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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2013 / Sanghwan A. Lee

예수님의 신성(神聖)에 관하여 (1) –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구절이 없다?

진리의 펜 (글)문제 제기: 교회사가 시작된 이후로 가장 뜨거운 논쟁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가?❞라는 질문은 식지 않고 오늘까지 식탁위에 올려져 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 6시에 주유소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만났습니다. 그 분과 나눈 대화도 역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그는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고, 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한가지 우스운 사실은요, 우리 둘 다 같은 성경을 펴고 서로의 주장을 펼쳤다는 것입니다. 재미있지요? 어떻게 같은 성경을 보는 두 사람이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이처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을까요?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다르게 말하고 있기 때문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는 사람들의 해석 때문입니다. 벧후 1:20과 3:16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영생이 좌우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영생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해석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영생이 좌우된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여호와의 증인처럼 그 반대로 생각하시나요?

 

반론 검증: 여호와의 증인들이 인용하는 구절과 그 해석은 여러분도 다 아시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 그대신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확실하게 증거하는 성경의 구절 몇 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이번 글에서는 로마서 9:5만 다루도록 합니다. 로마서 9:5로 가 봅시다.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로마서 9:5)❞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지요?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구절을 헬라어로 보면 그렇게 해석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이라는 헬라어(σάρκα) 뒤에 콤마가 찍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한 번 헬라어 성경을 볼까요?

ἐξ ὧν ὁ Χριστὸς τὸ κατὰ σάρκα, ὁ ὢν ἐπὶ πάντων θεὸς εὐλογητὸς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ἀμήν.

여호와의 증인들의 말처럼 육신(σάρκα)이라는 단어 뒤에 콤마가 있습니다. 이것을 고려하여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께 세세에 찬양이 있으리로다, 아멘❞

한국어 번역과 많이 다르지요? 한국어 번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위에 계신 하나님이시기에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는 송영으로 되어 있지만, 헬라어 본은 예수님이 아니라 ❝성부께서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시기에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는 송영이 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주장처럼 이 구절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해석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여기까지만 보면 여호와의 증인들의 주장이 맞습니다.

 

반론 비평: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헬라어를 어설프게 알기에 만들어지는 주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쓰인 고대 헬라어에는 콤마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고대 헬라어 사본을 보면 콤마도 없고 띄어쓰기도 되어있지 않습니다. 사진을 보세요.

이미지

그래서 읽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지요. 그래서 나중에야 비로소 콤마와 띄어쓰기, 그리고 장과 절이 삽입 되었는데, 문제는 신학적으로 충분한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을 신중하지 않게 삽입했다는 것입니다.  고로 후대에 찍힌 그 콤마를 가지고 로마서 9:5를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해석하는 것은 마치 “누나가방에들어간다”는 문장을 “누나 가방에 들어간다”로 해석하는것과 매 일반이라는 것이지요.

 

진실을 찾아: 그렇다면 고대 헬라어로 로마서 9:5를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확실한 구절이 됩니다. 그 이유를 몇 개 열거해 보겠습니다.

