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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2013 / Sanghwan A. Lee

영화(榮化)된 성도가 다시 타락할 수 있는가?

문제 제기:죄 없는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타락했다면, 영화를 거쳐 온전해진 성도들도 천국에서 타락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 이 곳, 저 곳에서 보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을 답하기 위해 제시된 답과 그 이유는 천차만별입니다.  신학의 길을 걷는 신학도로써 명확한 답을 제시하는게 도리인 것 같아 몇 자 적습니다.  우선 우리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볼 구절은 두 개 입니다: (1) 계 22:3a, (2) 슥 14:11.

계 22:3a 주해: 영화된 성도의 천국 삶을 묘사하는 계 22:3a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이 구절이 “성도가 영화 후 다시 타락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구절이 되려면, 여기에 쓰인 “저주”가 “타락”을 의미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종류의 저주를 말한다면 다른 구절을 택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니 계 22:3a에 쓰인 “저주”가 타락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면서 구절 선택의 타당성을 검증해 봅시다.

(1) 저주 (κατάθεμα): “저주”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카타떼마(κατάθεμα)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명확히 알기 위해서 헬라어 문법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헬라어 문법에 따르면, 이 단어의 성은 중성입니다.  이는 특별한 저주를 의미하지 않고, 모든 종류의 저주를 의미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저주 뿐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저주까지도 (그러한 저주가 있다면) κατάθεμα 속에 담겨 있다는 말이지요.  “타락“의 저주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더 확실한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어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저주”라는 단어 앞에 “모든”이라는 뜻의 형용사 πᾶν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타락”의 저주까지도 이 단어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고로 계 22:3a는 “성도가 영화 후 다시 타락할 수 있는지”의 질문을 판단할 수 있는 구절로 타당성을 갖습니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2) 다시 (ἔτι): 계 22:3a에는 “저주”라는 단어 앞에 “다시”라는 부사가 있습니다.  “다시”라는 부사는 반복의 의미를 갖고 있지요?  이는 계 22:3a가 말하는 “저주”는 전에 있었던 저주라는 뜻입니다.  고로 위에서 가능성으로 제기된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저주“는 제외되야 합니다.  계 22:3a가 말하는 “저주“는 타락의 저주를 포함하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저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저주가 어떻다는 것이죠?  “없다”는 것입니다.

(3) 없다 (οὐκ ἔσται): “없다”고 번역된 헬라어의 시제는 미래형으로써 세 가지의 의미로 쓰입니다: (a) 없을 것이다 (will not be), (b)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will not exist), (c)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will not continue).  이 세 가지의 의미 중 하나의 의미로 쓰였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떠한 의미로 쓰였을까요?  하나씩 알아보면서 그 의미를 짚어봅시다.

(3-a) “저주가 없을 것이다 (There will not be curse)”로 쓰였을 경우: 여기에서 “not” 안에는 종족 전체를 지칭하는 대표 단수의 성격을 띈 “any”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 어떤” 저주도 없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따라서 그 어떠한 저주도 “will”이 지칭하는 시점부터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3-b) “저주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Curse will not exist)”로 쓰였을 경우: (1)의 경우 “there”가 existential의 용법으로 쓰이고 있기에 “be”동사의 다양한 의미를 한정하고 있지만, (2)의 경우에는 be동사의 의미를 “exist”로 구체화 하여 저주가 존재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 어떤 저주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3-c) “저주가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Curse will not continue)”로 쓰였을 경우: “continue”의 경우, 지속(continuous)과 반복(continual)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기에, “will”이 지칭하는 시간까지 지속된 저주는 중단되고, 그 때까지 반복했던 저주도 멈춘다는 의미입니다.  그 어떠한 저주(반복된 저주까지도)도 중단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의미중 어떤 의미로 쓰였다 할지라도 성도의 영화 후에는 타락의 저주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 가지의 해석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확고한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계 22:3a는 영원 속에서 저주의 완전한 부재(不在)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자면, 계 22:3a에 쓰인 헬라어의 형태를 살펴보면 결과 산출자이신 하나님의 “저주를 하시는 행동”에 촛점이 맞추어있지 않고, 원인 제공자인 인간의 “저주를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영화 후 성도의 모든 행실이 완벽, 완전하기에 하나님께서 저주를 하시는 행동까지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영화된 성도의 행실이 영원 속에서 온전할 것임을 천명합니다.  영화된 성도의 행실이 온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주를 하시는 행동까지 결코 가실 수 없으시다는 것이지요.  고로 “죄 없는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타락했다면, 영화를 거쳐 온전해진 성도들도 타락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의 답은 “절대 아니요”입니다.  당연히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지요?  “왜 영화를 거친 성도는 저주를 받을 수 없는 상태로 영원을 보낼 수 있지요?”  이 질문은 슥 14:11을 주해하면서 답하도록 합니다.

슥 14:11 주해:  슥 14:11은 영화를 거친 성도의 천국 삶에 대해서 예언하면서 이렇게 비유로 말씀합니다.  “사람이 그 가운데에 살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다”  이 구절에 중요한 단서 하나가 있습니다.  “평안”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בֶטַח)가 “샬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대신 “베타앗”입니다.  “베타앗(בֶטַח)”의 뜻은 “평안”이 아니라 “보안,” “경비,” “안보”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이 예표하는 천국이 보안, 경비, 안보를 받는다는 것이지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천국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영화된 성도들이 들어있는 천국을 지키신다는 말입니다.  무엇으로부터요?  사탄과 그의 타락한 천사들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그 때 지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을 지키시는 대상은 다른 것입니다.  그럼 그것이 무엇인가요?  오직 하나입니다.  타락의 가능성입니다.  마치 그룹들이 에덴 동산을 사람의 출입으로부터 봉쇄했듯이, 하나님께서 천국을 죄의 출입으로부터 봉쇄하사 타락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끝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영화된 성도는 다시 타락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타락의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그들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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