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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5/2018 / Sanghwan A. Lee

오! 달콤한 교환이여!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와 예수님과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는 마태복음 20.20~22에는 문법학자들의 시선을 끄는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세베대의 어머니의 요구, 즉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요구는 αἰτέω의 능동태형이 쓰인 반면,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는 예수님의 답변은 αἰτέω의 중간태형이 쓰였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αἰτέω의 태를 바꾸신 이유는 무엇일까? 다수의 문법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αἰτέω의 능동태형은 ‘단순한 요구’를 의미하지만 중간태형은 ‘거래적 요구’를 의미한다. 물론 αἰτέω가 모든 책들 속에서 이런 양상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대략적으로 그런 양상을 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이 마태복음 속에는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여러 이유들 중 하나는 세리였던 마태의 업무가 그로 하여금 능동태와 중간태의 미묘한 차이를 다룰 수 있는 훈련을 충분히 제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마태복음 20.20~22에 사용된 αἰτέω가 이러한 양상을 띈다면 어떨까? 재미있는 해석이 만들어진다.

세베대의 어머니는 자신의 두 아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구(αἰτέω의 능동태)했다. 거래가 아닌 단순한 부탁으로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αἰτέω의 중간태형을 사용하심으로 당신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부탁은 거래 혹은 교환이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신 셈이다. 공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자리는 무엇으로 교환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이다.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을 마시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좌우에 앉을 수 있는 표를 얻을 수 있는 교환권이라는 말이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신에 사용된 “ὢ τῆς γλυκείας ἀνταλλαγῆς, 오! 달콤한 교환이여!”가 ‘죄인’과 ‘의인’의 교환이었다면, 본문에 사용된 교환은 ‘예수님의 잔을 마시는 것’과 ‘예수님의 좌우옆에 앉는 것’의 교환인 셈이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다”고 고백한 제자들의 고백을 인정 하신 후에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는 모호한 말씀을 하신다. 혹시 이것은… 예수님의 잔을 마신 세베대의 아들들 뿐 아니라, 그 잔을 마셨던 역사 속의 순교자들, 그리고 앞으로 마실 모든 순교자들도 그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망을 주기 위함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와 아내도 도전해 봐야겠다! ὢ τῆς γλυκείας ἀνταλλαγῆ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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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2018 / Sanghwan A. Lee

하나님의 자기 계시

신약 성경에 6 사용된 ἐξηγέομαι 문맥에 따라 ‘~ 관하여 말하다,’ ‘설명하다,’ ‘묘사하다정도로 이해된다. 1.18d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ἐξηγήσατο하셨다고 증거한다. 표현은 문맥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예수님께서 (1) 하나님에관하여 말씀하셨다’? (2) 하나님을설명하셨다’? 혹은 (3) 하나님을묘사하셨다’? 안타깝게도 (1)~(3) 해석은 문맥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번역이라고 판단된다.

우선 18a 보자. 18a 지금까지 하나님을(ἑώρακεν)”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증거한다. 그러나 18d 하나님을 ἐξηγήσατο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증거한다. 18a 18d 비교하면 ἑώρακεν ἐξηγήσατο 연결되고 있음을 있다. 이럴경우 18d 예수님께서 하나님을보여주셨다 의미로 이해될 있다. , ἐξηγήσατο 단지 ‘~ 관하여 말하다,’ ‘설명하다,’ ‘묘사하다정도의 의미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ἑώρακεν 의해 의미가 확장되어 적게는눈에 보일 정도로 설명해 주시다,’ 많게는생생하고 확실하게 보여주시다정도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는 후자를 취한다. 18b c 예수님을 “μονογενὴς θεὸς ὁ ὢν εἰς τὸν κόλπον τοῦ πατρὸς” 설명하고, 또한 근접 문맥도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을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원격 문맥까지 고려하면 더 큰 설득력을 얻을 수 있겠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만난다. 문맥 속에서 ἐξηγήσατο가 ‘보여주다’로 이해될 수 있다면 ‘보여주다’는 동사를 사용하지 않고 굳이 ἐξηγήσατο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에, 즉 신적 계시 사역까지 포함할 수 있는 단어가 ἐξηγήσατο였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요한은 ἐξηγήσατο를 통해 ‘공생애 기간동안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보여주는 계시의 작업’을 하실 예수님을 프롤로그에 담아내려 했다는 의미다. 공관복음과 비교해 볼 때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표적과 담화가 큰 비중으로 나타난다는 분석은 이런 해석에 힘을 싣는다. (결국 요한의 의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 도마의 고백에서 화룡점정을 찍는다 [요 20.28]). 그러므로 ἑώρακεν과 ἐξηγήσατο는 찰떡궁합이 되는 셈이다. 18절 처럼 말이다! 🙂

그렇다.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에 관해 말씀만 하셨던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에 대해 설명만 하시거나 묘사만 하셨던 분도 아니시다. 이러한 사역은 구약의 선지자들도 감당했었다. 예수님은 달랐다. 그분은 하나님의 현현이셨다. 하나님의 자기계시셨다. 아담과 함께 에덴의 동산을 거니시던 쉐키나의 영광께서 인간의 옷을 입고 우리와 함께 땅을 걸어주시며 하나님을 설명하시고 보여주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영광은 아버지로부터 오신 유일무이하신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의 영광이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듣는다.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을 만난다. 그분은 하나님의 현현이자 하나님의 자기계시이기 때문이다!