  1. 로마서 9:5에 ❝찬양❞이라고 번역된 헬라어(εὐλογητὸς)는 송영을 나타냅니다. 헌데 바울의 글에 나타나는 모든 송영은 앞에 있는 문장을 꾸미거나 그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 내용과 독립적으로 나타나는 송영은 전혀 없다는 말이지요. 고로 ❝찬양 받으실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송영은 앞에 나오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꾸며주는 것으로만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써 찬양을 받으셔야 할 주체라는 것이지요.
  2. 신약 성경에서 송영을 나타내는 ❝찬양❞이라는 헬라어(εὐλογητὸς)가 독립적 용법으로 쓰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장의 첫 머리에 와야 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9:5에는 문장의 첫 머리에 쓰이지 않고 중간에 쓰이고 있습니다. 이는 ❝찬양 받으실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송영이 문맥과 상관없는 성부 하나님께 돌려지는 것이 아니라, 문맥속에 주인공으로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께 돌려짐을 말합니다. 역시 예수님께서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써 찬양을 받으셔야 할 주체라는 것이지요.
  3. 이 송영이 성부 하나님에 대한 것이 되려면 ὁ ὢν ἐπὶ πάντων θεὸς εὐλογητὸς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에서 ὢν이 빠져야 합니다. ὢν이 있다는 것은 송영의 주인공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심을 밝힙니다.
  4. 이 송영이 성부 하나님에 대한 것이 되려면 ❝하나님❞ 이라고 번역된 헬라어(θεὸς)앞에 정관사가 붙어야 합니다. 정관사가 없다는 것도 송영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심을 밝히지요.
  5. 구문론상 존재를 나타내는 분사 ❝계셔서❞로 번역된 헬라어(ὢν) 는 신성만 있으신 성부 하나님께 사용되는 단어로 맞지 않습니다. 인성과 신성을 함께 입고 계신 예수님께 사용되는 것이 문맥상 맞습니다. 그래서 송영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6. 문장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볼 때에 ❝계셔서❞로 번역된 헬라어(ὁ ὢν)는 앞에 있는 명사인 ❝그리스도❞를 받습니다. 송영의 주체가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는 것이지요.
  7. 문맥적인 흐름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로 바울이 문맥을 무시하고 갑자기 성부 하나님에 대한 송영을 기록했다는 것은 억측입니다.

 

끝으로: 예수님께서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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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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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achel Jung / 9월 28 2013 12:24 오전

    좋은 글 업로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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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자유인 / 8월 8 2014 8:45 오후

    잘 보았습니다.

    예수 곧 지저스 Jesus란 이름은 이제 겨우 400년 밖에 되지 않은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헬라어 성경이 기록한 구주 구세주 구원자는 눈의 아들 호세아 곧 여호수아입니다.
    헬라어 성경이 구주 구세주 구원자로 기록한 눈의 아들 호세아의 헬라어 이름이 이에수스이고 라틴어로 Iesus이고 영어로 지저스 Jesus라 하고 한글로 예수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미 말씀드린대로 지저스 Jesus란 이름은 2000년 전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계셨던 당시에 존재한적도 그렇게 불린적도 없었던 이름이란 것입니다.
    지저스 Jesus란 이름은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져서 불리게된 이름인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록된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의 주/아도나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주 구세주 구원자이심을 기록하여 증거하시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14장 13-14절
    13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주께서 오늘 너희에게 보여 주실 주의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이집트인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잠자코 있을지니라.” 하더라.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주께서 오늘 너희에게 보여 주실 주의 구원을 보라”

    이 말씀은 주/아도나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싸우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구원이라고 번역되어진 단어는 히브리어로 예슈아트라고 합니다.
    구약의 주/아도나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주 구세주 구원자이신 예슈아 Yeshua님 이시란 말씀인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주/아도나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주 구세주 구원자이신 예슈아 Yeshua님이심을 증거하고 있고,

    헬라어 성경은 눈의 아들 호세아 곧 여호수아를 구주 구세주 구원자인 이에수스 곧 예수로 지저스 Jesus로 예슈아 Yeshua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구약의 주/아도나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주 구세주 구원자이신 예슈아 Yeshua님이심을 밝혔음으로 예슈아님께서는 구약의 주/아도나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시라는 것을 증거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설명을 위하여 개역한글 성경을 인용합니다.

    말라기 3장 1절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이사야 40장 3절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주/아도나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라고 말라기 선지자는 예언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역시도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라고 예언하였고 기록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이하에 말씀이신 예슈아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 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주/아도나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를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입니다.

