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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0/2018 / Sanghwan A. Lee

예수 그리스도, 영광스러운 분

…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τῆς δόξης (약 2:1)

 

야고보서에 나타나는 “속격 체인” 문장이다. 속격 체인의 문장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숙제는 번역일 것이다. 본문도 예외는 아니다. τῆς δόξης를 어떤 문법 구조 속에서 이해할 것이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해석적 경우의 수들이 있지만 나를 끄는 가장 매력적인 수들은 (1) 한정적 구조에 속한 요소로 보거나 (2) 독립적으로 보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우리의 영광스러운 주 예수 그리스도” 정도로 번역될 수 있고, 후자의 경우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 영광스러운 분”으로 번역될 수 있다. 둘 다 문법적으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굳이 밝히자면 전자보다 후자가 예수님의 신성을 조금 더 부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τῆς δόξης의 독립적 용법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지칭하는 장치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τῆς δόξης가 독립적으로 쓰여 예수님과 동격을 이룰 경우 예수님의 신성이 부각되는 것은 당연하다. 나처럼 High Christology 신학에 매료된 사람들은 이러한 문법 구조를 선호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접근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Dunn이 지적했듯이 예수님께서 τῆς δόξης와 직접적인 동격 구조로 나타나는 신텍스는 신약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을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 영광스러운 분”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확률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조금 억지를 부리자면 통계 자료의 부재가 τῆς δόξης의 동격 구조 사용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지는 못한다는 것. 조금 더 억지를 부리자면 교회사와 사회가정학적 관점이 τῆς δόξης의 동격 구조 사용을 지지할 수도 있다는 것.

 

교회사적으로 볼 때 재미있는 단서들이 몇 있다. 첫째, 야고보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신자”가 아니었다는 것 (마 13:55; 막 6:3). 둘째, 불신자였던 야고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급변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될 정도로 충성했다는 것 (행 15; 고전 15:7). 셋째, 야고보는 예수님을 위해 돌에 맞아죽는 순교를 택했다는 것 (유대고대사 20.9.1). 넷째, 야고보와 예수님은 형제였다는 것 (약 1:1). 다섯째, 야고보는 예수님의 바로 아래 동생이 거의 틀림 없었다는 것 (마 13:55; 막 6:3). 다섯가지 단서들을 일축하자면 다음과 같다: 바로 아래 동생인 야고보가 바로 위의 형인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따랐던 것. 그것도 돌에 맞아 죽을 정도로 독실하게!

 

물론 위에 열거된 단서들이 본글이 풀고자 하는 숙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형제/자매”라는 관계를 사회가정학적 프레임으로 볼 때 중요한 단서가 나올 수 있다. 거두절미하자면 형이나 동생이 있는 사람들은 바로 아래 동생이 형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이 확률적으로 얼마나 희박한 일인지 잘 알 것이다. ㅋ 하지만 동생 야고보는 부활하신 형,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형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가 된다. 그리고 자신을 “예수님의 종”으로 부르며 형을 위해 일평생을 사역하다가 순교를 당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부활하신 형을 통해 구약의 꽃, 즉 쉐키나의 영광(τῆς δόξης)을 봤기 때문이 아닐까? 야고보로 하여금 형과 동생이라는 사회가정학적 틀을 초월하여 형을 하나님으로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역사했던 초자연적 능력. 그것은 아마도 쉐키나의 영광(τῆς δόξης)을 입은 부활하신 형,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jpg

 

그러므로 본문에 있는 τῆς δόξης를 예수님과 동격을 이루는 구조로 보는 것은 통계적으로는 설득력이 없지만 교회사와 사회가정학적으로 볼 때 설득력이 조금, 아주 조금은 있다고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야고보서 2:1의 신텍스에 접근하는 방식이 나와는 다르다 할지라도 Robertson, Bengel, Hort, Mayor 등과 같은 거장들이 τῆς δόξης의 동격 구조를 택하는 것을 보면 나의 상상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단서들을 고려하여 약 2:1의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τῆς δόξης를 신학적으로 풀어 메세지 성경이나 앰플리파이드 성경처럼 확대해석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리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 빛나는 쉐키나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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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9/2018 / Sanghwan A. Lee

