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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1/2017 / Sanghwan A. Lee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우상숭배

GNT 요한복음 13:37과 알렉산드리아 사본 요한복음 13:37에 기록된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를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나타난다. 전자에는 “δύναμαί σοι, 두나마이 소이”로 기록된 베드로의 표현이 후자에는 “δυνασαι μοι, 두나사이 모이”로 필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사자가 실수로 (μ)와 시그마(σ)의 위치를 바꾸어 기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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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NT – λέγει αὐτῷ ὁ Πέτρος· κύριε, διὰ τί οὐ δύναμαί σοι ἀκολουθῆσαι ἄρτι; τὴν ψυχήν μου ὑπὲρ σοῦ θήσω.

M. 02A – [Λ]ε̣γει αυτω Πετρος Κ̅Ε̅ δια τι ου δυνασαι μοι ακολουθησαι αρτι Την ψυχην μου υπερ σου θησω

그러나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처럼 작은 실수가 문장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을 아는가? GNT의 표현을 번역하자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가 왜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까?”가 된다. 그러나 알파벳의 순서가 뒤바뀐 알렉산드리아 사본을 번역하면 “왜 주님이 저를 따를 수 없습니까?”가 된다. 보다시피 전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의미가 되지만, 후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따른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기억하라. 단어나 문장의 위치가 바뀐게 아니다. 겨우 알파벳의 순서가 바뀐것 뿐이다. 그러나 이로인해 족반거상,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지 않고 감히 예수님께 우리의 뒤를 따르도록 요구하는 기형적이고 뒤틀어진 배은망덕한 신앙생활은 “아주 작은 뒤바꿈”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렇다. 우선순위의 뒤바꿈이다. 즉, 첫 번째로 사랑해야 할 대상이신 예수님을 두 번째로 사랑해야 할 대상들과 살짝 바꾸어 놓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주인행세를 하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육안으로는 별로 티가 나지 않는다. 일등과 꼴등의 위치를 바꾼게 아니라 일등과 이등의 위치를 바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예수님을 최고의 우선순위로 모시지 않는 신앙생활은 모두 우상숭배적인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2등의 위치에 놓는 신앙생활이나 꼴등의 위치에 놓는 신앙생활이나 모두 기형적이고 뒤틀어진 배은망덕한 신앙생활이다.

내 삶을 잠시 뒤돌아 본다. 복의 근원이신 예수님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복을 더 많이 사랑하는 일이 내게 있지 않나? 신유의 예수님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신유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일이 내게 있지 않나? 축귀의 예수님보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능력을 더 사모하는 일이 내게 있지 않나? 바로 그것이 내가 깨부셔야할 바알이요, 아세라인 것이다.

02/13/2017 / Sanghwan A. Lee

중고책 성경에 남겨진 아름다운 이야기

절판이 된지 오래된 성경 한권을 구입했다. 역시 중고책 답게 주인의 손때가 가득 묻어 있었고, 오래된 책 냄새가 향수를 자아냈다.

FullSizeRender 3.jpg상태를 점검해 보기 위해 성경 커버를 여는 순간 기대하지 않았던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이슬람의 성경 구절인 수라 47:17이 커퍼 페이지 뒷면에 쓰여 있는 것이 아닌가?

“올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에게 알라의 인도하심이 더해질 것이요, 악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가르침이 주어질 것이라.” – 코란, 수라 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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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헬라어를 아는 이슬람 교도가 성경을 연구한 후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 본성경을 구입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 수록 내 짐작이 맞는듯 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으로 넘어갈 수록 난제라고 여겨지는 부분들에만 밑줄이 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서에 들어온 순간부터 밑줄이 그어진 부분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더이상 난제라고 여겨지는 부분이 아니라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밑줄이 그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분명 난제가 될 만한 부분이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1)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그리스도, (2)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케 하는 중보자 그리스도, 그리고 (3)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 등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성경을 읽어 나가던 옛주인의 관심이 서서히 바뀐것이 아닐까? 아마 그런것 같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 수록 성서적 난제가 아닌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독특성에 밑줄이 그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본성경의 가장 마지막 커퍼 페이지까지 왔다. 놀랍게도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옛주인이 그린 십자가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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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눈물이 났다.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기 시작한 이슬람 교도가 결국 예수님을 만난 것인가? 잃어버린 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이슬람 교도를 찾으신 것일까?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로고스의 하나님께서 이슬람 교도에게 예수님을 보이신 것일까? 정말 그렇기를 바라며, 잠시 그를 위해서 기도했다.

