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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2020 / Sanghwan A. Lee

“바로”가 사람 이름이 아니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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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를 하면서 자주 듣는 질문 중에 하나가 “바로가 왜 이렇게 오래사느냐?” 입니다. 아브라함도 “바로”를 만나고, 요셉도 “바로”를 만나고, 모세도 “바로”를 만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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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둥~ 많은 분들이 “바로”를 사람의 이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바로”는 사람의 직분을 의미합니다. 예를들어 “아무개 목사”라는 표현이 있다고 합시다. “아무개”는 사람의 이름이지만, “목사”는 사람의 직분입니다. 이처럼 “바로”는 이집트에서 가장 높은 사람의 직분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만난 “바로”와 요셉이 만난 “바로”와 모세가 만난 “바로”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렘 44:30, 46:2는 이런 부분을 잘 보여줍니다.

보라 내가 유다의 시드기야 왕을 그의 원수 곧 그의 생명을 찾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넘긴 것 같이 애굽의 바로 호브라 왕을 그의 원수들 곧 그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넘겨 주리라

애굽에 관한 것이라 곧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에 유브라데 강 가 갈그미스에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패한 애굽의 왕 바로 느고의 군대에 대한 말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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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바로와 더불어 그의 이름이 나오지요? 이처럼 “바로”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직분인 것입니다. 참고로 우리가 잘 아는 “시저” (카이사르)도 사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직분이지요. 클레오파트라도 사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직분이지요. 마치 대통령이 사람의 이름이 아닌 것 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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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바로”의 문자적 의미는 “큰/위대한 집”입니다. 아래는 고대 이집트어로 “바로”를 뜻하는 문자입니다. “큰 집” 이지요.

바로의 뜻

여기에서 “큰 집”은 “왕궁”을 의미합니다. 왕국에 누가 살지요? 그렇습니다. 바로가 살지요. 요즘에도 이런 식으로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문장을 종종 접할 수 있습니다. 아래의 문장을 보세요.

청와대에서 ~게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백악관에서 ~을 추진하기로 발표했습니다.”

청와대와 백악관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말하자면 청와대와 백악관이 의사를 결정하거나 발표할 수 없지요. 그러나 그 누구도 이런 의미로 문장을 해석하지 않습니다. 청와대가 상징하는 것, 백악관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바로”는 문자적으로는 “큰 집,” 즉 “왕궁”을 뜻하지만 그 의미는 “이집트의 군주”이지요.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집트의 구왕국 시대에는 “바로”가 “왕궁”의 의미로 쓰였지만 신왕국 시대에는 “군주”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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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궁금증이 풀리셨지요? 그렇다면 숙제가 있습니다. 성경을 편 후에 아브라함이 만난 “바로,” 요셉이 만난 “바로,” 모세가 만난 “바로”가 누구인지 찾아보세요. 성경이 더욱 재미있게 읽혀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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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2020 / Sanghwan A. Lee

태양신과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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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로 끌려간 요셉은 태양신을 믿는 사람들과 접촉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를 값주고 산 주인 보디발, 장인 보디베라, 그리고 아내 아스낫 등이 태양신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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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보디발: “보디발”은 히브리어로 음역된 이집트인의 이름을 다시 한국어로 음역한 것입니다:

/이집트인의 이름/ → /פּוֹטִיפַר/ → /보디발/

그렇다면 “보디발”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은 “보디베라”(פֹּוטִי פֶרַע)에서 마지막 아인(ע)이 누락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럴경우 “보디발”과 “보디베라”의 뜻은 같아집니다. 신기하게도 요셉의 장인 이름이 “보디베라”지요? 요셉의 주인과 장인이 같은 이름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마도 그 당시에 꽤 사랑을 받던 이름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보디베라/보디발”의 뜻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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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보디베라: “보디베라”의 이집트 이름을 역추적하는 작업은 오래 전 부터 시도되고 있습니다. 현재 학계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은 이집트어 Pa-di-Pre의 히브리어 음역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름의 구조는 ‘Pa-di-신명’의 작명구조에 따라 “라/레(태양신)의 선물” 정도로 번역됩니다. 요셉의 장인은 태양신을 섬기는 자로 볼 수 있는 셈이지요. 아니나 다를까 창 41:46은 그가 “온의 제사장”이었다고 말합니다. “온” (און, ̔Ηλιούπολις)은 이집트에서 태양신 숭배지로 유명했던 장소입니다. 요셉은 장인은 바로 그 곳에서 태양신을 예배했던 제사장이었던 것이지요. 아울러 “보디발”도 “보디베라”와 같은 뜻으로 볼 수 있으니 요셉의 주인도 태양신을 섬기는 자로 볼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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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아스낫: “아스낫” (אָֽסְנַת)은 통상적으로 이집트어 Nes-neit에서 초성의 음가 /n/이 탈락된 히브리어 음역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럴경우 ‘Nes-신명’의 작명구조로 이해되어 “네이트 여신에게 속한 자” 혹은 “그는 네이트 여신에게 속했다” 정도로 번역됩니다. 그렇다면 “네이트” 여신은 누구일까요? 이집트의 신관이 지역마다 다양하고 복잡해서 한 문장으로 일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인 메르넵타하의 석관 두껑에 기록된 글에 따르면 ‘태양신을 낳은 어머니’로도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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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후대의 외부문서에도 태양신을 낳은 여신으로 “네이트”를 특정하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집트의 신화는 지역마다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게다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형되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모든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네이트” 여신을 태양신의 어머니로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사실 “네이트”를 태양신의 어머니로 특정하는 소스는 매우 적지요. 하지만 메르넵타하가 자신의 석관 뚜껑에 “네이트”와 태양신의 관계를 모자로 새겨넣을 정도라면 (1) 특정한 지역에서는 둘의 모자관계를 담고있는 신화가 존재했고, (2) 이 신화는 메르넵타하의 시대보다 이른 시기(중왕국 혹은 힉소스 시대?)로 소급될 수도 있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이럴경우 요셉의 아내인 “아스낫”도 태양신과 간접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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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주변 사람들: 이렇듯 요셉의 밀접한 관계망 속에 들어와 있던 사람들은 태양신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던 자들로 보입니다. 요셉을 샀던 보디발도 태양신과 연결되어 있고, 그의 장인은 태양신을 섬기는 제사장이며, 그의 아내는 태양신을 섬기는 제사장의 딸이자, 태양신의 어머니로 믿어지는 이집트 여신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신관에 가득 물들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던 요셉. 특히나 태양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자들과 접촉했던 요셉. 혹시 그가 아버지로 부터 듣게된 야웨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충돌되는 상황들은 없었나? 분명히 주인, 장인, 아내와 함께 만나면 종교적으로 갈등을 빚는 상황들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그 상황들에 대처했을까?

