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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2016 / Sanghwan A. Lee

ὀργίζεσθε καὶ μὴ ἁμαρτάνετε (엡 4:26)

두 개의 명령어가 και 로 연결되어 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화를 내라 그리고 죄를 짓지 마라”가 되지만 (1) 두 개의 명령어가 και로 연결되어 있을 경우 대개 앞에 배열된 명령어는 양보나 조건의 의미를 갖게 되고 (2) 뒤에 배열된 명령어는 앞에 있는 명령어 보다 시간적으로 후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의미하게 된다. 이런 문법적인 특성을 고려한다면 “비록 화가 난다 할지라도 죄는 짓지 말이라”에서부터 “지금 화가 난다 할지라도 죄를 짓는데 까지 가지는 말아라” 정도로 확장해석 될 수 있다 (Robertson, Porter). 물론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ὀργίζεσθε를 단순 명령법으로 이해하여 “화를 내라 그러나 죄를 짓지는 말이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Wallace, Fantin). 중요한 사실은 두 개의 해석 모두 “화”와 “죄”를 분리시키고 있기 때문에 문장에 등장하는 “화”는 거룩한 화, 즉 악을 보고 느끼는 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Baugh). 이럴 경우 문장의 강세는 응당 “죄를 짓지 말라”는 부분에 떨어지게 된다. 즉, 화가 난다 할지라도 죄를 범하는데 까지는 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성도이기 때문에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보고 거룩한 화를 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때때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여 정죄하는 말, 단죄하는 말, 비방하는 말, 비난하는 말 등으로 거룩한 화를 둔갑시켜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도이기 때문에 거룩한 화를 내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화의 목적은 상대방을 회개케 하여 돌아오게 하는 것인지라 죄인들을 정죄, 단죄, 비방, 비난하여 난도질 하는데 화를 사용해서는 안된다. 거룩한 화는 거룩한 행동으로 귀결되야만 한다는 말이다.

끝으로 본문에 사용된 두 개의 명령어가 현재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왜 현재형으로 쓰였을까?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이 매일 자신과 싸우며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켜야 함을 넌지시 보여주기 위함은 아닐까?

09/18/2016 / Sanghwan A. Lee

부유한 믿음으로…

“Εὐθὺς (즉시) ὁ πατὴρ τοῦ παιδίου (아이의 아버지가) κράξας … ἔλεγεν (소리를 질러 이르되) ‘Πιστεύω (제가 믿고 있습니다). βοήθει (계속 도와주세요!) μου τῇ ἀπιστίᾳ (저의 믿음 없음을)” – 막 9:24

“계속 도와 주소서”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현재 명령형이다. 문맥상 과거 명령형이 나올 것 같지만 특이하게도 현재 명령형이 나왔다. 아버지는 자신의 믿음이 계속 시험을 당할 것이기 때문에 더 큰 믿음을 향해 꾸준히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예수님의 지속적인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던 듯 하다. 혹은 동사의 양상으로 볼 때 과거에도 믿음에 관해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던 아버지가 그 경험을 근거로 이번에도 도와 달라고 표현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자신의 연약한 믿음을 자라게 해 주셨던 예수님께 또 다시 의지하며 이번에도 도와 달라고 부탁한 것이 된다. 물론 문맥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현재 명령형이 쓰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아버지는 자신의 믿음 없는 상태가 예수님의 지속적인 도우심이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백했다.

즉시 … 소리를 질러 이르되 ‘제가 믿고 있습니다. 저의 믿음 없음을 지속적으로 도와주세요!’

후대 사본에는 아버지가 소리만 지른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렀다고 되어 있다. 믿음 없음에 대한 부분을 고침 받고자 하는 절박함을 극대화 하기 위해 “눈물을 흘렸다 (μετὰ δακρύων)”는 표현이 첨가된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부분은 물질, 건강, 직업, 학업, 인간관계 부분만이 아니다. 믿음에 관한 부분에 까지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 작은 믿음에서 큰 믿음으로 나가게 해 달라고, 가난한 믿음에서 부유한 믿음으로 나가게 해 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간구해야 한다.

혹시 우리들의 간구 기도의 목록에 “믿음”이 빠져 있다면 지금 당장 “믿음”을 넣자. 그리고 오늘부터 더 큰 믿음으로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자.

예수님! 저의 믿음 없음을 지속적으로 도와주세요!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해 드리는 큰 믿음을 갖기 원합니다!

