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s
Skip to content
10/05/2013 / Sanghwan A. Lee

예수님의 신성(神聖)에 관하여 (7) – 하나님께 빌었던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진리의 펜 (글)문제 제기: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을 잘 보면 예수님의 신성에 의문을 던지게 하는 문장들이 보입니다.  9절의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이라는 문장과 15절의 “내가 비옵는 것은…” 이라는 문장, 그리고 20절의 “내가 비옵는 것은…”이라는 문장에 들어있는 “빌다”는 단어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빌다”는 의미는 ‘손 아랫 사람이 손 윗 사람에게 구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단어가 성부 하나님께 구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에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 분의 신성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하는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구절을 놓칠리 없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이슬람 교도들, 여호와의 증인과 몰몬교도들은 “예수는 하나님보다는 낮은 영적 존재다,” “예수는 인간일 뿐이다”는 주장을 이 구절들을 기반삼아 논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증을 접한 기독교인들은

‘그러게 말이야…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면 왜 성부께 비셨지?  그분께서 하나님이시라면 성부 하나님께 비실 수 없잖아?  에이…  그냥 믿자.’

는 식으로 넘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뒤로 물러나기 전에 먼저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여러 번 사용된 “빌다”는 단어의 의미를 조명해 보는 것입니다.  만약 이 단어가 우리가 사용하는 “빌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스트레이트 펀치를 한 대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스트레이트 펀치를 한 대 날리는 것이지요.  지금부터 저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빌다”는 단어를 언어학적으로 조명하며 문제를 풀도록 하겠습니다.

 

“빌다”는 뜻: “빌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아이테오(αἰτέω)와 에로타오(ἐρωτάω)입니다.  우리 말 성경은 이 두 단어를 “빌다”로 번역했지만, 두 단어 사이에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여집합이 존재합니다.  아이테오는 우리가 생각하는 “빌다”의 개념으로 ‘손 아랫 사람이 손 윗사람에게 구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구하다,’ ‘종이 주인에게 구하다,’ ‘없는 자가 있는 자에게 구하다,’ ‘힘이 없는 자가 힘이 있는 자에게 빌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반면에 에로타오는 이러한 뉘앙스로 쓰이지 않습니다.  그대신 ‘동등한 자격을 지닌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요구하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이 단어는 ‘한 왕이 다른 왕에게 요구하다,’ ‘이 집 주인이 저 집 주인에게 요구하다,’ ‘한 랍비가 다른 랍비에게 요구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에로타오에는 “빌다”의 개념이 전혀 없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단어의 개념을 유념한 후 요한복음 17장으로 가봅시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단어:  요 17:9, 15, 20에는 예수님께서 성부께 비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빌다”로 번역된 헬라어가 아이타오일까요 에로타오일까요?  전부 다 에로타오입니다.  손 아랫 사람이 손 윗사람에게 구걸하는 아이테오가 아니라,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서 요구하는 에로타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서 요구하신 것입니다.  왜죠?  성부께서 하나님이신 것 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총제적 증언:  놀랍게도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에로타오와 아이타오의 차이를 구별하여 사용했습니다.  몇 개의 중요한 구절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요 16:26의 일부분입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요구하겠다…”

이 구절 속에는 “구하다”는 단어가 두 번 등장합니다.  한 번은 인간이 하나님께 구하는 모습을 나타낼 때 쓰였고, 또 한 번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하시는 모습을 나타낼 때 쓰였습니다.  같은 단어가 두 개의 다른 상황에 쓰인 것이지요.  그러나 헬라어 성경을 보면 두 단어가 다른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볼까요?

“ἐν ἐκείνῃ τῇ ἡμέρᾳ ἐν τῷ ὀνόματί μου αἰτήσεσθε, καὶ οὐ λέγω ὑμῖν ὅτι ἐγὼ ἐρωτήσω τὸν πατέρα περὶ ὑμῶν·”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빌 것이요(아이테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게 요구하겠다(에로타오)…”

인간이 하나님께 구하는 모습은 아이테오로 쓰였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모습은 에로타오로 쓰였습니다.  피조물인 인간들은 창조자와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 있지 않은지라 아이테오로 빈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창조자와 동등하고 대등하신 하나님이신지라 에로타오로 요구하신 것입니다.

요 14:16도 마찬가지입니다.

“κἀγὼ ἐρωτήσω τὸν πατέρα καὶ ἄλλον παράκλητον δώσει ὑμῖν, ἵνα μεθʼ ὑμῶν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ᾖ”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에로타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이 구절에 있는 “구하다”도 에로타오에서 번역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 계신지라 당당히 요구하신 것입니다.

