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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2018 / Sanghwan A. Lee

ι̅β̅ vs δωδεκα

시내사본 마가복음 필사자는 숫자 개의 다른 형태로 사용했다. 첫째는 숫자 의미하는 듀오(δύο) 의미하는 데카(δέκα) 합성어인 도데카(δώδεκα)이고, 둘째는 도데카의 축약형인 ι̅β̅ 이다 (이오타[ι] 의미하고 베타[β] 의미하기 때문에 ι̅β̅ 된다). 얼핏보면 δώδεκα ι̅β̅ 특별한 의미없이 이표동의(異表同義)적으로 사용된 것처럼 보이지만, “ 제자들 등장하는 문맥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차이가 발견된다. 가룟 유다가 근접 문맥에 등장하지 않는 구절(3.14, 16; 4.10; 6.7; 9.35; 10.32; 11.11)에는 ι̅β̅ 쓰인 반면 유다가 앞뒤 4 단어 이내에 등장하거나(14.10, 43) 가룟 유다를 특정하는 구절(14.17, 20)에서는 δώδεκα 쓰였다.

ι̅β.png

ι̅β 쓰인

Και εποιησεν ι̅β̅ ους και αποστολους ωνομασεν ινα ωσι μετ αυτου και ινα αποστελλη αυτους κηρυσσει (3.14)

και εποιησεν τους ι̅β̅ και επεθηκεν ονομα τω Σιμωνι Πετρον (3.16)

Και οτε εγενετο κατα μονας ηρωτουν αυτον οι περι αυτον συν τοις ι̅β̅ τας παραβολας (4.10)

Και προσκαλειται τους ι̅β̅ και ηρξατο αυτους αποστελλιν δυο δυο και εδιδου αυτοις (6.7)

Και καθισας εφωνησεν τους ι̅β̅ και λεγει αυτοις Ει τις θελει πρωτος ειναι εστε παντω εσχατος και παντων διακονος (9.35)

παραλαβων παλιν τους ι̅β̅ ηρξατο αυτοις λεγιν τα μελλοντα αυτω συμβαινιν (10.32)

Και εισηλθεν ις Ιεροσολυμα εις το ιερον και περιβλεψαμενος παντα οψε ηδη ουσης της ωρας εξηλθεν εις Βηθανιαν μετα των ι̅β̅ (11.11)

δώδεκα 쓰인

Και Ιουδας Ισκαριωθ εις των δωδεκα απηλθεν προς τους αρχιερις ινα αυτον παραδω αυτοις (14.10)

Και οψιας γενομενους ερχεται μετα των δωδεκα (14.17)

Ο δε ειπεν αυτοις Εις των δωδεκα ο εμβαπτομενος μετ εμου εις το τρυβλιον (14.20)

Και ευθυς ετι αυτου λαλουντος παραγεινεται Ιουδας εις των δωδεκα και μετ αυτου οχλος μετα μαχαιρων και ξυλων παρα των αρχιερεων και των γραμματεων και πρεσβυτερων (14.43)

가룟 유다의 배반이 기록된 14장에 사용된 모두 δώδεκα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 Amy Myshrall 주장처럼 적어도 4명의 필사자가 시내사본을 필사했다면 마가복음에 등장하는숫자 놀이 특정한 필사자의 장난 혹은 신학적 장치로 설명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의 필사자는숫자 놀이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던 것일까? 노미나 세크라의 축약법을 프레임 삼아 ι̅β̅ 이해하도록 유도한 것일까? 그렇다면 사본을 보는 자들로 하여금 이라는 거룩한 그룹에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신학적 가르침을 받도록 유도한 것일 수도 있겠다. 마치 거룩한 “교회당 다닌다고 해서 모든 자들이 “성도”는 아닌 것처럼 말이다. 물론 나의 상상의 날개가 너무 크게 펼쳐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언제나 느끼는 부분이지만사본의 세계는 무척 깊고, 넓고, 오묘하다. 아직 탐험이 백 분의 일도 못끝난 미지의 세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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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2018 / Sanghwan A. Lee

STM 논문

오늘 Google Books에서 소논문 출판 소식이 왔네요. 지도 교수님이셨던 다니엘 왈라스와 함께했던 (고통스러웠지만 무척 행복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갔습니다. ㅎㅎ 사소한 부분 하나 하나까지 이잡듯이 뒤지며 꼼꼼하게 지도해 주셨던 교수님이 보고싶은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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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2018 / Sanghwan A. Lee

