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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2013 / Sanghwan A. Lee

헬라어 문법과 계시적 논리로 접근한 예정과 구원, 그리고 전도의 상관관계

1. 에베소서 1:4a 문법적으로 접근하기

엡 1:4a를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짧은 구절 속에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문법적으로 접근해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창세 전: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한 때가 “창세 전”이라고 나와있습니다.  창세 전이라는 문장을 헬라어로 보면 ‘우주의 기초가 놓이기 전(πρὸ καταβολῆς κόσμου)’이라는 뜻입니다.  우주의 기초란 천국이고, 우주의 기초가 놓이기 전이라면 천국이 지어지기 전이라는 말이겠지요?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존재하실 적에 예정이 이루어 졌다는 말입니다.  그 때는 천국도 없었습니다 (천국도 피조된 세계라는 것을 아시지요?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는 전 영원에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천사들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인간들도 없었습니다.  오직 성 삼위 하나님만이 계셨습니다.  그때 이미 예정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2) 우리를 택하사:택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엨셀레사토(ἐξελέξατο)입니다.  이 단어는 세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그것들을 하나씩 살피면 도움이 됩니다.

(2-a) 동사의 시제: 동사의 시제가 일반과거형입니다.  이것은 단회적인 행동으로써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벌써 예정을 다 끝내셨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을 벌써 다 선택하셨다는 뜻이지요.  하나님께서 지금 다시 뽑지 않으십니다.  내일 마음이 바뀌어서 또 뽑지도 아니하십니다.  게다가 선택한 자를 취소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의 예정은 창세 전에 일회적 사건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2-b) 동사의 태: 동사의 태가 중간태로 쓰였습니다.  중간태는 한국어에는 없는 특이한 태입니다.  헬라어에서 중간태는 주어가 자신을 위하여 행동한 것을 의미하는 재귀용법으로 쓰입니다.  예컨데 “A가 B를 (중간태로) 선택했다”라는 문장이 있다면,  A가 자신을 위하여 B를 선택했다는 뜻이 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 행동이 중간태, 즉 재귀용법으로 쓰였습니다.  이는 우리를 선택한 이유가 당신을 위한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정된 사람들은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 분을 영원토록 왕으로, 주인으로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인본주의 자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오겠지요?

(2-c) 동사의 의미: 마지막으로 이 단어는 ‘적은 수를 많은 무리에서 뽑다’는 뉘앙스를 갖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직 적은 수 만이 예정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의미적 접근은 성경을 통하여 지지를 받습니다.  계시록 20장에 등장하는 백보좌 심판때에 놓인 두 종류의 책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는 생명의 책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심판의 책입니다.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헬라어의 수가 이 책들을 어떻게 받고 있는지 아세요?  생명의 책은 단수(βιβλίον)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책은 복수(βιβλία)로 되어 있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자가 더 적다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7장에 있는 길 비유도 마찬가지지요?  지옥으로 인도하는 큰 길에는 찾는 자가 많지만(πολλοί), 천국으로 인도하는 작은 길에는 찾는 자는 적다고(ὀλίγοι).  하나님께서 적은 수의 사람들을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2. 에베소서 1:4a와 로마서 10:13은 모순인가?

당연히 떠오르는 논리적 질문이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롬 10:13에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것은 예정론을 상쇄하는 가르침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엡 1:4a과 롬 10:13만 있다면 논리적 오류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 두 절만 있는게 아닙니다.  이 외에도 예정과 구원에 관한 수 많은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다 살펴본다면 이 두 구절이 절대로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좋겠네요.  엡 1:4a는 생선의 머리부분입니다.  그리고 롬 10:13은 생선의 꼬리부분입니다.  그리고 몸통부분은 성경의 여러군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 다 기록할 수 없으니 몇 개의 구절만 살펴 볼까요?

 

3. 엡 1:4a와 롬 10:13 사이에 몸통 붙이기

(1) 롬 10:14~15: 우선 롬 10:13부터 봅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문맥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대신 15절까지 흐르고 있습니다.  보세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구원이 이루어지는 순서가 역으로 되어있지요?  처음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들고 있는 자를 보내셔야(ἀποσταλῶσιν:신적 수동태) 합니다.  그 다음에는 보내심을 받은 자가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전파를 불신자가 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불신자가 전파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불신자가 믿게된 예수님의 이름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13절에 있는 “누구든지”는 문자적인 “아무나”가 아니라, 14~15절에 있는 모든 순서를 밟게된 자들을 나타낸다는 것이죠.

(2) 행 13:48: 이제는 위에 있는 순서에 살을 좀 더 붙여 봅시다.  위의 순서를 보면 보내신 자의 복음 전파를 듣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헌데 우리가 알다시피 전파한 자의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믿는것은 아닙니다.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않는 자는 더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정말 자유의지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행 13:48은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줍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 구절을 보면 전파한 자의 복음을 들은 자들이 다 믿지 않습니다.  그대신 몇 사람만 믿습니다.  그 몇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입니다.  여기에 “작정된 자(τεταγμένοι)”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시제는 완료형입니다.  사건 후에 있는 시간의 흐름을 강조하지요?  창세전에 일반 과거형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단회적 예정(ἐξελέξατο) 이후로 시간이 지나게 되었고, 그 예정이 이 세상에 태어나 완료형으로 살고 있던 예정된 자들에게 임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오직 예정된 자들만이 들은 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천명합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예정된 자들이 영생으로 향한다는 뜻을 의미하는 방향 전치사(εἰς)가 붙어 있습니다.  복음이 들려지면 예정된 자는 들은 그것을 언젠가는 받아들이게 되어 예정의 완성을 향해 들어간다는 뜻이지요.  고로 물고기의 머리와 몸통과 꼬리를 연결하자면 이렇습니다.

머리: 하나님께서 예정하심

몸통: 전도자를 보내사 복음을 선포케 하시고, 예정된 사람으로 하여금 듣게 하사 예수님을 믿고 시인하게 하심

꼬리: 누구든지 위의 단계를 거쳐 예수님을 부르는 자들은 예정된 자들이기에 구원을 얻음

때문에 엡 1:4a와 롬 10:13사이에는 모순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우리가 전도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당연히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고전 1:21)”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우리 인간들은 누가 예정을 받았고, 받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무작정 복음을 들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들려 땅 끝까지 보내신 이유도 이것입니다.  우리의 복음 전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예정이 이루어 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감격적이지 않나요?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 가짐으로 날마다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로 예정론을 부분적으로만 알아 “전도가 필요 없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것은 옳지 않겠지요?

 

5. 요약하기

(1)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를 예정하셨습니다.

(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3) 이 둘 사이에 모순이 없는 이유는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께서 우리의 복음 전도를 통하여 그 예정을 이루십니다.

(5)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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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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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yrene (@cyrene06941152) / 4월 28 2014 9:04 오후

    목사님 감사합니다..한줄 한줄 숨죽여 읽고 또 읽었어요. 예전에 아더핑크목사님의 하나님의 주권을 처음 읽었을 때 처럼.. 교회 지체들과 함께 목사님 블로그 방문하여 은혜 나누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귀한 사역에 무익한 여종은 기도만 보텔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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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4월 28 2014 10:49 오후

      안녕하세요.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늘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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