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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2013 / Sanghwan A. Lee

예수님의 신성(神聖)에 관하여 (8) –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요구한 예수가 하나님인가?

문제 제기: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등시키거나 부인하는 이단들이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여러 가지의 이유를 들지만 그 중에 하나는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성부 하나님께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했을 것이다”입니다.  얼핏 들으면 맞는 소리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면 당신께서 스스로 결정하시고 이루시면 되지 왜 굳이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께 요구를 했냐는 것이지요.  자유 신학자들은 이러한 이유로 인해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보다는 힘이 없는 약한 하나님으로 치부하고, 이단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등, 부인합니다.  심지어 초대 교회에 등장한 이단은 예수님을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하나님의 꼭두각시”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논증 검토: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너무 단순하고 비약적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함께 의논하시고 결정하시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성부 하나님께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행하실 수 없으시기에 요구하신 것도 아닙니다.  단지 성부 하나님과 모든 것을 나누시고 함께 결정하시기 때문에 요구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성부 하나님께서도 혼자 결정하시고 단독적으로 일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나누시고 함께 결정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들을 서로 나누시고 함께 결정하시며, 그 일을 같이 이루시는 것이지요.  제가 몇 가지 구절들과 교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함께 만드심: 창세기 1장 26절을 볼까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이 짧은 한 구절에 보면 “우리”라는 단어가 세번이나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드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누구일까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단일신과 천사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억지 주장입니다.  천사들은 창조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요.  몇몇의 신학자들은 “장엄 복수 [1]”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장엄 복수”가 될 수 없는 이유는 4세기에 처음으로 등장한 문법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2].  4세기에 처음 등장한 문법 형태를 그 때로부터 약 2,000년 전에 쓰인 창세기에 도입할 수 없는 것이지요 [3].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일까요?  삼위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의 강력한 지지를 받습니다.  요 1:3을 볼까요?

그[예수님]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것이 없느니라

이 구절은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만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πάντα)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말합니다.  그리고 “말미암아”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전치사 διʼ가 소유격 αὐτοῦ와 함께 쓰이기 때문에 ‘~에 의해서,’ ‘~를 통해서’라는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지어졌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뒤의 문장은 예수님 없이는 지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증거함으로 인간 창조도 이에 포함되어 있음을 명시합니다.  때문에 “우리”라는 단어는 삼위의 하나님으로만 봐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창 1:26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가 이 구절에서 눈여겨 봐야할 부분은 “만들고”라고 번역된 히브리어(נַֽעֲשֶׂ֥ה)가 제안형(提案型)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제안형은 건의, 제의를 나타내는 문법 형태입니다.  이러한 문법 형태는 창 1:26에 주어로 등당하시는 하나님께서 다른 위()의 하나님께 인간 창조를 건의, 제의 하셨다는 뜻임을 천명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동의에 따라 인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가 원하기에 무턱대고 만든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부께서는 인간을 만들자는 제안과 건의를 예수님과 성령께 제시했고, 두 위()의 동의 아래 인간이 지어진 것입니다.  만약 성부 하나님께서 단독적으로 결정하시고 성자와 성령에게 지령을 내리시는 위치에 있었다면 “만들고”의 문법 형태는 일반 명령형으로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함께 선택하심: 또 하나의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1:4a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이 구절을 보면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데서나 우리를 선택한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에는 “~ 안”이라는 개념의 전치사가 두 개 있습니다: 에이스(εἰς)와 엔(ἐν)입니다.  에이스(εἰς)에는 ‘~ 안’으로 향한다는 방향성에 촛점이 있고, 엔(ἐν)은 ‘~ 안’에 들어가 있다는 장소성에 촛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A 에이스(εἰς) B’는 ‘A가 B의 안으로 향한다’는 뜻이고, ‘A 엔(ἐν) B’는 ‘A 가 B 안에 들어가 있다’는 뜻이 되지요.  엡 1:4a에 쓰인 “~ 안”은 장소성을 의미하는 엔 (ἐν)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은 오직 그리스도라는 장소 안에 들어있던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성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자들을 선택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단독적으로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무작위로 선택하신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견과 상관없이 선택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사 마음에 담으신 사람들을 성부께서도 선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선택하자고 성부께 건의, 제안했고, 성부께서는 그 의견에 동의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성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원하신 숫자를 초과하거나 미달시켜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정확히 예수님께서 선택하사 당신의 안에 넣으신 자들을 다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함께 결정하시기 때문이지요.

 

함께 구원하심: 성경이 계시하는 인간 구원을 총체적으로 살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구원의 문을 여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정된 자들을 인치사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성부께서는 대속적 죽음을 받아들이고 인침을 받은 자들을 양자로 삼으십니다.  왜 이처럼 각각 다른 사역을 하실까요?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함께 의논하사 계획하시며, 작정하신 계획을 관철하기 위해 사역을 분할 하시고, 그 후에는 서로의 사역을 통하여 하신 계획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맺으며:  능력이 있으신 성자 하나님,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요구하신데에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당신께서 힘이 없으시기 때문도 아니요, 능이 없으시기 때문도 아닙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힘과 능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성부 하나님께 요구하신 이유는,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모든 것을 함께 결정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 몰래 어떠한 일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단독적으로 결정하고 그 일을 관철해 가시지도 않습니다.  항상 성부 하나님과 모든 일을 의논하시고, 그 일을 위하여 함께 일하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보다 아래에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자 예수님뿐만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도 성자 예수님 몰래 어떤 일을 하시거나 행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도 스스로 단독적으로 무엇을 결정하고 그 일을 관철해 가시지도 않으십니다.  항상 성자 예수님과 모든 일을 의논하시고, 그 일을 위하여 함께 일하시는 것입니다.

고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요구하셨다는 이유로 그 분의 신성을 강등, 부인할 수 없습니다.

 

[1] “장엄 복수”란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너무나 크고 위대하신지라 감히 단수로 부를 수 없고 복수로 불러야 한다는 해석입니다.

[2] 타빗사이넨과 주커는 브라운과 길만의 글(Irma Taavitsainen & Andreas H. Jucker (Editors), Diachronic Perspectives on Address Term Systems, 5.)을 인용하여 장엄 복수의 개념은 창세기가 쓰여진지 2,000년 후인 4 AD경에 처음으로 도입되었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3] 역사 신학자들은 이러한 시도를 “휘그적 해석 방법”이라고 부르며 비판합니다.  과거는 과거로 해석해야 합니다.  현재로 과거를 해석하면 안됩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은 과거에 있었던 개념과 현상으로만 해석을 해야지 그 때 없던 현재의 개념과 현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히브리어 학자 윌리암 파울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지한 후 그의 저서(William Pauli, The Great Mystery: Or, How Can Three Be One, 7~8.)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히브리어와 갈대아 언어의 기초를 아는 사람들은 성경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종종 당신을 복수형으로 말하시면서 술부의 수는 단수로 쓰시는 것을 알것이다.  이는 큰 어려움을 주는 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최근의 문법 학자들은 히브리어의 쓰임새를 면밀히 연구하지않고 오히려 철학적으로 접근하여 “장엄 복수”와 같은 표현을 만들어 냈다.  이 표현의 등장은 많은 신학적 어려움을 단번에 사라지게 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장엄 복수”라는 개념은 모세나 선지자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개념이었다는 것이다…  고로 하나님의 존함이 복수형이라는 의미를 장엄 복수로 풀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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