09/16/2016 / Sanghwan A. Lee

Wisdom Listens, Knowledge Speaks

신학과 더불어 오랜 시간을 보내다보니 몇 가지 생각의 변화가 생긴다. 그 중에 하나는 예전에 중요하지 않게 보였던 논증들이 이제는 중요하게 생각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예전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무식했기 때문에 중요한 논증이 중요하지 않게 보였던 것이다.

알빈 플랜팅가의 제자였던 더글라스 블런트 교수님의 수업을 듣다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블런트 왈, “철학 학부생들은 존재론적 논증을 가장 하찮은 신존재 논증으로 여겨 무시합니다. 그러나 철학 석사생들은 존재론적 논증을 어느정도 높이 삽니다. 그러나 철학 박사생들은 존재론적 논증을 가장 탁월한 논증으로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학부를 거처 석사를 지나 박사 과정까지 이르면서 비판적 사고 능력이 점점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다. 무식하면 좋은 논증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찮게 여길 경우가 높다. 그러나 지혜와 지식이 점점 자람에 따라 논증의 깊이가 이해되기 시작하여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지금 내가 거들떠 보지도 않는 하찮은 논증들이 있다면 내가 무식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거울일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칼비니스트들은 정말 “극단적인 교리주의자”들인가? 알미니안들은 항상 “무식한 논증들”만 만드는가? 몰리니스트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박쥐”들인가? 세대주의자들은 참으로 “극단적 종말론자”들인가? 언약 신학자들은 “성경을 볼 줄 모르는 바보”들인가? 톰 라이트는 지옥에서 보낸 “개혁 신학을 무너뜨리는 악마”인가? 더글라스 무는 “꽉 막힌 보수주의자”인가?

안타깝게도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의 글을 읽어보면 상대방 진영의 논리를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한채 무작정 비판부터 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전형적인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인 셈이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책읽기를 귀찮아 하는 자들이 비전문적인 웹사이트에 포스팅된 이런 자들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들의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군중심리들은 허수아비 공격을 마녀 사냥으로 둔갑시켜 버린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영국에 다음과 같은 속담이 있다: Wisdom Listens, Knowledge Speaks. 지혜는 듣고, 지식은 말한다는 의미이다. 지혜와 엮어진 들음이 먼저 나오고 지식과 엮어진 말하기가 다음에 나온다는 부분에 주목하자. 말하기 전에 먼저 들으라는 것이다. 먼저 들은 후에 말하라는 것이다. 왜? 바르게 들어야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얻고, 지혜를 얻어야 바르게 말할 수 있는 지식이 생기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자세로 논증에 임한다면 이곳 저곳에 우후죽순으로 올라오는 쓰레기 논증들의 90%는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Wisdom Listens, Knowledge Speaks.
참으로 나와 너에게 경종을 울리는 문구가 아닐 수 없다.

07/20/2016 / Sanghwan A. Lee

예수님을 낚는 리더

Καὶ εὐθὺς ἔτι αὐτοῦ λαλοῦντος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시는 중에
παραγίνεται Ἰούδας εἷς τῶν δώδεκα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다
καὶ μετʼ αὐτοῦ ὄχλος μετὰ μαχαιρῶν καὶ ξύλων 검과 몽치를 갖고 있는 무리들과 함께 (막 14:43)
의역: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열두 제자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검과 몽치를 들고 있는 무리들을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다.

막 14:43에는 특이한 문법 구조가 나타난다. (1) 문장의 주어가 둘(Ἰούδας, ὄχλος)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받는 동사가 단수형(παραγίνεται)이고, (2) 첫번째 주어(Ἰούδας)와 두번째 주어(ὄχλος)가 술부를 사이에 둔채 멀리 떨어져 등장한다. 이럴경우 첫 번째 주어가 두 번째 주어를 이끌거나 대표하는 동사의 주체로 해석된다. 즉, 본문은 가룟 유다를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을 대표하는 악자로 클로즈업 하고 있는 셈이다. (3) 게다가 문장의 서두에 예수님을 주어로 받는 독립속격 구조(αὐτοῦ λαλοῦντος)가 나타나고 있어 말씀 중이신 예수님의 신적 사역을 방해하는 악한 리더로 가룟 유다가 부각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본문이 (1), (2), (3)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자명하다.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갔던 주동자가 가룟 유다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을 낚는 리더로 부름받는 자가 세상의 사리사욕에 이끌려 예수님을 낚는 리더로 변질됐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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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께 향했던 리더들은 두 종류다. 선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향해 무리를 이끄는 리더와 악한 목적으로 이끄는 리더이다. 비록 양쪽 다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을 향해 간다는 현상은 같지만 그 이유와 목적은 전혀 다르다. 한쪽은 예수님께 잡히기 위해서 가지만 다른 쪽은 예수님을 잡으러 간다. 그러므로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을 향해 가고 있는 리더들은 자신이 리더질을 하는 이유와 목적을 매일 검증함으로 자신의 소명을 재차 확인하고 삶을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순수한 목적으로 리더질을 시작한 자들이 불온하게 변화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특히 목사들과 성경 교사들은 이 부분에 민감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이끄는 무리들은 예수님께 향하고 있다. 심판하실 그분을 향해 간다는 현상 만큼은 다른 리더들의 사역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무슨 목적으로 무리를 이끌고 있는가? 나를 내려놓고 예수님께 잡히기 위함인가 혹은 나를 높이기 위해 그분을 잡기 위함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늘 던져봄으로 자신이 부름받은 이유와 목적을 쉬지않고 마름질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불꽃과 같은 눈으로 무리를 이끌고 있는 리더들을 주목하시며 그들의 행동에 책임을 물으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며 말이다.