“하나님, 그가 어디에 있던지 이 책을 통해 만났던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01/18/2017 / Sanghwan A. Lee

귀 막힌 목사

나는 단 한 번도 평신도의 신분으로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평신도”란 소위 “사역자 (i.e., 목사, 전도사)”가 아닌 성도들을 일컫는다. 신학교를 다닐 때는 ‘전도사’의 신분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부목사’의 신분으로, 담임을 맡은 후로는 ‘담임 목사’의 신분으로 교회당을 다녔다. 그래서 그랬던지 시나브로 사역자의 관점으로만 교회당의 제반 사항들을 이해하려는 버릇이 생겼더랬다.

담임 목회를 그만 둔지 어느덧 2년 하고도 몇 개월. 이 기간동안 처음으로 평신도의 모습으로 교회당을 다니고 있다. 헌데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게 아닌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듯이 내게 ‘탈-사역자적-관점’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더이상 ‘사역자의 관점’이 아닌 ‘평신도의 관점’으로 교회당의 제반 사항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많이 속상하고 가슴이 아팠다. 목회할 때 전혀 공감되지 않았던 성도들의 아우성이 이제야 비로서 구구절절이 이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던 그들의 부탁들, 웃기지도 않게 들렸던 그들의 당부들, 달갑지 않게 여겨졌던 그들의 외침들은 결국 양들의 울음 소리였던 것이다. 그렇다. 목사인 내가 봤을 때 웃기기만 했던 문제들이 평신도인 내가 봤을 때는 심각한 일이었다. 목사인 내가 봤을 때 사소하기만 했던 문제들이 평신도인 내가 봤을 때는 중대한 일이었다. 목사인 내가 봤을 때 말도 안된다고 여겼던 문제들이 평신도인 내가 봤을 때는 똥줄이 타는 문제였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들을 향해 ‘믿음이 없는 자들,’ ‘교회를 힘들게 하는 자들,’ ‘분란을 초래하는 자들’이라고 너무 쉽게 단죄했었던 것이다. 내게 있었던 비좁은 ‘사역자의 관점’만이 교회당의 제반 사항들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척도일 것이라고 착각했던 무지몽매함의 결과였다.

나의 어리석음과 미련함이 조금씩 이해되고 있는 요즘, “목사”라는 직분의 무게와 중요성에 대해서 곱씹게 된다. 목사는 완벽할 수 없다. 완전해 질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론적 한계를 핑계삼아 성경이 요구하는 선한 목자상을 이루기 위한 달음박질까지 멈출 필요는 없다. 목사는 응당 성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도를 품기 위해 애써야 한다. 성도를 사랑하기 위해 발버둥쳐야 한다. 예수님의 양을 먹이고, 키우고, 보듬고, 사랑하는 것이 목사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선한 목사로 성장하기 위해 사역자들이 노력해야 할 부분들이 많겠지만, 가장 으뜸되는 일들 중에 하나는…

지금 섬기고 있는 성도들의 아우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그 소리가 말 같지 않은 투정처럼 들린다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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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4/2017 / Sanghwan A. Lee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우리들

어제 저녁, 무척 좋아라 하는 아무개 전도사님과 대화를 나눴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던지라 서로의 안녕을 묻는 과정에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 중에 나를 무척 놀래킨 사건 하나가 있었다. 전도사님 본인이 입양된 양자였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처음 접한 순간 무척이나 놀라셨단다. 이해가 됐다. 듣는 나도 크게 놀랐는데, 하물며 전도사님 자신이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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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사님과 대화가 끝난 후 큰 여운이 남아 어두운 공간에 홀로 누워 에베소서 1:5를 묵상했다. “[성부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에 “아들들이 되다”는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υἱοθεσίαν)는 입양이라는 뜻이다. 친자가 아니라 양자를 의미할 때 사용되는 단어라는 말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유일무이하신 독생자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양자들로 선택하사 입양하셨다는 의미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에베소서가 쓰였던 그레코-로만 사회에서 아무개에게 “입양”된다는 사실은 최고의 영광 중에 하나였다는 것이다. 로마인들이 가지고 있던 입양의 개념은 진화론의 자연선택설 매커니즘과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설을 쉽게 설명하자면 자연이 아무나 “선택”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살아있는 여러 생명체들 중 가장 우수하고, 튼튼하고, 건강한 유전자를 추리고 추려내, 그들만 살 수 있도록 “선택”해 준단다. 즉, 여러 생명체 중에 잘난 놈만 뽑아 자식을 삼고, 부족한 놈들은 스스로 도태되도록 버려둔다는 개념이 그레코-로만 시대에 있었던 “양자가 된다”는 의미에 숨겨진 매커니즘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욕문화(Honor and shame)가 크게 지배하고 있던 로마에서 누군가에게 입양됐다는 사실은 자신이 많은 경쟁자들을 이기고 또 이긴 후에 결국 선택되어진 “우월한 유전자”였음을 뽐낼 수 있는 훈장이었던 셈이다.