그렇지 않나요? 이런 부분이 정말 궁금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질문을 떠올리며 창세기 37~50을 읽어보세요.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신기한 부분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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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2020 / Sanghwan A. Lee

예수님 시대의 헬라어 발음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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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시대에 사용됐던 헬라어의 발음이 궁금하시나요? 헬라어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당시의 헬라어 발음을 100%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2,000년 이라는 시간적 격차는 물론, 발음을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도록 돕는 자료들이 퍽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헬라어의 리딩 스칼라들 조차도 서로간에 의견의 불일치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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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요즘 학계에서는 전통적으로 추구해오고 있는 에라스미안 발음을 “시대착오적인 인위적 발음 시스템”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저들의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강력한 고고학적 자료들도 나오고 있는지라 새로운 발음 시스템으로 신약 성경을 읽는 운동까지 등장하고 있지요. 가장 대표적인 경쟁 시스템이 (1) 모던 헬라어 발음과 (2) 재건된 코이네 헬라어 발음입니다. (참고로 모던 헬라어 발음에는 브랜치가 거의 없지만, 재건된 코이네 헬라어 발음에는 브랜치가 꽤 있습니다. 아무래도 시간의 격차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언어의 유동성 때문에 오래된 시스템을 재건할 수록 더 많은 브랜치가 있을 수 밖에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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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도 몇 년 간의 조사 끝에 결국 에라스미안 발음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코이네 헬라어 발음 찾기 운동에 편승한 후 연구를 계속하며 재건된 코이네 헬라어 발음을 택하게 됐습니다. 고고학적 자료들에 의해 가장 많이 지지를 받고 있는 시스템이라는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지요. 물론, 새로운 고고학적 자료가 나와 더 좋은 시스템을 지지해야 한다면 또 다시 편승할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재건된 코이네 헬라어 발음을 취한 제 선택을 범벅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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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이쯤에서 “발음을 꼭 찾아야해? 그게 뭐가 중요해?” 질문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제 의견부터 말씀드리자면 정확한 헬라어 발음을 찾으면 찾을 수록 신약학계 공헌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Jeffrey E. Brickle이 2010년에 Concordia Seminary에서 썼던 박사학위 논문입니다: Aural Design and Coherence in the Prologue of First John.

헬라어 발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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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kle은 논문을 통해 재미있고 참신한 시도를 합니다. 헬라어 발음으로 신약성경의 요한일서가 읽혀질 때 만들어지는 청각적 지도를 그려낸 것입니다. 당연히 어떤 발음 시스템으로 헬라어 성경을 읽느냐에 따라 청각적 지도가 달라지겠지요? 문맹률이 높아 구전에 높은 비중을 두었던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시각적 지도보다 청각적 지도가 훨씬 더 강하고 직관적으로 다가왔을 것을 감안해 본다면 Brickle의 시도는 결코 무시못할 시도일 것입니다. 아래의 자료는 Brickle가 그의 논문에서 두 발음 시스템을 비교하며 만들어낸 청각적 지도입니다.

코이네 헬라어
에라스미안 발음 시스템에서는 ε와 αι가 서로 다른 음가를 지닌다. 그러므로 ε와 αι가 사용된 단어에서 비슷한 음가를 찾을 수 없다. 그 결과 ε(노란색)와 αι(초록색)가 사용된 단어 사이에 동일한 혹은 비슷한 청각적 지도가 그려지지 않는다.
코이네 헬라어
에라스미안 발음 시스템과는 다르게 HGP (일단 재건된 코이네 헬라어 발음의 한 분파라고 보시면 됩니다) 시스템에서는 ε와 αι가 서로 같은 음가를 지닌다. 그러므로 ε(노란색)와 αι(노란색)가 들어간 단어에서 같은 음가를 찾을 수 있다. 그 결과 에라스미안 발음 시스템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청각적 지도가 보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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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요? 신기하지요? Brickle이 발전시킨 방법으로 신약성경을 조명해 본다면 (1) 음성학적으로 반복되는 부분을 통해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을 찾을 수 있거나, 혹은 (2) 지나치게 신학적 의미만을 부여하며 해석했던 특정 단어가 어쩌면 주변의 다른 단어와 같은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선택된 단어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볼 수 있도록 하겠지요. 이럴경우 성경의 저자가 구전에 익숙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정말 강조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 조금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게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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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헬라어 발음은 어떻게 찾지? 정말 가능하기는 한가?” 질문의 답을 찾기 원하시면 아래의 영상을 꼭 시청해 주세요. 본 영상은 위의 질문에 쉽고 간단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손수 만든 영상입니다. ㅋ 헬라어 발음을 찾는데 관심이 있는 분들께는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럼 즐감하세요!

07/03/2020 / Sanghwan A. Lee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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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0장에 등장하는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이야기는 익히 들어본 유명한 이야기이다. 참고로 “떡”으로 번역된 단어는 한국식 “떡”을 의미하지 않고, 이집트식 “빵”을 의미한다. 그리고 “술 맡은 자[משׁקה]”는 바로의 컵에 포도주를 따라주는 업무는 물론 술(포도주, 맥주)을 만드는 과정까지 아우르는 자를 의미한다. 이러한 배경지식을 기억하며 창 40:1–3을 읽어보자.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창 40:1–3)

본 구절에 따르면 술 맡은 자와 빵 굽는 자가 동시에 범죄하여 함께 옥에 갇히게 된다. 왜 두 종류의 다른 직업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한데 묶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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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이집트의 고고학적 및 문서적 자료에 따르면 빵 굽는 장소와 술 빚는 장소는 같은 장소에 위치하거나 혹은 아주 가까운 위치에 붙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떡과 술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재료들([엠머]밀, 보리)이 거의 같고, 게다가 만드는 과정까지 거의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집트 학자 Bob Brier는 “이집트에서 발굴을 하다가 술 만드는 장소를 발견하면 그 주변에 반드시 떡 만드는 장소가 있다고 믿어도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아래의 사진들은 이집트 중왕국 시대의 메케트레 무덤에서 발견된 미니어쳐들을 담고 있다. 보다시피 같은 작업장의 한 켠에서는 빵을 반죽하고 있고, 다른 한 켠에서는 술을 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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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역시 근접한 거리에서 빵과 술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집트의 고고학적 자료들이다.