갇힌 자, 바울 (ὁ δέσμιος Παῦλος)

Παῦλος δέσμιο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몬 1:1)

한글 역본들은 본문에 사용된 속격을 크게 세 개의 의미로 이해한다: (1) 이유, (2) 목적, (3) 소유. (1)의 경우 새번역 역본처럼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감옥에 갇힌 나 바울”로 번역되고, (2)의 경우 개역한글, 공동번역, 바른성경 역본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로 번역되며, (3)의 경우 흠정역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갇힌 자된 바울”로 번역된다. 참고로 현대인의 성경 역본은 설명 속격 정도로 이해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을 전파하다가 갇힌 바울”로 번역했다.

하지만 속격을 (4) 장소로 이해해 보면 어떨까(cf. 빌 2:8의 θανάτου σταυροῦ, 엡 3:1의 ὁ δέσμιος τοῦ Χριστου, 벧후 2:4의 σειραῖς ζόφου, 계 6:13의 οἱ ἀστέρες τοῦ οὐρανοῦ)? 이럴경우 본문은 “예수님 안에 갇힌 바울” 정도로 번역되어 다음과 같은 트위스트가 생긴다. 비록 바울의 육신은 감옥 안에 갇힌 구속된 자로 빌레몬서를 써내려가고 있지만 그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속된 자유로운 자로 서신을 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암시는 바울의 서신서들에 흐르는 “ἐν Χριστῷ 신학”과 “종과 주인의 신학”을 통해 더욱 풍성하게 이해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수신자의 관점에서 본문을 생각해보자. 수신자는 바울이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므로 서신의 서두에 등장하는 δέσμιος(“갇힌 자”)를 봤을 때 감옥을 연상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단어의 뒤에 따라나오는 표현은 놀랍게도 감옥이 아니라 Χριστοῦ Ἰησοῦ(“그리스도 예수”)였다. 수신자는 속격을 이해하기 위해 속격이 제시하는 여러가지 해석적 경우의 수들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본구절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물론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1세기의 수신자가 떠올린 모든 경우의 수들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그 중에 (4)가 속해 있을지는 않을까 조심히 짐작해 보는 것이다.

문학적 장치 중에 “애매모호성의 원리”가 있다. 저자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음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여러가지 경우의 수들을 생각해 보도록 하는 기법이다. 저자로부터 애매모호한 문장이 담긴 편지를 받은 독자들은 저자와 공유하고 있는 배경지식 안에서 애매모호성을 해체하기 위해 힘쓴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놀랍게도 저자는 여러 경우의 수들 중 여럿, 혹은 모두를 의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애매모호성을 사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이러한 저자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면 그와 공유하고 있는 배경지식 안에서 애매모호성의 원리를 따랐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엡 4:1에서와 같이 ὁ δέσμιος ἐν κυρίω 대신 δέσμιο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를 몬 1:1에 사용한 이유는 (1)~(4)를 모두 표현하거나 그들 중에 몇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문학적 장치였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예수님 때문에 감옥에 갇혔고, 예수님을 위하여 갇혔다. 또한 예수님의 갇힌 자이기도 하며, 예수님 안에 갇힌 자이기도 하지 않은가? 바울은 이런 사실들을 함축적으로 암시하기 위해 다소 애매모호한 δέσμιο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를 사용했을 수도 있겠다는 말이다.

만약 빌레몬이 (4)의 의미를 고려하여 몬 1:1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오네시모를 용서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자신 역시도 바울처럼 예수님 안에 구속되어 자유롭게 된 자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에서 찾지는 않았을까? 빌레몬서 전체에 흐르는 바울의 용서의 신학은 ‘예수님 안에 구속된 자’ =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된 자’ =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 = ‘타인을 용서하는 자’임을 전제 그리고 강화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02/16/2018 / Sanghwan A. Lee

용서의 근원

통계에 따르면 신약 27권에서예수라는 단어가 상대적 비율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책은 빌레몬서다. 여기에 그리스도,” “라는 단어까지 더하면 예수님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사용된 비율은 더욱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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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짧은 바울 서신인 빌레몬서에 예수님을 지칭하는 단어가 상대적 비율로 가장 많이 사용된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우리가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은 우리가 이미 받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함이 아닐까? 그렇다. 빌레몬서의 주제는 용서다. 그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벌써 임한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신적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용서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 된다. 죽어 마땅한 우리를 위해 우리 자리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주 예수 그리스도. 바울이 짧고 짧은 서신 속에 용서의 예수님을 지칭하는 단어들을 이곳, 저곳에 심어둔 이유는 수신자로 하여금 그가 이미 받은 충격적인 신적 용서를 의식적으로 또한 무의식적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도우려던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죄인 중에 괴수인 우리를 용서하신 용서의 예수님고맙고 감사합니다.

