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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2019 / Sanghwan A. Lee

“인침을 받은 자”

아래는 계시록 7장에 나오는 유명한 144,000에 관한 구절(개역개정)입니다.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5~8절)

본 구절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다시피 일정한 패턴으로 나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ἐκ φυλῆς + (2) 지파 이름 + (3) δώδεκα χιλιάδες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부분은 첫 번째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만 ἐσφραγισμένοι가 들어가 있습니다. 즉,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 있는 (1) ἐκ φυλῆς + (2) 지파 이름 + (3) δώδεκα χιλιάδες + (4) ἐσφραγισμένοι가 중간에 있는 (1) ἐκ φυλῆς + (2) 지파 이름 + (3) δώδεκα χιλιάδες를 감싸고 있는 셈이지요.

사실 처음에 사용된 ἐσφραγισμένοι나 마지막에 사용된 ἐσφραγισμένοι중 하나는 생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의도적으로 가장 앞과 뒤에만 ἐσφραγισμένοι를 넣음으로 처음과 끝에 있는 (1) ἐκ φυλῆς + (2) 지파 이름 + (3) δώδεκα χιλιάδες + (4) ἐσφραγισμένοι가 중간에 있는 (1) ἐκ φυλῆς + (2) 지파 이름 + (3) δώδεκα χιλιάδες를 감싸고 있는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독자에게 암시하려던 바는 무엇일까요? 혹시… 인침을 받은 144,000명이 앞뒤로 꽉~ 인침을 받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저들의 영혼을 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은 144,000이라는 숫자의 비밀에만 머물지 말고, 인치신 자들을 끝까지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까지 나야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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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2019 / Sanghwan A. Lee

잠긴 글: 모빌 아카데미 성경공부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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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7/2019 / Sanghwan A. Lee

그레코-로만 시대의 고전학(古錢學)관점으로 이해하는 “일곱 별의 비밀”

들어가기 전에: 본글은 (1) 도미시안 황제때 계시록이 쓰였다는 관점, (2) 과거주의와 미래주의를 절충하는 관점, (3) 그리고 관련성 이론에 따른 해석적 관점을 따랐음을 밝혀둔다.

들어가며: 아래는 영국의 천문역사학자 Nicholas Campion이 그의 저서에 쓴 내용이다.

“Any intelligent audience of the 1st century would have been deeply aware of the cosmological significance of these numbers, there being seven planets and twelve signs of the zodiac. The most overtly cosmological text in the New Testament, though, is the Revelation of St. John, an imaginative work of grand proportions. Its repetition of the number seven—churches in Asia, spirits before the throne of God, the famous seals, and, significantly, stars—ties Christian cosmology to the planets.” (Italics Mine)

Nicholas Campion, Astrology and Cosmology in the World’s Religions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2012), 167.

1 세기의 그레코-로만 시대의 사람들이 별과 숫자 7을 언급하는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천문학적/점성학적으로 이해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당시에는 천문학과 점성학을 세밀하게 구별하지 않았다). Campion의 주장에는 신빙성이 있다. 계시록이 쓰였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볼 경우 별과 숫자 7의 조합으로 유명세를 탔던 아이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 북두칠성, (2) 플레이아데스 성단, 혹은 (3)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태양, 달. Campion의 주장이 맞다면 요한은 당시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배경지식을 사용하여 무엇인가를 전달하려 했던 것이고, 원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그 의미를 축출해 냈을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아쉽게도 Campion의 접근은 여기에서 끝나지만 나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별과 숫자 7의 조합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다.

그레코-로만 동전: 재미있게도 그레로-로만 시대의 천문학/점성학을 엿볼 수 있게하는 자료들 중 하나는 동전이다. 별, 혜성, 별자리 등이 상징적인 의미를 입고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사진을 보라. 다양한 별들이 동전에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레코-로만 시대에 주조된 동전들

