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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2013 / Sanghwan A. Lee

예수님의 신성(神聖)에 관하여 (6) – 무지(無知)한 예수인가, 부정직(不正直)한 예수인가?

 

문제 제기: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강등시키려는 아리우스주의자들과 여호와의 증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에 하나는 마 24:36입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얼핏 보면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속성(屬性)중 하나인 전지성(全知性)이 부재(不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은 구절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하여 여러 방향으로 접근을 시도했고, 그에 못지않게 많은 제안들을 내놓았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 제안들을 소개함과 동시에 검토해 보겠습니다.

 

(1)   아타나시우스적 접근: 아타나시우스적 접근은 “제자들이 그 날과 그 때에만 온 신경을 쓸 것을 우려하셨던 예수님께서 질문의 답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모른다고 말씀하셨다”는 주장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예수님께서 선의의 거짓말을 하셨다는 것이지요. 크리소스톰, 힐러리, 어거스틴 등이 이와 비슷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예수님의 신성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억지 해석입니다. 게다가 건전하지 못한 해석이기도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선의의 거짓말을 하셨다면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인 정직성(正直性)에 위배되어 하나님으로 인정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설령 예수님의 신성을 강등시키지 않는 건전한 제안을 내놓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신성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구절을 해석했다는 것은 비판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특별한 목적을 갖고 해석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반드시 해석 되어지는 대로만 믿어야 합니다. 색안경을 끼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정직하고 바른 성경 해석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고찰도 이 원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정직하게 성경을 해석하여 예수님 신성의 가부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타나시우스적 접근은 옳지 못합니다.

(2)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적 접근: 그레고리적 접근은 “예수님의 신성은 이를 알고 있었지만, 인성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인성 쪽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하셨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취약한 논증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마치 한 대의 컴퓨터 안에 두 대의 하드 드라이브가 있어, 프로세서가 신성을 담고 있는 하드 드라이브에는 접근하지 않고 인성을 담고 있는 하드 드라이브에만 접근했다는 말과 일반입니다. 물론 과학적으로 가능은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러한 식으로 당신의 신성과 인성에 접근하셨다는 말씀이 성경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레고리적 접근도 석연치 않습니다.

(3) 암브로스적 접근: 암브로스적 접근은 원문 비평으로 접근하여 “‘아들도 모르고’라는 문장은 마태복음에 없었지만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던 아리우스주의자들이 끼어 넣은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많은 신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א a, K, L, W와 같은 대다수의 마태복음 헬라어 사본에는 “아들도 모르고”라는 구절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성경을 편찬하는 연합 성경 협회에서도 이 구절을 “[원문에 있었는지]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등급 C를 매김으로써 암브로스적 주장에 힘을 더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도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권위 있는 마태복음 사본들인 알렉산드리안 사본과 웨스턴 사본에서는 “아들도 모르고”라는 문장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브루스 메츠거와 같은 원문 비평학자들은 “아들도 모르고”라는 구절이 א a, K, L, W와 같은 대다수의 마태복음 헬라어 사본에서 발견되지 않는 이유를 “마태복음을 필사하던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보존하려고 삭제했기 때문”이라고 제안했습니다. 더 오래된 사본에 이 구절에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헬라어 문장 구조상 이 문장이 있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지요. [1] 설령 메츠거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암브로스적 접근이 설득력을 잃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마 24:36과 평행 구절인 막 13:32에도 오직 성부만이 그 날과 그 때를 알고 있다고 계시하기 때문입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막 13:32)”. 그러므로 암브로스적 접근도 건전성을 잃습니다.

 

막다른 골목: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마 24:36를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모르셨다고 말씀하셨다면 거짓말을 했기에 하나님의 정직성에 위배되고, 모르셨다면 무지했기에 하나님의 전지성에 위배됩니다. 이래도, 저래도 예수님의 신성이 인정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게 된 것일까요? 정말 예수님께 신성이 없었던 것일까요?

