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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2017 / Sanghwan A. Lee

능력의 근원

“Καὶ ἐποίησεν δώδεκα [οὓς καὶ ἀποστόλους ὠνόμασεν] ἵνα ὦσιν μετʼ αὐτοῦ καὶ ἵνα ἀποστέλλῃ αὐτοὺς κηρύσσειν, 예수님께서 열 둘을 세우셨습니다. 저들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있게 하시고 또한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시기 위함입니다. 막 3:14 (필자번역)

본 구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이유를 두 개의 목적절을 통해 설명한다. 첫째는 사도들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함이고, 둘째는 저들이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시기 위함”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또한 복음을 전하도록 선택된 것이다 (14절과 성전 문서와의 연관성, ἀποστέλλῃ와 15절의 부정사와의 관계는 본글에서 생략한다).

우리는 이 짧은 구절을 깊게 묵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있는 부르심의 또 하나의 목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저들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그렇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은 이유는 단지 사역현장에 보내심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보다 훨씬 중요한 것, 즉 예수님과 함께 있기 위함이기도 하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으로부터 하나님을 보고 배워야 했다. 그들이 전할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그 하나님이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부름받은 제자들은 그 시로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하나님을 보고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보고 배운 그 하나님을 전했다. 은과 금도 없던 제자들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을 수 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제자들은 상상 속의 하나님을 전하지 않았다. 인간이 만든 하나님을 전하지도 않았다. 남이 만났던 하나님을 앵무새처럼 읊었던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과 깊은 시간을 보내며 보고 배운 참 하나님을 전했다. 바로 이것이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을 흔들 수 있도록 했던 능력과 권능의 근원이었다. 물론 사역을 위한 제도나 시스템도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맺는 영적 관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제자들의 능력과 권능은 제도나 시스템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제자로 부르신 분과의 친밀하고 각별한 관계를 통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도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또한 우리가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시기 위함”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우리는 단지 사역을 하기 위해 부름받은 노동자가 아니라는 의미다. 그 전에 반드시 선행되고 또한 병행되어야 할 부분이 있으니, 바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예수님과 함께 하며 그분으로부터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전해야 할 대상은 성경의 예수님께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 없이 사역에만 몰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역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위한 사역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많은 성도들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사치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오직 일개미처럼 사역하고 일벌처럼 일하는 것만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유일무이한 목적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씀 앞에서 홀로 서는 시간과 어둠 가운데 조용히 무릎꿇는 시간은 거의 없다. 눈뜨고 감을 때 까지 사역, 사역, 사역이다. 사역이 너무 바빠서 기도하고 말씀과 대화할 시간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큰일이다. 우리가 살펴봤듯이 성도들이 부름받은 이유는 단지 사역전선에 보냄을 받기 위함이 아니다.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며 하나님을 깊게 보고 배워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보고 배운 하나님을 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예수님으로 하나님을 배우는 관계가 선행 및 병행되지 않는 한 우리의 사역은 우리의 의를 위한 사역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사역전선에서 뛰어봤다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성도들의 능력은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로부터 나오지 않던가? 예수라는 이름을 주문처럼 외침으로 능력이 나가는 것도 아니지 않던가? 성구를 외우고, 금식을 하고, 작정기도를 한다고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지 않던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권능과 능력은 우리를 부르신 이,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역에만 눈이 멀어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부터 멀어진다면 우리가 맺는 모든 열매들은 빛좋은 개살구가 될 것이다. 은과 금이 넘치는 교회들이 21 세기를 가득 메우고 있지만, 교회의 수와 비례하게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지 않던가?

나는 말씀을 읽다가 가끔씩 상상한다. 제자들에게 고기를 구워주시는 예수님, 제자들 틈에서 주무시는 예수님, 제자들과 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드시는 예수님, 제자들과 함께 밀밭을 거느시는 예수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예수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시는 예수님, 제자들을 사역전선으로 보내시는 예수님, 사역전선에서 돌아온 제자들을 맞아주시는 예수님, 맞이하신 제자들을 쉬게 하시는 예수님, 제자들에게 다시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을 말이다. 그리고 이런 예수님을 골고루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은 사역전선으로 제자들을 보내시기만 하는 “고용주”가 아니라 (1) 보내시기 전에 함께 하시며 가르치시고, (2) 사역하는 중에도 함께 하시며 가르치시고, (3)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과도 함께 하시며 가르치시는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처럼 단순한 사실에 눈을 돌려 첫단추부터 바르게 끼우고자 한다면 한국 교회는 서서히 저력을 나타낼 수 있으리라 본다.