이런 자료는 천문학/점성학이 많은 사람들의 삶에 깊이 들어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당시의 동전들은 요한이 살던 시대의 별에 대한 사회적 개념을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사람의 운명과 별: 그레코-로만 시대의 권세자들이 이런 동전을 주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별들이 사람들의 운명을 주관한다“는 개념 때문이었다. 유명한 마법문서(PGM) XIII.633–37과 XIII.708–14 등은 이런 부분을 잘 보여주지 않던가? 정치의 전채였던 로마의 황제들은 이러한 시대적 개념을 백분 이용하여 그들의 통치권을 정당화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별들과 자신의 통치력을 연결하는 동전을 주조하여 로마의 모든 지역에 유통시킴으로 “나의 통치권은 하늘이 내린 운명이야. 너희는 이 운명을 거스를 수 없어!“라는 무언의 정치적/종교적 메세지를 가시화 했던 것이다 (역시 요한이 살던 시대에는 정치와 종교를 세밀하게 분리하지 않았다). “로마의 황제들은 정치의 천재들이었다”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로마 제국의 문맹률: 잠깐… 크레딧 카드와 문명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겨우 동전이?”라고 물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레코-로만 시대의 낮은 문맹률을 고려한다면 동전에 새겨진 문양이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William V. Harris는 그의 저서 Ancient Literacy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89)를 통해 그레코-로만 시대의 문맹률은 약 85%까지 육박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학자들이 그의 주장을 따르지는 않지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그의 견해를 수용한다. 쉽게 말해서 제국의 15%만 읽고 쓸 수 있었다는 말이다. Harris의 주장이 옳다면 동전의 정치적 역할이 크게 부각된다. 생각해보자. 높은 문맹률로 인해 글을 통해 효과적인 정치를 꾀할 수 없었던 황제들은 문맹들과 소통하는데 큰 여러움을 겪었다. 그러므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정치적/종교적 메세지를 전달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어떤 도구가 이런 바람을 관철시킬 수 있을까? 그렇다. 동전이었다. 동전에 정치적/종교적 메세지를 그림처럼 새겨 넣은 후 뿌리는 것이다. 이럴경우 문맹이나 비문맹이나 할 것 없이 메세지가 전달 될 수 있었다!

베스파시안과 도미시안의 정치적 메세지를 담은 동전.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동전으로 비굴하게 앉아 등을 돌리고 있거나 무릎을 꿇고 있거나 누워있는 사람은 전쟁에서 패한 나라를 상징하고, 거만하게 일어나 있거나 말을 타고 있는 자는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를 상징한다. 동전의 앞면에는 전쟁시에 로마를 통치했던 황제의 얼굴이 그려져있다.

동전의 역할: Erika Manders는 동전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After all, … deployment of imperial coinage was probably the most efficient and effective medium by which the center of power could convey an image of the emperor and his reign. Through coins, the emperor disseminated his idealized self-image over a large pro- portion of the Empire and to all segments of the population.”

Erika Manders, Coining Images of Power: Patterns in the Representation of Roman Emperors on Imperial Coinagae, A.D. 193-284, IE 15 (Leiden: Brill, 2012), 227.

Donal T. Ariel과 Jean-Philippe Fontanille도 The Coins of Herod: A Modern Analysis and Die Classfication, AJEC 79 (Leiden: Brill, 2012), 22에 비슷하게 설명한다: “Propaganda on a most rudimentary level has always existed on coinage.” 이처럼 동전 만큼이나 정치적/종교적 메세지를 제국의 구석까지 보낼 수 있었던 매개체는 그레코-로만 시대에 없었다. 황제는 동전에 새겨진 문양을 통해 제국의 85%의 문맹들과 15%의 비문맹들에게 종교적/정치적 메세지를 보냈고, 수신자들은 의식적으로 또한 무의식 적으로 그 메세지를 받았다. 비록 동전은 말할 수 없지만 동전 위에 새겨진 문양은 쉬지않고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계시록의 일곱 별: 이제는 이런 역사적 개념을 기억하며 계시록의 일곱 별을 살펴보자. 계시록 1.16에는 “그(예수님)의 오른손에 일곱 별들이 있(ἔχων ἐν τῇ δεξιᾷ χειρὶ αὐτοῦ ἀστέρας ἑπτ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곱 별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1.20에 그 답이 나온다. 일곱 별들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οἱ ἑπτὰ ἀστέρες ἄγγελοι τῶν ἑπτὰ ἐκκλησιῶν εἰσιν)”이다. 안타깝게도 20절이 일곱 별들의 비밀을 시원하게 풀어주지는 못한다. “사자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의미가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햄릿이 이 문장을 봤다면 “이 단어를 ‘천사들’로 번역할 것이냐 ‘전달자’로 번역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말했을 것이다. 어휘적 접근과 문맥적 접근도 확실한 답을 주지 못한다. 그 결과 학자들은 여전히 끊이지 않는 논쟁 속에서 의견의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애매모호성의 원리: 잠깐… 혹시 이 부분에서 우리의 생각을 전환해 볼 필요성이 있지는 않을까? 요한이 일부러 “사자들”의 의미를 애매모호하게 설정해 놓았다면? 성서해석의 원리 중에 “애매모호성의 원리”가 있다. 저자가 중의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단어나 문장을 애매모호하게 표현했다는 개념이다. 이럴경우 “사자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성급하게 풀어내려는 시도는 오히려 요한의 의도를 해치게 된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일차 독자들인 이방 지역에 살고 있는 일곱 교회의 성도들의 세계관으로 본문을 바라보려는 시도가 우선 필요하다. 요한이 복음서와 계시록에 중의적 표현을 위한 장치들을 제법 많이 심어놨다는 점은 이런 방법을 충분히 지지한다. 게다가 오캄의 면도날의 관점으로 볼 때에도 이것은 가장 쉬운 방법이요, 가장 당연한 방법일 것이다.