 

논리적 접근: 아니요. 아직 아무것도 확정할 수 없습니다. 마 24:36만을 가지고 예수님의 신성이 부재한다고 단정 짓는 것은 제한된 정보와 불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답을 내려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날과 그 때를 모르셨다 하더라도 신성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전능하심으로 전지하심을 잠시 동안 가리셨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예수님의 신성에 타격을 가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분의 전지성을 부각시켜 그 분의 신성에 한 표를 더하게 됩니다. 그럼으로 마 24:36만 가지고 예수님의 신성을 왈가왈부 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계시(啓示) 논리적 접근: 잠깐만요! 제가 너무 억지를 부리는 것 같다고요? 아타나시우스와 그레고리, 그리고 암브로스는 논리적으로 비평하면서 제 자신은 비논리적으로 비평한다고요? 잠시 제 말을 들어주세요. 만약 제가 제시한 주장이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저는 정말 억지를 부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남들이 제시한 주장에는 오캄의 면도날을 마구잡이로 들이대면서 제 자신에게는 관용의 덕을 보이는 비일관적인 사람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제시한 주장이 성경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계시적 논리로 가장 건전한 주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부터 제가 드린 주장의 타당성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케노시스 설: 마 24:36을 바르게 풀기 위해서 제안된 해석 하나가 있습니다. 케노시스 설입니다. “케노시스”란 “비워진 상태”라는 뜻의 헬라어(κένωσις)입니다. 이 단어는 LXX의 창 20:24에서 리브가가 물동이에 담긴 물을 구유에 붓는 모습을 나타낼 때 동사형으로 쓰였습니다. ‘소유하고 있던 무엇인가를 비움으로써 비워진 상태’가 케노시스의 의미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 단어의 동사형이 예수님께서 당신을 비우시는 모습을 나타내는 빌 2:6~8에도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ἐκένωσεν)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갖고 계신 무엇을 비우셨다는 것이지요. 그 무엇이 뭐지요? “자기”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비우셨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당신의 존재를 비우셨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비울 수 없습니다. 존재 자체를 비우는 순간 무(無)가 되어버리니까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비우신 “자기”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자기”라고 번역된 헬라어(ἑαυτὸν)는 인격체의 속성을 지시하는 대명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우신 것은 당신께서 소유하고 계신 속성이라는 것이지요.

 

반론 비판: 잠시 이에 대한 반론을 비판하겠습니다. 로빈슨과 예레미아스같은 신학자들은 사 53:12를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비우신 것이 당신의 목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억지주장입니다. 왜냐하면 빌 1:6는 예수님께서 비우신 것이 ‘소유하고 계셨던 속성’이라고 밝히 명시하기 때문입니다. 문장 구조를 보시면 아시다시피 “자기”라는 단어는 대격으로 쓰여 예수님께서 비우신 것이 목숨이 아니라 소유하고 계셨던 속성임이라고 증거 합니다. 이러한 본문의 계시를 무시하고 예수님께서 비우신 것이 목숨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억지라는 것이지요.

로빈슨과 예레미아스의 주장이 잘못 되었다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낮아지시는 단계가 점진적으로 나와 있는 빌 2:6~8의 문맥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지요. 빌 2:6~8을 사건의 순서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a)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심 → (b) 당신을 비우심 → (c) 종의 형체를 가지심 → (d) 사람들과 같이 되심 → (e)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심 → (f) 자기를 낮추심 → (g) 죽기까지 복종하심 → (h) 십자가에서 돌아가심

보시다시피 예수님께서 당신을 비우시는 사건은 (b)번에 있지만, 돌아가심은 (h)번에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돌아가심이 (h)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b)번을 예수님의 돌아가심으로 주장한다면 예수님께서 (b)번에서 한 번 돌아가시고, (h)번에서 또 한 번 돌아가셨다는 뜻이 됩니다. 잘못된 해석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b)번에서 비우신 것은 목숨이 아니라 ‘소유하고 계셨던 속성’으로 봐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우신 속성: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비우신 ‘속성’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낮아지시는 첫 번째 단계인 (a)번과 (b)번을 분석해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a)번에 있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심”과 (b)번에 있는 “자신을 비우심” 사이에 들어있는 한 단어를 찾아보세요. “오히려”입니다. 헬라어의 알라(ἀλλὰ)에서 번역된 이 단어는 ‘그 대신’ 이라는 뜻의 연결 접속사로써 앞 문장과 뒤 문장을 연결합니다. 이는 (a)번과 (b)번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b)번에 있는 예수님께서 비우신 속성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a)번과 연결해서 봐야만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a)번과 (b)번의 관계를 봅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그 대신” 당신의 속성을 비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속성을 비우지 아니하시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고 계신 상태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그들의 속성을 비우지 않아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동등됨을 취하고 싶어도 취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속성은 취하고 싶다고 취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 분께서는 당신의 속성을 비우셔야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결정적인 뜻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비우신 속성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으로 충만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속해있는 신성을 비우심으로써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능성: 잠시 곁길로 빠졌다가 놀라운 사실 하나를 나누고 돌아옵시다. (b)번의 단계에 있는 “비우다”는 동사의 태를 보면 능동태(ἐκένωσεν)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아주 독특한 용법입니다. 신약 성경에 5번 쓰이는 이 단어는 예수님을 주어로 받는 빌 2:7에서만 능동적으로 쓰이지, 다른 4번은 다 수동적 의미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가 첫 번째 등장하는 롬 4:14에도 수동태 “파기되어지다”로 쓰였고, 고전 1:17에도 “헛되지 않게 되어지다”는 수동태로 쓰였습니다. 고전 9:15에는 “헛된 데로 돌려지다”는 능동태로 쓰였지만 동사의 주체가 타인이기 때문에 수동적 의미로 쓰인 것이며, 고후 9:3에 있는 “헛되게 되어지지 않다”는 표현도 수동태로 쓰였습니다. 이처럼 “비우다”는 단어는 수동적 의미로 쓰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빌 2:7은 다릅니다. 독특하게도 예수님을 주어로 하는 빌 2:7에는 이 단어가 능동적 의미로 쓰였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예수님께서 스스로 당신의 신성을 비우셨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그분으로부터 신성을 착취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당신의 신성을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전능성을 부각시키는 중요한 문법 구조입니다. 신성을 스스로 내려놓을 수 있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뿐이니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능성으로 신성을 직접 내려놓으셨던 것입니다.