    말라기 3장 1절 말씀에 내가, 내 사자를, 내 앞에 란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언된 말씀과 이루어진 말씀에 엄청난 차이가 생겨났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0절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마가복음 1장 2절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누가복음 7장 27절
    27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에는 “내가, 내 사자를 내 앞에” 보낸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인용된 말씀에는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보낸다로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내 앞과 네 앞은 천지차이가 나는 말입니다.
    내는 말씀하신 주/아도나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슈아 Yeshua님으로 오셨다는 말씀이지만,
    네 앞이란 말은 주/아도나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신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왔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언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에도 기록된 신약말씀이 변개된 것은 신약성경의 원문이라는 헬라어 성경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은 정복자 로마의 다신론 사상과 유대인의 유일신 신앙과 혼합하여 정복자 로마가 섬기던 제우스 Zeus 사상과 섞어 놓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다신론 사상과 유대인의 유일신 신앙이 결합하여 삼위일체 곧 세 하나님이지만 하나라는 교리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구약의 유일신 신앙이 신약에 와서도 그대로 유일신 신앙이며 역사 전체로 유실신 신앙인 것입니다.

    불편한 말씀이 될 수 있음에도 댓글을 올렸습니다.
    기록된 성경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고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좋아요

    • Sanghwan A. Lee / 8월 9 2014 12:05 오전

      안녕하세요. 님께서 진중하게 댓글을 다셨으니 저 역시도 진중하게 반박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반박: “지저스”란 이름이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부분과 예수아께서 성육신을 하셨을 때에 있었던 이름이 아니라는 부분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예수아를 “지저스”로 표현했다는 이유로 구약의 여호수아를 구원자로 둔갑시키는 실수를 범했다는 부분은 동의할 수 없네요. 이러한 접근법은 언어학적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님의 논증에 깔려 있는 숨은 전제를 드러내며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숨은 전제: 같은 이름은 같은 사람만 가리킨다.
      전제 1: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이다.
      전제 2: 여호수아의 헬라어적 표현이 예수다.
      결론: 고로 신약에 나오는 예수는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이다.

      님께서 사용하신 논증은 숨은 전제로 인해 오류적 결론을 돌출해 냈습니다. 같은 이름은 같은 사람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글의 명료성을 위하여 님의 논증과 비슷한 오류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여러번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이름이 한 사람만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예수아의 어머니와 향유를 깬 베다니 여인, 그리고 한 때 창녀였던 막달라의 여인등 다른 사람들을 가리키기 위해서 쓰였지요. 님의 논증을 따른다면 세 명의 마리아가 다 동일인이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접근은 옳지 않지요. 이번에는 님의 논증과 반대되지만 비슷한 유형의 오류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사울과 바울의 차이점을 아실겝니다. 단순하게 말해서 사울은 히브리적 표현이고 바울은 헬라적 표현입니다. 같은 사람을 다른 언어적 표현으로 부르는 표현일 뿐이지요. 헌데 제가 만약 바울의 히브리적 표현이 사울이라는 이유로 신약에 등장하는 바울이 구약에 등장하는 사울 왕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그냥 웃어 넘기시겠지요? 님의 입장과 정반대로 접근했지만 같은 부분에서 오류를 범했기 때문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논증이 된 것입니다. 제가 드린 두 가지의 예를 생각하며 님의 논증으로 돌아가 볼까요? 이제는 “헬라어 성경은 눈의 아들 호세아 곧 여호수아를 구주 구세주 구원자인 이에수스 곧 예수로 지저스 Jesus로 예슈아 Yeshua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는 님의 주장이 왜 잘못 되었는지를 아시겠지요?

      두 번째 반박: 님께서는 소유하고 계신 유니테리안적 입장의 적합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출 14:13~14를 토대로 “히브리어 성경은 주/아도나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주 구세주 구원자이신 예슈아 Yeshua님이심을 증거하고 있고… 구약의 주/아도나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주 구세주 구원자이신 예슈아 Yeshua님 이시란 말씀인 것입니다”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러나 출 14:13~14는 님의 주장을 조금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만약 님께서 이 구절을 근거로 “구약의 주/아도나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히브리 민족의 구원자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육체적 구원과 영적 구원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동의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님께서는 미리 갖고계신 유니테리안적 신학으로 이 구절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셨습니다.

