가의 가사를 한 번 보세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삼키시네!  하나님의 불이 그들에게 임하사 그들을 태우시리라!  오!  하나님!  영원 불변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진노는 예나 지금이나 변치않네!  진노의 하나님!  거룩하시며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나는 찬양하네!  당신의 진노는 나로하여금 죄를 미워하게 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찬송을 요즘에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중신학에 물들어 버린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종류의 내용을 담고 있는 찬송들을 부르지 않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찬송가에 넣지 않는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대중신학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찬송 속에는 예수님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사랑의 하나님과 진노의 하나님에 대한 찬송이 알맞게 들어 있었습니다.  참 감격적인 사실은 그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노래할 때는 엄숙해 졌고, 진노의 하나님을 노래할 때는 기뻐 뛰었다는 것입니다.  왜?  사랑의 하나님을 진노의 하나님과 결부시켜 이해했고, 또한 진노의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과 결부시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예배는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설교:  이번에는 설교를 진단해 보겠습니다.  우리들은 어떠한 종류의 말씀에 끌리게 됩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전부 다 내가 잘먹고, 내가 잘 살고, 내가 잘되어 진다는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의 설교이지 않습니까?  어쩔수 없습니다.  대중신학에 물들어 버린 우리들에게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지극히도 당연합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고 사탕발림이 되어있는 설교를 전하는 사역자들에게 길들여진 많은 21세기의 사람들은 사탕과 같이 달콤한 설교만을 좋아합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사람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교회들을 보십시요.  대부분이 대중신학에 물들은 목사들이 운영하는 교회입니다.  이들은 심판하시는 진노의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저 사랑의 하나님만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교회에 모이지 않고, “어떻게 하면 긍정적인 힘을 얻어 갈까?,” “어떻게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난관을 헤처날갈 방법을 얻을 수 있을까?”의 질문을 해결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얻어가면, “은혜받았다…” 말하고 그렇지 못하면, “오늘은 은혜가 좀 떨어지네…” 말합니다.  참으로 가슴아픈 현실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세를 잃어버렸고,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예배하는 모습을 망각해 버렸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가장 속상한 사실 중에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설교하는 설교자를 이단 취급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푯대를 들고 하나님의 진노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혹시라도 그들을 손가락질하며, “정신나간 사람들,”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사람들,” “기독교의 원수”라고 생각한적은 없었습니까?  그들의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새, 혹은 직설적인 표현때문에 그들을 판단하신 적은 없으신지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원수로 내 몰고, 하나님의 사랑만을 설교하는 자들을 좋은 목회자, 하나님의 사자라고 부르신 적은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들 중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아 자신의 삶을 다 송두리채 버린채, 길거리에 나댕기는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신관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띠를 어깨에 매고 한 2년정도 전도를 나갔습니다.  매주 수요일, 금요일만되면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함께 띠를 매고, 성경을 들고 밖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술집 앞에서, 대학가 앞에서, 길거리 앞에서도 했습니다.  밀침을 당하기도 했고, 발로 걷어 차이기도 했으며, 침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 때 제게 가장 큰 눈치를 주던 행인들이 누구이신줄 아십니까?  바로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른 쪽 옆구리에 성경을 끼고 왼 손으로 손가락질 하며 “적당히 하라”고 말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심판하고 싶어하시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데, 그들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중신학의 영향 때문이지요.

혹시 예레미아선지자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당시 타락한 선민을 향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신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아를 일으키셔서 사람들에게 진노의 하나님을 전하게 하심으로 사랑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러한 설교를 사람들이 좋아할 턱이 없지요.  그래서 예레미야를 반대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고소하고 조롱하고 멸시하고 때리고 가두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당한 예레미아는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수 백번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그들이 지옥에 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그는 전하지 않고는 못배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또 일어납니다.  그리고 진노의 하나님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사랑을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서는, 진노의 하나님을 전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침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쳤던 설교는 어떻습니까?  진노의 하나님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전했던 설교의 내용은 어떻습니까?  진노하신 하나님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첫 번째 설교는 어떻습니까?  역시도 진노의 하나님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왜?  진노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상 사랑의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정통교회가 가지고 있는 95%의 지옥에 대한 교리가 누구의 입에서 부터 나온 가르침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대한 말씀을 성경속에서 가장 많이 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왜죠?  그분은 심판하시기 원치 아니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진노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써 온전히 알 수도 없습니다.  제 의도를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저는 예수님의 진노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 옳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고 진노만 전하는 것은 당연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21세기의 신학사조는 그 반대의 현상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진노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명확하게 깨달음으로써 그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맺으며: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대중 신학의 잔재들임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부지런하 탐구하고 탐독해야만 해야 합니다.  위에서 말씀 드렸다시피, 하나님의 진노에만 집착하라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고 진노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것은 철저히 잘못된 것입니다.  단지 21세기의 현 주소가 하나님의 사랑에만 촛점을 맞추는 위치에 있는지라 잊혀진 하나님의 진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속히 시행되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글을 읽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깨달아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예배할 수 있는 예배자가 우리 조국 대한 민국에서 봇물 터지듯이 나올 수 있도록 통곡합시다.  침례 요한과 예레미아와 같은 선포자들이 나와 무너진 신관을 세울 수 있도록 눈물 흘립시다.

그리고

바로 우리가 그러한 자들이 되기를 소망하며 펜을 놓습니다.

 

 

Advertisements

댓글 2개

댓글 남기기
  1. kim0hun / 10월 13 2014 1:05 오후

    아멘아멘! 회개하며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Liked by 1명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