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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2/2018 / Sanghwan A. Lee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

φιλεῖς με… κύριε, πάντα σὺ οἶδας, σὺ γινώσκεις ὅτι φιλῶ σε,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당신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 당신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7

베드로의 고백에 특이한 부분이 있다. 예수님을 지칭하는 단어(κύριε, σὺ, σὺ, σε)는 여러번 사용하지만 자신을 지칭하는 대명사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다시말해 대격은 그렇다 쳐도 호격과 주격 대명사를 사용해 예수님을 강조한 사실은 정말 특이하다. 문맥 속의 베드로가 정말 피력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여러번 강조해도 모자를 “자신”을 지칭하는 대명사를 생략시킨 베드로의 의도는 무엇일까? 반면에 예수님을 지칭하는 주격 대명사는 동사 속에 묻어두지 않고 구태여 꺼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정작 강조가 돼야하는 “자신”의 대명사는 숨기고, 강조될 필요가 없는 “예수님”의 대명사를 사용함으로 주님을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예수님께서 자신의 본심을 알고 계시다는 믿음 때문이 아닐까?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전지의 눈으로 자신의 진심을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럴경우 구태여 “자신”을 강조할 필요가 없게 된다. 오히려 예수님을 지칭하는 단어를 많이 사용함으로 전지하신 그분을 강조하면 된다. 이런 관점이 타당하다면 본문은 다음과 같이 확장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을 향한 제 본심을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냐고요?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시여, 주님은 아십니다. 당신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이 연약하고 나약한 자의 본심을….” 

우리는 수 많은 자기 변명을 늘어놓아야지만 하나님께서 이해하실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신다. 죄를 놓고 얼마나 아파했는지… 얼마나 괴로워 했는지… 얼마나 진실로 회개했는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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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회개한 심령에게 물어오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처럼 솔직하고 확실히 답하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신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제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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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2/2018 / Sanghwan A. Lee

저와 함께 가실래요?

한꺼번에 몰려왔던 사건사고로 인해 두달 동안이나 이곳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이곳을 찾았다. 성경 공부의 초안을 만들기 위함이다. 매끈한 테이블과 푹신한 쇼파가 나를 반기는듯 했다. 씁쓸한 맥다방 커피맛과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잉크를 흘리는 펜이 나를 더욱 반겼다. “~ 정말 그리웠다.” 나도 모르게 속삭였다. 누가 뭐라해도 성경과 커피, 그리고 써지는 펜과 함께 보내는 아침은 낭만의 으뜸이다!

맥다방.jpg

청빙 절차를 겪으며 교우분들께서 성경 공부에 무척 갈급해 하시다는 말씀을 듣게 됐다. 나에게는 무척 감사한 소식이었다. 목회와 성경 공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전과는 사뭇 다른 자세로 성경 공부를 준비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예전처럼나를 따르라! 내가 끌어주리라! 아니라저와 함께 가실래요? 힘들면 제가 뒤에서 밀어드릴께요! 자세로 말이다. 성경 공부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척도가내가 얼마나 많이 가르쳤나? 아니라성도들을 얼마나 많이 이해하도록 했는가? 바뀐 것이다. 정말 감사한 변화가 아닐 없다. “나를 위한 성경 공부성도들을 위한 성경 공부 차이를 보게 것이다.

전자와 후자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일까? 전자는 성도를 모르고 성도를 위해 기도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반면에 후자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후자는 오직 성도를 바르게 알고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며 가르칠 때야 비로서 나타나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결국 목회의 모든 부분은 하나님 사랑과 성도 사랑에서 시작되는 같다. 정말 그런 것 같다.

01/16/2018 / Sanghwan A. Lee

GA Lectionary 402

GA Lectionary 402.jpg

Ἡ μὲν χεὶρ ἡ γράψασα σήπετε τάφω.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필사한 제 손은 무덤에서 썩고 있지만

τὸ δὲ γράμμα μένη εἰς χρόνους πληρεστάτους.
필사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길이 길이 남을 것입니다.

11 세기 성경 (GA Lectionary 402) 필사자의 고백

01/03/2018 / Sanghwan A. Lee

먼지묻은 사진첩을 정리하며…

“형제님의 꿈이 너무 큽니다. 예수님을 위해 쓰임받기 원한다면 그 꿈부터 버리셔야 합니다. 형제님의 꿈이 너무 커서 예수님의 꿈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텍사스에 있는 롱뷰의 작은 커피숍.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재물을 오른손에, 명예를 왼손에 움켜쥐는 것이 성공한 목사의 모범 답안이라고 생각했었다. 자라면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교회부흥의 비결,” “교회성장 세미나,” “전도폭발 훈련,” “축복의 배가”등은 사역자들이라면 앵무새처럼 읊고 다녀야만 했던 마법주문과도 같았다. 교회에는 이러한 키워드가 들어간 배너가 곳곳에 걸렸고, 교회의 행사는 키워드와 맞물리는 것들로 주로 구성됐다.

목회자의 성공 기준은 ‘신학과 신앙의 깊이,’ ‘성도를 향한 사랑과 은혜의 폭’ 등이 아니었다. 몇명이 모이는 교회를 맡고 있는지, 어떤 자가용을 몰고 있는지, 교회로부터 자녀 유학비를 받고 있는지 등이었다. 놀라운 점은 누구도 이런 현실에 반문하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모두들 그렇게 배웠던 것이다.

