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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2018 / Sanghwan A. Lee

재키(Jacqueline)의 고구마

오늘 재키 누님께 호출을 받아 댁에 방문했다. 텃밭에 심겨진 고구마를 함께 캐자는 이유였다. 아이들과 함께 고구마를 캐며 시간을 보내던 중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에 보이는 수 많은 고구마들이 오직 하나의 고구마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텃밭에 심은 것은 오직 하나의 고구마였는데, 그 고구마가 저렇게 많은 자녀를 낳았다는 말이다.

 

고구마.jpg

 

큰 충격과 동시에 어제 번역했던 골로새서 1.6이 떠올랐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듣고 참으로 깨달은 그 때부터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이 복음은 세상에서 열매를 맺고 있으며 또한 자라나고 있습니다.” ~개인번역

본문에 있는στν καρποφορούμενον κα αξανόμενον “[ 복음은 세상에서] 열매를 맺고 있으며 또한 자라나고 있습니다 번역했다. 우회적 구조를 일반 동사의 구조와 차별하여 강조적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유? (코이네 헬라어에서 모든 우회적 구조를 강조적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반드시 개인어와 저자의 신텍스를 고려한 후 판단해야 한다.) 골로새서를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우회적 구조가 아주 희귀하게 나타난다. 움직임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부분은 거의 일반동사나 분사로 묘사됐을 뿐이다. 그러므로 서신에서 겨우 번만 나타나는현재형 동사 + 현재형 분사 우회적 구조는 강조적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어떤 강조점일까? 첫째, ‘복음이 세상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 이라는 생명성지금까지 자라나고 있는 이라는 역동성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생명성과 역동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씨앗이었다. 씨앗은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세상의 풍파를 뚫고 역동한다. 결과 세상에 심겨진 복음은 오늘도열매를 맺고 있으며 또한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예부터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말이다. 복음은 정녕 하나님의 능력이자 자존심인게다.

잠시 모습을 돌이켜 본다. 과연 안의 복음은 어떠한가? 내 속에 들어있는 복음이 참이라면 삶을 통해 열매를 맺고 자라나는 것이 옳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렇다면 삶은 그러한가? 입술의 말과 행동을 통해 예수님의 향기가 증거되고 있는가? 모습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점점 변화되고 있는가? 반드시 깊이 숙고해봐야 일임에 틀림없다.

인생에 영향력을 끼친 구고마가 있다. 첫째, 권혁수의 호박고구마. 정말 눈물이 나고 배가 아프도록 웃겼기 때문. 둘째, 재키 누님의 생명성과 역동성이 풍부한 고구마. 큰 충격과 더불어 깊은 깨달음을 줬기 때문. 짧고 짧았던 오늘 훌륭한 레슨을 배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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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2018 / Sanghwan A. Lee

요한복음 1.3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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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πάντα διʼ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καὶ χωρὶς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οὐδὲ ἕν. ὃ γέγονεν,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존재하게 되었고,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 중, 단 하나도 예수님 없이 존재하게 된 것은 없습니다.” ~개인 번역

09/24/2018 / Sanghwan A. Lee

1분 신학: “말씀하시는 성령님”

말씀하시는 성령님.jpg

Written by Sanghwan Lee

09/18/2018 / Sanghwan A. Lee

요한복음 Prologue 분석 (1, 2, 3, 4)

1. 분석 (1)

2. 분석 (2)

3. 분석 (3)

4. 분석 (4)

08/22/2018 / Sanghwan A. Lee

극적 아이러니(Dramatic Irony)

Christos Karakolis는 “The Logos-Concept and Dramatic Irony in the Johannine Prologue and Narrative”에서 요한복음의 Prologue가 독자들에게 끼치는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 논한다. 그의 논지를 간략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Prologue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독자들에게 명확히 설명해 줌으로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사건들—특히 예수님의 정체성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들—을 공관복음을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해석하도록 유도한다.’ 예컨대 예수님의 정체성을 모르는 관계로 그 분을 오해하는 유대적 종교지도자들을 요한복음에서 만날 때, 독자들은 그들에게 분개하거나 적개심을 갖기 보다는 오히려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기게 된다. 독자들은 Prologue를 통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Karakolis는 이런 효과를 “극적 아이러니(Dramatic Irony)”로 표현한다.

Karakolis의 주장은 복음을 이미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행동강령까지 터치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정죄하기전에 먼저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참 좋은 예수님을 함께 알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이미 알고 있는 성도들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