새로운 접근: 이런 관점으로 계 1.16으로 다시 가보자. (1) 일곱 별들과 (2) 그 별들을 소유하고 있는 분이 등장한다: “ἔχων ἐν τῇ δεξιᾷ χειρὶ αὐτοῦ ἀστέρας ἑπτὰ.” 도미시안 황제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일곱 교회의 성도들이 이 표현을 들었을때 무엇을 바로 연상했을까? 이 질문에 어느정도 합당한 답을 제시할 수 있는 문화적 단서가 있을까? 있다. 82-83 CE에 로마에서 주조된 도미시안의 동전이다. 아래의 사진을 보자.

도미시안이 주조한 동전

무엇이 보이는가? 일곱 별들과 그 별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도미시안의 혈통—죽은 도미시안의 아들로 신성화 됐음—이 등장한다!

중요한 단서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단서들이 있다. 그것들을 짧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동전의 성분: 같은 문양의 동전이 아우레우스(금화)와 데나리온(은화)으로 주조됐다. 청동 AE(aes)이 아닌 AV(aureum)와 AR(argentum)로 주조됐다는 것은 동전에 담긴 메세지의 가치가 높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2. 동전의 문장: “DIVVS CAESAR IMP DOMITIANI F, 신성한 카이사르, 도미시안 황제의 아들.” “신성한”이라는 표현은 황제 숭배 사상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놓치지 말자.
  3. 둥근 구: 아이가 앉아있는 둥근 구는 주권과 통치권을 의미한다.
  4. 아이의 자세: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5. 일곱 별: 동전에 뿌려져 있는 일곱 별은 운명을 주관하는 요소로 봐야한다.
  6. 손의 위치: 별들 사이에 아이의 손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아이가 운명을 주관하는 별들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나타낸다.
  7. 머리 위에 없는 별: 아이의 머리 위에는 별이 없음에 주목하자. 이것은 의도적인 장치로 도미시안 혈통의 우위성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단서들을 조합할 경우 다음과 같은 메세지가 나온다: “신성한 도미시안의 혈통이 사람의 운명을 주관한다.” 동전을 보는 모든 사회 집단들(귀족, 소작농, 종 등)은 이러한 의미를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전의 가시적 효과는 Richard Oster, “Numismatic Windows into the Social World of Early Christianity: A Methodological Inquiry” JBL 101 (1982): 200의 말을 통해 설명된다: “Iconography [on the coins] was no less powerful or cogent than written or spoken communication.” 동전에 새겨진 문양은 글처럼 확실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전의 확산: 로마에서 주조된 이 동전은 군인들과 상인들을 통해 그레코-로만 시대의 전지역으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번잡한 도시에서 낙후된 시골에까지 동전은 도미시안의 통치권이 미치는 지역의 구석으로 침투해 들어갔고, 그렇게 동전이 담고 있는 종교적/정치적 메세지는 글을 읽을 수 없는 문맹들에게까지 전달됐다. 동전이 로마의 전지역에 퍼져나가는 경로를 C. H. V. Sutherland와 R. A. G. Carson은 이렇게 설명한다.

“For the Roman world, devoid of any network of banks in the modern sense, there was only one regular primary means of disseminating coinage, namely by the annual payment of stipendia to the legions, of salaries to civil servants, and of wages of those employed on public works: from these recipients coinage would in turn be circulated downwards to merchants, traders, and ordinary people.”