이런 배경지식으로 미뤄보아 창세기 40장에 나오는 술 맡은 자와 빵 굽는 자는 같은 혹은 근접한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친밀해 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함께 애굽 왕의 식단을 관리하다가 관련 사건/사고로 인해 그의 노여움을 샀을지도 모른다. (e.g., 빵과 맥주는 바로를 포함한 이집트인들의 식탁에 빈번하게 오르는 주식/주음료였다. 그러므로 행여나 빵과 맥주를 섭취한 바로가 아프게 됐다면 사용 재료와 만드는 과정이 비슷한 둘 중에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가리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혹시 그 기간동안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를 함께 가둬 둔 것 일까?) 물론 바로의 노여움을 사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하는지라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창세기 40장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함께 옥에 갇히는 이야기는 이집트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일 수 있다고 Brier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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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이집트 학자 Donald Redford, John Van Seters, T. Eric Peet 등은 구약성경을 쓴 히브리 저자에 대해 ‘이집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특히 요셉의 이야기는 ‘성경이 제시하는 시대보다 한참 이후에 쓰여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요셉 이야기를 쓴 저자는 연대기적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른 이집트 학자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예컨대 James K. Hoffmeier, Bob Brier, Kenneth A. Kitchen 등은 구약 성경이 전제 및 기술하는 이집트에 관련 내용들은 이집트의 역사를 잘 알아야지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본 글이 소개한 ‘술을 빚는 장소와 빵을 만드는 장소의 근접성’처럼 말이다.

물론 본글에 있는 한 가지의 간접적 예가 Redford, Seters, Peet의 주장을 뒤엎고, Hoffmeier, Kitchen, Brier의 주장에 힘을 준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단지, 우리가 평소에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쉽게 넘어가는 구절들 속에 어쩌면 성경의 역사성에 대해 검증할 수 있도록 돕는 내용들이 들어있을 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구절들이 성령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면… 정말 그렇다면… 성경을 사랑하는 자들은 열린 마음으로 한 구절, 한 구절을 뜯어보며 씨름해 봐도 좋을 것 같다. 믿음의 농도가 짙어질 수도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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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2020 / Sanghwan A. Lee

이집트어 알파벳 배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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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어 알파벳을 쉽게 가르쳐주는 유튜브 채널이 있네요.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번역본은 한국인들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데, 본 영상은 한국인들이 이집트어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한국적으로 구성했네요. “한국적으로 구성”했다는 표현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다면 영상을 한 번 보세요. 이순신과 신사임당도 나와요~ ㅋ

혹시 이집트어를 공부하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래의 글은 “이집트어 학당” 유튜브 채널에서 퍼온 것입니다.

이집트어 학당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아름다운 이집트어. 신비한 이집트어. 그리고 몽환적인 이집트어. 고대 이집트어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취해 감탄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도전을 받지요. 하지만 공부를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 포기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아무개 님께서 그들 중에 한 명이시라면 이제는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한국인을 위한 이집트어 학당이 여러분의 고대 이집트어 입문을 도와드릴 테니까요!

팔로어 여러분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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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2020 / Sanghwan A. Lee

내가 믿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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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저승사자 신, 아누비스가 로마인의 옷을 입고 있다. 어찌된 일인가? 아누비스가 그리스의 신 헤르메스와 융합되어 헤르마누비스로 재탄생한 것이다. 섬기는 신들이 서로 다른 두 나라에 접점(전쟁, 무역 등)이 생길 때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지역신이 타문화에 소개되면서 다른 옷을 입고, 없었던 능력을 부여받고, 있었던 능력을 빼앗긴다. 그 결과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다른 신으로 재탄생한다. 근본을 일탈한 재창조인 것이다.

2,000년 전 유대땅을 걸으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담은 복음이 2,000년의 시간적 격차가 있는 한국땅에 도착했다. 그리고 한국 문화 속에서, 한국어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비슷하지만 근본을 일탈한 모습으로 재탄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한국에는 가짜 예수들이 너무 많다. 교회당에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서로다른 예수들. 과연 누가 진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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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고 섬기는 예수는 어떨까? 2,000년 전, 유대땅을 거니셨던 하나님의 아들, 그 예수 그리스도일까?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짝퉁 예수일가? 나는 오늘도 이런 생각을 하며 이렇게 소망한다. “아… 엠마오의 두 제자처럼 어두운 눈이 밝아졌으면 좋겠다. 바울처럼 눈에서 비늘이 벗겨졌으면 좋겠다. 그런 은혜를 경험하고 싶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귀신들로 치장된 융합된 예수가 아닌, 천사들이 경배했던 그 순결하신 예수님을 예배하기를 기도한다.

03/29/2020 / Sanghwan A. Lee

Hot Tub Baptism

• Joey: “Pastor Lee, 나 너한테 침례를 받고 싶어.”

• 나: “미안, 나는 더이상 너의 담임목사가 아니기 때문에 침례를 주지 않는게 좋을 것 같아. 다음에 오시는 담임목사님께 받는게 어때?”

• Joey: “나는 너한테 예수님을 배웠잖아? 바로 네가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해서 내게 예수님을 가르쳐 줬잖아? 그러니 당연히 네가 침례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

• 나: 어차피 우리 교회는 침례탕도 없고, 주변의 교회들도 코로나 바이스러스로 인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침례탕을 빌려주지는 않을꺼야.

• Joey: 장소가 뭐가 중요해? 침례탕이 없으면 집에 있는 화장실 Hot Tub에서 침례를 받으면 되잖아? 안그래?

• (깊이 감동받은) 나: 아… 그래.