      세 번째 반박: 님께서 유니테리안적 입장을 변호하기 위하여 사용하신 두 번째 구절들은 말 3:1; 사 40:3, 마 11:10; 막 1:2; 눅 7:27; 요 1:1입니다. 님께서는 이 구절들을 비교하시면서 “내가 내 사자를 내 앞에 보내겠다”는 표현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겠다”는 표현에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차이가 나타난다는 근거로 신약이 증거하는 구세주는 “다른 존재”요 “삼위일체는 고안된 것”이며 더 나아가 “헬라어 성경은 변개된 성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역시 언어학적 오류로 인해 만들어진 잘못된 논증입니다. 님께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할 수 있으시니 이곳에 말 3:1의 원문을 전체적으로 옮겨본 후 제 주장을 피력해 보겠습니다.

      הִנְנִ֤י שֹׁלֵחַ֙ מַלְאָכִ֔י וּפִנָּה־דֶ֖רֶךְ לְפָנָ֑י וּפִתְאֹם֩ יָב֨וֹא אֶל־הֵיכָל֜וֹ הָאָד֣וֹן׀ אֲשֶׁר־אַתֶּ֣ם מְבַקְשִׁ֗ים וּמַלְאַ֨ךְ הַבְּרִ֜ית אֲשֶׁר־אַתֶּ֤ם חֲפֵצִים֙ הִנֵּה־בָ֔א אָמַ֖ר יְהוָ֥ה צְבָאֽוֹת׃

      보시다시피 “내 앞에”에 사용된 일인칭 “내”가 갑자기 삼인칭 “그”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것은 “그”가 “내”라는 분과 같지만(체) 다른(위) 분임을 천명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삼위일체의 교리가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도표화 하자면 님의 주장처럼

      전제 1: 히브리어 구약 – 내가 (일위일체 하나님) 내 사자 (침례 요한)를 내 앞에 (일위일체 하나님)
      전제 2: 헬라어 신약 – 내가 (일위일체 하나님) 내 사자 (침례 요한) 네 앞에 (다른 존재)
      결론: 이러한 차이는 헬라어 성경은 변개된 성경이요 삼위일체는 고안된 것임을 나타낸다.

      가 아니라

      전제 1: 히브리어 구약 – 내가 (삼위일체 하나님) 내 사자 (침례 요한)를 내 앞에 (삼위일체 하나님)
      전제 2: 헬라어 신약 – 내가 (성부 하나님) 내 사자(침례 요한)를 네 앞에(성자 하나님)
      결론 : 이러한 차이는 점진적 계시아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더 명확하게 계시되었음을 나타낸다.

      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님의 주장처럼 삼위일체를 허구로 만드는 구절이 아니라 강력하게 지지하는 구절로 봐야합니다. 님께서는 말 3:1을 전체적으로 보시지 않으셨기에 잘못된 해석을 만드신 것입니다.

      네 번째 반박: 님께서는 헬라어 성경이 “정복자 로마의 다신론 사상과 유대인의 유일신 신앙과 혼합하여 정복자 로마가 섬기던 제우스 Zeus 사상과 섞어 놓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이 주장은 프톨레미 2세의 정책으로써 LXX 성경에 해당되는 말이지 우리가 논하고 있는 신약성경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LXX 성경에도 적용하기 힘든 이유는 프톨레미 2세가 정치적 목적으로 종교 통합을 위해 LXX가 만들어 졌다는 해석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백번 천번 양보해서 그렇다쳐도 님의 논증은 LXX에만 국한된 것이지 신약성경에는 적용될 수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이 글이 님의 진리탐구 열정에 바른 방향을 제시하기를 소망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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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jhs / 7월 24 2015 5:54 오후

    목사님 제가 삼위일체 관련문제로 3년간 방황하다가 목사님의 글들을 보고 많이 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반삼위일체적 글을 보게 되었는데 혹시 반박해주실수 있으신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마가복음 10장 18절]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 [요한복음 14장 28절]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린도 전서 15장 28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한복음 5장 19절]

    (이건 제가봤던 글 주소입니다 일부분만 요약해서 올립니다)

    비록 귀찮으실수도 있겠지만 한영혼살리는마음으로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곳의 많은 좋은글을보고 힘이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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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hs / 7월 24 2015 5:58 오후

      요한본음 14장 28절 뒷부분이 짤렸네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 [요한복음 14장 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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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Sanghwan A. Lee / 7월 24 2015 8:23 오후

    1. 막 10:18에 관하여 –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변증이 있습니다. 쉽게 변증이 되는 부분이기에 간략히 뼈대만 남깁니다.