기억하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탄 케이스—사역을 위한 시스템—가 아니다. 이것은 벌써 충분히 있다고 보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케이스에 들어가야 할 폭약이다. 그 폭약이 무엇인가? 그렇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부터 나오는 복음의 능력이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깊이 교제할 때, 한국 교회는 거룩한 원자폭탄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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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2017 / Sanghwan A. Lee

ὁ καρδιογνώστης

기독교 문서에만 나오는 단어로 ‘마음(καρδία)’과 ‘알고 있는 자(γνώστης)’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ὁ καρδιογνώστης는 ‘타인의 마음을 알고 있는 자’에서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자’까지 확장 해석될 수 있다. 성경과 속사도들의 문서 속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였다. 그렇다면 누구를 지칭하기 위해서 ὁ καρδιογνώστης가 쓰였을까? 그렇다.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연의 깊은 암흑 속에 침전되어 있는 것들은 물론 천길만길 사람 속도 보신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속에도 계시고 전지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이다.

미련한 인간은 무화과 잎사귀로 가리고, 나무 뒤에 숨으면 하나님으로부터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멍청한 인간은 다시스로 떠나면 하나님으로부터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심한 인간은 작은 산들 아래 숨으면 하나님으로부터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자”이시다. 무소부재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속에도 계시고 전지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이런 사실을 기억하며 하루를 사는 것이 참된 성도의 자세가 아닐까?

11/03/2017 / Sanghwan A. Lee

먹이시고 입히시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

ἐμβλέψατε εἰς τὰ πετεινὰ τοῦ οὐρανοῦ ὅτι οὐ σπείρουσιν οὐδὲ θερίζουσιν οὐδὲ συνάγουσιν εἰς  ἀποθήκας, καὶ ὁ πατὴρ ὑμῶν ὁ οὐράνιος τρέφει αὐτά· οὐχ ὑμεῖς μᾶλλον διαφέρετε αὐτῶν; 하늘을 나는 새들을 생각해봐. 심지도, 수확하지도, 창고에 거두어 들이지도 않아. 그래도 너희들의 하늘 아버지께서 먹이시고 계시지. 너희들이 새들과 비교할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는건 아니지?” 마 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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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는 너희들의 하늘 아버지라는 표현이 나온다. 두군데가 특이하다. 첫째, “새들의 하나님이란 표현 대신너희의 하늘 아버지라는 표현이 사용 됐다. 본문은 새들에 관한 내용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흐름상 새들의 하나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늘을 나는 새들을 생각해봐. 심지도, 수확하지도, 창고에 거두어 들이지도 않아. 그래도 새들의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계시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너희들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심으로 문맥의 흐름에 브레이크를 거셨다. 제자들은 브레이크를 통해 전달되는 예수님의 논증을 바로 인지했을 것이다.

(1) 새들을 먹이시는 하나님은 너희의 하늘 아버지.

(2) 새들을 먹이시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들인 너희를 돌보지 않으실까?

(3) 너희들은 새들이 너희의 하늘 아버지 소중한 것과 비교할 없을만큼 소중하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제자들은 깊은 감동에 빠졌을 것이다.

둘째, “너희의라는 속격대명사관사+명사+관사+형용사 (ὁ πατὴρ ὑμῶν ὁ οὐράνιος)구조 사이에 들어가 있다. “너희의 강조하는 구조로 있다. 예수님께서는 새들을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제자들의 하늘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문법 구조와 문맥의 브레이크를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이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상환아, 유경아! 하늘을 나는 새들을 생각해봐. 심지도, 수확하지도, 창고에 거두어 들이지도 않아. 그래도 너희들의 하늘 아버지께서 먹이시고 계시지. 너희들이 새들과 비교할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는건 아니지?”

아멘! 제가 믿습니다!

11/01/2017 / Sanghwan A. Lee

365-Day Prayer Plan (365일 기도 앱)

저스틴 바스 교수님(Justin W. Bass, Ph.D.) 365 기도 앱이 출시됐습니다. 하루에 (아침, 점심, 저녁) 말씀 묵상 기도를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나눴던 주옥같은 신앙 고백도 만나볼 있습니다. 체계적으로 기도하기 원하지만 아직 방법을 찾지 못하셨다고요? 365-Day Prayer Plan 여러분의 길라잡이가 되어줄 것입니다.

“Every year, pray through every single one of the God-breathed prayers of the Scriptures, pray the great prayers of the Saints like St. Augustine, Calvin, Spurgeon, Lewis and Keller, and learn what happened on every day of the year in Church History. Full Church History Timeline included.”

– Morning, Noon, and Evening daily guides to prayer

– Every day of the year, you will have a God-breathed prayer from Scripture to pray, memorize, meditate over, etc. A total of 365 different prayers from the Old and New Testaments and prayers from the great saints of Church History like St. Augustine, St. John Chrysostom, St. Thomas à Kempis, Martin Luther, John Calvin, John Owen, Charles Spurgeon, George Müller, Dietrich Bonhoeffer, CS Lewis, Tim Keller and many others.