 

비우신 선택적 속성: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비우신 신적 속성은 무엇일까요? 소유하고 계신 모든 신적 속성을 비우신 것인가요? 그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되사 공생애를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속성 중 몇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물위를 걸으시는 모습, 죽은 자를 살리시는 모습, 죄를 사하시는 모습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이러한 정황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속성을 다 비우신 것이 아니라 일부만을 비우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바로 그 속성이, 혹은 그 속성들 중에 하나가 전지성 (全知性)인 것입니다.

 

마 24:36 해석: 그렇습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는 구절 속의 예수님께서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분께서 아시면서도 불구하고 선의의 거짓말을 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무지하셔서 모른다고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 대신 당신의 전능하심으로 전지하심을 내려놓으셨기 때문에 그 날과 그 때를 일부러 모른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찾으신 전지성: 그렇다면 지금도 모르고 계실까요? 아니요. 지금은 다 알고 계십니다. 부활 하시고, 승천하사, 왕위에 옹립하신 후에는 모든 신성을 다시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떻게 아냐고요? 골 2:9를 보세요. 부활체를 입으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 신성이 어떤 상태로 머물러 있는지가 증거 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예수님의 신성이 그분의 육신 안에 모든 충만으로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성”이라고 번역된 헬라어(θεότητος)는 ‘하나님으로써 마땅히 가지셔야만 하는 신적 속성’이라는 뜻이고, “충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πλήρωμα)는 ‘빈틈없이 꽉 차다’는 뜻입니다. 부활체를 입으신 예수님께 하나님으로써 마땅히 가지셔야만 하는 신적 속성이 빈틈없이 꽉 차 있다는 것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능성으로 잠시 내려놓으신 전지성을 전능성으로 다시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전지성을 비우신 이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전지성을 잠시 비우시고 사역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성경이 증거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여러 가지 가능한 추측들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하지 않으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두고, 저는 결론으로 펜을 돌립니다.

 

결론: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는 구절만 가지고 예수님의 신성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이 구절과 연결되고 연동되는 다른 구절들까지 세밀히 연구한 후에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 논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고
성경을 펴보세요.

그리고
정직하게 읽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오직 하나님 홀로 알고 있다”는 문장에 쓰인 μόνος는 οὐδὲ와 οὐδὲ의 동격 구조를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οὐδὲ οἱ ἄγγελοι τῶν οὐρανῶν οὐδὲ ὁ υἱός)”라는 문장이 “하늘의 천사들은 모르고 (οὐδὲ οἱ ἄγγελοι τῶν οὐρανῶν)”라는 단독 문장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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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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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희원 / 2월 18 2017 8:47 오후

    안녕하세요 목사님.
    목사님 글들을 읽으며 매번 감탄하고 있는 한 사람입니다.
    다름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6)’을 읽으면서 궁금하게 있어서요.
    예수님의 신성(하나님의 속성) 중에 ‘전지’에 대한 설명을 더 듣고 싶습니다.
    만약, ‘그 날, 그 때’가 전지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그 날을 몰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요.

    사이다 같은 답변을 기다리며….
    그럼 오늘도 복된 하루 되세요~

    Liked by 1명

    • Sanghwan A. Lee / 2월 21 2017 12:33 오후

      물론 말씀하신듯이 “그 날, 그 때”가 전지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면 상황이 달라지겠지요? 사이다같은 답변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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