아울러 로마의 부모들은 비록 친자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가 뛰어나거나 탁월하지 않으면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독보적인 행보를 보이는 타자를 양자로 입양하여 그에게 자신의 가업을 물려줄 정도였다. 놀랍게도 이런 일들은 왕족 가문에서 특히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것 아는가? 로마의 첫 황제였던 아우거스투스도 입양된 양자였다는 것을? 두 번째 황제였던 티베리우스도 아우거스투스에 의해 입양됐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뒤의 황제들인 갈리굴라, 네로, 트라잔, 하드리안, 안토니우스, 아울렐리우스, 그리고 베루스도 모두 입양된 양자들이라는 사실을? 더 놀라운 사실은 황제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입양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보다 “더 우수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판단된 혈통 다른 타자를 양자로 선택하여 황제로 키웠던 것이다.

이런 매커니즘에 의해 구동되는 사회 속에서 쓰인 서신서가 에베소서다. 그런 에베소서 1:5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부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 문장을 읽는 1 세기의 성도들은 두 가지 이유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첫째, 모든 면에 으뜸되고 뛰어난 최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양자 삼으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증거하듯 예수님께서는 로마 황제들의 친아들처럼 탁월하지 못하거나 결핍이 있으신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모든 면에 뛰어나시고 완벽하신 아들, 성자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께는 양자들이 필요 없으셨다. 예수님 한 분 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들을 양자로 입양하셨다는 사실은 1 세기의 독자들을 충분히 충격으로 몰아 넣었을만 하다.

둘째, 탁월하지 못하면 양자로 선택될 수 없던 문화에서 벌레보다도 못한 죄인들이 하나님에 의해 양자로 선택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진화론의 핵심 매커니즘인 자연선택설을 뒤엎으신 것이다! 생각해보라. 어떻게 자랑할 것이 전혀 없는 자들을 양자로 선택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기쁘시게 말이다! 그래서 본문을 읽은 1 세기의 성도들은 이렇게 외쳤을지도 모른다. “이럴수가!  특별하지도 못하고, 탁월하지도 못하고, 걸출하거나, 독특하거나, 으뜸 된 것이 하나도 없는 우리를 양자로 선택하신 이유가 뭐지? 게다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모든 복까지 누리게 하시는 이유가 뭐지? 이게 도대체 어찌된 영문이지? 도대체 왜? 내가 뭐라고? 나같은 벌레가 어찌 이런 과분한 선택을 받았다는 말인가?” 바울도 역시 여러가지 질문을 던졌을 것이 분명하다. “내가? 만삭되지 못하여 태어난 약하고 보잘 것 없는 나… 죄인 중에 괴수인 나…. 나 같은 천한 자가 어찌?” 바로 그 때, 성경은 이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그 분의 양자로 선택이 된것이니 이 모든 과정은 너희가 잘났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하여 주어진 그분의 선물이라 (엡 2:8 의역).”

이런 엄청난 축복을 받은 우리가 은혜에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앞에 언급했던 아무개 전도사님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어제 저녁, 그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처음 입양되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사실을 믿기 어려웠던 큰 이유는 입양된 자신과 입양하신 아버지가 너무 닮았기 때문이란다. 그래. 바로 이것이다. 사랑하면 사랑의 대상을 닮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 입양되신 전도사님께서 입양하신 아버지와 크게 닮게 되어진 이유는 아버지를 너무 깊이 사랑하셨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그 분을 시나브로 닮게 되어진 것은 아닐까?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아버지를 닮은 것은 아닐런지… 성부 하나님에 의해 입양된 우리도 그래야 할 듯 하다. 너무 깊이 사랑하여, 너무 크게 사랑하여 그분이 우리를 입양했다는 사실이 겉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 분을 닮아가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의 삶을 통해 겉으로 보여지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은혜의 보답은 아닐까? 아마… 그런 것 같다.

큰 은혜를 나눠주신 OOO 전도사님께 이 부족한 글을 드립니다.

01/03/2017 / Sanghwan A. Lee

새해 인사

안녕하세요, 블로그 형제, 자매 여러분! 이번에 출시된 유다서: 원문 주해에서 설교까지에 있는 글을 요약해 드림으로 새해 인사를 올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은 영적인 (1) 군의병, (2) 통신병, (3) 특전병, (4) 수송병, (5) 헌병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主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 영적 전쟁에 임하는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혹시 2016년에는 구원 받았다는 사실에만 만족하고 안주하는 나태한 나날들을 보내셨나요? 그렇다면 2017년에는 전신갑주입고 최선을 다해 선한 싸움을 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화이팅!

이상환 - 유다서 주석.png

출처: 이상환, 유다서: 원문 주해에서 설교까지, Candle Theology 2 (Cupertino: GPAC, 2016), 원문주해-인사-71. Android의 Play store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iOS의 App store에서도 곧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