특히 9절의 문장구조를 보면 이러한 사실이 더욱더 확연히 들어납니다.  9절은 헬라어의 에고(ἐγὼ)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이는 1인칭 주격 대명사로써 “내가”라는 뜻입니다.  헬라어에는 주격 대명사를 쓸 일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사에 인칭 대명사가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이지요.  쉽게 말하자면 동사로만 동사의 주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격 대명사가 쓰이는 경우는 주어를 강조할 때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한 후 9절을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일인칭 동사인 에로타오앞에 일인칭 주격 대명사 에고를 붙이셨습니다.  왜죠?  그럼으로써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내가 당신과 동일한 위치에서 요구합니다’라는 사실을 계시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명약관화 (明若觀火): 이처럼 성경은 아이테오와 에로타오를 명확하게 구별하여 예수님과 인간의 차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요한복음 17장에 “빌다”로 잘못 번역된 구절을 갖고 예수님의 신성을 강등하거나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대등하고 동등한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에로타오적으로 요구할 수 없고, 오직 아이테오적으로만 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께 구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에로타오로 묘사하지않고, 아이테오로만 묘사한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 계신 하나님이신지라 그 분께서 성부 하나님께 구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아이테오로 묘사하지 않고, 에로타오로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발견했던 웨렌 위어스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9, 15, 20절에서 ‘기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쓰신 단어 ‘비옵나니’는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쓰인 ‘기도하다’라는 단어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께서 쓰신 단어는 ‘동등한 상태로부터의 요구’라는 뜻이다. 여러분과 나는 하나님께 이 단어를 쓸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단어를 수 없이 사용하셨다.  왜인지 아는가?  그분은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결론: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께

손 아랫 사람이 손 윗사람에게 구하는 것 처럼 빌지 않으셨습니다.
힘 없는 자가 힘 있는 자에게 구하는 것 처럼 빌지도 않으셨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구하는 것 처럼 빌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같은 하나님으로써 대등하고 동등하게 요구하셨습니다.  그분은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Advertisements

댓글 2개

댓글 남기기
  1. 익명 / 8월 30 2015 5:59 오전

    고린도전서 8장 6절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이 성구를 어떻게 해석하나요?

    좋아요

    • Sanghwan A. Lee / 8월 30 2015 8:36 오후

      안녕하세요.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고전 8:6)

      이 구절을 병렬적 구도로 배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한 하나님 아버지(εἱς Θεὸς ὁ πατήρ)로부터 만물이 났고, 우리도 그 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2) 한 주 예수 그리스도(εἱς Κύριος Ἰησοῦς Χριστὸς)께로부터 만물이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한 하나님”과 “한 주”가 각각 다른 인격체를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한 하나님”은 성부를, “한 주”는 성자를 의미하지요.

      만약 “한 하나님”을 아버지께로만 귀속시켜야 하는 성호로 본다면 “한 주”는 예수 그리스도께만 귀속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하나님”이 아니고, 아버지께서도 “주”가 아니라는 의미가 되지요. “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은 오직 성부이시니까요.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논리입니다. 마태복음 11:25를 봐도 아버지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κύριε τοῦ οὐρανοῦ καὶ τῆς γῆς)”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수식하기도 하고 아버지를 수식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아버지를 수식함과 동시에 예수님을 수식하기도 하지요. 성경의 근거가 있냐고요? 아래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θεὸς)이시니라 아멘” (롬 9:5)

      “우리의 크신 하나님(θεὸς)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딛 2:13)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는 신성(θεότητος)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 2:9)

      우리는 여기에서 마지막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어떻게 “한”이라는 관형사가 아버지도 꾸미고 아들도 꾸밀 수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서 삼위일체의 신비가 계시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한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십니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들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끝으로 보스톤 대학과 킹스 대학교의 철학 교수인 Peter Kreeft의 말로 글을 맺습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계시없이 삼위일체의 진리를 절대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의 이성은 그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게다가 인간의 이성은 그 진리를 증명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반증할 수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 교리는 논리적으로 모순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체(體)로는 하나(一)요 위(位)로는 셋(三)이라고 가르치지 체(體)로는 하나(一)임과 동시에 셋(三)이요, 위(位)로도 하나(一)임과 동시에 셋(三)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모순일 것이다.”

      좋아요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w

%s에 연결하는 중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