그렇게 침례식이 시작됐다. 복음에 관한 질의응답 시간을 마친 우리는 모빌에 있는 작은 Hot Tub에 모였다. 그리고 그 곳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늘과 땅을 잇는 침례식을 거행했다. 평생 기억에 남을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Steve Pink의 Hot Tub Time Machine에 등장하는 Hot Tub이 시공간을 넘나드는 타임머신이었다면, 오늘 친구의 집에 있던 Hot Tub은 영원을 넘나드는 타임머신이었다. 할렐루야!

03/24/2020 / Sanghwan A. Lee

교회사역자들의 원격근무를 위한 Swit 데모 영상

교회 사역자님들, 안녕하세요!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인해 교회 업무에 지장이 많지요? 이처럼 안타까운 시기에 조금의 도움이라도 드리고자 본 영상을 만들었어요. 본 영상에는 온라인 협업 도구인 Swit을 통해 교회 원격근무를 탁월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담겨 있어요. 바이러스 확산도 막고, 사역도 놓치지 말자는 일석이조의 마음이라고나 할까요? 짧게 말씀드리자면 Swit에는 대화방, 업무관리, 달력 등의 기능들이 있고, 지메일, 구글 드라이브 등도 연동되어 있어서 사역자님들의 원격회의를 돕는 탁월한 도구로 쓰일 수 있지요. 목회를 20년 간 해오고 있는 저도 Swit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고 있으니 여러분들께서도 동일한 도움을 받으실 수 있으리라 확신해요.

영상을 보시고 Swit을 사용해 보고 싶은 분들은 help@swit.io로 연락주세요~ 스윗 커스터머 석세스 팀에서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 줄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03/23/2020 / Sanghwan A. Lee

아크나톤

아크나톤 (첨부사진 왼쪽 하단 참조). 이집트 역사상 가장 신비롭고 논란이 많은 바로. 전통적인 이집트 다신론을 과감히 버리고 창조자 태양신 “아톤”만을 섬겼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집트의 이단아”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아톤”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 넣기 위해 아메노피스라는 이름을 버리고 아크나톤(아큰-아톤)을 취한 이단아. 다른 신들의 신전과 제사장들이 있는 테베 땅을 과감히 버리고 우상숭배로 오염되지 않은 땅으로 옮겨가 아톤을 섬겼던 신봉자. 그에게 있어서 아톤은 선하고 관대한 신으로 우주의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태양빛으로 모든 피조물을 살게하는 생명의 유지자이기도 했다.

질문이 있다. 왜 그는 당시의 전통적인 신관인 다신론을 배격하고 하나의 신만을 예배하기로 작정한 것일까? 그리고 그의 존재를 출애굽의 이른 연대와 늦은 연대의 관점으로 조명해 볼 때 어떤 신학적 사유의 차이가 나타나나? 그리고 아크나톤의 흔적이 구약성경이나 고대근동 문서에 나타나는가? 그렇다면 어떤 가르침을 얻을 수 있을까? 이처럼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역사-신학적 배경을 “구약의 맥 잡기” 성경공부 시간에 나눈다.

추신: 사진은 Swit을 플랫폼으로 사용하여 인도하는 성경공부의 스샷. Swit이 궁금하시면 아래의 주소를 참고하세요!

• Home Page: https://swit.io/
• Simulator: https://demo.swit.io/channel/1907100448364eqbAOD/chat
• Pricing: https://swit.io/home/pricing
• Help Center: help@swit.io

09/27/2019 / Sanghwan A. Lee

“인침을 받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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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계시록 7장에 나오는 유명한 144,000에 관한 구절(개역개정)입니다.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5~8절)

본 구절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다시피 일정한 패턴으로 나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ἐκ φυλῆς + (2) 지파 이름 + (3) δώδεκα χιλιάδες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부분은 첫 번째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만 ἐσφραγισμένοι가 들어가 있습니다. 즉,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 있는 (1) ἐκ φυλῆς + (2) 지파 이름 + (3) δώδεκα χιλιάδες + (4) ἐσφραγισμένοι가 중간에 있는 (1) ἐκ φυλῆς + (2) 지파 이름 + (3) δώδεκα χιλιάδες를 감싸고 있는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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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에 사용된 ἐσφραγισμένοι나 마지막에 사용된 ἐσφραγισμένοι중 하나는 생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의도적으로 가장 앞과 뒤에만 ἐσφραγισμένοι를 넣음으로 처음과 끝에 있는 (1) ἐκ φυλῆς + (2) 지파 이름 + (3) δώδεκα χιλιάδες + (4) ἐσφραγισμένοι가 중간에 있는 (1) ἐκ φυλῆς + (2) 지파 이름 + (3) δώδεκα χιλιάδες를 감싸고 있는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독자에게 암시하려던 바는 무엇일까요? 혹시… 인침을 받은 144,000명이 앞뒤로 꽉~ 인침을 받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저들의 영혼을 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은 144,000이라는 숫자의 비밀에만 머물지 말고, 인치신 자들을 끝까지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까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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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2019 / Sanghwan A. Lee

잠긴 글: 모빌 아카데미 성경공부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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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7/2019 / Sanghwan A. Lee

그레코-로만 시대의 고전학(古錢學)관점으로 이해하는 “일곱 별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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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본글은 (1) 도미시안 황제때 계시록이 쓰였다는 관점, (2) 과거주의와 미래주의를 절충하는 관점, (3) 그리고 관련성 이론에 따른 해석적 관점을 따랐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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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아래는 영국의 천문역사학자 Nicholas Campion이 그의 저서에 쓴 내용이다.

“Any intelligent audience of the 1st century would have been deeply aware of the cosmological significance of these numbers, there being seven planets and twelve signs of the zodiac. The most overtly cosmological text in the New Testament, though, is the Revelation of St. John, an imaginative work of grand proportions. Its repetition of the number seven—churches in Asia, spirits before the throne of God, the famous seals, and, significantly, stars—ties Christian cosmology to the planets.” (Italics Mine)

Nicholas Campion, Astrology and Cosmology in the World’s Religions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2012), 167.