    (1) 문맥적 이유: 청년은 예수님을 가리켜 선한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한 분만 선하신데 자신을 선하다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으셨지요.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는 청년으로 하여금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고 있는지 검증을 촉구하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안타깝게도 마지막 부분을 보면 청년이 예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청년이 예수님을 선하신 분, 즉 하나님으로 보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지요. 예수님의 질문을 통하여 볼 때 예수님께서는 청년이 이렇게 행동할 것을 아셨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2) 언어학적 분석: 이단들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이는 언어학적 오류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당신께서 선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언지가 없지요. 만약 예수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는 말씀 후에 “나는 선하지 않다”는 말씀이 있었다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위의 말씀만으로는 “나는 선하지 않다”는 구조가 필연적으로 돌출되지 않아요. 더 많은 정황들이 필요한데, 정황들은 이단과 같은 주장을 뒷받침 하지 않습니다.

    (3) 유대적 사관: 유대인들은 오직 하나님만 선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청년이 예수님을 좋으신 분으로 묘사한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부른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청년의 믿음을 재차 점검하시기 위하여 당신과 하나님을 비교하신 것으로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이렇게 해석할 경우, 청년이 예수님을 하나님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떠난 것에 대한 어려움이 남습니다. 혹자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는 것을 근거로 이 해석을 지지하기도 합니다.

    2. 고전 15:28에 관하여 –

    남자와 여자는 인격적으로 동일합니다. 그러나 질서적으로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지요. 이처럼 성부와 성자는 신적으로 동일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구속적 질서로는 성부가 성자의 위에 있지요. 성부가 성자보다 월등하거나 탁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승천 하신 후에는 다시 모든 것을 되찾으셨지요. 제가 쓴 케노시스 설과 하나님의 보좌가 단수인 이유에 잘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 시리즈를 다 읽어보세요. 도움이 될 줄 믿습니다.

    3. 나머지 부분 역시도 예수님의 신성 시리즈에서 거의 다 다뤘습니다. 특히 케노시스 설을 보시면 되요. 건승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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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hs / 7월 24 2015 10:46 오후

      고전15장 28절 부분은 재림이후를 말하는데 그땐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것을 되찾으셨는데 복종하여 아버지하나님만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실필요가 없지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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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7월 24 2015 11:24 오후

        1. 신학적 접근: 재림 후에 모든 것이 다 끝나지 않아요. 재림 후에는 밀레니엄 킹덤이 건설되지요. 그 때까지 성자께서는 아버지의 보좌에 앉지 않으시고, 그 때 조차도 아버지와 아들의 구속사적 질서를 예수님께서 지키시죠. (케노시스때 스스로 내려놓으셨던 모든 신성을 되 찾으셨음에도 말이죠) 천년이 다 찬 후에 곡과 마곡 전쟁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백보좌 심판이 일어납니다. 모든 원수들이 다 심판을 받고 지옥으로 들어간 후에야 비로소 성자가 성부의 보좌에 함께 좌정하죠. 그러므로 고전 15:28로 예수님께서 성부보다 낮다는 해석은 만들어 질 수 없답니다.

        2. 언어학적 접근: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자면 언급하신 본문에 사용된 ὑποταγῇ 과 ὑποταγήσεται는 중간태 동사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예수님께서 성부보다 낮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낮아지신다는 의미가 되지요. 조직신학적 관점으로 볼 때 “성부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낮아지신다는 의미”가 더 많은 논리적 타당성을 확보합니다. 역시 고전 15:28로 예수님께서 성부보다 낮다는 해석은 만들어 질 수 없지요.