C. H. V. Sutherland and R. A. G. Carson, The Roman Imperial Coinage, Volume 1 (London, 1984), 9.

동전에 실린 도미시안의 메세지는 피라미드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듯 거래와 매매를 통해 로마 제국의 가장 낮은 곳까지 흘러 들어갔을 것이고 동전이 사용되는 곳마다 도미시안의 종교적/정치적 메세지가 가시화 됐을 것이다. 그렇게 무언의 메세지는 소리있는 아우성이 되어 그레코-로만 사람들에게 도미시안의 통치권을 천천히, 그리고 아주 효과적으로 각인시켰을 것이다.

도미시안 황제의 영향권 아래 있는 일곱 교회: 중요한 부분은 이것이다. 동전이 도달할 수 있는 장소 중에 계시록의 일곱 교회가 위치했던 장소들도 포함되었다는 것. 그러므로 일곱 교회의 성도들도 동전을 봤거나, 소유했거나, 사용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계시록의 수신자로 일곱 교회가 선택된 이유가 설명된다. 알다시피 그 당시에는 일곱 교회보다 더 많은 교회들이 그 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교회를 선택하사 계시록의 일차 수신자로 삼으셨다. 물론 전통적인 해석대로 “완전수 일곱”이란 개념을 도입하여 일곱 교회를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본글의 취지는 전통적 프레임을 탈피하여 그레코-로만의 시대적 배경으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 이런 방법론을 허용한다면 일곱 교회의 성도들은 일곱 별들과 그 별들을 오른 손으로 움켜주고 계신 예수님(계 1.16)을 도미시안의 동전과 연결하여 생각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나온다. Craig R. Koester도 나와 같은 생각을 피력한다.

“The section climaxes by noting that the figure holds seven stars in his right hand (Rev 1:16). This cosmic imagery conveys sovereignty. An analogy appears on a coin from Domitian’s reign that depicts the emperor’s deceased son as young Jupiter, sitting on the globe in a posture of world dominion. The coin’s inscription calls him ‘divine Caesar, son of the emperor Domitian,’ and the imagery shows him extending his hands to seven stars in a display of divinity and power. John has already identified Jesus as the ruler of kings on earth (1:5), and the imagery of the seven stars fits the book’s larger context, which contrasts the reign of Christ with that of imperial Rome.” (Italics Mine)

Craig R. Koester, Revelation: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AYB 38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4), 253.

예수님의 신학적/정치적 메세지: Koester가 잘 지적했다: “[T]he imagery of the seven stars fits the book’s larger context, which contrasts the reign of Christ with that of imperial Rome.” 그랬다면 아래의 그림들처럼 요한은 도미시안의 동전에 새겨진 종교적/정치적 메세지를 의도적으로 겨냥하여 해체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은 요한이 계 1.16을 통해 원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신학적 의미를 보다 명확히 볼 수 있도록 돕는다: 도미시안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것! 그렇다. 도미시안은 자신의 혈통이 일곱 별들, 즉 사람들의 운명을 주관한다고 피력했지만,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미시안의 목줄을 쥐고 계심을 천명했다. 더불어 ‘일곱 별 → 일곱 사자 → 일곱 인격체 (모든 인격체들을 의미)’의 운명까지도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이심을 천명했다. 그러니 도미시안에게 주눅들지 말고 전지전능하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도미시안의 핍박에 위풍당당히 맞서라고 권유하는 메세지를 보낸 것이다. 요한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도미시안의 혈통은 두 손으로 별들을 흩뿌려 놓고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한 손으로 별들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계 1.16)!”

“도미시안의 혈통은 죽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사셨습니다 (계 1.18)!”

“도미시안의 혈통은 둥근 구 위에 앉아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백보좌 심판대에 앉아 계십니다 (계 20.11-15)!”

“도미시안의 혈통은 피조물이었다가 신으로 신성화 됐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본래부터 창조되지 아니하신 영원자, 하나님이십니다 (계 1.17)!”

“도미시안의 혈통은 끝났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무궁하십니다 (계 20-21)!

누구를 두려워 하시렵니까? 누구를 따르시렵니까? 일곱 별들을 오른 손에 움켜쥐고 우리의 인생을 끝까지 붙잡아 주시는 전능자 예수님을 저와 함께 경외하며 따르지 않으시렵니까?”

맺으며: 이 질문을 받은 일곱 교회의 성도들은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네! 나와 내 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따르겠습니다!” 아멘.