1 세기의 그레코-로만 시대의 사람들이 별과 숫자 7을 언급하는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천문학적/점성학적으로 이해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당시에는 천문학과 점성학을 세밀하게 구별하지 않았다). Campion의 주장에는 신빙성이 있다. 계시록이 쓰였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볼 경우 별과 숫자 7의 조합으로 유명세를 탔던 아이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 북두칠성, (2) 플레이아데스 성단, 혹은 (3)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태양, 달. Campion의 주장이 맞다면 요한은 당시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배경지식을 사용하여 무엇인가를 전달하려 했던 것이고, 원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그 의미를 축출해 냈을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아쉽게도 Campion의 접근은 여기에서 끝나지만 나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별과 숫자 7의 조합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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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코-로만 동전: 재미있게도 그레로-로만 시대의 천문학/점성학을 엿볼 수 있게하는 자료들 중 하나는 동전이다. 별, 혜성, 별자리 등이 상징적인 의미를 입고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사진을 보라. 다양한 별들이 동전에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레코-로만 시대에 주조된 동전들

이런 자료는 천문학/점성학이 많은 사람들의 삶에 깊이 들어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당시의 동전들은 요한이 살던 시대의 별에 대한 사회적 개념을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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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운명과 별: 그레코-로만 시대의 권세자들이 이런 동전을 주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별들이 사람들의 운명을 주관한다“는 개념 때문이었다. 유명한 마법문서(PGM) XIII.633–37과 XIII.708–14 등은 이런 부분을 잘 보여주지 않던가? 정치의 전채였던 로마의 황제들은 이러한 시대적 개념을 백분 이용하여 그들의 통치권을 정당화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별들과 자신의 통치력을 연결하는 동전을 주조하여 로마의 모든 지역에 유통시킴으로 “나의 통치권은 하늘이 내린 운명이야. 너희는 이 운명을 거스를 수 없어!“라는 무언의 정치적/종교적 메세지를 가시화 했던 것이다 (역시 요한이 살던 시대에는 정치와 종교를 세밀하게 분리하지 않았다). “로마의 황제들은 정치의 천재들이었다”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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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문맹률: 잠깐… 크레딧 카드와 문명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겨우 동전이?”라고 물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레코-로만 시대의 낮은 문맹률을 고려한다면 동전에 새겨진 문양이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William V. Harris는 그의 저서 Ancient Literacy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89)를 통해 그레코-로만 시대의 문맹률은 약 85%까지 육박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학자들이 그의 주장을 따르지는 않지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그의 견해를 수용한다. 쉽게 말해서 제국의 15%만 읽고 쓸 수 있었다는 말이다. Harris의 주장이 옳다면 동전의 정치적 역할이 크게 부각된다. 생각해보자. 높은 문맹률로 인해 글을 통해 효과적인 정치를 꾀할 수 없었던 황제들은 문맹들과 소통하는데 큰 여러움을 겪었다. 그러므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정치적/종교적 메세지를 전달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어떤 도구가 이런 바람을 관철시킬 수 있을까? 그렇다. 동전이었다. 동전에 정치적/종교적 메세지를 그림처럼 새겨 넣은 후 뿌리는 것이다. 이럴경우 문맹이나 비문맹이나 할 것 없이 메세지가 전달 될 수 있었다!

베스파시안과 도미시안의 정치적 메세지를 담은 동전.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동전으로 비굴하게 앉아 등을 돌리고 있거나 무릎을 꿇고 있거나 누워있는 사람은 전쟁에서 패한 나라를 상징하고, 거만하게 일어나 있거나 말을 타고 있는 자는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를 상징한다. 동전의 앞면에는 전쟁시에 로마를 통치했던 황제의 얼굴이 그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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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의 역할: Erika Manders는 동전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After all, … deployment of imperial coinage was probably the most efficient and effective medium by which the center of power could convey an image of the emperor and his reign. Through coins, the emperor disseminated his idealized self-image over a large pro- portion of the Empire and to all segments of the population.”

Erika Manders, Coining Images of Power: Patterns in the Representation of Roman Emperors on Imperial Coinagae, A.D. 193-284, IE 15 (Leiden: Brill, 2012), 227.

Donal T. Ariel과 Jean-Philippe Fontanille도 The Coins of Herod: A Modern Analysis and Die Classfication, AJEC 79 (Leiden: Brill, 2012), 22에 비슷하게 설명한다: “Propaganda on a most rudimentary level has always existed on coinage.” 이처럼 동전 만큼이나 정치적/종교적 메세지를 제국의 구석까지 보낼 수 있었던 매개체는 그레코-로만 시대에 없었다. 황제는 동전에 새겨진 문양을 통해 제국의 85%의 문맹들과 15%의 비문맹들에게 종교적/정치적 메세지를 보냈고, 수신자들은 의식적으로 또한 무의식 적으로 그 메세지를 받았다. 비록 동전은 말할 수 없지만 동전 위에 새겨진 문양은 쉬지않고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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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의 일곱 별: 이제는 이런 역사적 개념을 기억하며 계시록의 일곱 별을 살펴보자. 계시록 1.16에는 “그(예수님)의 오른손에 일곱 별들이 있(ἔχων ἐν τῇ δεξιᾷ χειρὶ αὐτοῦ ἀστέρας ἑπτ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곱 별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1.20에 그 답이 나온다. 일곱 별들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οἱ ἑπτὰ ἀστέρες ἄγγελοι τῶν ἑπτὰ ἐκκλησιῶν εἰσιν)”이다. 안타깝게도 20절이 일곱 별들의 비밀을 시원하게 풀어주지는 못한다. “사자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의미가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햄릿이 이 문장을 봤다면 “이 단어를 ‘천사들’로 번역할 것이냐 ‘전달자’로 번역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말했을 것이다. 어휘적 접근과 문맥적 접근도 확실한 답을 주지 못한다. 그 결과 학자들은 여전히 끊이지 않는 논쟁 속에서 의견의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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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성의 원리: 잠깐… 혹시 이 부분에서 우리의 생각을 전환해 볼 필요성이 있지는 않을까? 요한이 일부러 “사자들”의 의미를 애매모호하게 설정해 놓았다면? 성서해석의 원리 중에 “애매모호성의 원리”가 있다. 저자가 중의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단어나 문장을 애매모호하게 표현했다는 개념이다. 이럴경우 “사자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성급하게 풀어내려는 시도는 오히려 요한의 의도를 해치게 된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일차 독자들인 이방 지역에 살고 있는 일곱 교회의 성도들의 세계관으로 본문을 바라보려는 시도가 우선 필요하다. 요한이 복음서와 계시록에 중의적 표현을 위한 장치들을 제법 많이 심어놨다는 점은 이런 방법을 충분히 지지한다. 게다가 오캄의 면도날의 관점으로 볼 때에도 이것은 가장 쉬운 방법이요, 가장 당연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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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접근: 이런 관점으로 계 1.16으로 다시 가보자. (1) 일곱 별들과 (2) 그 별들을 소유하고 있는 분이 등장한다: “ἔχων ἐν τῇ δεξιᾷ χειρὶ αὐτοῦ ἀστέρας ἑπτὰ.” 도미시안 황제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일곱 교회의 성도들이 이 표현을 들었을때 무엇을 바로 연상했을까? 이 질문에 어느정도 합당한 답을 제시할 수 있는 문화적 단서가 있을까? 있다. 82-83 CE에 로마에서 주조된 도미시안의 동전이다. 아래의 사진을 보자.