– Every day of the year, you will have quotes from the Scriptures and from Church History about prayer, to help set your heart on fire to pray! A total of 365 different quotes about prayer from the Scriptures and the great saints of Church History.

– Every day you have the option to scroll through “This Day in Church History” which tells you significant events that occurred every day of the year. – A full Church History Timeline covering the last 6,000 years is included.

– A daily Bible Reading Plan is also included to read through the entire Bible annually. If you follow it then you will not just read the Bible annually, but also the Gospels 2x annually, all 150 Psalms 5x annually, and the Proverbs at least 11x annually.

– It is $2.99 to download and available for Android and IPhones.

Google Play: 365-Day Prayer Plan (365일 기도 앱)

App Store: 365-Day Prayer Plan (365일 기도 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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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2017 / Sanghwan A. Lee

나는 네가 핍박하고 있는 예수라.” 바울에게 들렸던 예수님의 음성이었다. 핍박을 당하고 있는 하나님으로 당신을 소개하신 예수님. 그것이 다메섹으로 올라가는 바울에게 필요했던 계시였기 때문이다. 상상할 수도 없는 충격을 받은 바울.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기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찾는 시간이었으리라.

성경에는 바울이 자신의 과거를 언급하는 부분이 4 등장한다.

내가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 22:4)”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많은 성도들을 옥에 가두며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모든 회당에서 여러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26:9-11)”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이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 1: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딤전 1:13)”

특이한 점은 딤전 1:13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사용된 동사의 애스팩트가 거의 임퍼펙티브라는 것이다. 예컨데 22:4 경우 일반과거형 동사를 현재형 분사로 수식하는 구조를 선택했다. 26:11 경우 개의 현재분사와 개의 미완료 동사가 사용됐다. 1:13 경우 역시 개의 미완료 동사가 나타난다. (물론 미완료 동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따라 뉘앙스는 달라질 있다 [e.g., ἐδίωκον, ἐπόρθουν]). 하지만 바울이 자신의 과거를 언급할 임퍼펙티브 애스팩트 동사를 주로 사용했다는 부분을 놓치면 안된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바울이 회심 전에 저질렀던 죄는 비록 오래 전의 사건이지만 바울은 그것들을 생생히 기억하며 기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던 예수님, 즉 그의 삶을 찢고 당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은 핍박받고 계셨던 하나님이셨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바울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다고 없다. 그는 은혜의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알았던 사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만행을 아무렇지도 않은듯 지우지 않았다. 잊으려고 애써 노력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과감히 밝히며 그러했던 자신을 완전히 변화시킨 복음의 능력을 자랑했다. 그에게 과거의 만행이 임퍼펙티브 애스팩트로 기억되고 있듯이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도 임퍼펙티브 애스팩트로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상상할 없는 죄인이었다. 바울처럼 과거의 만행들이 임퍼펙티브 애스팩트로 기억되어 진다. 그러나 바울처럼 담대하지는 않기 때문에 과거를 당당히 밝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것은 바울이 만났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 이로인해 임퍼펙티브 애스팩트의 힘으로 수나미처럼 밀려오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나는 날마다 구원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끊이지 않고 마르지 않는 은혜는 영원 속에서 터져나와 영원 속으로 회귀해 들어가는 임퍼펙티브 애스팩트이기 때문이다.

며칠간 본문을 묵상하며 떠오른 질문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과거 무엇일까? 은혜라는 지우개로 단번에 지워버릴 있는연필로 낙서정도 일까? 혹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죄책감을 불어일으키는주홍글씨일까?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과거는 단지 뿐이다. 달고 다니면 악취를 풍기지만 거름으로 사용하면 귀한 열매를 맺게하는.”

바울에게도 똥이 있었다. 똥은 거름이 되어 죄인 중에 괴수인 바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달음박질하게 했다. 푯대를 향하여 전력질주하게 했다. 기억 마다 뛰게 했고, 생각 마다 뛰게 했다. 바울은 똥을 자랑하지 않았다.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잊지 않았다. 오히려 죽어 마땅한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하여 똥을 거름으로 사용했다. 전력질주를 위한 촉매제로 말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에게 똥이 있다. 혹자는 똥을 매일 달고 다니며 냄새에 시달린다. 혹자는 똥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뻔뻔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똥을 없었던 것처럼 여기거나 훈장처럼 달고 다녀서는 안된다. 똥을 똥으로 인식하여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마땅한 태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똥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바른 태도인가?

그렇다. 거름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선한 싸움의 촉매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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