        3. 우리가 이단과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 논쟁할 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 사이에 있는 “사역적 질서”는 “본질적 질서”와 다르다는 거에요. 이 둘만 잘 분리하시고 논쟁에 임하신다면 바르게 논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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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hs / 7월 28 2015 8:30 오전

        아 자꾸 묻게 되어 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5절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라고 되어있는데 목사님의 글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원수가 발판이 된후에는 하나님의 보좌에 앉는다고 하셨는데 고린도전서15장 말씀과 차이가 있는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윗 댓글을 보면 고린도전서 15장 28절의 말씀이 예수님이 재림하신후 라고 말씀하시며 그이후에 밀레니엄 킹덤이 있고 그다음에 성부와 성자가 보좌에 앉으신다고 하셨는데 고전15장 25,27절을 읽어보면 그때가 원수가 발판이 된이후라는것을 알수있습니다
        그럼 그때의 배경이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으실때 아닌가요?

        그럼에도 예수님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공격적으로 글을 쓴것은 아닌데 조금 공격적인 성향으로 보인다면 죄송합니다 하나님에대해 정말 바르게 알기원해서 그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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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hwan A. Lee / 7월 28 2015 8:06 오후

        아닙니다. 🙂

        1. 제가 위에 댓글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사역적 질서”와 “본질적 질서”의 차이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본질적으로는 성부와 성자가 같은 위치에 계십니다. 그러나 구속사적 사역을 위해서 성자께서 스스로 낮아지셨지요. 낮아지셨다 함은 (1) 신성 중 몇 개를 스스로 두고 내려오셨다는 의미(이 부분은 제가 케노시스 설에서 다루었으니 이곳에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와 (2) 구속사적 질서를 위해 성도와 아버지를 연결하는 중보자적 위치에 스스로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재림을 하신 후에는 두고 오신 신성을 다시 찾으심으로 성부와 다시 동일하게 되셨지요. 하지만 아직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구속사적 질서를 위해 낮아지신 중보자적 위치로부터 일탈하사 본래의 위치를 다시 취하신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이 두 부분의 차이를 조직신학적으로 나누어 설명하지요. 이 둘의 구분을 잘 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으실 시간은 제가 다른 글에 설명드린 그 때이고, 구속사적 질서를 위해 낮아지신 것은 다시 취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를 영원히 예배할 것이니까요. 이것이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신성)는 없지만 사역적 질서의 차이는 있다는 말이고, 또한 그 때에도 예수님께서 스스로 복종하신다는 표현의 의미랍니다.

        2. 25절과 27절 사이에 있는 26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는 말씀은 그 때가 언제인지 짐작하게 해줍니다. 중요한 부분은 사망이 멸망 받을 때가 밀레니엄 킹덤이 끝나고 나서가 아니라 시작될 때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 때부터 성도들에게 죽음은 아예 없어지니까요. Richard L. Pratt Jr의 설명을 인용합니다.

        “Of course, the last enemy that Christ will destroy is death itself. Adam introduced death into the human race (Rom. 5:12–14), but Christ has come to eliminate death. Yet, this destruction of death will take place gradually. The elimination of death is the last great work of Christ. This will occur when he raises believers to everlasting life and frees them from the power of death (Heb. 2:14–15).” (Richard L. Pratt Jr, I & II Corinthians, vol. 7, Holman New Testament Commentary [Nashville, TN: Broadman & Holman Publishers, 2000], 265.)

        보시다시피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부활시킬 때가 사망을 이기실 때라고 해석합니다. Alan F. Johnson이 Bruce를 인용한 부분도 발췌합니다.

        “However, as Bruce points out, ‘the temporal adverb eita [then] implies an interval of indeterminate duration between the parousia and the end, when Christ hands his dominion back to God,’ which could allow for the millennial kingdom.” (Alan F. Johnson, 1 Corinthians, vol. 7,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291–292.)