도미시안이 주조한 동전

무엇이 보이는가? 일곱 별들과 그 별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도미시안의 혈통—죽은 도미시안의 아들로 신성화 됐음—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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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단서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단서들이 있다. 그것들을 짧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동전의 성분: 같은 문양의 동전이 아우레우스(금화)와 데나리온(은화)으로 주조됐다. 청동 AE(aes)이 아닌 AV(aureum)와 AR(argentum)로 주조됐다는 것은 동전에 담긴 메세지의 가치가 높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2. 동전의 문장: “DIVVS CAESAR IMP DOMITIANI F, 신성한 카이사르, 도미시안 황제의 아들.” “신성한”이라는 표현은 황제 숭배 사상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놓치지 말자.
  3. 둥근 구: 아이가 앉아있는 둥근 구는 주권과 통치권을 의미한다.
  4. 아이의 자세: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5. 일곱 별: 동전에 뿌려져 있는 일곱 별은 운명을 주관하는 요소로 봐야한다.
  6. 손의 위치: 별들 사이에 아이의 손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아이가 운명을 주관하는 별들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나타낸다.
  7. 머리 위에 없는 별: 아이의 머리 위에는 별이 없음에 주목하자. 이것은 의도적인 장치로 도미시안 혈통의 우위성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단서들을 조합할 경우 다음과 같은 메세지가 나온다: “신성한 도미시안의 혈통이 사람의 운명을 주관한다.” 동전을 보는 모든 사회 집단들(귀족, 소작농, 종 등)은 이러한 의미를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전의 가시적 효과는 Richard Oster, “Numismatic Windows into the Social World of Early Christianity: A Methodological Inquiry” JBL 101 (1982): 200의 말을 통해 설명된다: “Iconography [on the coins] was no less powerful or cogent than written or spoken communication.” 동전에 새겨진 문양은 글처럼 확실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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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의 확산: 로마에서 주조된 이 동전은 군인들과 상인들을 통해 그레코-로만 시대의 전지역으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번잡한 도시에서 낙후된 시골에까지 동전은 도미시안의 통치권이 미치는 지역의 구석으로 침투해 들어갔고, 그렇게 동전이 담고 있는 종교적/정치적 메세지는 글을 읽을 수 없는 문맹들에게까지 전달됐다. 동전이 로마의 전지역에 퍼져나가는 경로를 C. H. V. Sutherland와 R. A. G. Carson은 이렇게 설명한다.

“For the Roman world, devoid of any network of banks in the modern sense, there was only one regular primary means of disseminating coinage, namely by the annual payment of stipendia to the legions, of salaries to civil servants, and of wages of those employed on public works: from these recipients coinage would in turn be circulated downwards to merchants, traders, and ordinary people.”

C. H. V. Sutherland and R. A. G. Carson, The Roman Imperial Coinage, Volume 1 (London, 1984), 9.

동전에 실린 도미시안의 메세지는 피라미드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듯 거래와 매매를 통해 로마 제국의 가장 낮은 곳까지 흘러 들어갔을 것이고 동전이 사용되는 곳마다 도미시안의 종교적/정치적 메세지가 가시화 됐을 것이다. 그렇게 무언의 메세지는 소리있는 아우성이 되어 그레코-로만 사람들에게 도미시안의 통치권을 천천히, 그리고 아주 효과적으로 각인시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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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시안 황제의 영향권 아래 있는 일곱 교회: 중요한 부분은 이것이다. 동전이 도달할 수 있는 장소 중에 계시록의 일곱 교회가 위치했던 장소들도 포함되었다는 것. 그러므로 일곱 교회의 성도들도 동전을 봤거나, 소유했거나, 사용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계시록의 수신자로 일곱 교회가 선택된 이유가 설명된다. 알다시피 그 당시에는 일곱 교회보다 더 많은 교회들이 그 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교회를 선택하사 계시록의 일차 수신자로 삼으셨다. 물론 전통적인 해석대로 “완전수 일곱”이란 개념을 도입하여 일곱 교회를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본글의 취지는 전통적 프레임을 탈피하여 그레코-로만의 시대적 배경으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 이런 방법론을 허용한다면 일곱 교회의 성도들은 일곱 별들과 그 별들을 오른 손으로 움켜주고 계신 예수님(계 1.16)을 도미시안의 동전과 연결하여 생각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나온다. Craig R. Koester도 나와 같은 생각을 피력한다.

“The section climaxes by noting that the figure holds seven stars in his right hand (Rev 1:16). This cosmic imagery conveys sovereignty. An analogy appears on a coin from Domitian’s reign that depicts the emperor’s deceased son as young Jupiter, sitting on the globe in a posture of world dominion. The coin’s inscription calls him ‘divine Caesar, son of the emperor Domitian,’ and the imagery shows him extending his hands to seven stars in a display of divinity and power. John has already identified Jesus as the ruler of kings on earth (1:5), and the imagery of the seven stars fits the book’s larger context, which contrasts the reign of Christ with that of imperial Rome.” (Italics Mine)

Craig R. Koester, Revelation: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AYB 38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4),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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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신학적/정치적 메세지: Koester가 잘 지적했다: “[T]he imagery of the seven stars fits the book’s larger context, which contrasts the reign of Christ with that of imperial Rome.” 그랬다면 아래의 그림들처럼 요한은 도미시안의 동전에 새겨진 종교적/정치적 메세지를 의도적으로 겨냥하여 해체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은 요한이 계 1.16을 통해 원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신학적 의미를 보다 명확히 볼 수 있도록 돕는다: 도미시안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것! 그렇다. 도미시안은 자신의 혈통이 일곱 별들, 즉 사람들의 운명을 주관한다고 피력했지만,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미시안의 목줄을 쥐고 계심을 천명했다. 더불어 ‘일곱 별 → 일곱 사자 → 일곱 인격체 (모든 인격체들을 의미)’의 운명까지도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이심을 천명했다. 그러니 도미시안에게 주눅들지 말고 전지전능하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도미시안의 핍박에 위풍당당히 맞서라고 권유하는 메세지를 보낸 것이다. 요한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도미시안의 혈통은 두 손으로 별들을 흩뿌려 놓고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한 손으로 별들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계 1.16)!”

