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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6/2018 / Sanghwan A. Lee

성경과 문화 (종교 vs. 수학?)

Annette Punkt Imhausen 교수는 최근에 출판한 책—Mathematics in Ancient Egypt: A Contextual History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6)—을 통해 ‘헬라화의 영향으로 인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가 피차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교류했었고, 이를 통해 수학적 개념들 까지도 자연스레 통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주장은 고대의 파피러스(P BM 10399, P BM 10520, P BM 10794, P Heidelberg 663, etc)의 분석을 통해 상당한 지지를 받는다. 알렉산더 대왕이 남긴 가장 큰 유산, 헬라어가 링구아 프랑카로 사용됐던 시대였던지라 문화적 교류가 활발히 일어났고, 수학도 이러한 흐름의 수혜자였던 것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성경의 저자들도 이러한 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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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코-로만 시대는 요즘처럼 과학, 신학, 철학, 수학 등이 서로 상관없이 동떨어진 과목이 아니었다. 그 시대는 모든 것이 종교적이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관점을 빼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21세기의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수학도 종교적으로 이해됐다. L.C.D. Kulathungam는 “종교와 … 수학은 서로 불간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주장함으로 수학과 종교의 경계선을 허물었고, R. Hunter도 “수학자 프톨레미는 모든 것이 종교적이었던 시대에 살았다”고 주장함으로 수학과 종교라는 이분법을 연대기적 오류로 지적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기독교 진영에서도 지지를 받고 있다: “그레코-로만 시대는 종교와 정치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시대였다.” 물론 수학도 마찬가지다.

 

조금 이른 시대로 가보자. 우리에게 있어서 피타고라스(ca 570—495 BCE)는 단지 수학자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수학자가 아니었다. 21세기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그는 “수학자이자 종교자”였다. “모든 것은 숫자이다”라는 신념을 따랐던 피타고라스. 우주의 비밀을 풀기 위한 비밀의 열쇠가 숫자라고 믿었던 피타고라스. 무리수를 세상의 질서를 파괴하는 괴물로 봤던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증명한 후에 100마리의 소를 잡아 제단에 바쳤던 피타고라스 (추신: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피타고라스가 발견한 공식이 아니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던 공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불리는 이유는 그가 공식을 증명했기 때문). 그가 남긴 거대한 유산은 결국 새로운 주인을 만나 그레코-로만 시대로 흐를 준비를 한다. 바로 플라톤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플라톤은 단지 철학자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21세기적 관점을 고대 시대로 투영하려는 연대기적 오류이다. 플라톤도 단지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수학자이기도 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선생에게 수학을 배웠던 플라톤. 그들의 수학적 영향을 받아 철학을 개진했던 플라톤. “우주의 질서를 이루고 있는 원리”가 곧 숫자라고 믿었던 플라톤. 영혼을 구속의 세계로부터 자유롭게 할 비밀의 열쇠를 수학으로 봤던 플라톤. 종교와 수학을 “다른 과목”으로 보지 않았던 고대의 사람들에게는 지극히도 당연한 사유였다. 이런 사유는 플라톤을 지나 그레코-로만 시대에도 변함없이 수용됐다. 그리고 그레코-로만 시대의 클래시스트들에 의해 더욱 확산됐다. 성경의 저자들도 이런 문화에 노출되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번에는 조금 뒤로 가보자. 어거스틴(354—430 CE)의 “신의 도성”에는 재미있는 부분이 나온다.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완벽한 이유는 6일 동안 창조됐기 때문이라고 논증하는 부분이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6일을 선택하신 이유는 6이라는 숫자에 들어있는 완전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추신: 주지주의와 주의주의 관점으로 이 부분을 바라보면 이해가 더욱 쉽게 될 것이다). 이처럼 어거스틴에게도 종교와 수학은 이분된 개념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 학문이었다. 이처럼 피타고라스(ca 570—495 BCE)에서 어거스틴(354—430 CE)에 이르기까지 종교와 수학을 이분하는 개념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 안에 자리잡고 있는 1세기도 마찬가지이다.