시대의 부산물인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지일관 돈과 명예를 움켜쥔 성공한 목사가 되리라는 결심으로 이 길을 걸었다. 신학과 신앙은 중요한 가치가 아니었다. 재물과 명예를 얻는데 큰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했던것은 인맥과 화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자기계발이었다. 그렇게 나는 잘못된 방향으로 질주했다. 그리고 질주하는 내 인생은 폭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한 사람을 만났다. 내 인생에 급제동을 걸어준 은인을 말이다.

텍사스에 있는 롱뷰의 작은 커피숍. 나는 지인을 통해 알게된 무명의 시골 목사와 만났다. 그는 공학 교수이자 신학자요, 또한 목사였다. 오전에 만난 우리는 해가 서산에 걸릴 때까지 대화를 나눴다. 긴 대화를 마무리하며 내게 던졌던 그의 말은 결코 잊을 수 없다. “형제님의 꿈이 너무 큽니다. 예수님을 위해 쓰임받기 원한다면 그 꿈부터 버리셔야 합니다. 형제님의 꿈이 너무 커서 예수님의 꿈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 꿈을 버리지 않는다면 괴물과도 같은 삯꾼 목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 하고, 교회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회사를 세우려 하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그는 말했다.

홀로 달라스로 돌아오는 길, 정말 많은 생각에 잠겼다. 그에게 화도 났고, 그가 괘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조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후에도 우리는 전화나 편지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함께 만나 텍사스의 광야를 함께 돌아다니며 들판이나 산에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바위 아래 엎드려 산기도도 했다. 별빛이 쏟아지는 사막에서 밤을 지새며 철야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을까? 결국 나의 일그러진 사고는 그가 제시한 진리 앞에 해체됐다.

몇년 후. 우리는 좀더 가깝게 만났다. 담임 목사와 부사역자로 말이다. 우리는 문제 많은 시골 교회에서 함께 우여곡절을 겪으며 서로에게 각별하고 진중한 친구가 됐다. 마음에 묻어둔 비밀까지 함께 나눌 수 있는 죽마고우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그늘이 되어 주었고, 오아시스가 되어 주었다. 목회 현장에서는 사수와 부사수로, 인생에서는 선배와 후배로,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는 절친으로 말이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를 생각한다. 비록 나보다 먼저 주님께 갔지만 그가 내게 물려준 진리는 내 심장과 함께 뛰고 있다. 이런 소리를 내면서… “당신에게는 꿈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꿈은 예수님의 꿈인가요 당신의 야망인가요?” 날마다 묻고 점거해야 할 질문임이 틀림없다.

1월 3일, 2018년. 먼지묻은 사진첩을 정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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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2018 / Sanghwan A. Lee

새해의 첫번째 책에서 만난 명언들

“참으로 학문은 길고 인생은 짧은 것이다.” (69)
 
“학자들의 새로운 듯한 주장들도 상당한 경우 과거의 반복일 뿐이다.” (69)
 
“오순절주의자들이 무식하다는 편견은 경건한 오순절주의자인 그(G.D. Fee)의 글을 읽다가 보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책을 쓰는지 그의 책은 영감과 지혜가 넘친다.” (24)
 
“오늘 우리가 완전한 성서 원문을 향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수백 년의 세월을 이 거룩한 사역에 헌신했던 많은 학자들 덕분이다.” (8)
 
“흔히 파피루스나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만을 열심히 따라다니는 사본학도들이 있는데, 이것은 이미 고대 알렉산드리아 본문 유형을 원문으로 간주하고 사본학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매우 위험한 방법이다. … 우수한 몇 가지 사본들만을 맹신하며 따라다니는 유치한 사본학은 곤란하다.” (34, 58)
 
“미국에서 일부 학자들은 Q복음서라는 용어까지 사용하는데, 이것은 단일 문서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학문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경계를 넘어 환상의 가도를 달리고있는 셈이다.” (36)
 
“그리스바흐가 진술한 원리는 본래 … 조심스러웠는데, 오늘날 사본학을 어설프게 공부한 이들이 이 원리를 확신 있게 교리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160)
 
“유혹은 추한 실상을 숨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나타난다. 이 달콤한 유혹은 통계학의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한다.” (154)
 
“많은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이 무조건 진리로 향하는 길이라고 믿고 다수에 맹목적으로 합류하며, 좁은 길을 가는 무리들을 이유 없이 비웃는 것은 학문의 세계에도 늘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지만 학문의 발전은 진리를 향하는 좁은 길을 과감하게 선택하는 창조적 소수에 의해 이루어진다.” (160-61)
 
“검은색이 틀렸다고 흰색이 참인 것은 아니다. 파란색은 어떤가? 짧은 독법이 원문에 가깝지 않다고, 긴 독법이 원문에 가까우리라는 보장은 없다. … 짧은 독법을 선호하겠다는 것은 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을 선호하겠다는 것이나 다름 없이 주관적인 판단이다.” (163, 165)
 
“종종 긴 독법을 취하는 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긴 독법을 취할 때 그에 주목하고, 흔히 짧은 독법을 취하는 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긴 독법을 취할 때 그에 주목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166)
 
“전통의 수레바퀴는 관성의 힘에 의해 계속 굴러가려고 한다. 그리하여 자유와 평등을 토대로 하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동화 속이나 난장이들과 살아야 할 중세의 공주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완고하고 자존심 강한 이 시대의 학자들의 상당수는 마차에서 내리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짧은 독법을 선호하는 원리는 한동안 사본학계에서 명맥을 유지할 것이다. 그러나 이 원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호하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과 함께 자취를 감출 것이 분명하다.”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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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우, 사본학 이야기: 잃어버린 원문을 찾아서 (서울: 웨스트민스터출판부,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