“도미시안의 혈통은 죽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사셨습니다 (계 1.18)!”

“도미시안의 혈통은 둥근 구 위에 앉아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백보좌 심판대에 앉아 계십니다 (계 20.11-15)!”

“도미시안의 혈통은 피조물이었다가 신으로 신성화 됐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본래부터 창조되지 아니하신 영원자, 하나님이십니다 (계 1.17)!”

“도미시안의 혈통은 끝났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무궁하십니다 (계 20-21)!

누구를 두려워 하시렵니까? 누구를 따르시렵니까? 일곱 별들을 오른 손에 움켜쥐고 우리의 인생을 끝까지 붙잡아 주시는 전능자 예수님을 저와 함께 경외하며 따르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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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으며: 이 질문을 받은 일곱 교회의 성도들은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네! 나와 내 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따르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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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5/2019 / Sanghwan A. Lee

저널 출판 (JGRChJ)

Stanley E. Porter 교수님께서 Editor로 있는 Journal of Greco-Roman Christianity and Judaism (JGRChJ)에 저널이 출판됐습니다. 제목은 Reexamining the Greek-Speaking Ability of Peter in Light of a Sociolinguistic Perspective입니다. 저널을 JGRChJ에 출판한 이유는 Stanley E. Porter 교수님께서 에디팅에 직접 참여해 주셨고, 아울러 JGRChJ에 출판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논증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한 Modern Linguistic Theories(SLT, CPH, etc.)가 Porter 교수님의 연구방향과 부합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다른 저널 출판사에 출판거절 소식을 알리는 호강도 누려봤네요. 🙂 본저널의 Abstract는 아래와 같습니다:

 

In contrast to the scholarly consensus, this article argues that utilizing the Aramaic Hypothesis to characterize Peter as an Aramaic-speaking Galilean is less accurate than using sociolinguistic approaches, which characterize Peter as a multilingual speaker who was able to speak Greek fluently. The lack of attention given by traditional methods to the complex mechanisms of sociolinguistic dynamics has resulted in an incomplete understanding of Peter’s linguistic ability. Thus, it is the aim of this article to reevaluate Peter’s linguistic ability and offer a new perspective that is more congruent with his personal sociolinguistic domains (i.e., his birthplace, occupational area, and mission territories).

 

03/11/2019 / Sanghwan A. Lee

아사셀에게 보내진 염소와 예수님

레위기 16장에 보대속죄일에 사용되는 “아사셀에게 보내지는 염소”가 등장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사셀 염소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하는 예식을 치른 후 염소를 진영 밖으로 추방했다. Mishnah Yoma 6.4에는 추방당하는 염소의 털을 뽑으며 다음과 같은 저주를 퍼붓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꺼져라!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사라져라!” 본기록에 따르면 아사셀에게 보내지는 염소는 학대와 저주 속에서 진영 밖으로 추방된다. 그리고 결국 광야에서 죽는다. 이러한 의식은 대속죄일의 속죄 예식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순서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염소 의식을 통해 대속죄가 일어났다는 부분에는 구약의 학자들이 의견일치를 보이지만, 정확히 언제 대속죄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1) 염소가 저주를 받을 때 이스라엘의 죄가 사해졌나? (2) 염소가 진영에서 추방을 당할 때 사해졌나? 아니면 (3) 염소가 광야에서 죽을 때 사해졌나? 이 부분을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위의 과정 중 하나를 통해 대속죄가 일어났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즉, (1) 저주, (2) 추방, (3) 죽임 중 하나를 통해 대속죄가 일어났다는 의미다.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우리를 죄에서 구해주신 예수님께서는 위의 세 가지 과정을 모두 겪으셨다는 것이다. (1)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수염을 뽑히고 저주를 받았다. (2) 진영에서 추방당해 골고다로 보내지셨다. 그리고 (3)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아사셀의 염소가 당하는 (1) 저주, (2) 추방, (3) 죽임을 모두 겪으셨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뭘까? 우리의 죄가 사하여 졌다는 사실을 완전히, 온전히, 반박의 여지가 없이 보여주기 위함은 아닐까? 성경은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시는 모습, 추방을 당하시는 모습, 그리고 돌아가시는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담고 있다. 너무 자세하고 정확하게 담고 있다. 왜? 우리에게 “너희의 모든 죄는 확실히 사해졌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 우리의 죄가 사하여 졌다는 사실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 더이상 죄와 사망과 마귀의 종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예수님의 종이라는 사실만큼 심장이 떨리는 기쁨이 있을까? “예수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찬양합니다. 예배합니다.” 라고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는 밤이다.

03/02/2019 / Sanghwan A. Lee

잠긴 글: “홍 어머님” 돕기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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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8/2019 / Sanghwan A. Lee

잠긴 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B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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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3/2019 / Sanghwan A. Lee

잠긴 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Pr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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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9/2018 / Sanghwan A. Lee

표절자 마태?

들어가며: 본글은 Christian Origins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Early Jesus Movement (ed. Stanley E. Porter and Andrew W. Pitts IV; TENTS 12; Leiden: Brill, 2018) 실린 E. Randolph Richards “Was Matthew a Plagiarist? Plagiarism in Greco-Roman Antiquity” 소개하려는 목적으로 써졌습니다. 소개의 이유는 (1) 2018년에 읽은 글들 가장 신선하게 다가왔고, (2) 진리를 탐구하는 신학도들에게 도움이 것으로 판단됐기 때문입니다. 본글에 사용된 모든 정보는 Richards “Was Matthew a Plagiarist?”에서 나왔고, 굵은 폰트는 독자들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제가 요약하여 정리한 것임을 밝혀드립니다. 즐독하세요!