 

가끔씩 성경에 등장하는 숫자에서 상징적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를 “무의미한 것,” “쓸데없는 짓,” “영해주의자들의 성서해석”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만난다. 솔직히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레코-로만 시대의 문화에 관한 책들을 얼마나 읽고 있느냐고. 기독교 진영 밖에 있는 학자들의 그레코-로만 시대의 연구를 얼마나 접하고 있느냐고. 이러한 부분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단지 종교와 수학에 철저한 분리가 있는 21세기적 관점으로 1세기의 문서를 해석하려 한다면 곤란하다. 물론 후대에 발전된 카발라적 관점으로 성경의 숫자를 풀려는 시도는 명백한 연대기적 오류이기에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레코-로만 시대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던 문화를 고려하여 숫자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권장될만한, 아니 마땅히 그래야만하는 시도이지 않을까?

 

월요일 아침, 커피숍에서 요한계시록에 관련된 서적을 읽다가 속상해서 몇자 끼적인다. 숫자에 담겨진 의미들을 문화 속에처 찾으려는 시도를 “unnecessary”라고 단정한 저자. 그가 인용한 책들은 대부분이 이차서적들이고, 기독교 진영 밖의 책들은 단 한권도 없다. 그 흔한 R. Backhum, R. Hurtado의 책만 읽어도 그런 주장은 안할텐데 말이다. 한 챕터씩 비판하고 싶지만 20분 전에 시켜놓은 아메리카노가 식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만 하련다. K. Mathews를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The Bible was not written in a cultural vacuum; it is imperative that the expositor consider its cultural setting in order to recognize the distinctive message of the B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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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1/2018 / Sanghwan A. Lee

배은망덕 (背恩忘德)

우리는 어떤가요?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06/15/2018 / Sanghwan A. Lee

예수님의 사랑

“우리를 [늘, 변함없이, 끝까지, 영원히] 사랑하시고 우리를 그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에서 [이미] 해방시키신 예수 그리스도께…Τῷ ἀγαπῶντι ἡμᾶς καὶ λύσαντι ἡμᾶς ἐκ τῶν ἁμαρτιῶν ἡμῶν ἐν τῷ αἵματι αὐτοῦ (계시록 1.5 필자번역)”

본문은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현재형 문법 구조로 나타나는 유일무이한 구절이다. 물론 과거형 표현이 사용된 문법 구조가 단회적 사건이나 이미 지나간 사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문처럼 ‘관사(Τῷ) + 현재분사(ἀγαπῶντι) + 대명사(ἡμᾶς)’의 실명사적 구조가 ‘관사(Τῷ) + 과거분사(λύσαντι) + 대명사(ἡμᾶς)’의 실명사적 구조와 카이(καὶ)를 사이에 두고 대비를 이루는 문법 구조는 상당히 충격적인 계시를 전달한다. 게다가 관사가 하나만 쓰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대비를 극대화 시키기에 충분하다: 관사(Τῷ) + 현재분사(ἀγαπῶντι) + 카이(καὶ) + 과거분사(λύσαντι). 이런 구조를 고려하여 5절을 번역하면 어떨까?

“우리를 [늘, 변함없이, 끝까지, 영원히] 사랑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에서 [이미] 해방시켜주신 분, 예수 그리스도께!”

현대어 성경은 이러한 뉘앙스를 살려 전반부를 잘 번역 하였다: “늘 우리를 사랑하고 (반면에 후반부는 너무 안타깝게 번역했다).” 카톨릭 성경은 후반부를 잘 번역 하였다: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고 (역시 안타깝게도 전반부는 원인과 결과적으로 번역했다).”

결론? 계시록 1.5는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실패할 수 없는 신적이고 의지적인 사랑, 완전하고 변함없는 사랑, 그리고 영원하고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담고 있다.

사랑의 예수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05/15/2018 / Sanghwan A. Lee

오! 달콤한 교환이여!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와 예수님과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는 마태복음 20.20~22에는 문법학자들의 시선을 끄는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세베대의 어머니의 요구, 즉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요구는 αἰτέω의 능동태형이 쓰인 반면,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는 예수님의 답변은 αἰτέω의 중간태형이 쓰였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αἰτέω의 태를 바꾸신 이유는 무엇일까? 다수의 문법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αἰτέω의 능동태형은 ‘단순한 요구’를 의미하지만 중간태형은 ‘거래적 요구’를 의미한다. 물론 αἰτέω가 모든 책들 속에서 이런 양상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대략적으로 그런 양상을 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이 마태복음 속에는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여러 이유들 중 하나는 세리였던 마태의 업무가 그로 하여금 능동태와 중간태의 미묘한 차이를 다룰 수 있는 훈련을 충분히 제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마태복음 20.20~22에 사용된 αἰτέω가 이러한 양상을 띈다면 어떨까? 재미있는 해석이 만들어진다.