        H. D. M. Spence-Jones도 역시 같은 말을 합니다.

        This rendering might imply that other enemies should still exist, though Death should be the last who would be destroyed. The original is more forcible, and implies. ‘Last of enemies doomed to annulment is Death;’ or, as in Tyndale’s version. ‘Lastly, Death the enemy shall be destroyed;’ or, as in the Rhemish Version, ‘And at the last, Death the enemy scal be distried.’ The present, ‘is being annulled,’ is the præsens futurascens, or the present of which the accomplishment is regarded as already begun and continuing by an inevitable law.” (H. D. M. Spence-Jones, ed., 1 Corinthians, The Pulpit Commentary [London; New York: Funk & Wagnalls Company, 1909], 487.)

        그러므로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라는 표현은 성도들이 부활하고 예수님의 원수들(마귀와 그의 천사들)이 옥에 갇히는 천년왕국의 시작이 될 수도 있지요. 게다가 문맥이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은 이런 해석을 확정적으로 지지하지요.

        3. 이처럼 성경은 정확한 때를 어느 사건이 발생하는 시점으로만 두지 않고 점진적으로 설명하기도 해요. 그러므로 전제적인 교리의 틀 안에서 위의 구절을 해석해야만 한답니다. 가장 좋은 예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먹는 날에 네가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던 말씀이에요. 아담은 그 날 죽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그 때를 시작으로 죽어갔지요. 점진적인 죽음이 그 때 부터 도래한 것이랍니다.

        4. 그리고 A라는 사건이 끝나자 마자 B라는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도 조심하셔야 해요. 예컨대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후(사건 A)에 천녕왕국(사건 B)이 바로 건설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몇 주의 간격이 있지요. 그러므로 사건 A 후에 사건 B가 일어난다는 말을 사건 A 후에 사건 B가 바로 일어난다고 보시는 독법은 피하시는게 좋을듯 해요. 마지막으로 위의 구절을 천년왕국의 관점으로 푸신 Roy E. Gingrich의 글을 인용합니다.

        “The time relationship between Christ’s resurrection and the resurrection of believers (15:23–28) (a) Christ resurrected many years ago—He was ‘the Firstfruits.’ (b) All believers will resurrect at Christ’s coming (15:23)—His coming will be in two phases, the Rapture and the Second Advent. The church will be raised at the Rapture, 1 Thes. 4:13–17. Old Testament believers and martyred Tribulation believers will be raised at the Second Advent, Isa. 26:19–21; Dan. 12:2, 13; Rev. 20:4. When the Old Testament believers and the martyred Tribulation saints resurrect at Christ’s Second Advent, the ‘First Resurrection’ program will be completed. Rev. 20:5, 6. (c) All unbelievers will resurrect after the close of Christ’s Millennial reign (15:24–28) (Paul mentions this final resurrection of the unsaved to complete his outline of Christ’s entire resurrection program and to reveal the destiny of those not included in ‘the first resurrection. ‘) 1). Christ will reign on the earth for 1000 years (Rev. 20:4) 2). God has ordained that all things be subjected to Christ (15:27)—God had decreed that all except Himself be brought under the authority of Christ, Eph. 1:10; Phil. 2:9 11; Heb. 2:6–9. 3). Christ will reign until all things are subject to Him (15:25, 26)—Some things will willingly submit and will abide. Other things will refuse to submit and will be conquered and destroyed. The last enemy of Christ to be destroyed is death (Adamic death, the first death, physical death). This will take place after the unbelieving dead are resurrected from Adamic death, Rev. 20:13, at the close of the ‘little season’ which will follow the Millennial reign of Christ, Rev. 20:3. 4). Christ will then subject Himself to God the Father (15:24, 28)—After Christ has subdued or destroyed all of His enemies, the Son’s Mediatorial kingdom will be delivered up to God and merged with the Father’s Eternal kingdom and the Son will rule on forever in His Father’s kingdom, the Father being the supreme ruler.” (Roy E. Gingrich, The Book of 1 Corinthians [Memphis, TN: Riverside Printing, 2000], 65–66.)

        건승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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