Christian Origins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Early Jesus Movement.jpg

고대의 표절: E. Randolph Richards고대에 표절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학계의 암묵적 동의를 Bart D. Ehrman 2012 출판서적, Forgery and Counterforgery: The Use of Literary Deceit in Early Christian Polemic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들어 반박합니다 (p. 101, pp. 112–119). 그리고 Ehrman 제시하지 않았던 다른 예들을 제시하며 고대에도 표절에 대한 개념이 있었다는 Ehrman 주장을 지지하지요 (pp. 119–122).

마태복음에 사용된 마가복음: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내용 90% 마태복음에 나타난다는 학계의 정설을 부각시킨 Richards 복음서의 교집합(마태복음에 사용된 마가복음의 90% – “사용된이라는 표현을 이유는 마가우선설을 따르는 저의 신학적 사고가 반영된 것임을 밝혀드립니다)에는 단지단어문장이라는 원소들뿐 아니라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라는 원소까지 포함되었음을 지목합니다 (p. 101). Evan Powell 이러한 사태의 심각성을 문장으로 일축합니다: “[T]he entire text of Mark is copied almost without change by Matthew, with several small exceptions” (Richards, “Was Matthew a Plagiarist?,” 126에서 재인용).

마태와 표절: 여기까지 사유의 흐름을 몰고온 Richards 마가우선설을 따르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1.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했다.
  2. 마태가 후에 복음서를 기록했다.
  3.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내용의 90% 마태복음에 등장한다.
  4. 복음서의 교집합 속에는단어,” “문장,” “이야기라는 원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5. 마태는 마가를 표절한 것인가?

저는 (5) 질문이 합당하고 정당하다고 생각됩니다. Ehrman Forgery and Counterforgery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1)~(4) 내용들은 고대인들의 관점으로 판단하더라도 마태복음을 표절문서로 분류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마가우선설을 따르는 Richards 다음과 같이 동일한 판단을 내리지요: “Matthew plagiarizes Mark in that he takes Markan material and presents it as his own” (p. 126; cf. 127). 정말 마태가 마가를 표절한 것이라면 마태복음의 도덕적 질은 “ wrong” “thievery” 되고 (p. 109), 저자인 마태는 그레코로만 시대의 영욕문화에 따라 마가의 영광을 훔친 “theif” 것입니다 (p. 111, pp. 124–126).

표절 심의에 걸리지 않은 마태: 하지만 마태복음은 표절이라는 개념이 있었던 초대교회의 잣대를 당당히 통과하여 복음서의 서두에 위치하는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있었을까요? Ehrman 관점(Forgery and Counterforgery, 55) 발전시킨 Richards 이유를 이렇게 제시합니다: “The desire to publish anonymously was to avoid any claims to praise and glory, and thus to avoid charges of plagiarism, of stealing honor, and not some vague theological motive like giving Jesus the credit as author” (p. 132). 마태가 표절 심의에 걸리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저자라고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 학계의 정설처럼 굳어버린겸손을 위한 익명 저자설 아니라표절을 피하기 위한 익명 저자설 주장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마태복음의 제목처럼 사용되는 “κατὰ Ματθαῖον”는 마태복음 원문에는 없었을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반에 복음서들을 서로 구분하기 위해서 붙여졌겠지요. 그러므로 후대에 타인에 의해 붙여진 “κατὰ Ματθαῖον”을 근거로 마태의 표절설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끝으로: 저는 Richards 주장이 상당히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레코로만 시대의 영욕문화의 관점으로 보면 더욱 그러하지요. Richards 글이 출판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peer review criticism 제시한 학자들이 없지만 Thesis 도발적인 만큼 서서히 평가글들이 나올 것으로 기대됩니다. Richards 주장이 학계의 반응을 어떻게 불러 일으킬지 무척 기다려 지네요. 이제 세 가지 생각만 나누고 글을 맺습니다.

  1. Q 소스나 M, L 소스 등을 연구하는 신학도들에게는 새로운 방법론이 소개될 있는 2019년이 수도 있겠지요?
  2.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사도 바울 저자설을 취하는 신학도들에게는 Self-Plagiarism으로 석사 논문 정도를 있는 기회가  수도 있겠네요!
  3. 신학도 여러분, 표절은 도둑질입니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하지 맙시다! 🙂

Merry Late Christmas & Happy New Year!

 

부록: Brill에서 제공하는 사진파일 첨부: E. Randolph Richards “Was Matthew a Plagiarist? Plagiarism in Greco-Roman Antiquity”의 첫 두 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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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2018 / Sanghwan A. Lee

천국에서 온 문자

모빌 가족
지난 주일, 모빌 가족에게 중요한 문자 하나를 받았다. “노엘” 찬송가에 사용된 “이상한”이라는 문구에 파라색 동그라미가 칠해져 있고 그 아래 내 이름 “이상환”이 적혀져 있다. 워낙 재미있으시고 재치있으신 분이시라서 유모스러운 문자를 보내신 줄 알았다. (참고로 몇 년 전에 아무개 교회에 설교 초빙을 받아 갔더니 주보에 “설교자: 이상한 목사”라고 적혀 있었다. ㅋ) 하지만 다음에 온 문자를 보니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목사님은 우리의 별이에요.”
 
별이 동방의 박사들을 예수님께 인도했듯이
이상환 목사는 모빌 가족들을 예수님께 인도해야 한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렇다. 목사는 예수님의 양떼들을 예수님께 인도해야 한다. 교회의 성도들은 담임 목사의 양무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양무리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먹여야 한다. 예수님의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야 한다. 양들의 시선이 오직 예수님께 고정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내게 이러한 목회론을 가르쳐 주신 故 이병균 목사님의 목소리가 故 이병균 목사님과 외모가 무척이나 닮은 모빌 가족의 문자로부터 메아리쳐 들려온다.
 
혹시 천국에서 故 이병균 목사님으로부터 온 문자일까? 
10/21/2018 / Sanghwan A. Lee

주권의 하나님, 예수: 이원론에 반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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