한 여름 밤의 꿈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행 19.19

마술을 행하는 자들이 가져온 “그 책 (τὰς βίβλους)”은 단순히 마술책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술책은 물론 금, 은, 보석등 값비싼 재료들로 만들어진 부적등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용어(Ἐφέσια Γράμματα)라고 대다수의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런 부적들의 가치를 환산하니 “은 오만”이나 됐다. 여기에 사용된 “은”이 데나리온을 의미한다면 한 사람이 137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 액수를 의미한단다. 놀랍게도 예수님을 만난 에베소 사람들은 그만한 가치의 물건을 버렸다. 그 이유가 뭘까? 기독교가 요구하는 참된 신앙에는 버림도 있기 때문이다.

 

바울.jpg

그렇다. 참된 신앙은 버리는 것이다. 무엇을 버리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거룩한 것을 취하는 대신 부정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높은 것을 취하는 대신 낮은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귀한 것을 취하는 대신 저질스러운 것들을 버리는 것이다. 그 어떠한 경제적 손실, 육체적 고통, 지위의 하강이 온다손 치더라도 주께서 원치 아니하시는 것들을 미련없이 버리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오호라, 그렇구나. 기독교는 예수님을 취하는 대신 예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들을 버리는 종교인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아니, 나는 어떤가? 그리고 당신은 어떤가? 버려야 할 똥들을 양 손에 가득 움켜진채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질 수 있다고 스스로 속이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다면 빨리 꿈 깨자.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03/26/2018 / Sanghwan A. Lee

본래 목사란…

“본래 목사란
 
잘해도 욕먹도 못해도 욕먹는 부르심입니다.
이왕 욕먹을 것 잘하면서 욕먹어야지요.
 
사람의 기쁨을 구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면서 가세요.
 
정말 그거면 됩니다.”
 
70년 아래의 목사에게 주신 방지일 목사님의 조언. 엘파소의 사무실에서 환하게 웃으시며 주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방지일 목사.png
03/18/2018 / Sanghwan A. Lee

당신도 빚진자 입니다 (몬 1.19)

빌레몬서.PNG

빌레몬을 자신에게 빚진자로 만드는 바울 사도. 그는 ἐγὼ, Παῦλος, ἐγὼ, μοι, ἐμῇ와 σοι, σεαυτόν를 적시적소에 사용함으로 자신이 건축한 무대의 중앙에 빌레몬을 세운다. 그 무대는 빌레몬이 바울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자리다. 서신을 읽던 독자들은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는 셈이다. “빌레몬아, 오네시모가 너에게 빚을 졌지? 그렇다면 이걸 기억해. 뭐,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너도 나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을… 그것도 네 자신을 말이야!”라고 말하는 바울의 대사를 들을 수 있기 때문. 한 문장 속에 등장하는 바울을 가리키는 용어들(ἐγὼ, Παῦλος, ἐγὼ, μοι, ἐμῇ [물론 ἐμῇ가 나타나는 구조는 그레코-로만 시대에 널리 사용됐던 서신서명공식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ἐμῇ에 담겨 있는 포스는 빌레몬에게 무의식적으로 피력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인다])은 빌레몬을 가리키는 용어들(σοι, σεαυτόν)과 날카로운 대비를 이룬다. 그리고 그 대비는 빌레몬으로 하여금 자신이 바울에게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그 은혜를 제 삼자, 즉 자신에게 빚을 진 오네시모에게 흘릴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빌레몬에게 준 은혜는 누구로부터 온 것인가? 그렇다.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분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 은혜는 바울을 바꿨고, 바울을 통해 빌레몬을 바꿨다. 이제는 빌레몬을 통해 오네시모를 바꿀 차례다. 바울은 그만의 독특한 수사법을 사용함으로 빌레몬이 오네시모에게 마땅이 흘려야하는 은혜의 당위성을 피력하고 있는 셈이다: ἵνα μὴ λέγω σοι ὅτι καὶ σεαυτόν μοι προσοφείλεις, 구태여 그대가 내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말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벌써 말했으면서 ㅎ] 그대가 지금만큼 된 것이나 그대의 영혼이 구원 받은 것은 전적으로 나의 도움이었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오네시모를 도와줘야겠지요?] (현대어 성경)

왜? 우리에게 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는 단지 우리 속에서 꽁꽁 숨어 조용히 지낼 수 없는, 시퍼렇게 살아 꿈틀대기에 삶 밖으로 표출될 수 밖에 없는 역동적인 은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