07/13/2016 / Sanghwan A. Lee

유레카!

“유레카!” 새로 만들어진 왕관이 순금인지 아닌지를 찾아오라는 왕의 어려운 명령을 받고 전전긍긍하던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후에 외쳤던 표현이다. 워낙 유명하고 극적인 이야기에 등장하는 표현인지라 (1) 오랫동안 고민해오던 문제의 답을 찾았거나 (2) 아주 특출하고 걸출한 보석 등을 찾았을 때 외치는 세계적인 관용어로 쓰이게 됐다. 한국적인 사례에 빚대어 설명하자면 심마니가 500년 묵은 산삼을 찾아 몇날며칠, 혹은 수십년을 불철주야 목숨걸고 고생하다가 가까스로 삼을 찾은 후에 외치는 “심봤다” 정도일 듯 싶다.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유레카”는 헬라어 동사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찾다”는 의미의 동사형인 휴리스코(εὑρίσκω)의 완료형이 유레카(εὒρηκά)이다. 헬라어에서 완료형 동사는 동작보다 상태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아르키메데스가 외친 “유레카”는 (1) 그가 오랫동안 고민해오던 문제의 답을 찾은 상태, 혹은 (2) 오랫동안 찾아 헤메이던 대상을 찾은 상태를 강조하는 표현이 된다. 그가 동작에 강세가 주어지는 일반과거형 동사(εὗρον)를 쓰지 않고 완료형 동사(εὒρηκά)를 사용한 부분에서 홀가분하게 자유하고 있는 그의 상태를 엿볼 수 있다. 얼마나 좋았으면! 

나에게도 완료형 동사인 유레카를 외쳤던 경험이 두 번 있다. 처음은 아르키메데스처럼 오랫동안 고민하던 문제의 답과 심마니처럼 아주 특출하고 걸출한 보석을 찾았을 때였다. 그때가 언제인지 아는가? 내  존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였다. 영혼을 얽매고 있던 더러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소망도 없이 발악하고 있을 그 때,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짊어지신 어린 양으로 나타나셨다. 개와 돼지보다 더 지저분한 시궁창 인생을 살던 내게, 죄인을 깨끗케 하시는 유일한 생명수로 주님께서 나타나셨다. 영혼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해 절대로 천국을 살 수 없는 내게, 세상을 열번 팔아도 도저히 살 수 없는 값진 보석으로 그 분께서 나타나셨다. 이처럼 존귀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내 영혼은 유레카를 외쳤다. 그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는 내 영혼의 상태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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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정한 유레카는 그 다음에 외쳐졌다. 그때가 언제인지 아는가? 내가 예수님을 능동태 적으로 찾은 것이 아니라 그분에 의해 수동태 적으로 찾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였다. 즉, 내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찾으셨다는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 그 순간, 내 영혼은 목놓아 유레카를 외쳤다.

“예수님께서 나를 먼저 찾으셨다는 사실을 찾았다! 나는 예수님에 의해 먼저 발견되어졌고, 그로인해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상태에 있음을 발견했다!”

길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이곳 저곳을 다니시는 예수 그리스도. 늦은 밤 그 분에 의해 발견되고 구출되는 절벽 위의 양. 그러나 이제는 그분의 품에 안겨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 만약 당신이 그 양이라면 알 것이다. 진정한 유레카는 예수님에 의해 발견되어진 우리가 지금은 그 분의 품 속에서 깊은 평안을 누리고 있는 상태에 있다는 엄청난 사실에 의해 만들어지는 고백임을 말이다!

εὒρηκ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