02/11/2018 / Sanghwan A. Lee

ο διγλωσσος

ο διγλωσσος 좋게 해석하면이중 언어 구사자”지만 나쁘게 해석하면 입으로 하는 ”가 된다. 문맥에 따라 단어의 의미가 하늘과 차이로 바뀜을 있다. “두 말하면 잔소리겠지만 요즘은 거의 모든 사람이 이중 언어를 구사할 있는 시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ο διγλωσσος인가? “이중 언어 구사자”임과 동시에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자”이기도 한가? 시내 사본 집회서 5:9c 15d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ο αμαρτωλος ο διγλωσσος, “ 입으로 두 말하는 죄인”!

 

집회서 5.9c.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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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과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이중 언어는 구사하되 한 입으로 두 말은 하지않는 ο διγλωσσος가 되어야 할 것이다.

02/10/2018 / Sanghwan A. Lee

마가복음 1:1 (The Codex Sinaticus)

막 1:1에는 5개의 가능한 헬라어 독법들이 있다. 그들 중 (1)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θεοῦ] (אc)와 (2)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א*)가 원독법에 가장 가까울 것이라는 명예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저명한 학자들마다 그럴듯한 증거들을 제시하며 각각의 독법을 지지하고 있지만 햇살은 독법 (2)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듯 하다.

독법 (2)를 지지하는 강력한 논증들 중 하나는 마가복음 필사자의 실수가 1장 1절 부터 등장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2)의 독법을 지지하는 P. M. Head의 주장에 동의하는 신현우 교수님의 논증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마가복음을 막 필사하기 시작한 필사자가 처음부터 이러한 실수를 하였을 법하지는 않다.” 신 교수님은 “최근의 사본 분석들은 참으로 필사자들이 문서의 초두에서 더욱 세심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B. D. Ehrman의 주장을 인용하며 (2)의 독법에 더욱 힘을 더한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논증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증을 취하기 전에 간과하지 말아야 할—그러나 자주 간과되는—사본학적 자료가 있다. 같은 사본의 고전 1:1에 나타나는 필사자의 실수이다. 고전 1:1은 필사자가 정신을 가다듬고 막 필사하기 시작한 구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수가 나타날 확률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놀랍게도 실수가 나타난다. 그것도 일반적인 단어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함인 노멘 세크럼에서 나타난다. Ι̅Υ̅ Χ̅Υ를 Α̅Υ̅ Χ̅Υ로 기록했다가 고쳤던 것이다!

 막 1.1.png

물론 고전1:1에 나타나는 실수는 막 1:1에 나타나는 독법과는 다른 종류의 실수—υἱοῦ θεοῦ가 실수로 생략됐다고 볼 경우—이다. 하지만 필사자가 서신의 첫 번째 구절에 등장하는 노멘 세크럼을 틀렸다는 것은 신 교수님과 Ehrman이 제시한 가능성이 막 1:1에 있는 독법 (1)의 가능성을 원천봉쇄 하지는 못함을 보여준다. 새롭게 필사하기 시작한 사본의 서두에도 실수가 나타날 확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법 (1)과 (2)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이문이 발견되는 위치가 1장 1절이라는 점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춰서는 안될 것이다.

추신: 물론 신 교수님은 이렇게 논증하지 않았다. 교수님이 독법 (2)를 주장하기 위해 피력하신 가장 강력한 논증은 마가가 사용하는 고유의 Idiolect에 관한 논증이라고 생각한다. Idiolect 논증을 취하기 전에도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있으나 본글이 다루고자 했던 주제의 범위 밖임으로 생략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