세베대의 어머니는 자신의 두 아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구(αἰτέω의 능동태)했다. 거래가 아닌 단순한 부탁으로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αἰτέω의 중간태형을 사용하심으로 당신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부탁은 거래 혹은 교환이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신 셈이다. 공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자리는 무엇으로 교환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이다.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을 마시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좌우에 앉을 수 있는 표를 얻을 수 있는 교환권이라는 말이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신에 사용된 “ὢ τῆς γλυκείας ἀνταλλαγῆς, 오! 달콤한 교환이여!”가 ‘죄인’과 ‘의인’의 교환이었다면, 본문에 사용된 교환은 ‘예수님의 잔을 마시는 것’과 ‘예수님의 좌우옆에 앉는 것’의 교환인 셈이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다”고 고백한 제자들의 고백을 인정 하신 후에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는 모호한 말씀을 하신다. 혹시 이것은… 예수님의 잔을 마신 세베대의 아들들 뿐 아니라, 그 잔을 마셨던 역사 속의 순교자들, 그리고 앞으로 마실 모든 순교자들도 그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망을 주기 위함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와 아내도 도전해 봐야겠다! ὢ τῆς γλυκείας ἀνταλλαγῆς!

05/13/2018 / Sanghwan A. Lee

하나님의 자기 계시

신약 성경에 6 사용된 ἐξηγέομαι 문맥에 따라 ‘~ 관하여 말하다,’ ‘설명하다,’ ‘묘사하다정도로 이해된다. 1.18d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ἐξηγήσατο하셨다고 증거한다. 표현은 문맥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예수님께서 (1) 하나님에관하여 말씀하셨다’? (2) 하나님을설명하셨다’? 혹은 (3) 하나님을묘사하셨다’? 안타깝게도 (1)~(3) 해석은 문맥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번역이라고 판단된다.

우선 18a 보자. 18a 지금까지 하나님을(ἑώρακεν)”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증거한다. 그러나 18d 하나님을 ἐξηγήσατο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증거한다. 18a 18d 비교하면 ἑώρακεν ἐξηγήσατο 연결되고 있음을 있다. 이럴경우 18d 예수님께서 하나님을보여주셨다 의미로 이해될 있다. , ἐξηγήσατο 단지 ‘~ 관하여 말하다,’ ‘설명하다,’ ‘묘사하다정도의 의미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ἑώρακεν 의해 의미가 확장되어 적게는눈에 보일 정도로 설명해 주시다,’ 많게는생생하고 확실하게 보여주시다정도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는 후자를 취한다. 18b c 예수님을 “μονογενὴς θεὸς ὁ ὢν εἰς τὸν κόλπον τοῦ πατρὸς” 설명하고, 또한 근접 문맥도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을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원격 문맥까지 고려하면 더 큰 설득력을 얻을 수 있겠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만난다. 문맥 속에서 ἐξηγήσατο가 ‘보여주다’로 이해될 수 있다면 ‘보여주다’는 동사를 사용하지 않고 굳이 ἐξηγήσατο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에, 즉 신적 계시 사역까지 포함할 수 있는 단어가 ἐξηγήσατο였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요한은 ἐξηγήσατο를 통해 ‘공생애 기간동안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보여주는 계시의 작업’을 하실 예수님을 프롤로그에 담아내려 했다는 의미다. 공관복음과 비교해 볼 때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표적과 담화가 큰 비중으로 나타난다는 분석은 이런 해석에 힘을 싣는다. (결국 요한의 의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 도마의 고백에서 화룡점정을 찍는다 [요 20.28]). 그러므로 ἑώρακεν과 ἐξηγήσατο는 찰떡궁합이 되는 셈이다. 18절 처럼 말이다! 🙂

그렇다.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에 관해 말씀만 하셨던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에 대해 설명만 하시거나 묘사만 하셨던 분도 아니시다. 이러한 사역은 구약의 선지자들도 감당했었다. 예수님은 달랐다. 그분은 하나님의 현현이셨다. 하나님의 자기계시셨다. 아담과 함께 에덴의 동산을 거니시던 쉐키나의 영광께서 인간의 옷을 입고 우리와 함께 땅을 걸어주시며 하나님을 설명하시고 보여주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영광은 아버지로부터 오신 유일무이하신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의 영광이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듣는다.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을 만난다. 그분은 하나님의 현현이자 하나님의 자기계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