03/15/2019 / Sanghwan A. Lee

저널 출판 (JGRChJ)

Stanley E. Porter 교수님께서 Editor로 있는 Journal of Greco-Roman Christianity and Judaism (JGRChJ)에 저널이 출판됐습니다. 제목은 Reexamining the Greek-Speaking Ability of Peter in Light of a Sociolinguistic Perspective입니다. 저널을 JGRChJ에 출판한 이유는 Stanley E. Porter 교수님께서 에디팅에 직접 참여해 주셨고, 아울러 JGRChJ에 출판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논증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한 Modern Linguistic Theories(SLT, CPH, etc.)가 Porter 교수님의 연구방향과 부합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다른 저널 출판사에 출판거절 소식을 알리는 호강도 누려봤네요. 🙂 본저널의 Abstract는 아래와 같습니다:

In contrast to the scholarly consensus, this article argues that utilizing the Aramaic Hypothesis to characterize Peter as an Aramaic-speaking Galilean is less accurate than using sociolinguistic approaches, which characterize Peter as a multilingual speaker who was able to speak Greek fluently. The lack of attention given by traditional methods to the complex mechanisms of sociolinguistic dynamics has resulted in an incomplete understanding of Peter’s linguistic ability. Thus, it is the aim of this article to reevaluate Peter’s linguistic ability and offer a new perspective that is more congruent with his personal sociolinguistic domains (i.e., his birthplace, occupational area, and mission territories).

제 블로그에 전문을 공유할 수 없는 이유로 서론과 결론만 공유합니다.CoverIntroduction 1Introduction 2Introduction 3Introduction 4Conclusion본론을 포함한 전문을 보기 원하신다면 저널 제목에 걸려있는 링크를 따라 들어가세요: Reexamining the Greek-Speaking Ability of Peter in Light of a Sociolinguistic Perspective. 저널을 위해 애써주신 Daniel B. Wallace 교수님, 에디팅에 직접 참여해주신 Stanley E. Porter 교수님, 귀한 피드백을 주셨던  Markus Bockmuehl, Francis Watson, Thomas R. Schreiner, Karen H. Jobes 교수님 등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추신: 그나저나 Ilaria L.E. Ramelli 교수님이 쓴 저널과 함께 출판되어 큰 영광이네요! 🙂

03/11/2019 / Sanghwan A. Lee

아사셀에게 보내진 염소와 예수님

레위기 16장에 보대속죄일에 사용되는 “아사셀에게 보내지는 염소”가 등장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사셀 염소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하는 예식을 치른 후 염소를 진영 밖으로 추방했다. Mishnah Yoma 6.4에는 추방당하는 염소의 털을 뽑으며 다음과 같은 저주를 퍼붓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꺼져라!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사라져라!” 본기록에 따르면 아사셀에게 보내지는 염소는 학대와 저주 속에서 진영 밖으로 추방된다. 그리고 결국 광야에서 죽는다. 이러한 의식은 대속죄일의 속죄 예식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순서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염소 의식을 통해 대속죄가 일어났다는 부분에는 구약의 학자들이 의견일치를 보이지만, 정확히 언제 대속죄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1) 염소가 저주를 받을 때 이스라엘의 죄가 사해졌나? (2) 염소가 진영에서 추방을 당할 때 사해졌나? 아니면 (3) 염소가 광야에서 죽을 때 사해졌나? 이 부분을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위의 과정 중 하나를 통해 대속죄가 일어났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즉, (1) 저주, (2) 추방, (3) 죽임 중 하나를 통해 대속죄가 일어났다는 의미다.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우리를 죄에서 구해주신 예수님께서는 위의 세 가지 과정을 모두 겪으셨다는 것이다. (1)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수염을 뽑히고 저주를 받았다. (2) 진영에서 추방당해 골고다로 보내지셨다. 그리고 (3)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아사셀의 염소가 당하는 (1) 저주, (2) 추방, (3) 죽임을 모두 겪으셨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뭘까? 우리의 죄가 사하여 졌다는 사실을 완전히, 온전히, 반박의 여지가 없이 보여주기 위함은 아닐까? 성경은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시는 모습, 추방을 당하시는 모습, 그리고 돌아가시는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담고 있다. 너무 자세하고 정확하게 담고 있다. 왜? 우리에게 “너희의 모든 죄는 확실히 사해졌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 우리의 죄가 사하여 졌다는 사실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 더이상 죄와 사망과 마귀의 종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예수님의 종이라는 사실만큼 심장이 떨리는 기쁨이 있을까? “예수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찬양합니다. 예배합니다.” 라고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