05/12/2018 / Sanghwan A. Lee

ρ̅ν̅γ̅

풀러 신학교의 GEL 교수인 Donald A. Hagner 공관복음이역사적 > 신학적구도로 쓰였다면 요한복음은신학적 > 역사적구도로 쓰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프레임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일치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해결할 있는 틀을 제공한다. 독자에 따라 신학성과 역사성에 부여하는 배율에 차이가 있을 있겠지만, 배율을 바르게 잡을 경우 마리의 토끼를 잡게 되는 셈이다. 물론 이상적인 기대지만 말이다.

잠시 요한복음의 Epilogue 기록된 수수께끼 숫자, 153 떠오른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 역사적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신학적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혹은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배율을 어느정도로 둬야 하는가? 아니면… 153표적(σημεῖον)” 관점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153 헬라어 알파벳으로 바꾸어봤다. ρ̅ν̅γ̅ 나왔다. ρ̅ν̅γ̅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파피러스 122 153 ρ̅ν̅γ̅ 기록되었음을 발견했다. 신기했다. 그렇다면 ρ̅ν̅γ̅ 어떤 의미로 풀어야 하나? 아크로스틱 혹은 애너그램으로 풀어야 하나? 그렇다면 ρ̅ 무엇을 의미하나? ν̅ γ̅? 아니면 게마트리아로 풀어야 하나?

 

Papyrus122.jpg

 

주일 설교를 끝내고, 주보를 끝내고, 심방을 끝내고, 내일 성도들이 먹을 음식 배달을 끝내고, 다음 강의 준비를 끝내고, 오랜만에 찾아온 시간의 여유이런 답없는 상상을 하며 보내는 시간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보상의 시간이다. 주님, 감사합니다~  🙂

 

이렇게 토요일 저녁을 맞이한다.

05/12/2018 / Sanghwan A. Lee

ὑψόω

“들어 올리다” 정도로 번역되는 ὑψόω는 요한복음에 5번 등장한다 (3.14; 8.28; 12.32, 34). 재미있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모습을 의미하기 위해 본단어가 사용됐다는 것. 이상하다. 요한은 ‘십자가에 못박다’는 의미의 단어들(i.e., σταυρόω, προσηλόω, προσπήγνυμι)을 제치고 ‘들어 올리다 (ὑψόω)’를 선택한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ὑψόω에 담겨있는 중의적 뜻 때문으로 보인다. ὑψόω는 공간적으로 ‘들어 올리다’ 뜻 외에 공경과 존경의 의미로 ‘높이다’는 뜻이 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ὑψόω 되신다는 의미에는 문자적으로 ‘들려진다’는 뜻이 있지만 영적으로는 ‘존경과 공경을 받기에 합당한 자리로 높여지신다’는 뜻도 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재림의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로마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수치와 치욕의 상징이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저주와 버림의 상징이었다.하지만 우리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기쁨과 즐거움의 상징이다. 복음은 결단코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05/10/2018 / Sanghwan A. Lee

침례 요한의 페리코페(περικοπή)

요한복음의 ‘프롤로그 (1.1~18)’와 ‘표징들의 책 (2.1~12)’ 사이에 위치한 ‘침례 요한의 페리코페 (1.19~51)’에는 성자 하나님의 호칭이 무려 12개 이상이 등장한다: (1) 예수 (Ἰησοῦς), (2) 하나님의 어린양 (ὁ ἀμνὸς τοῦ θεοῦ), (3) 세상 죄를 짊어지신 자 (ὁ αἴρων τὴν ἁμαρτίαν τοῦ κόσμου), (4) 성령 침례자 (ὁ βαπτίζων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5) 하나님의 아들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6) 침례 요한의 뒤에 오시는 분 (ὁ ὀπίσω μου ἐρχόμενος), (7) 바리새인들이 알지 못하는 분 (ὃν ὑμεῖς οὐκ οἴδατε), (8) 랍비 (ῥαββί), (9) 그리스도 (Χριστός), (10) 메시아 (Μεσσίας), (11) 이스라엘의 왕 (βασιλεὺς τοῦ Ἰσραήλ), (12) 사람의 아들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신약의 페리코페들 중에서 성자 하나님의 호칭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페리코페(περικοπή)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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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있다. 왜 ‘침례 요한의 페리코페’에 성자 하나님의 호칭이 이처럼 많이 등장하는 것일까? 왜 요한복음에 사용된 성자 하나님의 호칭이 이곳에 거의 모두 집약되어 나타나는가? 혹시 공관복음과는 다른 관점으로 침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을 대비시키려는 사도 요한의 의도적 프레임은 아닐까? 이럴경우 페리코페 안에 두루두루 뿌려진 성자 하나님의 호칭들은 다음과 같은 아우성 소리를 낸다. 

 

‘침례 요한의 사역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준비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예수님의 사역은 물로 침례를 주는 침례 요한의 사역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역입니다!’ ‘세상 죄를 짊어지시는 예수님의 사역은 세상 죄를 고발만 할 수 있었던 침례 요한의 사역과는 전혀 다른 사역입니다!’

 

침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는 Continuity와 Discontinuity가 존재한다. 공관복음이 Continuity를 잘 그려냈다면 요한복음은 Discontinuity를 잘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 정말 놀랍고 위대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